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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9. 묵상글 ( 성녀 마르타와 성녀 마리아와 성 라자로 기념일. - 거룩한 가족.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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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9. 성녀 마르타와 성녀 마리아와 성 라자로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거룩한 가족
아시다시피 오늘 축일이 옛날에는 성녀 마르타의 축일이었습니다.
이 말은 옛날에는 마르타의 동생과 오빠는 성인으로 공경받지 못했다는 말이고,
마르타만이 가족들을 대표하는 성녀가 되었다는 의미로도 읽힐 수 있을 겁니다.
이런 면에서 세 분을 성인으로 같이 기념하는 새로운 전례는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는 의미도 있고 과거에 제대로 조명하지 못한 것을
이제 제대로 조명하는 의미가 있을 텐데 제 생각에 이것이 더 중요한 의미입니다.
한 가족이 모두 주님의 사랑을 받았고,
한 가족이 모두 주님을 사랑한 것에 의미를 두는 것 말입니다.
비슷한 의미에서 저는 이순희 루갈다와 유중철 요한 동정 부부를 높이 삽니다
부부가 같이 하느님께 나아간 경우이니 말입니다.
사실 서로 사랑하는 것도 쉽지 않은 것이고 그래서 대단히 훌륭하지만
같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신앙인에게 귀감이 되지요.
그렇지요.
서로 사랑하는 것이 훌륭하긴 하지만
그것으로 그친다면 그 사랑은 갇히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사랑에 갇히는 것이요,
이 세상에서의 사랑에 갇히는 것입니다.
사실 요즘 많은 사람이 자기 사랑에 갇히고,
기껏해야 가족 사랑에 갇혀 더 이상 사랑이 확장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인간적인 사랑에서 하느님 사랑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한세상 서로 사랑하다가 같이 사랑을 끝내는 것으로 그치게 됩니다.
이것을 심하게 얘기하면
고양이를 사랑하며 한 생을 살다 가는 것처럼 슬픈 사랑입니다.
인간이 되어서 그래 고양이나 사랑하며 살다가 간다면 이 얼마나 슬픈 인생입니까?
마찬가지로 신앙인이 되어서 하느님 사랑으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한다면
이 얼마나 슬픈 신앙생활입니까?
이는 천국에 가려 하지 않고 기껏 이 세상에서 복되게 살기 위해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참으로 슬픈 신앙생활입니다.
우리는 자주 얘기합니다.
연인들의 풋사랑은 서로를 보지만
부부의 익은 사랑은 같이 한곳을 바라본다고.
그런데 부부의 사랑이 같이 한곳을 바라보긴 하지만
그 한곳이 하느님이 아니라 자식일 수도 있지요.
이번 행진자 중에 딸이 출산하여 첫 손주를 본 분이 있습니다.
이분은 딸이 출산하러 가는 날 행진에 참여하신 겁니다.
어떻게 보면 출산하는 딸 옆에 있지 않은 비정한 엄마일 수도 있지만
내가 옆에 있을 테니 잘 갔다가 오라고 한 남편이 있어 자녀도 같이 사랑하고
주님도 같이 사랑하는 것을 동시에 실현한 성숙한 부부 사랑이라고 할 수 있지요.
아무튼 교회는 오늘 한 가족의 축일을 통해
한 가족의 거룩한 삶에서 자극도 받고 본도 받으라고 합니다.
우리 프란치스칸에겐 성녀 클라라의 가족이 이 거룩한 가족의 본보기이지요.
세 자매가 클라라의 수녀가 되었고 나중에 어머니까지 수녀가 되었으며
마침내 세 자매가 모두 성녀 또는 복녀가 된 거룩한 가족이니 말입니다.
한 가족이 거룩한 가족이 되는 것은 욕심을 내도 좋을 욕심일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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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9. 성녀 마르타와 성녀 마리아와 성 라자로 기념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어느 형제님은 반드시 회사에 출근한 뒤에 회사 화장실에 들러 대변을 본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신 데요.
“나는 똥을 싸면서 돈을 번다.”
틀린 말이 아니죠? 그리고 이런 식으로 생각하며 산다면 정말로 흔들리지 않는 삶을 살겠다 싶습니다.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직 회사 다닌 지 얼마 되지 않아 박봉인데도 늘 즐겁게 생활하십니다.
사실 세상은 불공평해 보입니다. 아니 분명히 불공평합니다. 그러나 그 형평성은 자기 마음에서 만드는 것이 아닐까요? 노력에 대한 적절한 보상이 있어야 하는데, 누가 노력하지 않았음에도 엄청난 보상을 받으면 불공평하다고 말합니다. 이런 일이 드물지 않습니다. 이 세상 전체에 퍼져 있습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내가 하나를 베풀면, 상대방도 하나를 줘야 공평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내가 10개를 줘도 하나도 주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큰 이득을 얻었다면서 좋아하는 것이 세상입니다. 오히려 주는 사람이 어리석다고 말합니다. 너무 불공평한 세상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세상 삶은 길게 잡아봐야 100년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 나라는 영원합니다. 그 나라에 보물을 쌓는 것은 이 세상 안에서 자기가 베푼 것으로 이루어진다고 하셨습니다. 나의 사랑이 하느님 나라에 보물로 차곡차곡 쌓인다는 것입니다.
100년 동안 사랑만 베풀었다고 하느님께서 바보같이 살았다고 하실까요?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된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 나라에 가야 진정한 공평함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과연 무엇을 해야 할까요?
성녀 마르타와 성녀 마리아와 성 라자로 기념일인 오늘 복음에서는 마르타와 예수님의 만남을 이야기합니다. 마르타는 라자로의 누이며 마리아의 자매이지요. 그리고 그들의 집은 예수님께서 복음 선포에 지치셨을 때 찾아오셔서 쉴 수 있는 곳이었지요. 그만큼 예수님과 누구보다 가까운 가족과 같은 관계였습니다. 그런데 오빠 라자로의 죽음을 맞이합니다. 예수님만 그 자리에 계셨더라면 오빠는 죽지 않았을 것을 알고 있었지요. 다른 사람은 다 살리면서, 사랑하는 오빠에게 무관심했던 예수님을 이해하기 힘들 수도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마르타는 자기의 신앙을 강하게 고백합니다. 생명을 주관하시는 예수님이라는 믿음을 표현하지요. 그 결과 오빠를 살리시는 주님의 기적을 직접 체험합니다. 불공평해 보이는 세상의 모든 일에,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간직해야 합니다.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주님의 섭리를 그때 비로소 바라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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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소통은 이해의 과정이며, 이해는 인간관계의 밑바탕입니다(피터 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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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9. 성녀 마르타와 성녀 마리아와 성 라자로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우리는 성녀 마르타와 마리아와 성 라자로를 기념하며, <복음>을 통해, 부활의 믿음에 대한 초대를 받습니다. 그것은 “나는 안다”에서, “나는 믿는다.”로의 초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빠 라자로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는 마르타와 마리아에게 찾아오십니다. 그러자 마르타가 집밖으로 뛰쳐나와 예수님께 말합니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요한 11,21)
이 인사말에는 예수님께 대한 마르타의 원망과 섭섭함이 묻어납니다. 그래서 오빠가 죽은 이유가 예수님이 여기에 계시지 않은 까닭이라고 말합니다. 사실 그럴 법도 할 것입니다. 임종 때에도, 장례식 때에도 오시지 않고 사흘이 지나서 이제야 찾아오시는 예수님이 섭섭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계속해서 마르타는 마치 떼를 쓰듯이 하느님의 권능을 알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요한 11,22)
그러나 그분의 권능을 ‘알고 있다’고 고백할 뿐, ‘믿는다.’고 고백하지는 않습니다. 곧 예수님께서 그렇게 해주실 수 있는 분이심을 “압니다.”(οιδα)라고 고백하지만, 예수님께서 그렇게 해주실 것을 “믿습니다.”(πιστιω)라고 고백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요한 11,23). 그러나 마르타는 여전히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오빠도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요한 11,23) 하고, 또 다시 “압니다.”라고 고백할 뿐, 여전히 “믿습니다.”라고 고백하지는 않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에게 부활에 대한 믿음을 일깨우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요한 11,26)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내가 부활과 생명을 너에게 준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너는 이것을 믿느냐?”고 물으십니다. 이는 믿을 때라야, 그 믿음 안에서 부활과 생명이 부여된다는 말씀입니다. 곧 부활과 생명은 믿는 이에게 주어진다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믿는 이들은 그 믿음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이 땅에서 이미 소유하게 됩니다. 믿는 이들은 비록 이 땅에서는 육체적인 죽음을 겪을지라도, 그 생명은 영원히 죽지 않게 됩니다.
마침내 마르타는 믿음을 고백합니다.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있는 메시아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요한 11,27)
그렇게 하여, 마르타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을 알게 되었고 또 믿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라자로의 무덤 앞에서 믿음에 대한 확증을 일깨워줍니다.
“네가 믿으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요한 11,40)
오늘 <독서>에서도 요한 사도는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을 우리는 알게 되었고 또 믿게 되었습니다.”(1요한 4,16).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 11,26)
주님!
