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801
3월19일[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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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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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mNj6tYWrXn8
[서울대교구 조한건 프란치스코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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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말없이 행동하고, 말없이 사랑합시다!>
사순 특강을 갔다가 정말이지 몇십 년 만에 신학교 동창 신부님을 만났습니다. 특강 시간에는 성당에 안 보이더니, 사제관에서 따로 들었더군요. 저를 보고 하는 말, 어떻게 사람이 변해도 이렇게 변할 수 있냐고.
온종일 말 한마디 없던 사람이었는데, 아무리 말을 붙여도 뒤로 빼면서 실실 웃기만 하던 사람이었는데, 대체 그동안 무슨 일이 벌어진 거냐, 어떻게 이렇게 날나리가 되었냐며 놀라워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지난 세월을 돌아보니, 정말이지 그랬습니다. 제가 봐도 놀랄 정도입니다. 사실 저는 젊은 시절 요셉 성인 못지않게 과묵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저 듣기만 하고, 마음속으로 깊이 생각하고, 해야 할 일만 딱 하고…….
몇십 년 동안 엄청나게 많은 말을 하며 살았으니, 이제 다시 과묵했던 시절로 돌아가야 할 순간이로구나, 하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살다 보면 진국 같은 사람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말없이 사랑하는 사람.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사람. 조용히 도와주는 사람. 힘들 때 든든한 배경이 되어주는 사람. 침묵 속에 기도하는 사람. 생각만 해도 마음이 든든하고 힘이 나는 그런 사람입니다.
오늘 축일을 맞이하는 요셉 성인이 그런 분이셨습니다. 복음 사가들은 그에 대해 철저하게도 함구하고 있습니다. 사실 구세주의 양부이자, 마리아의 동반자로서, 오랜 세월 구세사의 주역들을 동반하셨던 그의 역할은 참으로 막중한 것이었습니다.
요셉 성인의 특별하고 굴곡진 삶을 글로 쓰자면, 아마도 소설 몇 권으로도 부족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굳게 입을 다물고 있었습니다. 그만큼 그는 과묵하고 진중한 사람, 침묵하고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사실 요셉 성인은 하느님으로부터 아주 특별한 사명을 부여받았으며, 그 사명을 충실히 수행하기 위해 일생을 봉헌했습니다. 그 사명은 예수님을 보호하고 양육하는 것이었습니다. 동시에 마리아의 순결을 보호하는 것이었습니다.
비오 11세 교황님께서는 요셉 성인의 사명이 세례자 요한의 사명이나 베드로 사도의 사명에 버금가는 막중한 것임을 강조하셨습니다.
“성 요셉의 사명은 조용히 생각하는 사명이요, 침묵하는 사명이었습니다. 특히 그는 구속 사업의 비밀이 세상 사람들에게 미리 노출되지 않도록 끝까지 침묵을 지켰습니다.”
바오로 6세 교황님께서는 성 요셉의 사명은 곧 오늘날 우리 교회의 사명임을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과 성모님과 함께 계실 때의 성 요셉의 사명은 보호와 방위의 사명, 수호와 원조의 사명이었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도 적으로부터 방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의 사명은 곧 우리의 사명입니다. 우리 역시 이 혼탁한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지키고, 그리스도를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 주위에 성장시킬 사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요셉 성인에 대한 신심이 각별하셨던 요한 23세 교황님께서는 그에 대한 사랑을 이렇게 표현하셨습니다.
