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실상사에 다녀왔다. 정도상의 소설 속에서 실상사는 하얀 옷을 입은 여인이 자전거를 타고 다니던 절집이었고 시사지나 시사프로그램에서는 도법스님과 귀농학교
그리고 일종의 대안학교인 실상사 작은학교로 비춰지는 절집이다.
실상이라.. 몰랐을 때는 失想이라 여겼다. 상념을 잊은 곳, 혹은 버린 곳.. 도량의 이름치고는 그럴 듯 했다. 하지만 해탈다리 건너 실상사는 實相의 현판으로 우리를 맞았다. 열매 실, 서로 상.. 서로 열매를 나눈다는 뜻인가. 또 한 번 아전인수다. 그래도 생각해 보니 그럴듯 하다. 한국참여불교의 선찰답게 실사구시적이고 현실적이다.
작은학교의 책임선생이라는 분이 합장으로 우리를 맞았다. 무념무상 나 역시 합장으로 수인사를 대신하면 될 것을 그저 고개 푹 숙이는 속세의 풍습을 따랐다. 생각해 보니 잘 한 짓이다. 흉내내기, 바람잡기, 허우대 만들기로 살아온 시절 아니었던가. 점심
때라 우리는 공양간으로 향했다. 귀농학교 식구들이 키웠는지 혹은 학승들이 다듬었을지 모를 산나물들이 때깔을 자랑하고 있었다. 행운이라 할 수 있는 건, 우연히 도법스님을 엿본 것이다. 2580의 PD도 아니요. 유수 일간지의 기자도 아니요. 불도에 뜻을
뚠 수련인도 아닌 나로서는 그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일이다. 그래서 그런지 "어이,
내는 밥 안주나?" 하는 스님의 재촉문도 나에겐 법문으로 들린다. 밥에 대한 지고지순의 사랑, 밥에서의 평등, 배고픔의 진리. 뭐.. 그런 도통한 것들. 큰 사람의 권위는 그렇게 뿜어져 나온다. 말 한 마디, 눈빛 하나, 걸음걸이 하나에. 후.. 생각해 보니 조금
오버다. 큰 사람의 그늘에 숨어보려는 얄팍한 생각이다. 도법이나 나나 풀벌레나 무어가 그리 다른가. 역시 나는 권위에 대한 불협화음을 자랑삼아 뒷골에 쑤셔박고 있는
모양이다.
나와는 달리 동행인 두 사람(남해갯벌생태학교 교장과 합천농민회 형님)은 작은학교와 귀농학교에 관심이 많다. 물론 나도 관심이 있다. 그것은 지난 8월 말, 남해를 다녀간 '사랑의 도시락 보내기 운동본부' 부설 '도시속 작은학교' 아이들 때문이다. 우연치
않게 2박 3일을 그 아이들과 함께 보내게 되었는데, 그 아이들 덕분에 대안교육에 대한 약간의 관심이 생겼다. 그 녀석들 지금쯤 부산의 어느 번화가 뒷골목을 서성거리고
있지는 않을까 사뭇 걱정스럽다.
그 아이들은 대부분 공교육에서 반강제적으로 퇴출당한 아이들이었다. 모난 성격 때문이기도 했고 싸움질로 잘린 녀석들도 있고 그냥 학교가 다니기 싫어 그만 둔 녀석들도 있고 가정형편으로 그만 둔 아이도 있었다. 쉬이 학년을 물어볼 수 없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2박 3일 동안 그 아이들이 다른 아이들과 달리 못됐다라든가
조졌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다. 흡연구역에서만 담배를 피우고 수련회 기간 동안은
금주를 하겠다는 약속을 지키는 그 녀석들은 숨어서 담배를 피고 백일주니 뭐니 행사에 때 맞춰 술 마시는 다른 아이들과 하나도 다를 게 없었다.
귀신놀이를 하느라 분장에 바빴던 은정이 태풍이 휘몰아치는 운동장에서도 결코 센터포드의 자리를 내놓지 않았던 정훈이 - 다만 그 녀석은 패스를 배우지 못한 것 뿐 - 미용사가 꿈이라며 자봉 선생들의 머리를 제 마음대로 만들어 놓은 설비, 치과의사와 만화가를 꿈꾸는 유진이와 나라, 그렇게 그 아이들은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정작 우리가 모르는 것은 그 '다름'의 영역이다. 아이들의 소식지 제목인 '우다다'처럼 "우리는 모두 다 다른' 것 아닌가. 월요일 아침이면 군인처럼 좌우정렬하고 교장의 훈시를 들어야 했고 원리도 모른 채 수학공식을 딸딸 외워야 했던 건,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옛 속담의 긍정만 키울 뿐, 모난 돌이 주춧돌이 되고 모난 돌이 칼날의 역할을 대신해 왔다는 것은 알지 못하도록 막아왔던 것 아닌가.
그런 작은학교가 실상사에도 있다. 이미 3년 정도 되었다고 하니 간디학교 등과 함께
한국 대안교육의 선구자인 셈이다. 점심공양을 마치고 우리는 작은학교로 발걸음을
옮겼다. 절집 옆 논두렁같은 좁은 길을 따라 컨테이너 박스 몇 개로 이루어진 학교는
3년의 역사치고는 보잘 것 없어 보였다. 하지만 법문같은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그 더디감의 힘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깨달음은 나무처럼 자란다' 그래, 나무가 어디
하루 아침에 거목이 되더냐. 아이들처럼 자연처럼 학교는 그렇게 커가고 있었다.