제 생명이 죽고, 당신 생명이 피어나게 하소서!
그리하여 제 안에 살아계신 당신 생명을 보게 하소서!
제가 사라지고 당신이 드러나게 하소서!
당신의 생명을 살게 하소서!
제가 믿음으로 당신의 영광을 보리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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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9. 성녀 마르타와 성녀 마리아와 성 라자로 기념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주님께 사랑 고백을 해야 한다
사랑을 고백하려면 진지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마음을 제대로 읽을 수 있습니다. 또 마음은 있지만 표현하지 않으면 그 진심을 놓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회가 되면 적극적으로 마음을 표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상대방도 깊이 헤아려 볼 것입니다. ‘꼭 말해야 하느냐?’ , ‘해야 할 때는 해야 합니다’. 이심전심을 확인하는 순간이 될 것입니다.
마르타는 마리아보다 더 활동적이고 적극적인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식탁에서 시중을 드는 일(루카10,40)에 있어서도 그랬고, 오늘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하고 말하는 것을 봐도 그렇습니다. 마르타는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 하며 오빠를 굳이 낫게 해 달라 청하지 않으면서도 주님의 특별한 개입을 희망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에게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마르타는 마지막 날 부활 때에 다시 살아나는 것을 생각했고, 그래서 예수님은 다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라는 말씀은 부활이 현재 사건이며 예수님의 정체성을 알려줍니다. 또한 믿음 안에 있는 한 영원한 생명은 죽은 다음에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을 포함하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주님과 함께하고 있다면 오늘로부터 생명을 누리는 것이요, 지금 구원을 이루는 것입니다. 오늘의 생명 없이 영원한 생명은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마르타는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습니다” 고백함으로써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에게 신앙고백의 모범을 보여주었습니다. 우리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께 나의 믿음을 고백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좀 더 적극적으로 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주님께서 가장 원하시는 사랑의 실천에 더디게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보면 아직도 입술에 익숙한 믿음의 고백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삶으로 말해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나의 삶을 통해서 말씀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스스로 행하지 않으면서 주님을 전한다고 하면 오히려 예수님께 다가가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장애가 되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없다”(히브11,6)고 했습니다. 우리의 믿음을 사랑의 실천으로 고백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성 루치아노는 “나는 그리스도교 신자입니다. 이것이 최고의 명예이며 또 하느님께 받은 최대의 은혜입니다” 하고 고백했습니다. 여러분도 신자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만큼 사랑하십시오! 우리 믿음의 고백은 말로나 혀가 아니라 진리 안에서 사랑을 실천하는 데 있습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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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9. 성녀 마르타와 성녀 마리아와 성 라자로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세상에는 좋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좋은 사람이 있는 것만으로도 세상은 아름답습니다. 며칠 전입니다. 부주임 신부님이 문자 보냈습니다. 자동차 키가 안 보인다고 합니다. 분명히 차를 타고 왔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키가 없다고 합니다. 제게 키가 하나 더 있으니 걱정하지 말고 찾아보라고 했습니다. 미사를 마치고 나왔는데 사무장님이 자동차 키를 가져왔습니다. 교우분이 길에 떨어져 있는 자동차 키를 주워서 사무실에 맡겼다고 합니다. 키를 하나 복사해야 했는데, 찾아서 다행입니다. 저도 좋은 일을 했습니다. 공항에서 여권과 핸드폰 그리고 항공권을 주었습니다. 아직 시간이 있어서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10분 정도 있으니 한 남자가 급하게 뛰어왔습니다. 저는 제가 보관하고 있던 여권과 핸드폰 그리고 항공권을 보여주며 본인의 것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분은 자신이 맞는다고 하면서 무척 고마워했습니다. 저도 기분 좋게 비행기에 탑승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하느님 나라에 관해서 이야기하십니다. 온 우주를 담을 수 있는 나라입니다. 이 세상에 있었던 모든 생명이 머물 수 있는 나라입니다. 그런 하느님 나라가 마치 겨자씨와 같다고 하십니다. 겨자씨는 무엇일까요? 저는 그것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타인의 아픔을 공감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기꺼이 자신의 것을 나누는 사람입니다. 자기 잘못을 뉘우치는 사람입니다. 하느님과 형제에게 용서를 청하는 사람입니다.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도 모르게 하는 겸손한 사람입니다. 세상의 것과 하느님의 뜻을 식별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겨자씨와 같은 분들이 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선교하였던 이태석 신부님입니다. 꽃동네를 시작한 오웅진 신부님입니다. 캘커타의 마더 데레사 수녀님입니다. 환경미화원에게 따뜻한 국물을 나눠주는 포장마차 주인입니다. 헌혈증을 모아서 수혈이 필요한 아이에게 전달한 국밥집 주인입니다. 주변을 돌아보면 ‘겨자씨’와 같은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이 있기에 하느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물리적인 인식을 넘어서는 나라입니다. 문학적인 상상력을 뛰어넘는 나라입니다. 과학의 발전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게 해 주고 있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외장 하드에는 수백 편의 영화가 들어있습니다. 우리는 스마트 폰을 이용해서 인터넷이라는 가상의 나라에 접속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곳에서 친구를 만나기도 하고, 정보를 검색하기도 하고, 은행 업무를 보기도 하고, 물건을 사기도 하고, 사진을 보내기도 합니다. 스마트 폰은 작지만 접속하기만 하면 또 다른 세상으로 우리를 안내해 줍니다. 시간과 공간의 틀에 머물 수밖에 없는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주는 하느님 나라에 접속할 방법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는 그 방법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첫 번째는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의로움이 드러날 수 있도록 기도하셨습니다. 한적한 곳에 머물며 기도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도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하느님 나라에 머물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행동입니다.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새롭게 시작되는 한 주간의 첫날입니다. 스마트 폰으로 접속하는 시간을 잠시 멈추고 기도로 하느님 나라에 접속하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작은 선행과 나눔이 우리의 이웃들에게는 하느님 나라로 접속하는 길이 되면 좋겠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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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9. 성녀 마르타와 성녀 마리아와 성 라자로 기념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라자로가 죽었다는 소식을 주님께서 들으셨습니다. 그래서 마르타와 마리아와 라자로가 머물렀던 그 집으로 주님은 향하십니다.
마르타는 오시는 주님을 마중하기 위해 밖에 나와 서 있습니다. 주님을 뵙고 그녀는 그녀 안에 마음을 주님께 풀어놓습니다.
오빠의 죽음에 관한 슬픔을 주님께 말합니다. 특히 마르타가 건넨 말들에서 원망의 색도 보이는 듯합니다.
그녀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께서 계셨더라면 오빠는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라고….
마르타를 통해 슬픔속에 있는 우리도 얼마든지 주님께 원망할 수 있음을 오늘 복음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원망을 주님은 원망으로 듣지 않으십니다.
마르타와 반대로 마리아는 집에 있습니다. 마리아는 이번에도 역시 가만히 앉아 있습니다. 마리아는 왜 가만히 있었을까요? 가만히 눈물 흘리고 있었을까요? 애도하고 있었을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마리아는 가만히 앉아 오빠의 죽음을 묵상하고 하느님의 뜻이 어디 있는지를 듣고 있었을 것입니다.
오빠의 죽음을 대하는 두 자매의 모습은 다릅니다. 한쪽은 원망의 기도를 합니다. 또 한쪽은 마음으로 그 뜻을 듣습니다.
우리도 이런 아픔과 상실을 경험합니다. 우리가 삶의 길을 걷는 이상 우리는 이런 아픔을 만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때 우리도 마르타처럼 탄원하고 원망하기를 바랍니다. 실컷 눈물 흘리면서 말입니다. 그리고 그 원망 안에서도 주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마리아처럼 가만히 그 모든 것을 묵상하기를 바랍니다. 가슴에 새기고 그 모든 아픔을 통한 하느님의 뜻을 찾는 우리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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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것 중 중요한 것.
자신의 발견은 세상의 발견보다 중요하다.
-찰스 핸디(아일랜드의 작가, 철학자)-
우리는 세상을 공부합니다.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알아야 그 안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을 것을 더 빨리 얻고 더 높이 오르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교육되었습니다.
이렇게 세상을 공부하고 잘 알고 있다고 할지라도 내가 나를 모르면 우리 삶은 행복과 기쁨에서 멀어집니다.
나에게 잘해주는 것은 중요합니다. 내가 행복해야 내 옆에 있는 누군가도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나에게 잘해주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나를 내가 아는 것, 나를 내고 볼 줄 아는 모습입니다.
내가 나를 잘 볼 수 있을 때 좋은 방향을 제시하고 행복의 길을 걸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행복한 길이라고 제시하는 모든 길이 내게 행복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바라고 원하는 행복의 길을 걸어야 진정 행복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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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9. 성녀 마르타와 성녀 마리아와 성 라자로 기념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환대의 사랑
“환대의 사람, 환대의 집”
“나 언제나 주님을 찬미하리니,
내 입에 늘 찬양이 있으리라.”(시편34,2)
오늘 옛 어른의 말씀도 유익합니다.