“성 요셉! 저는 이 성인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저는 가장 먼저 그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서는 제 일과를 시작할 수도, 끝낼 수도 없을 정도로 그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성모님 전문가 쇼사르 박사는 요셉 성인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성 요셉은 우리와 조금도 다름없는 보통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언제나 두 발을 땅에 딛고 있었으며, 결코 지상 낙원의 꿈을 좇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나이를 먹지 않는 영원한 청년입니다. 그는 세상 모든 가장의 모범입니다. 그는 참으로 여성스러운 동정녀 마리아와 떳떳하고 올바르게 교제할 수 있었던, 참으로 이상적이고 멋진 남자였습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이 세상, 성 요셉처럼 침묵의 사명에 충실해야겠습니다. 성 요셉처럼 하느님의 시선으로 세상만사를 바라봐야겠습니다. 성 요셉처럼 말없이 행동하고, 말없이 사랑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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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xF_Dt0_q9-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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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해성사의 효과는 정확히 이렇게 드러난다>
제가 어렸을 때 뒤란에서 야한 여자 사진을 보다가 아는 형이 나타났을 때 그것을 둥그렇게 꾸겨서 담 밖으로 버린 적이 있습니다. 그 형은 그런데 굳이 그것을 찾으려 했습니다. 다행스럽게 논은 그것을 잘 감추어 주어 그것이 드러나지 않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형이 찾았는데도 일부러 모른 척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어쨌거나 그 일로 저는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일이 있고 난 뒤로 나는 타인의 잘못을 덮어주는 논을 본받았을까요, 아니면 그것을 찾아내려던 동네 형을 본받았을까요? 이상하게 나에게 상처 준 사람을 본받게 됩니다. 이것이 부모가 자녀의 잘못을 들추어 상처 주면 안 되는 이유입니다. 자녀는 그러면 자기 잘못보다는 자기가 잘못했을 때 그것을 덮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 지만을 배우게 됩니다.
이는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을 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께서 이미 용서하시기로 작정하셨음에도 그것을 믿지 못하고 상대의 탓을 하였습니다. 타인의 잘못을 들추어내는 것 자체가 용서를 믿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오늘 요셉 성인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라고 나와 있습니다.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는 말은 순결했다는 뜻입니다. 자꾸 타인의 잘못을 드러내려 한다면 자신이 얻는 게 있어서입니다. 반면 드러내고 싶은 게 없다면 이미 의로운 사람으로 심판받았기에 굳이 남을 아프게 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남을 아프게 하면 나도 아픕니다. 요셉 성인이 약혼 중에 임신하고 온 아내를 보면서도 굳이 그 사실을 드러내고 싶지 않으신 그러한 순결한 분이셨습니다. 우리가 닮아야 할 요셉 성인의 의로움이 이것입니다. 타인의 잘못을 들추는 사람은 그것으로 반드시 얻는 이득이 있기에 타인을 아프게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고집 센 사람 한 명과 똑똑한 사람 한 명이 있었습니다. 둘 사이에 다툼이 일어났는데, 다툼의 이유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고집 센 사람은 4×7=27이라 주장했고, 똑똑한 사람은 4×7=28이라 주장했던 것입니다.
답답한 나머지 똑똑한 사람이 재판관에게 가자고 말하였고, 그 둘은 재판관을 찾아가 옳고 그름을 가려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재판관은 한심스러운 표정으로 둘을 쳐다본 뒤, 고집 센 사람에게 말했습니다. “4×7=27이라 말하였느냐?” 그러자 고집 센 사람이 말합니다.
“네, 당연한 사실을 당연하게 말했는데, 글쎄 이놈이 28이라고 우기지 뭡니까?” 그러자 재판관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27이라 답한 놈은 풀어주고, 28이라 답한 놈은 매질하여라!”
결국 고집 센 사람은 똑똑한 사람을 놀리며 그 자리를 떠났고, 똑똑한 사람은 억울하게 매질을 당해야 했습니다. 도무지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똑똑한 사람은, 매질을 당하는 내내 재판관에게 억울하다고 하소연했지만, 재판관은 그런 그의 하소연을 한 마디로 잠재웁니다.
“4×7=27이라고 말하는 놈이랑 싸운 네놈이 더 어리석은 놈이다. 내 너를 매우 쳐서 지혜를 깨치게 하려 한다.”