놀라운 건 그 선생님들. 편한 직장생활 접고 한 달 50만원의 보수로(그것도 10만원 6개월이 지나야) 24시간 아이들과 함께 하는 그들은 대체 어떤 사람들일까. 나 역시 한
때 그런 삶을 동경하기는 했지만 와서 보니 나같은 미물은 도저히 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작은학교를 나서 다시 귀농학교로 발걸음을 옮겼다. 귀농학교는 합천농민회의 형님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곳으로 그 곳 역시 지난 수해의 풍파를 씻어내고 있는 중이었다.
귀농학교의 사람들은 아직은 도시티가 역력했다. 막일을 하면서도 입에서는 노동요가
아닌 이문세와 조성모가 나오고 있었고 - 하긴 그것도 일하며 부르면 노동요지. 뭐 -
옷은 작업복이라기보다는 때깔만 변해버린 케주얼이었다. 지금 그들이 하고 있는 일은 집을 짓는 일이었다. 생태와 환경과 우리의 삶을 생각하는 집. 흙벽돌을 만들어 차곡차곡 쌓아올리고 황토로 미장을 한다. 그리고 서까래를 얹고 그 위로 개량형 기와를
올린다. 화장실은 일명 통시. 재래식이기는 하나 소변 따로 대변 따로 받아 정해진 시간마다 거두어 두엄을 쌓고 그것으로 비료를 대신하는 자연농법. 듣기는 거의 예술이지만 그 땀의 흔적을 모르고서야 어디 나같은 사람은 손길 한 번 내밀겠는가.
귀농학교의 교감선생인 김해경 선생은 교감이라는 분위기보다는 도사 혹은 도인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뚜렷한 이목구비에도 선한 눈빛 도사리고 있었고 땀에 거을린 피부며 굳은 살 박힌 손마디는 그가 도시에서 살았다는 어떤 흔적도 남기질 않았다. 합천농민회 형님과 교감선생의 대화가 조금 길어질 즈음, 어느덧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실상사를 나서며 수재민돕기 바자회에서 표고버섯 두 봉지를 사고 천원짜리 오백원짜리 중고 옷가지들을 둘러보며 우리는 다시 길을 나섰다. 여전히 합장을 하는 스님. 여전히 고개를 숙이는 나. 처음처럼 우리는 다시 남해로 차를 몰았다.
사람들은 그런다. 남들처럼 살라고 보통사람처럼 살라고 말이다. 사실 나도 그러고 싶은데, 그렇게 잘 되지가 않는다. 형님에게 물어보니 그건 보통사람이 보통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한다. 새벽녘 자동차를 타고 출근해서는 하루 종일 앉아서 컴퓨터를 쳐다보다가 퇴근무렵이면 육체가 아닌 헝클어진 머리를 위해 술을 마시고 (육체노동을
한다손 치더라도 자연의 섭리와는 동떨어진 기계의 섭리에 맞춰지는) 일주일에 한 번쯤 대형마트에 차 끌고 가서는 크고 때깔 좋은 외국산 농산물을 산다. 집에 모기 한 마리 있으면 온통 약을 뿌리고 그것도 모자라 세스코인지 뭔지 해충박멸한다는 회사의
무료전화를 이용한다. 나와 다르고 나의 이해에 충실하지 않으면 죽이고 버리고 매장한다. 그것이 지금 보통사람들의 생활이다.
실상사 사람들은 남루한 옷과 나물이 전부인 음식을 먹고 있지만 얼핏 지나가며 보는
나에게도 건강한 생명의 기운을 퍼뜨린다. 똥 냄새가 구수한 거름의 향기로 느껴지는
건, 우리가 버리고 싸는 것에 대한 신뢰와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방향제와 향수에 길들여진 인공이 아니기 때문이다.
실상사 사람들은 그렇게 자신과 닮아가려는 사람들을 자연처럼 따뜻한 손길로 맞는다. 여느 절집처럼 대규모의 불사를 벌이지 않는 대신, 그 사람들 거두고 먹이는 불사로 덕을 쌓는다. 지역과 종교가 다르고 설사 국적이 달라도 자연과 생명에 대한 경외감 하나만 있다면 그들과 한 식구가 되는 건 스스럼이 없다.
남해의 형은 남해 진목도 그렇게 만들고싶어 한다. 내년이면 이 곳 남해에도 작은학교를 만들어 아이들의 친구가 되고싶어 하고 귀농을 하려는 사람들 받아 함께 남해를 가꾸고자 한다. 감당하기 힘들지 않겠냐고 해도 자연을 닮으면 할 수 있다고 한다. 동학쟁이인 그는 이제 삶의 근본을 깨달아가고 있는 모양이다.
남해갯벌생태학교 한 구석에 방을 마련한 나는 애써 그를 거부하고 있다. 내가 이 곳에 있는 이유는 그게 아니라고. 수운과 해월과 증산과 일부를 읽는 것은 받아들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용하기 위해서라고. 나는 여전히 김지하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그렇게 아직은 우기고 있다.
사실은.. 두려움 때문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오늘은 어쩌면 꿈 속에서 도법스님에게 회초리를 맞을 지도 모르겠다. 맞아서 달라진다면야 어디 천 대 만 대라도 회피할 쏘냐. 맞아서 사람만 될 수 있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