“타인이 나의 거울이 되듯 나 또한 타안의 거울이 된다. ‘나는 얼마나 맑고 깨끗한 거울인가?”<다산>
날마다 말씀의 거울에 비춰보면서 사랑을 새로이 할수록 맑고 깨끗한 마음의 거울일 것입니다. 특히 오늘은 마르타, 마리아, 라자로 삼남매의 환대의 사랑, 환대의 거울에 우리 자신을 비춰볼 수 있겠습니다.
“세 사람이 길을 가면 그중에는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 좋은 점은 배워 본받고, 좋지 않은 점은 나 자신을 바로 잡는 거울로 삼는다”<논어>
저에게 가장 큰 스승은 제 자신을 비춰보고 배우는 공동체 형제들의 거울입니다. 사실 만나는 모든 이들 하나하나가 저를 비춰주는 거울입니다. 매일 주님의 거울인 미사얼굴에 자신을 비춰보는 우리들입니다.
또 어제 과학잡지 뉴톤 7월호에서 “지능이란 무엇인가?”에서 읽은 저명한 학자의 인텨뷰 결론을 꼭 소개해 드리고 싶습니다.
“실패에는 좋은실패와 나쁜실패가 있다. 나쁜실패는 누군가가 이미 경험한 실패이다. 하지만 열심히 공부하면 나쁜실패를 할 확률이 낮아진다. 그런 다음 경험하는 실패는 좋은 실패다. 결국은 좋은실패가 중요하다.”
매사 모두에 적용되는 진리입니다. 수행생활에 충실할수록 나쁜실패는 줄어들고 있다하면 좋은실패들일 것이며 이는 내적성장과 성숙에 좋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어제 주일 삼종기도후 교황님의 강론 주제가 멋졌습니다. “음미하십시오, 날마다 하느님의 기적들을!(Savour, God’s everday miracles!”, 하루하루 날마다 하느님의 기적을 음미하며, 맛보며 사는 삶이 참 멋집니다.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오늘 화답송 후렴도 잘 어울립니다. 우선 그 시작이 매일 미사때 주님을 맛보는 것입니다. 주님 맛으로 살아가는 믿는 이들입니다.
오늘은 성녀 마르타와 성녀 마리아와 성 라자로 기념일입니다. 세남매의 이름을 따서 저희 요셉 수도원 피정집 하나는 마리아의 집이라 부르고 하나는 라자로의 집이라 부르며 봉사자 집은 마르타의 집이라 부릅니다. 오늘 세남매를 동시에 기념일로 지내기 올해로 4번째입니다. 그전에는 이 날은 마르타의 기념일로만 지냈습니다. 역시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각별한 배려의 사랑을, 결단을 깨닫습니다. 2016년에는 마리아 막달레나 기념일을 축일로 격상시켰고, 어제는 제4회 “조부모와 노인의 날”을 지냈는데 역시 현임 교황님의 배려의 결단임을 봅니다. 당시 교황님의 가르침이 좋은 깨우침이 됩니다.
“마르타와 마리아의 집에서 예수님은 순례자요 손님이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여행중인 주님을 환대했지만, 다른 방식으로 대접했습니다. 그러나 두 대조되는 태도로 봐서는 안되고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깊은 일치와 조화에서 체득되는 태도로 봐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봉사와 사랑의 활동은 주된 원천에서 결코 떼어낼수 없습니다. 주된 원천이란 주님의 말씀에 대한 경청입니다. 그러나 가난하고 병들고, 도움이 필요한 형제, 어려움에 처한 형제들을 향해 구체적인 행동으로 이끌지 않는 관상이라면 무익하고 불완전합니다.”
교황님의 환대, 그리고 관상과 활동에 대한 명쾌한 설명입니다. 환대의 사랑은 관상과 활동으로 표현되는 상호보완의 관계요 환대의 우선 순위는 말씀의 경청에 있다는 것입니다. 마리아와 마르타가 그러하듯 전임 베네딕도 16세 교황과 현임 프란치스코 교황님간의 관계도 두 성인처럼 상호보완관계임을 깨닫습니다. 결코 관상과 활동, 우선순위의 문제이지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런 깨달음을 노래한 ‘산山과 강江’이란 제 자작시가 있습니다. 역시 이 시는 '성 베네딕도회 프란치스코 수도사제'인 저의 신원을 보여줍니다.
“밖으로는 한결같은 정주의 불암산山, 성 베네딕도,
안으로는 한결같이 맑게 흐르는 강江, 성 프란치스코”
전번 방문했던 한의원 아들이 둘있는데 큰 아들은 산山, 작은 아들은 강江이라 하기에 기막힌 이름이란 격찬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환대하는 미사의 구조도 말씀전례에 이은 성찬전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마르타의 주님 환대가 적극적이요 빛을 발합니다. 마르타 덕분에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참 기막힌 복음의 진리를 배웁니다. 오늘 복음의 핵심으로 평생 화두로 삼고 살아야 할 말씀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진리를 설파하신후, 주님은 “너는 이것을 믿느냐?”물으십니다. 오늘 우리 모두에게 물으시는 말씀입니다. 마르타는 참으로 멋진 신앙고백으로 주님을 환대함으로 주님을 기쁘게 합니다.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영원히 우리의 주님 고백으로 삼아야 할 말씀입니다. 참으로 주님께 환대의 우선순위는 말씀의 경청이자 신앙고백임을 깨닫습니다.
마르타, 마리아, 라자로 삼남매는 주님의 각별한 사랑을 받았고 이들 삼남매가 살던 베타니아의 집은 주님이 피곤할 때 마다 수시로 마음 편히 머물렀던 ‘환대의 집’ 같습니다. 환대의 사랑에 환대의 사람들인 삼남매요, 환대의 집인 베타니아 집이요 이들을 닮은 우리 성베네딕회 요셉수도원입니다. 요셉 수도원뿐 아니라 정주의 삶을 살아가는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에게 필수 덕목이 환대입니다. 정주와 환대의 영성은 한쌍을 이룹니다. 규칙서에 명시되어 있습니다.
“찾아오는 모든 손님들을 그리스도처럼 맞이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께서는 장차 ‘내가 나그네 되었을 때 너희는 나를 맞아주었다’라고 말씀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이들에게 합당한 공경을 드러낼 것이며 특히 신앙의 가족들과 순례자들에게 그러할 것이다.”(성규53,1-2)
그러니 수도원을 방문하는 신앙의 가족들과 순례자들, 나그네들에 대한 환대의 사랑, 환대의 영성은 베네딕도회 영성을 대변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겠습니다. 환대의 사랑, 환대의 영성을 살아가는 환대의 사람들인 수도자들이요, 위로와 치유가 일어나는 환대의 집, 주님의 집, 평화의 집인 수도원은 흡사 세상 광야의 오아시스와 같은 존재입니다.
오늘 제1독서 요한1서는 흡사 ‘사랑의 찬가’같습니다. 짧은 말씀 안에 무려 사랑이란 말마디가 18회 나옵니다. 새삼 사랑밖엔 길이, 답이 없음을 깨닫습니다. 사랑은 우리의 존재이유이며 모두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단숨에 읽혀지는 사랑예찬의 말씀입니다.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기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듯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안에 머무르십니다.”
사랑의 요한 사도야 말로 주님을 가장 닮은 '사랑의 대가'이자 '사랑의 달인'입니다. 바로 이런 사랑이 환대의 사랑으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시간 주님은 환대의 사랑으로 우리 모두를 환대하시며, 우리 역시 마음을 활짝 열어 말씀과 성체로 오시는 주님을 환대의 사랑으로 맞이하는, 주님의 환대와 우리의 환대가 만나는 축복의 시간입니다.
“주님을 바라보아라. 기쁨이 넘치고,
너희 얼굴에는 부끄러움이 없으리라.”(시편34,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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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9. 성녀 마르타와 성녀 마리아와 성 라자로 기념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삶과 죽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 11,25-26)
주님을 닮는
믿음으로
여기
죽음조차
여기 너머
삶이요
주님을 버리는
불신으로
여기
삶조차
여기 너머
죽음이지요
주님을 품는
희망으로
여기
죽음조차
여기 너머
삶이요
주님을 지우는
절망으로
여기
삶조차
여기 너머
죽음이지요
주님을 따르는
사랑으로
여기
죽음조차
여기 너머
삶이요
주님을 거스르는
미움으로
여기
삶조차
여기 너머
죽음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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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9. 성녀 마르타와 성녀 마리아와 성 라자로 기념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마태 11,25-26)
물음인가 단언인가?
구원자께서 “너는 이것을 믿느냐?’고 물으신 것은 마르타가 당신 말씀을 믿는지 믿지 않는지 몰라서가 아닙니다. 그분께서 이렇게 물으신 것은 그때 그곳에 있던 사람들과 우리가 마르타의 대답에서 그의 기질을 알아보게 하시려는 뜻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을 물음이 아니라 ‘너는 이것을 믿어라”라는 단언이라고 풀이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이 풀이가 맞다면 마르타는 이렇게 덧붙임으로써 구원자의 말씀을 마무리하는 셈입니다.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지금 말씀하신 것을 믿음은 물론이요, 전에도 믿어 왔듯이 주님께서 그리스도이심도 믿습니다. 또한 당신은 세상에 오시어 당신을 믿는 이들과 함께 사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심도 믿습니다.’
