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문경새재에서 도적들이 상인을 죽이고 은자(銀子:은돈) 수백 냥을 탈취한 사건이 일어났다.
범인 일당은 영의정을 지낸 박순의 서자 박응서, 심전의 서자 심우영, 전 목사 서익의 서자 서양갑, 평난공신 박충갑의 서자 박치의, 박유량의 서자 박치인, 전 북병사 이제신의 서자 이경준, 서얼 허홍인 등 권세 가문의 서자(庶子) 일곱 명이었다.
그들은 허균, 이사호, 김장생의 이복동생 김경손 등과 교유하며 죽림칠현, 강변칠우로 자처했던 서자(庶子)들이었다.
그들은 광해군이 등극하자 서얼 차별을 없애달라는 상소를 올렸지만 거부당하자, 이에 반감을 품고 경기도 여주 남한강변에 ‘윤리가 필요 없는 집’이라는 뜻의 무륜당(無倫堂)을 지은 뒤, 그곳을 근거지로 전국을 오가며 화적질을 일삼고, 문경새재에서 강도짓을 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런데 피살된 상인의 노비 하나가 살아남아 그들의 뒤를 밟아 근거지를 알아낸 뒤 포도청에 고발함으로써 일망타진되었다.
사건을 접한 대북파의 거두 이이첨은 김개, 김창후, 한희길, 정항 등과 모의해 서얼 출신 화적패들이 자금을 모아 영창대군을 추대하려 했다는 거짓자백을 받아낸다.
그것은 일곱 명의 서자(칠서:七庶) 중에 한 사람인 박응서가 광해군에게 비밀상소를 올리는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박응서는 상소문에서 자신들이 1608년 명나라 사신을 죽여 사회혼란을 야기하려 했고, 군자금을 비축하여 무사를 모은 뒤 일을 벌이려 했으며, 거사에 성공하면 영창대군을 옹립한 다음 인목대비의 수렴청정을 실행하려 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대북파는 박응서의 자백을 근거로 하여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이 역모의 수괴(首魁)이고, 인목대비까지 모의에 가담했다는 거짓 자백도 받아냈다.
그 결과 선조로부터 인목대비와 영창대군의 안위를 부탁받은 신흠, 박동량 등 일곱 대신, 이정구, 김상용, 황신 등 서인 수십 명이 하옥되었다. 나아가 이이첨은 유생 이위경에게 영창대군과 인목대비의 처단을 종용하는 상소를 올리게 했고, 장령 정조와 윤인 등이 폐모론(廢母論:인목왕후를 폐함)을 지지하고 나섰다.
이이첨의 사주를 받은 삼사(三司:사헌부,사간원,홍문관)에서도 연일 영창대군을 벌하라고 광해군을 압박했다.
결국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은 1614년 6월 1일 서소문 밖에서 사사(賜死)되었고, 영창대군은 서인으로 강등되어 강화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그와 함께 영창대군을 비호했던 영의정 이덕형, 좌의정 이항복 등도 조정에서 쫓겨났다.
그러자 이덕형은 시국을 개탄하며 식음을 전폐한 끝에 10월 10일 세상을 떠났다. 이듬해 봄 영창대군은 강화도의 작은 골방에서 죽음을 당했다.
강화 부사 정항이 그를 밀실에 가두고 아궁이에 불을 지펴 질식사시켰던 것이다.
당시 대군의 나이는 불과 9세였다. 이 계축옥사를 통해 대북파는 서인과 남인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고 정권을 독점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