장터 놀이 비유의 교훈
마태복음 11:12~19
요절:“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마태복음 11:16,17)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택하여 갈릴리와 유다 지역에 첫 번째 전도 여행을 보낸 시점에 일어난 일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주님의 제자들의 전도를 받고 받아들이기도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교만하게 비판하며 거리를 두었습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사역을 많이 하신 갈릴리 호수 주변 성읍들인 고라신과 벳새다와 가버나움 등은 여전히 예수님에 대하여 우호적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비판적인 의견에 동조하며 예수님께 거리를 두었습니다.
이러한 때에 마침 감옥에 갇힌 세례 요한이 그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님께 묻기를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세례 요한이 이렇게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예수님께서 메시야인지 아닌지를 물은 동기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그가 잠깐 예수님께서 메시야이신지를 의문이 생겨서 그렇게 물은 것인지, 아니면 자기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예수님이 메시야이신 것을 확신하게 해주려는 의도인지 다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 제자들을 돌려보낸 후에 회중들에게 세례 요한이 누구인지에 대하여 진지하게 설명해줍니다. 세례 요한을 광야에 외치는 자로서 그리스도가 세상에 나타나기 전에 그의 길을 예비하기 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지자라는 것입니다. 그는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요 그의 사역으로부터 천국이 침노를 당하기 시작했노라고 알려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을 선지자보다 더 큰 자라고 인정해준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내신 세례 요한의 사역과 자신의 사역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에 대하여 비판합니다. 예수님께서 어린아이들의 장터놀이의 비유를 들어 당시 유대인들이 행한 하나님이 보내신 종들에 대한 무조건적인 비판과 독선의 태도를 비판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르신 말씀에, 장터에 어린아이들이 모여 함께 놀이를 하자고 제안하면서 먼저 혼인 잔치 놀이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어린이 중에 한쪽이 흥겨운 피리를 불어대는데, 어린아이 중 일부에서 싫다면서 피리를 불어도 함께 춤추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놀이를 중단하고 이제 장례식 놀이를 하자고 다시 제안합니다. 그래서 이번에 호곡꾼 역할을 담당하는 아이가 슬피 우는 시늉을 하는데, 다른 친구들은 맞장구를 치면서 가슴을 치면서 그 놀이에 동참해야 하는데, 이번에도 장례식 놀이도 싫다고 딴지를 거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슬퍼서 싫고 저것은 흥이 나서 싫다.”라고 하면서 딴죽을 거는 친구들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이 어린아이들의 장터 놀이 비유처럼 하나님께서 세례 요한을 보내어 회개하라면서 가슴을 찢으라고 명하였더니, 그것도 싫다라고 하고 또 이번에는 예수님께서 오셔서 용서와 사랑과 기쁨의 잔치를 벌이고 누구든지 와서 함께 먹고 마시며 즐거워하자고 초대하는데 이것도 싫다면서 거부하는 것이 당시 유대인들의 태도였던 것입니다.유대인들은 세례 요한이 와서 자주 금식하면서 깡 마른 모습으로 회개를 외치니까 그를 향하여서는 귀신들렸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께서 오셔서 즐거운 잔치를 벌이고 누구든지 와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누리라면서 초대하면서 누구라도 막지 않고 다 부르고 심지어 죄인과 세리들과도 어울리며 교제하니까 이제 예수님을 두고서 먹고 마시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라고 비난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선민 유대인들은 이기적이고 교만하고 자기 중심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례 요한과 같은 선지자를 보내어 회개로써 생명 길을 열어도 거절하고 예수님과 같이 부드러운 위로와 사랑의 메시지를 보내도 듣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종들을 다양하게 보내어서 사람들의 마음을 열고자 합니다. 전혀 다른 성향의 사역자들을 보내시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다양한 사역자들을 통하여 한편으로는 사람들의 교만한 완악한 마음을 찢기도 하시고 그 반대로 상처입고 지친 마음을 달래고 싸매어 품으시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만하고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자들은 어떤 주님의 사자들이 오더라도 비난만 계속합니다. 이 사람은 너무 지나치게 엄하다, 저 사람은 너무 지나치게 사교적이다고 하면서 비난하면서 아무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렇게 비판만 하고 순종하지 않고 불신앙의 자리에 머물러 있는 당시 유대인들에게 이방인들만도 못하다고 책망하십니다. 당시 주님이 열심히 다니면서 말씀을 증거하셨던 갈릴리 주변 도시에 대하여 21절 이하에서 이렇게 책망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게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성이 오늘까지 있었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더 견디기 쉬우리라”(마태복음 11:21~24)
그렇습니다. 심판날에 많이 받은 자에게 많이 거둘 것입니다. 많은 은혜를 입고도 거기에 응답하지 않는 자들은 그 만큼 더 무거운 심판이 임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주님께서 25절, 26절 말씀에서 하신 메시지를 귀담아 새겨야 하겠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그렇습니다. 당시의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 헤롯당원들, 에세네파 사람들처럼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고 자기를 대단하게 여기면서 하나님의 모든 말씀들에 대하여 이렇고 저렇고 토를 달며 비판만 하였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지혜로운 자들이요 스스로 똑똑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기적을 보고도 놀라지 않고 더 마음이 꼿꼿해졌고 훌륭한 주의 종들과 우리 주님이 친히 오셔서 생명의 말씀이 증거해도 끄덕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도리어 당시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은 세례 요한의 엄한 말씀을 미워했고 예수님의 부드러운 말씀도 멸시하며 무시했습니다.
반면에 오직 자기 자신을 어리석게 여기고 자신의 죄를 크게 여기고 하나님 앞에 늘 낮아진 마음으로 사는 자들은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한 마음으로서, 주님의 책망의 말씀 앞에서 마음을 깨뜨립니다. 죄를 지적하는 주의 말씀 앞에서 자신의 죄를 깨닫고 깊이 회개합니다. 그러한 어린아이 심령을 가진 자만이 십자가를 통하여 용서와 사랑의 말씀에 감격하면서 하나님의 크신 용서와 사랑의 잔치에 부름받은 것을 기뻐서 달려와서 주님 곁에 와서 말씀의 잔치에 참여하며 달게 그 말씀을 들을 줄 아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 지옥 밑바닥에 떨어질 사람들인 세리나 창녀가 함께 있을지라도 그런 사람을 사랑하며 함께 십자가의 은혜를 감격하며 그 자리에 참여하게 됨을 함께 기뻐하며 주님의 크신 사랑을 함께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한평생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열린 마음과 순종하는 마음으로 달게 듣는 어린아이가 됩시다. 주님의 어떤 말씀일지라도, 날카로운 말씀이든, 부드러운 말씀이든, 책망의 말씀이든지, 위로의 말씀이든 간에 그 모든 말씀에 믿음으로 화합합시다. 그렇게 어린아이와 같은 심령을 가질 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더 많은 계시들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또한 그런 순수한 마음을 가질 때 주님께서 자기의 멍에를 우리에게 주시어 함께 쌍멍에를 매고 함께 일하고자 하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귀한 영혼의 밭들을 함께 깊게 갈고 씨를 뿌리는 주님의 영적인 동역자로 우리를 쓰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