-오리게네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9
하느님 나라가 다가온 줄을 아시오
하느님 나라가 다가온 줄을 아시오(루카 21,31),
하늘은 지표면의 모든 점에서 똑같은 거리에 있습니다. 이처럼 영혼도 지상의 만물로부터 똑같은 거리를 유지해야 합니다. 어느 하나를 다른 것보다 더 가까이 두어서는 안 됩나다. 어디에 있든지 간에, 고귀한 영혼은 이승의 모든 것으로부터, 곧 희망과 기쁨과 불행으로부터 한결같은 거리를 유지해야 합니다. 영혼은 무엇에게서든지 충분한 거리를 유지해야만 합니다. 달에서 볼 때, 우리의 하늘은 순수하고 맑고 흠이 없어 보입니다.
학자들은 달을 가리켜 지구에서 가장 가까운 천체, 천상적 존재들의 산파라고 부릅니다. 시간도 공간도 천상의 존재들을 건드리지 못합니다. 하늘에서는 자리를 차지하는 것, 곧 물질적인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성서를 아는 사람이라면 하늘이 특정한 장소를 가지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 것입니다. 하늘은 시간 속에 있지 않습니다. 하늘의 궤도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르기 때문입니다. 시간 자체가 하늘의 길에서 유래하기는 했지만, 하늘의 길은 시간 너머에 있습니다. 영혼이 하느님을 아는 데 시간과 공간만큼 방해가 되는 것도 없습니다. 시간과 공간은 전체의 부분이지만, 하느님은 통짜이십니다. 영혼이 하느님을 알아챌 수 있으려면,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은 지상의 갖가지 사물 가운데 이것도 저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통짜이십니다. 하느님을 알고자 하면서,영혼이 시간 안에 있을 수는 없습니다. 시간이나 공간이나 기타 이 세상의 어떤 표상을 의식하는 한, 영혼은 하느님을 알 수 없습니다. 색깔을 알려면, 눈은 먼저 모든 색깔로부터 벗어나야 할 것입니다. 어떤 학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을 알고자 하는 영혼은 하느님 이외의 무엇과도 공통되는 것이 있어서는 안 된다." 하느님을 아는 사람이라면, 모든 피조물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잘 알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의 피조물을 다른 피조물보다 높이 평가한다면, 그 첫째 것이 아름다워 보이거나, 조금 다른 성질을 지닌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하지만 무언가가 하느님에게 맞서는 자리에 놓인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211)
✝️ 월요일 거룩한 독서(렉시오 디비나)의 날✝️
필레 1,8-22
오네시모스에 대한 부탁
그래서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큰 확신을 가지고 그대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명령할 수도 있지만,
사랑 때문에 오히려 부탁을 하려고 합니다. 나 바오로는 늙은이인 데다가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님 때문에 수인까지 된 몸입니다.
이러한 내가 옥중에서 얻은 내 아들 오네시모스의 일로 그대에게 부탁하는 것입니다.
그가 전에는 그대에게 쓸모없는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그대에게도 나에게도 쓸모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나는 내 심장과 같은 그를 그대에게 돌려보냅니다.
그를 내 곁에 두어, 복음 때문에 내가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그대 대신에 나를 시중들게 할 생각도 있었지만,
그대의 승낙 없이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대의 선행이 강요가 아니라 자의로 이루어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가 잠시 그대에게서 떨어져 있었던 것은 아마도 그를 영원히 돌려받기 위한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이제 그대는 그를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종 이상으로, 곧 사랑하는 형제로 돌려받게 되었습니다. 그가 나에게 특별히 사랑받는 형제라면, 그대에게는 인간적으로 보나 주님 안에서 보나 더욱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그대가 나를 동지로 여긴다면, 나를 맞아들이듯이 그를 맞아들여 주십시오.
그가 그대에게 손실을 입혔거나 빚을 진 것이 있거든 내 앞으로 계산하십시오.
나 바오로가 이 말을 직접 씁니다. 내가 갚겠습니다. 그렇다고 나에게 빚을 진 덕분에 지금의 그대가 있다는 사실을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형제여! 나는 주님 안에서 그대의 덕을 보려고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내 마음이 생기를 얻게 해 주십시오.
나는 그대의 순종을 확신하며 이 글을 씁니다. 내가 말하는 것 이상으로 그대가 해 주리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아울러 나를 위하여 손님방을 하나 마련해 주십시오. 여러분의 기도 덕분에 은총이 내려 내가 여러분에게 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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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9. 성녀 마르타와 성녀 마리아와 성 라자로 기념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11,27)
‘기도와 활동’은 교회의 오랜 논제입니다. 문제는 기도와 활동 사이의 괴리가 아닌 조화와 통합입니다. 모든 영성 학교가 답변을 내려야 하는 결정적인 질문은 세상 안에서 살아가기(=활동)와 하느님 앞에서 살아가기(=관상)를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하는데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관상과 활동 사이의 조화 보다 관상에 우위를 제공함으로써 본의 아니게 마르타(=활동)와 마리아(=관상) 자매 사이에 서열을 매기는 오류를 낳기도 하였습니다. 그 복음적 근거가 바로 지난 16주일 복음의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루10,41.42)라고 표현하신 예수님의 말씀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는 오늘 갑작스레 마리아 축일은 없는데 마르타 축일은 있었다, 는 사실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라는 의문으로 묵상을 시작합니다. 물론 2021년부터 성녀 마르타와 성녀 마리아와 성 라자로 기념일로 바뀌었지만 말입니다.
환대의 여인인 마르타의 축일에서 기념일로 바뀌었지만, 우리가 오늘 듣는 독서와 복음은 변함없이 둘 다 요한의 편지와 복음입니다. 요한은 오늘 편지에서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1요4,7~8)하고 선언함으로써 ‘하느님은 사랑이다.’, ‘하느님을 아는 것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그리스도교의 핵심인 사랑의 신비를 요한은 자신의 뛰어난 통찰로 분명하게 제시합니다. 어쩌면 마르타와 마리아 그리고 라자로가 알고 있었던 앎은 사변적인 앎이 아닌 경험적인 앎이며, 무엇보다도 예수님과의 관계 체험을 통한 사랑의 앎이라고 봅니다.
마르타의 가족은 예수님을 누구 못지않게 사랑한 가족이었습니다. 어쩌면 동생 마리아와 함께 마르타 역시 순수한 사랑의 경쟁(?)하면서 예수님을 깊이 사랑하게 되었고, 예수님과 관련하여 많은 것을 경험적으로 알게 되었으리라 상상해 봅니다. 그래서 그녀는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11,22)하고, 또한 “마지막 부활 때에 오빠도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11,24)하고 고백할 수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마르타와 마리아는 이처럼 예수님에 대한 사랑의 경험을 통해서 자신들이 알고 있는 바를 표현할 줄 아는 성숙한 사랑의 여인이었고, 그 사랑의 힘으로 예수님께 자신이 바라는 바를 기꺼이 요구할 수 있는 당찬 여인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마르타와 마리아는 마침내 사랑의 앎에서 솟아나는 믿음으로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11,27)라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고백했던 마르타와 마리아는 진정 사랑의 여인들이었습니다. 마르타와 마리아가 고백한 사랑은 바로 인생의 길에서 지치고 힘든 사람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환대의 사랑이었고, 자신의 소중한 것, 향유를 다 쏟아부어 사랑을 표현함으로 이런 환대와 사랑을 확인하고서, 예수님께서는 기꺼이 자신이 가야 할 길을 꿋꿋이 걸어갈 힘을 얻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교 영성의 핵심 중 되찾아야 할 영성의 요인 중 하나가 환대의 영성이라고 생각합니다. 비록 마르타 기념일에서 성녀 마르타와 성녀 마리아와 성 라자로 기념일로 변경되었지만, 환대의 중요성을 교회가 배제하거나 무시한 것은 아닙니다. 마르타와 마리아와 라자로의 집은 여전히 곧 교회가 다시 회복해야 할 ‘나그네들을 위한 환대의 집’이요, 교회 구성원은 마르타와 마리아 그리고 라자로처럼 ‘환대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사실 마르타 가족의 환대의 원천은 바로 예수님이잖아요. 예수님은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을”(마태11,28) 언제나 기꺼이 환대하셨고 당신 안에서 참된 쉼을 갖도록 초대하신 분이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의 환대를 실행한 사람이 바로 마르타와 그 가족들입니다. 우리 역시도 오늘을 살면서 마르타와 그 가족들처럼 누군가를 기꺼이 환대하는 사랑의 사람이 될 수 있도록 간청하면서 「환대란?」 글을 여러분과 함께 공유하렵니다.
