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04
**** 현대 철학을 이해하기 위한 기본 지식
본질과 형상
*회원 공부방에 철학 이야기를 최대한 쉽게 풀어서 올리겠습니다.
철학 교실을 운영하는 조광제라는 분의 글을 많이 참고합니다.
모든 사물은 눈에 보이는 형상과 눈에 보이지 않는 본질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이동민이라는 사람은 ’겉보기로‘는 순해 보여도 ’사귀어보니‘ 엉큼하고, 욕심이 많더라.’ 라는 말을 여러 사람이 하였다. 이때 ‘겉보기로’ 보여지는 것은 형상이고,‘사귀어보니’ 나타나는 엉큼함은 본질에 해딩한다. 이럴 때 이동민(사물)은 본질과 형상으로 되어 있다.
목장에 가서 100마리의 소가 풀을 뜯는 것을 보았다. 뜯어보니 한 마리, 한 마리 모두 달랐다. 그러나 네 개의 다리, 느릿느릿한 움직임, 파리를 쫒으려는 듯 꼬리를 흔들고---, 공통점도 많았다.
공통점은 본질이고, 한 마리, 한 마리 다른 모습은 형상이다.
여기서 형상은 눈에 보이는데로(겉보기로) 이고, 본질은 머리를 굴려 찾아낸 것(생각한 것)이다.(- 뒤에 더 공부)
(*철학은 머리를 구불리서 찾아내는 답이다. 그러니 철학개념어는 추상어이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이것만 머리 속에 담아두세요.)
본질은 통일성이 특징이고, 형상은 다양성이 특징이다.
(통일성과 다양성)
본질은 무엇인가
앞에서 모든 사물은 본질과 형상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공부했다.
그렇다면 본질은 무엇인가?
그중에 자연의 본질이 무엇이냐고 하면, 우리는 ‘자연의 법칙’을 자연의 본질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인간사회에서도 같은 대답을 할 수 있다. ‘사회의 법칙’이 본질이 된다. 사회를 구성하는 경제에는 ‘경제의 법칙’이, 역사에는 ‘역사의 법칙’이 본질이 된다.
자연의 법칙은 필연적으로 그렇게 되더라는 내용이다. 따라서 본질에는 ‘필연성’이 들어간다. 필연성에 해당하는 것으로 ‘사람은 죽는다.’, ‘해는 동쪽에서 뜨서 서쪽에서 진다.’ 등등이다. 본질을 알고 나니, 미래에 대한 예측이 가능해진다. 삶이 더 풍요로워 질 수 있다. 우리가 인문학을 공부하는 이유이다.
본질이 필연성을 가졌다면 변하지 않는 ‘불변성’을 가졌다는 뜻도 된다. 불변성, 이것도 본질의 특성이 된다.
(필연성, 불변성이고, 만고불변의 진리라고 함으로 진리도 본질이다.)
존재와 존재론
(서양 현대철학을 공부하기 전에 존재에 대한 개념부터 알아야 할 것이다.)
서양철학은 ‘존재’를 어떻게 바라보느냐,를 따지는 학문이래도 과언이 아니다. 서구인들은 이 세상을 서로 반대되는 (서로 다른) 두 개의 세계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고의 뿌리를 가지고 있다. 그 생각은 지금도 바뀌지 않고 있다. 현대철학이라는 것도 옛날 사람이 바라본 존재를 새롭게 바라보기 라는 것으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문학이론도 서양철학의 존재 바라보기에 따라서 춤을 춘다. 문학을 공부하기 위해서는 서양철학이란 것을 껍데기만이라도 훓어 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존재’는 ‘있다’ 이다. 그렇다면 ‘있다’ 라는 말은 무엇인가? ‘있다’에 특별한 뜻이 있을 리 없습니다. 그냥 ‘있음’이다. 집에는 책상도 있고, 텔레비전도 있고, 밥솥도 있고, 별 별 것이 있다. 산도 있고, 나무도 있고, 물도 있고, 강도 있고, 소도 있고, 사람도 있다.
소리도 있고, 말도 있고, 공기도 있다. ‘있다’가 바로 존재입니다.