왜 굳이 받아들이지도 않으려는 사람의 잘못을 드러내면서까지 나의 옳음을 증명하려 할까요? 나 스스로 그렇게 해야 하는 틀린 면이 있음을 스스로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타인을 굳이 심판하고 잘못을 드러내며 자기를 정당화하지 않아도 되는 때가 있습니다. 바로 ‘고해성사 직후’입니다. 이때는 모든 죄를 용서받았기에 그 사실을 믿는다면 타인의 잘못도 들추고 싶지 않은 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의로운 사람이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내 죄를 용서받았음을 의심하게 된다면 아담과 하와처럼 또 누군가의 잘못을 들추어 자기를 정당화하게 마련입니다. 고해성사를 본 즉시 우리는 요셉 성인처럼 ‘누구의 잘못도 들추고 싶지 않은 사람’이 됩시다.
‘굳이 남의 잘못을 들추어낼 때 내 맘만 괴롭게 되는 성 요셉과 같은 정결하고 의로운 상태’로 살아갑시다. 이것이 심판 앞에서 의로운 상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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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군대 가면 ‘군기’ 잡는다는 말을 듣습니다. 그것을 잘 통과하면 군 생활 적응을 잘하고, 군 생활이 편해집니다. 그것을 통과하지 못하면 ‘고문관’이란 소리를 듣습니다. 지금은 군 생활이 짧아지고 편해졌습니다. 제가 군대에 있을 때는 지금보다는 열악한 상황이었습니다. 내무반에는 모포와 옷을 넣어놓는 ‘관물대’가 있었습니다. 관물대에 사람이 들어가려면 들어갈 수 있지만 쉽지는 않았습니다. 신병이 오면 관물대에 들어가서 ‘어머니 은혜’를 부르라고 했습니다. 신병은 비좁은 관물대에 들어가서 어머니의 은혜를 부르면서 감정이 복받치는지 눈물을 흘리곤 했습니다. 이 행사가 우리 내무반의 ‘신고식’이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식기를 씻고, 내무반 청소를 하고, 군화에 광을 내면서 군 생활에 조금씩 봄이 오기 마련입니다. 전투체육의 꽃인 ‘족구’를 하고, 그리운 친구와 연인의 편지를 받고, 초소에서 근무를 서면서 계급도 이등병에서 일병 그리고 내무반에서 실세인 상병이 됩니다.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한다는 병장이 되면 국방부의 시계는 돌아가고 드디어 제대 특명을 받습니다. 3년의 군 생활은 군대에 다녀온 사람들에게는 잊지 못할 추억입니다.
새집으로 이사 가면 집도 집 주인의 군기를 잡는다고 합니다. 새집과 주인이 서로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사제관에 온 지 3일 만에 보일러를 교체했습니다. 후배 신부님이 가스 냄새가 난다고 하였고, 홈디퍼에서 가스 누출 검사기를 사서 측정하니 가스가 누출되고 있었습니다. 보일러 수리하는 형제님이 와서 수명이 다 되었다고 교체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보일러를 새것으로 교체하고 5일 만에 싱크대에서 물이 흘렀습니다. 형제님이 와서 보더니 음식물을 분쇄하는 기계가 고장 났다고 합니다. 음식물 분쇄하는 기계를 교체하면서 싱크대 누수 문제는 해결되었습니다. 생각하니 새집과 저는 적응 기간이 있었습니다. 와이파이 용량이 너무 느려서 인터넷 접속에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용량을 높이고 기계를 새로 바꾸니 해결되었습니다. 화장실의 세면대가 막혀서 물이 잘 내려가지 않았는데 월마트에서 플라스틱 막대기를 사서 뚫으니 잘 내려갔습니다. 열쇠로 열어야 하는 문을 번호키로 바꾸었습니다. 신제품인지 스마트폰으로 밖에서도 원격으로 문을 여닫을 수 있어서 편했습니다. 사제관으로 온 지 1달이 되었습니다. 이제 사제관도 저도 서로 적응시간이 끝난 것 같습니다.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입니다. 나자렛의 성가정도 적응 기간이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먼저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나타나서 아이를 가질 것이라고 예고하였습니다. 마리아는 ‘이 몸은 아직 남자를 모르는데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라고 응답했습니다. 천사는 이는 성령으로 인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마리아는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응답했습니다. 이번에 천사는 요셉에게 약혼녀 마리아는 아이를 가졌다고 말하였습니다. 요셉은 마리아가 곤경에 처할 수 있기에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천사는 다시 요셉에게 나타나서 그것은 성령으로 인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요셉은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그리고 나자렛의 성가정은 시작되었습니다. 