『환대란 낯선 사람이 들어와 친구가 될 수 있는 자유로운 공간을 창조하는 것이다. 환대는 사람을 변화시키려고 하는 게 아니라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는 것이다. 환대는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신을 자신의 방식으로 찾을 수 있는 기회를 열어주는 것이다. 환대에 숨어 있는 역설은 환대가 비어있음을 창조하기 원하기는 하지만 두려움으로 가득 찬 비어있음이 아니라 낯선 이들이 그 공간에 들어와 자신이 이미 자유롭게 창조된 존재임을 발견하게 되는 친절한 비어있음을 원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노래를 부르고, 자신의 언어로 말하고, 자신의 춤을 출 수 있는 그리고 자신의 부름을 따라 원할 때 자유롭게 떠날 수 있는 그런 비어있음이 환대이다. 우리가 진정 환대하는 존재가 되기를 원한다면 단순히 낯선 이들은 받아들이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이중적이지 않은 명료한 우리의 존재감으로 낯선 이들을 만나고 중립성이라는 가면 뒤에 숨지 않고 우리의 생각과 의견, 우리의 삶의 방식을 명료하고 분명하게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명료하게 드러난 우리의 선택과 태도, 관점을 보면서 낯선 이들이 자신의 입장을 자각하게 되고 스스로 자신의 관점을 탐구하게 되는 경계와 경계의 만남이 열리게 될 때 비로소 우리는 그들과 진정한 소통에 들어갔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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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9. 성녀 마르타와 성녀 마리아와 성 라자로 기념일.
■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고백하는 마르타 / 굿뉴스 게시판
박윤식 [big-llight] 240728. 20:20 ㅣNo.174576
오늘은 성녀 마르타와 마리아, 성 라자로 기념일이다. 마르타는 라자로의 동생이자 마리아의 언니로 예루살렘 근처 베타니아에 살았다. 나흘이나 무덤에 묻혀 있던 라자로는 예수님 덕택으로 다시 살아난 이다. ‘예수님께서 마르타에게 이르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이는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 믿는 이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그녀가 답하였다. “예, 저는 주님께서 오시기로 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마르타의 이 신앙고백은 베드로 사도나, 백인대장의 그것에 못지않다. 이는 라자로가 죽어 큰 슬픔에 빠졌을 때 비로소 한 엄청난 고백이기에. 사실 우리는 주님을 어떻게 고백하는가? 언제 어디서나 마르타마냥 우리 구세주로 고백하는가? 마르타의 이 믿음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라자로를 살려 내셨다. 하느님에 대한 이 믿음이 우리가 상상하지 못한 기적을 만들어 내었다.
베타니아에 있던 마르타의 집은 예수님께서 복음 선포에 지치셨을 때 찾아와서 쉬이 쉴 수 있는 오아시스와 같은 곳이었다. 그때마다 예수님 발치에만 머문 마리아보다 그녀는 그분을 편안히 모시려고 정말 온 정성을 다했다. 그것은 그녀가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생명마저 주관하시는 분이시라는 믿음을 가졌기에, 죽은 오빠를 다시 살리시는 그분 기적을 직접 체험하였다.
이렇게 마르타는 활동적인 신앙인의 모범으로 주님 말씀에 따라 충실히 살아, 믿음의 삶에서 관상생활의 모범으로 공경 받는 성녀중의 성녀이다. 이 마르타를 쭉 보면서 우리가 믿는 참 신앙은 사랑과 믿음의 결과물임을 분명히 알게 될게다. 비록 때로는 서로가 서로에게 다소 다툴 때도 있지만, 서로 믿고 사랑해가면서 그 믿음은 더욱더 굳건해지리라. 따라서 우리가 신앙을 말로만 고백하면서 깊숙이 체험하지 않는다면, 신앙의 정도가 점점 깊이가 덜해질 수밖에.
그렇지만 믿음으로 우리가 서로 늘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함께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될 것이리라. 사람들은 늘 바쁘단다. 어쩜 고통 앞에서마저 눈코 뜰 새가 없이 바쁘다나. 그러나 주님은 바쁘지 않으시다. 우리만 조급할 뿐이지 그분께서도 그러려니 생각해서는 안 된다. 기적은 언제나 천천히 일어나니까. 조건이 갖추어진 뒤에야 주어질 게다.
예수님은 죽은 지 분명히 나흘이나 지난 라자로를 살리셨고 마르타는 그 기적 체험에 고백했다.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믿음이라는 게,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는 우리들이 따르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영원한 구원의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리라.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이렇게 이르셨듯이, 당신께서 바로 부활이시요 생명이시라는 것을 믿게 하려는 것이다.
주님을 믿는 이들은 하나같이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게다. 그런데 주님께서 되돌려 주시는 것은 단순한 육신의 숨이 아니다. 주님께서 되찾아 주시고자 하는 그것은 우리가 잃어버린 영원한 생명이다. 그 생명은 창조 이전부터 우리에게 계획된 생명으로 이 땅에서 이미 우리 모두가 누리고 있는 생명이며 육신의 숨이 끊어진다 하더라도 계속 이어지는 그러한 생명이다. 믿음이 깊어질 때 삶과 죽음은 분리되지 않고 하나이다. 우리도 그녀의 이 고백을 언제 어디서나 되풀이해야 한다. 주님의 부활과 생명의 자리가 우리에게 이미 와 있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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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9. 성녀 마르타와 성녀 마리아와 성 라자로 기념일.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
죽음 앞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가진 것들도, 사회적인 지위와 능력도, 그 어떤 것도 죽은 이를 살리지 못합니다.
죽음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단 한 가지는 죽은 이를 위하여 기도하며 하느님께 자비를 청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나약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이처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약한 우리를 주님께서 사랑하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제1독서는 하느님의 사랑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알려 줍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하느님의 이 사랑은 예수님을 통하여 이루어졌습니다. 복음에서 ‘마르타와 마리아, 라자로를 사랑하신’(요한 11,5 참조) 예수님께서는 당신 사랑이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지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정말로 가져야 할 것, 곧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고 계시다는 믿음을 가진 신앙인이 됩시다.
라자로가 죽음에서 일으켜졌던 것처럼, 이 믿음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줄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소중하신 예수님까지 희생시키시면서 우리를 살리시려는 하느님 사랑의 초대가 이 믿음 안에 담겨 있습니다.
하느님을 외면하면서까지 무엇인가 가지고 싶어질 때마다, 마르타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깊이 되새기면 좋겠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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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9. 성녀 마르타와 성녀 마리아와 성 라자로 기념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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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9. 성녀 마르타와 성녀 마리아와 성 라자로 기념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예수님의 오아시스, 베타니아!
공생활 기간 동안 예수님과 제자들에게도 그런 무한 리필 에너지 충전소같은 집이 있었으니,
베타니아에 위치한 절친 라자로의 집이었습니다.
베타니아는 예루살렘에서 동쪽으로 약 15스타디온(약 2.8킬로미터) 떨어진 곳,
올리브산 동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오르내리실 때 마다 자주 라자로의 집에 들르셔서 숙식을 해결하곤 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종종 벌어진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과의 껄끄럽고 날선 대화로 끝내신 예수님께서는 지친 몸을 이끌고 베타니아로 내려오셔서 휴식을 취하셨습니다.
그런 날 밤에는 라자로, 마르타, 마리아와 마주 앉아 밤늦도록 포도주잔도 많이 기울였습니다.
손님 맞이의 총 책임자는 언제나 마르타였습니다.
그녀는 엄청나게 먹고 마셔대는 제자들을 위해 빵을 굽고 또 구웠습니다.
하루 온 종일 지지고 볶았습니다.
그들이 떠나고 나면 사흘씩 앓아 누울 정도였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본당 성모회장으로 적격인 인물이었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힘들고 굳은 일은 도맡아 하는 사람, 이웃의 필요성에 언제나 즉각적으로 응하는 사람이 마르타였습니다.
성격은? 착하고 성실했습니다.
그러나 때로 과격하기도 하고 쉽게 흥분도 했습니다.
한번은 예수님과 일행들 식사 준비에 바빠 죽겠는데, 동생 마리아를 아무리 찾아도 없었습니다.
나중에야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있는 마리아를 발견했습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마르타는 주저없이 예수님께 따집니다.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루카 복음 10장 40절)
마르타는 예수님이 두렵지 않았습니다.
힘들 때면 힘들다고 솔직하게 그분께 털어놓을 수 있는 용기를 지녔습니다.
그만큼 그녀는 예수님과 절친했습니다.
친한 오빠처럼 예수님을 각별히 신뢰했습니다.
그럼 마리아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동생을 향한 언니 마르타의 까칠하고 날선 발언을 통해 마리아의 성격을 대충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돌아가는 분위기 파악에 더딘 사람이었습니다.
살짝 ‘공주과’라고나 할까요?
산더미 같은 일감 앞에 언니가 쩔쩔 매고 있으면, 굳이 부탁하지 않아도 알아서 척척
도와주는 것이 당연할텐데, 동생에게는 그런 ‘촉’이 부족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마리아는 종종 존재 자체로 마르타에게 스트레스를 안겨주곤 했습니다.
마리아가 그렇게 된 이유가 있었으니, 바로 예수님 때문이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과의 운명적인 만남 이후 모든 것이 180도 바뀌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아 버리셨습니다.