셋방살이 하는 사람이 월말에 월세를 낼 수 없어서 ‘요즘 형편이 어렵다’라는 말과, 사업을 하는 사람이 물품 대금을 지급하고, 월급을 지불해야 하는 월말에 ‘요즘 형편이 어렵다’라는 말의 형상은 같아도 의미는 다르다. 같은 모양의 존재도 하나의 의미가 아니고 다양한 의미를 가졌음을 알 수 있다.
‘붉은 장미가 피었다’라고 할 때 장미는 혼자서 존재(있다)할 수 있지만 ‘붉다’는 장미에 얹혀서(의존하여) 존재한다. 장미가 없으면 ‘붉다’라는 색상이 나타날 수 없다. 이것으로 존재하는 방식도 여러 가지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존재의 의미도 다를 뿐 아니라 존재하는 방식도 다르다.
‘존재론’이라고 할 때는 존재하는 방식을 말한다. 수많은 철학자들이 존재 방식을 두고 자기의 의견을 말하였다.
‘같은 강물에는 두 번 들어갈 수 없다’라는 유명한 말이 있다. 한강에서 같은 지점에서 두 번 뛰어들었다면 흐르는 물은 뛰어 들 때마다 다르다. 따라서 같은 한 강에 뛰어든 것은 같아도 같은 강물에 뛰어든 것은 아니다. 감나무에서 씨를 받아 심어서 얻은 감나무는 엄마 감나무와는 다른 감나무이면서도, 감나무라는 것은 같다. 감나무처럼 변하지 않으면서도 변함을 지닌 것이 이 세상에 많다.
. 하여간에 감나무를 보면 ‘ 변하면서도 변하지 않는다.’라고 할 수 있다. 변한다고 해야 할까 변하지 않는다고 해야 할까. 이제는 우리가 ‘존재’를 어떻게 말해야 할지 머리가 복잡해진다
플라톤은 변하지 않은 것이 더 좋은 것이라고 하였다. 이것을 ‘이데아 세계’ 또는 ‘진리’라고 하였다.(만고불변의 진리) 우리가 사는 세상은 잠시도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 시간에 따라서 변화를 거듭한다. 현실세계는 변하는 것이구나, 라고 알 수 있다.
서양철학은 변하지 않는 것이 좋다. 라는 명제에서 출발하였다. 만고불변의 진리라고 하면, 진리는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변하지 않는다, 라는 전제를 깔고 있다. 이데아 또는 진리는 시간과는 무관한 것이다. 플라톤이 동굴의 벽에 비친 그림자를 이야기하였다. 그림자가 생기려면 그림자를 만드는 것이 있다. 원형이다. 빛의 방향이나, 빛의 세기, 또는 그림자가 맺히는 곳에 따라 형태가 달라진다. 우리가 사는 현실 세상은 어떤 원형(이데아)의 그림자라고 하였다. 원형과는 조금은 닮았다는 뜻이다. 불교에서도 현실 세계를 실체도 없이 끝없이 변하므로 환(幻)이라고 하였다.
서양사람들의 생각을 보면 이 세상을 두 개의 세계가 있다. 변하지 않는 세계는 좋은 세계이고, 시간이 없고, 우리가 닮기를 바라는 세계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변하는 세계이고, 나쁜 세계이고, 시간이 들어있고, 우리가 벗어나기를 바라는 세계이다. 기독교가 이 생각에 꼭 들어 맞는다. 힘든 이 세상을 벗어나면 영원히 사는 천당이 있다고 하였다.
서구 문화는 진리를 추구하는 플라톤 철학과 이상향을 추구하는 기독교가 뿌리이다.
서양 철학자가 19세기 말이 되면 이와 같은 생각에 회의를 가진다. 현대철학은 변하지 않는 것이 더 좋다. 라는 생각에 회의를 가지면서 변하는 것에 더 가치를 두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이것을 현대 철학이라고 하였다.
첫댓글 넘 재미있습니다.
최근에 사귄 친구가 컬럼비아 대학에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로 석,박사학위를 받았다고 하네요.
하나하나(?) 알아 가고 있는 중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