이제 그녀에게 있어 예수님은 삶의 유일한 의미가 되어버렸습니다.
마리아는 이제나 저제나 예수님을 목빠지게 기다렸습니다.
예수님께서 나타나시기만 하면 만사 제쳐놓고 쪼르르 예수님께로 달려갔습니다.
가장 가까이에서 그분을 바라봤습니다.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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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9. 성녀 마르타와 성녀 마리아와 성 라자로 기념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주님께서는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
오늘은 성녀 마르타와 성녀 마리아와 성 라자로 축일이다. 성경에 보면 예수께서 라자로의 집에 들르셔서 쉬고 계실 때에, 마르타는 부엌에서 열심히 음식 준비를 하고 있었고, 예수님 발치에 앉아 예수님의 말씀을 열심히 듣고 있던 마리아에게 자기 일 좀 거들어 주게 하라고 예수님께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마르타를 보고,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루카 10,41-42)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보아 매우 활동적인 사람이었던 것 같다. 이 때문에 마르타는 활동적인 그리스도인의 상징이고 동생 마리아는 관상생활의 모델로 공경을 받는다. 또한, 성녀 마르타는 요리사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이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25절) 하시면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신다. 예수께서 오늘 복음에 나오는 라자로를 다시 살리시는 장면을 보고 그분이야말로 생명을 주실 수 있는 분임을 체험하였기 때문이다. 그러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마르타는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21-22절)라고 할 수 있었다. 여기서 예수님은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23절) 하시고 라자로를 살려 주시면서 “부활이요 생명이다.”(25절) 라는 말씀을 하셨다.
오늘의 복음에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메시지는 예수님이 마지막 날에 죽은 자를 살려주시는 분으로서가 아니라, 구원은 “지금 여기서” 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이다. 구원은 바로 지금 내가 사는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구원이 단지, 내가 죽은 다음에, 하느님의 심판을 받은 다음 결정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구원은 이 세상에서부터 체험되고 누릴 수 있어야 한다. 내가 지금 구원을 체험하지 못한다면, 죽은 다음에 구원을 받을 수 없다. 구원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것은 구원을 주시는 그분을 믿고, 따르면서, 즉 그분의 가르침을 실천하면서 “지금 여기서”부터 살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주님을 닮아가기 위해 하느님의 뜻 때문에 나 자신을 죽일 수 있는 삶, 죽으려 노력하는 삶을 통해 우리는 부활의 신비를 체험할 수 있다. 이 부활의 신비를 체험하기 전에 이미 고통의 신비를 체험하게 되며, 이를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 안에, 혹은 이웃에게 구체적으로 그리스도를 낳아줄 수 있다. 그러기에 우리는 성탄의 신비, 십자가의 신비, 죽음과 부활의 신비를 체험하게 된다. 이때 우리도 “예, 주님,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27절) 라고 고백할 수 있다. 우리가 체험하는 부활은 바로 구원의 체험이며 그럼으로써 부활 신앙을 올바로 전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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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9. 성녀 마르타와 성녀 마리아와 성 라자로 기념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사람은 무엇을 남기기 위해 살아야 할까?
한국의 유명한 가수, 작곡가, 연극 창시자 김민기 선생이 2024년 7월 21일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김민기는 1970년대 한국 민주화 운동의 주요 히트곡이자 찬가가 된 노래 '아침이슬'의 작곡가입니다.
김민기 씨는 아침이슬 외에도 ‘상록수’ 등을 작곡하였지만, 그의 노래는 나오는 대로 금지곡이 되었고 옥살이까지 해야 했습니다.
농사를 지으며 공장에서 일하며 가난한 이들을 위해 야학당을 만들어 봉사하였습니다.
그러다 학전이라는 극장을 만들어 ‘지하철 1호선’ 등으로 황정민, 설경구 등의 연기자, 윤도현 등의 가수들이 설 자리를 마련하였습니다.
그의 영결식에는 수많은 그로부터 영향을 받은 각계각층의 유명인들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 모습을 보면 ‘나도 저래야 할 텐데!’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라고 하던데 그게 아니라 사람은 죽어서 사람을 남긴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믿음이 없는 세상 사람들은 세계 4대 성인으로 공자, 소크라테스, 부처, 예수를 말합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물론 이름을 남긴 사람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공통점은 책을 쓰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이들의 목적은 제자집단을 만드는 데 있었습니다.
책보다 오래 남는 게 사람들임을 알았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라자로, 마르타, 마리아라는 세 남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들은 남매로서 하나의 제자 공동체이기도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죽은 라자로를 살려주시는 은혜를 베풀었고, 마리아가 향유로 당신 죽음을 준비하게 허락하셨습니다.
마르타의 호의도 다 받아들이셨고 그러나 물질적인 봉사보다는 당신께 머무는 마리아를 본받으라고 알려주셨습니다.
왜 이들에게만 그리 특별한 은혜를 베푸셨을까요? 사실 한 사람이 자신을 사랑해주는 것보다 그 사랑해주는 이들이 여럿일 때 더 행복합니다.
예수님은 두세 사람이 함께 당신 이름으로 모인 곳에 당신도 함께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하나의 공동체에 당신 이름이 새겨질 때 한 사람에게 새겨지는 것보다 더 오래 남고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베타니아 세 남매의 집에서 자주 쉬셨고 에너지를 회복하셨습니다.
저도 사람들을 만날 때 지치지만, 나를 사랑해주는 여러 명을 만날 때는 마치 기도를 할 때처럼 힘을 얻습니다.
함께 하는 이들 안에서 주님의 성령이 크게 작용하고 있음을 느낍니다.
아인슈타인과 포돌스키, 그리고 로젠이라는 세 과학자가 실험한 것이 있습니다.
처음 본 사람 둘을 잠깐 만나 눈을 마주치게 하고 따로 어두운 방에 들어가게 하고는 한 사람에게만 빛을 비춥니다.
그럴 때 다른 사람의 뇌파에도 그 반짝이는 빛을 감지하는 지에 대한 실험입니다.
놀랍게도 거리에 상관없이 잠깐 마주친 두 사람은 한 사람에게만 빛을 비추어도 같은 반응을 보였습니다.
성 프란치스코와 성 도미니코, 성 베네딕토 등은 많은 말씀을 하신 분들이지만, 정작 그들을 알게 되는 이유는 그 수도회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당신을 믿는 이들 안에 살아계시기 위해 예수님은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가 영향을 받아 믿음이 증가하게 하셨습니다.
우리의 목표도 그래야 할 것입니다.
무엇을 남길까 걱정하지 말고 먼저 거룩하게 살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일 사람들을 남겨야 합니다.
그러면 나도 그들 안에서 오래 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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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9. 성녀 마르타와 성녀 마리아와 성 라자로 기념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부활의 힘은 예수님에게서 옵니다.>
“많은 유다인이 마르타와 마리아를 그 오빠 일 때문에 위로하러 와 있었다.
마르타는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그분을 맞으러 나가고, 마리아는 그냥 집에 앉아 있었다. 마르타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르타에게,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시니, 마르타가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오빠도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마르타가 대답하였다.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요한 11,19-27)”
1)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 여러분, 죽은 이들의 문제를 여러분도 알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희망을 가지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처럼
슬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셨다가 다시 살아나셨음을 우리는 믿습니다.
이와 같이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하여 죽은 이들을 그분과 함께 데려가실 것입니다(1테살 4,13-14).”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죽은 이들의 맏물이 되셨습니다.
죽음이 한 사람을 통하여 왔으므로 부활도 한 사람을 통하여 온 것입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날 것입니다(1코린 15,20-22).”
그리스도교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음을 믿는다는
부활 신앙에서부터 시작된 종교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인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예수님처럼 부활하기를 희망하고, “나도 예수님처럼 부활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고,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하느님 나라로) 건너가는 ‘관문’일 뿐입니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 때문에 큰 슬픔과 허무와 절망에 빠지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모습인데, 신앙인이라면 부활 신앙으로 그 슬픔과 허무와 절망을 극복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2) 누구나 한 번은 죽어야 한다는 것이 진리라고 생각할 때가 많은데, 그것은 예수님의 재림 전까지만 해당되는 일이고, 예수님의 재림에 연결해서 생각하면 누구나 한 번은 죽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바오로 사도는 ‘재림’과 ‘종말’에 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근거로 이 말을 합니다. 주님의 재림 때까지 남아 있게 될 우리 산 이들이 죽은 이들보다 앞서지는 않을 것입니다.
명령의 외침과 대천사의 목소리와 하느님의 나팔 소리가 울리면, 주님께서 친히 하늘에서 내려오실 것입니다.
그러면 먼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이들이 다시 살아나고, 그다음으로, 그때까지 남아 있게 될 우리 산 이들이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들려 올라가 공중에서 주님을 맞이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늘 주님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1테살 4,15-17).”
살아 있는 동안에 예수님의 재림을 보게 되는 사람들은 ‘죽음’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종말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러니 누구나 한 번은 반드시 죽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창세기에는 ‘에녹’이(창세 5,24), 열왕기 하권에는 ‘엘리야’ 예언자가(2열왕 2,11) 죽지 않고 승천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일들도 “인간은 누구나 한 번은 죽어야 한다.” 라는 말이 진리가 아니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3)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오빠도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라는 마르타의 말은, 그 당시 유대인들이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던 믿음을 나타낸 말입니다.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부활을 안 믿었지만(마태 22,23), 일반 유대인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부활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 믿음은 예수님에 대한 신앙과는 상관이 없는, “종말이 되면 모두 다 부활하겠지.” 라는
막연한 생각일 뿐이었습니다.
마르타가 다른 유대인들과 같은 믿음을 표현한 것은, 아직 예수님의 권능과 권한을, 또는 예수님의 신원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4)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라는 말씀은, 5장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
아버지께서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으시고, 심판하는 일을 모두 아들에게 넘기셨다(요한 5,21-22.).”
이 말씀은, 어떤 사람을 부활시킬 것인지 멸망시킬 것인지의 권한을 당신이 가지고 계신다는 분명한 선언(계시)입니다.
부활을 원한다면, 예수님을(예수님만)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부활 자체가 곧 영원한 생명은
아니라는 것도 생각해야 합니다.
부활은 최후의 심판을 받기 위한 일이고(묵시 20,12-15), 그 심판에서 영원한 생명에 참여할 자격을 얻은 사람들만 그 생명을 받게 될 것입니다(루카 20,35).
<신앙생활은 그 자격을 얻기 위해서 노력하는 생활이고, 나중이 아니라 지금 당장 해야 하는 생활입니다(요한 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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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9. 성녀 마르타와 성녀 마리아와 성 라자로 기념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마르타와의 대화를 통해 당신을 따르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마음가짐을 ‘나는 안다’라는 인식의 차원에서 ‘나는 믿는다’라는 투신의 차원으로 변화시키십니다. 오빠의 장례 절차가 끝나갈 때 쯤 뒤늦게 도착하신 예수님께 그녀는 이렇게 말하지요.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문장 안에는 예수님께 대한 원망과 섭섭함이 담겨 있습니다. 자기 오빠가 죽은건 예수님께서 제 때 도착하시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예수님께서 곁에 계시기만 했다면 오빠의 병이 아무리 위중해도 치유의 은총을 입어 금새 회복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그렇기에 이 문장 안에는 예수님의 능력에 대한 믿음이, 그리고 자기들을 향한 그분의 사랑을 신뢰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고도 할 수 있지요.
그러나 주님께 대한 그녀의 믿음은 아직 ‘입’에만 머무르고 있었습니다. 즉 머리로 ‘아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초보적인 단계,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분이 어떤 능력을 지니셨는지 알긴 알겠는데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 있으며 내 삶에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는 아직 모르겠는 수준에 그치고 있던 겁니다. 그래서일까요? 하느님 아버지와 예수님 사이의 친밀한 관계에 대해서도, 그리고 주님을 굳게 믿고 따르는 이들이 세상 종말의 때에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된다는 약속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οιδα)고 말할 뿐 ‘믿는다’(πιστιω)고 고백하지는 않습니다. 지금 당장 내가 세상을 떠나 하느님 아버지께로 가는게 아니기에 신앙생활이 그렇게 절박하지 않고, 주님을 믿고 따른 보상이 지금 여기에서 주어지는 것도 아니기에 구원이 아직 나에게는 먼 남의 일처럼 여겨지는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지요.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에게, 그리고 무미건조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부활에 대한 믿음을 일깨우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이 말씀에서 드러나듯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고 따르는 이들이 받게 될 보상에 대해 알려주시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당신께서 가르치신 구원의 진리를 우리가 ‘믿는지’를 물으십니다. 그분은 당신께서 원하시는 일을 혼자서 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가 당신 뜻을 알고 받아들이며 믿음으로써 함께 하기를 바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즉 주님은 우리가 믿는대로 이루시는 분이기에 우리가 주님을 믿기만 하면, 그분께서 주시는 선물인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이 세상에서 이미 소유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 주님의 뜻을 헤아린 마르타는 마침내 가슴에서 우러나는 믿음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있는 메시아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죽은지 사흘이 더 지난 라자로를 되살리심으로써 마르타가 고백한 신앙이 반드시 이루어고야 마는 진리임을 확증해 주십니다. 그러니 우리도 굳은 믿음을 지녀야 합니다. 주님을 온전히 신뢰하며 그분께 자신을 의탁하는 이들은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분께서 자신에게 영원한 생명과 참된 행복을 주실 것을 믿기에 이 세상에서부터 그것을 누리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쁘게 살 수 있지요. 이처럼 내 마음이 ‘안다’에서 ‘믿는다’로, 걱정과 두려움에서 감사와 기쁨으로 변화되지 않는다면 나는 아직 예수님을 제대로 믿는 게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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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9. 성녀 마르타와 성녀 마리아와 성 라자로 기념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주님 사랑”
우리는 사랑하며 살아갑니다. 하느님도 사랑하지만 또 사람들을 사랑합니다.
자식 사랑도 차이가 있다고 하지요? 흔히 손에다 비유를 하며 같은 자식이라도
차이가 있다고 합니다.
같은 손이라도 손가락이 엄지, 집게, 검지, 약지의 길이가 차이가 있듯 같은
자식이라도 더 사랑이 가는 자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람의 특징일 것입니다. 온전한 하느님이시며 사람이신 예수님께서도 모두를 사
랑하라고 하셨지만 친하게 지내는 가정이 있었으니 바로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베타니아의 마르타의 집입니다.
복음을 통해서도 그 집안의 내력을 알 수 있습니다.
마르타의 오빠는 라자로이고 동생은 마리아라입니다.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마르타의 집에서 식사 대접을 받으실 때에 당신의 말씀에 귀를 기우리고 있는
마리아와 일에 분주한 마르타를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루카 10,40-42)
그래서 교회는 일만 열심히 하는 사람을 일컬어 ‘마르타 같은 사람’이라고 하며
영성적으로 깊이를 함께 해야 하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대신 마리아를 일컬어 영성적인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마리아도 활동이
필요한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장 성숙한 신앙인은 이 둘을 합해서 영성적이면서도 활동적인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학자마다 서로 의견이 틀린 것은 마리아가 마리아 막달레나가
마리아와 같은 인물인가 대한 추측입니다. 만일 마리아가 막달레나의 인물이라면
십자가 밑에 서 있었고 또 부활하신 주님을 처음으로 목격한 인물일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가족을 끔찍이 사랑하신 것이 복음서에서도 나타납니다.
바로 오빠 라자로의 죽음의 대목에서 이 사랑이 나타납니다. (요한 11,35-36)
요한 복음은 마르타를 통하여 주님 부활에 대한 신앙을 설명하도 있습니다.
마르타는 아빠가 죽은 다음에 오신 주님 앞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오빠도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요한 11,23)
요한 복음은 마르타를 통하여 현재 이루어지는 오빠의 부활과 종말론적인 의미의
부활에 대한 신앙을 동시에 전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믿습니다. 그런데 사실 하느님을 사랑하지요.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또한 그분을 사랑합니다.
요한 서간의 저자도 하느님과 그 아드님에 대한 우리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영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로
우리가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신다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우리는 아버지께서 아드님을 세상의 구원자로 보내신 것을 보았고
또 증언합니다.” (1요한 4,13-14)
예수님의 부활에서 우리가 새길만한 대목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많은 사람들 보다
우선 당신을 사랑했던 제자들과 여인에게 당신 부활을 보여주시고 또 증언하도록
하셨습니다.
우리도 주님을 사랑하기에 마지막 날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주시라 믿습니다.
우리가 이 지상에서 해야할 것은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선포하면서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1요한 4,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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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9. 성녀 마르타와 성녀 마리아와 성 라자로 기념일.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우리에게 매우 친숙한 마르타 성녀의 기념일입니다. 오늘 복음 내용은 마르타 남매(라자로, 마르타, 마리아)와 예수님 사이에 있었던 여러 일화 중 하나지요. "주님,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이가 병을 앓고 있습니다."(요한 11,3) 오늘의 대목이 있기 며칠 전, 마르타, 마리아 두 자매가 주님께 사람을 보내어 전한 말씀입니다. 두 자매의 심정은 오늘의 내용을 이해하는 실마리가 될 것입니다.
이미 매장이 끝난지 나흘이나 지난 라자로의 죽음 앞에서도 마르타는 예수님께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께서 하고자만 하신다면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의 청을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요한 11,22)을 안다고 고백합니다. 이 앎의 고백은 예수님 향한 그녀의 굳은 믿음과 변치 않는 사랑에서 나온 것입니다. 무엇보다 마르타는 예수님께서 라자로를 사랑하신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요.
"우리의 친구 라자로가 잠들었다. 내가 가서 그를 깨우겠다."(요한 11,11)고 말씀하신 바가 있는 예수님은 당신이 하실 일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이를 죽음에서 일으킴으로써 "하느님의 영광"(요한 11,4)을 드러내실 예수님께서 먼저 마르타의 믿음을 확인하십니다. 기적이 대중의 얕은 호기심이나 자극하는 기괴한 스캔들이 되지 않으려면 그 기적의 당위성인 "믿음"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베푸시려는 기적은 "사랑"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요한 11,25-26) 당신께 대한 믿음이 생명의 조건이라고 하십니다. 다시 되살아나는 생명은 물론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은 믿음에서 흘러나와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 물음에 마르타는 신앙 역사에 길이 남을 명 대답, 정답을 남깁니다.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요한 11,27)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이, 당시 제자들부터 우리들에 이르기까지 우리 모두는 이 신앙을 믿고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그분이 인류를 위해 목숨을 바칠 주님의 종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진리입니다.
제1독서인 요한의 첫째 편지에는, 사랑의 사도라 불리는 요한의 글답게 온통 "사랑"이라는 말씀으로 도배가 되어 있습니다. 사랑, 사랑... 그야말로 사랑 타령입니다. 그리고 "사랑" 다음으로 자주 등장하는 말씀이 "머무르다"는 동사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과 "머무름"은 뗄려야 뗄 수 없이 밀착된 말씀들이지요.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1요한 4,16) 머무름은 상대를 거처 삼아 그의 안에 자신을 두는(놓는) 존재적 행위입니다. 그런데 사랑을 통해 이 머무름이 동시에 상호적으로 이루어진다고 하네요. 그분 안에 내가 머무르고 내 안에 그분이 머무르는 신비는 사랑할 때 일어나는 기적입니다. 이 기적이 가능한 이유는 단 하나,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1요한 4,8)
"누구든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고백하면 하느님께서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시고 그 사람도 하느님 안에 머무릅니다."(1요한 4,15) 마침 오늘 마르타가 믿음으로 고백한 내용이지요. 이 믿음 또한 머무름을 부른다고 합니다. 내 안에 그분이 계시고(머무르시고) 그분 안에 내가 있는(머무르는) 상태, 서로가 서로에게 머무르는 것은 하나됨의 상태가 아닐까 합니다. 내 안에 그분이, 그분 안에 내가... 둘은 이미 분리할 수 없이 일치되어 있습니다. 서로에게 머물러 하나된 존재는 칼로 베듯 분리할 수도, 뜯어내듯 떼어놓을 수도 없습니다. 이미 하나니까요.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예수님의 존재와 정체성에 대한 믿음은 사랑의 머무름으로 이어지고, 또 생명을 부릅니다. 결국 생명은 사랑입니다. 사랑이신 하느님의 창조부터, 그 창조사업에 동참하는 모든 피조물의 사랑까지, 또 우리가 일상에서 소박하게 나누는 작은 사랑까지, 사랑은 생명을 생성하고 보듬고 지키고 풍요롭게 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에 기초한 모든 사랑은 생명으로, 영원한 생명으로 이어지는 기적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믿고 머무르고 사랑이 되어 영원히 사는 그 기적 안에 있습니다. 그 기적 안에 있는 벗님을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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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9. 성녀 마르타와 성녀 마리아와 성 라자로 기념일.
인생의 나아갈 바를 올바로 선택하는 삶
<2024.7.29> 아침을 여는 묵상 (렘 40:1~16절)
❝인생의 나아갈 바를 올바로 선택하는 삶❞
❚ 매일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고 실천함으로 인생의 나아갈 바를 선택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 어떤 삶을 살아가기를 노력해야 합니까?
➲ 인생의 목적을 말씀을 따라가는 삶에 두어야 합니다(1~6절).
예레미야는 결박된 채 바벨론에 끌려가던 중에 바벨론 사령관 느부사라단의 도움으로 라마에서 풀려났습니다. 풀려난 예레미야에게 느부사라단은 유다와 예루살렘의 멸망과 관련해서 말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예루살렘에 재난을 선포하시고 그대로 행하셨다는 것(2절)과 예루살렘 멸망의 근본적인 원인은 유다 백성이 여호와께 범죄하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은 것(3절)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방인 사령관 느부사라단이 말한 이 내용은 하나님의 심판 예언을 무시하고 거부했던 유다 왕들과 고관들 그리고 백성들과 대조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느부사라단은 예레미야에게 바벨론에 함께 갈 것을 제안하면서 그를 잘 돌봐 주겠다 약속합니다(4절). 그러나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에 머물기를 원했습니다. 그의 결정에 대해 느부사라단은 유다 총독으로 임명을 받은 그다랴에게 돌아가 그와 함께 남은 백성 중에 머물 것을 제안했고, 예레미야에게 양식과 선물을 주고 그를 보냈습니다(5절). 예레미야는 미스바에 있는 그다랴에게 가서 유다에 남아 있던 백성들과 함께 살았습니다(6절).
평생을 고난과 눈물 가운데 살아왔던 예레미야에게 느부사라단의 제안은 너무나 달콤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연히 그 제안을 거부하고 멸망한 민족에게로 돌아왔습니다. 예레미야가 선택하고 추구한 중요한 가치는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에게는 바벨론에서의 영화보다 하나님의 뜻이,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 그리고 민족의 앞날이 더 소중했던 것입니다. 말씀을 따르는 사람은 인생의 목적을 하나님께 둡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선택하기 위해 기도하며 나아가게 됩니다. 우리는 늘 선택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세상의 기준과 가치, 나의 안위와 평안을 선택하지 않는 결단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말씀을 따라 살기로 선택하여 나의 인생의 나아갈 바를 올바로 선택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 주님의 선하신 인도를 기다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7~12절).
예레미야는 느부사라단의 제안을 듣고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에게로 갔습니다. 바벨론의 왕이 그다랴를 유다 땅의 총독으로 세웠다는 소식을 들은 유다의 모든 지휘관과 부하들이 미스바에 있는 그다랴에게 왔습니다. 그다랴는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바벨론 왕을 섬길 것을 명하였고, 그 길이 그들에게 유익한 것이라고 설득하였습니다(9절). 또한 자신은 미스바에 머물면서 바벨론과 유다의 관계에 있어서 총독으로서 최선을 다할 것을 약속하며, 성읍에서 포도주와 여름 과일과 기름을 모아 항아리에 저장해 놓고 정착할 준비를 하라고 권고합니다(10절). 전쟁을 피해 도망친 각처의 백성이 다시 유다로 모여들었습니다(11절). 그들은 그다랴의 말에 따라 바벨론의 왕을 섬기기로 하고 포도주와 여름 과일을 모았습니다(12절).
세상은 자신들의 정치적 상황에 따라서 또는 자신의 유익을 찾아 이리저리 몰려다니며 삽니다. 이러한 모습들은 죄로 인해 자신에게 무엇이 유익한지조차 제대로 판단하지 못한 결과에서 나오는 행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습득한 학문과 경험에 근거한 판단에는 분명 한계가 있습니다. 아울러 하나님을 떠나 사는 인생은 자유로운 것 같지만 궁극적으로 죄와 정욕에 빠져 말할 수 없는 비참한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 아래 사는 것이 진정 복 있는 삶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는 자에게 하나님의 선한 인도하심이 기다리고 있음 또한 기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고 진리의 말씀을 좇아 살아가므로 나의 인생의 나아갈 바를 올바로 선택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 성령이 주시는 충고로 분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13~16절).
미스바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었습니다. 이때 요하난이 이스마엘과 암몬 왕이 공모하여 그다랴를 암살하려는 음모를 사전에 감지하고 그다랴에게 고발합니다(13절). 암몬은 유다와 오랫동안 적대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유다가 재건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한 이스마엘은 왕족으로서 단지 귀족의 자손에 불과한 그다랴가 유다의 총독이 된 것에 불만을 갖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암몬 왕과 뜻이 맞은 이스마엘은 그댜랴의 암살을 모의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다랴는 불행히도 요하난의 말을 믿지 않고 묵살함으로써 돌이킬 수 없는 운명을 맞게 됩니다(14절). 요하난은 그다레에게 이스마엘의 암살 음모를 밝히고 자신을 그를 처단하게 해 달라고 요청합니다(15절). 그러나 그다랴는 요하난에게 ‘이스마엘을 죽이지 마시오. 그대가 이스마엘에 관해 한 말은 사실이 아니오...’(16절,쉬운성경)이라고 말했습니다.
지혜자인 솔로몬은 훈계와 충고를 듣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잠언 여러 부분을 통해서 강조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한 충고와 훈계들을 경솔히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충고는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주시는 충고와 권면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 매사를 판단하는 것만이 멸망을 면하고 나아가 주께서 부여하신 사명을 완수하는 필요조건임을 명심하고 이를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연약한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것 또한 기억하여 사람을 의지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인생의 도움이시며 의지할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성령이 주시는 충고를 귀담아 들어 하나님의 분별의 영이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 나의 인생의 나아갈 바를 올바로 선택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말씀을 따라 살기로 선택하므로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하심을 경험하는 삶을 살아갈 뿐만 아니라 실패하지 않는 인생을 위하여 성령의 충고를 귀를 기울여 듣고 영적 분별력을 갖는 충성된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렘 40:1~16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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