마리아도, 요셉도 모두 자기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따랐습니다. 그렇게 나자렛의 성가정은 시작되었지만 적응 기간이 또 필요했습니다. 헤로데는 2살 이하의 어린이를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아기 예수님을 데리고 이집트로 피난 갔습니다. 바람결에 헤로데가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드디어 요셉과 마리아는 어린 예수님과 함께 고향 나자렛으로 돌아와서 성가정을 이루었습니다.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의 공동체와도 적응시간이 필요할 것입니다. 생각이 다르고, 의견이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영광과 하느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늘 그랬던 것처럼 하느님의 사랑이 길을 보여 주실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주님의 약속을 믿었고, 요셉은 꿈에서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라는 천사의 말을 듣고 그대로 하였습니다. 약속은 믿음에 따라 이루어지고 은총으로 주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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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16.18-21.24a: 요셉은 천사가 일러준 대로 하였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18절) 이 잉태는 거룩한 신비이다. 이 잉태로 비롯하여 우리는 요셉의 놀라운 모습을 본다. 요셉은 조금도 마리아의 마음을 괴롭게 하지 않으려고 하면서 그 일을 해결하려 한다. 약혼은 했지만, 마리아와 혼인을 하는 것은 율법을 어기는 것이고, 그 일을 드러내어 마리아를 재판에 넘긴다면 마리아가 죽을 수도 있어서 조용히 파혼하려 했다. 이때 천사가 꿈에 나타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20절) 하였다. 이것은 요셉이 마리아의 순결을 의심하지 않도록 그 신비를 알려준 것이다. 요셉은 의심이라는 악을 떨쳐버리고 신비라고 하는 선을 받아들여야 함을 깨달았다. 요셉은 이제 마리아가 아무 죄가 없다는 것과 동정잉태를 인정할 수 있었다. 요셉이라는 뜻은 흠잡을 데 없는 이라는 뜻이다.
천사는 또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21절) 하였다. 그 아기의 이름을 예수라 했는데 그 뜻은 하느님께서 구원하신다, 구원자라는 뜻이다. 이는 하느님께 어울리는 이름이다.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를 통해, “하느님이요 구원자는 나밖에 없다.”(참조: 이사 43,3; 호세 13,4)라고 하셨다. 즉 그 이름은 하느님이시며 구원자이신 분의 육에 붙여진 이름이다. 요셉은 천사에게서 계시를 받고 기쁘게 하느님의 뜻에 따른다. 그는 마리아를 맞아들이고 기쁘게 하느님의 뜻을 이루어 가게 되었다. 요셉 성인이 의롭다고 하는 것은 바로 하느님의 뜻을 채우려 노력했다고 하는 것이다.
요셉이 하느님의 뜻을 따름으로써,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고,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이루는데 협력하셨던 삶을 본받아, 우리의 삶의 순간순간에 주님의 뜻을 이루려고 노력하며 그분을 본받도록 하여야 한다. 요셉은 어떤 큰 공적이 있어서가 아니라, 온전한 믿음을 통해서 주님께 인정을 받았다. 우리의 믿음은 바로 하느님의 뜻에 대한 올바른 응답이 되어야 한다. 요셉이 자기 뜻을 버리고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였듯이, 마리아가 주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였듯이 주님의 뜻을 따르며 주님의 뜻을 따르려 노력하여야 한다.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고 살면서 주님을 따르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이렇게 할 때, 우리의 삶의 순간순간이, 조그마한 행위 하나하나가 하느님 구원사업에 협력하는 순간으로 될 것이다. 요셉 성인과 같이 언제나 하느님의 뜻을 충실히 이루는 우리 자신이 될 수 있도록 깨어있는 삶을 사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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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미리내 성모성심 수녀회)]
교회의 수호자이며 우리 모두의 아버지인 요셉 성인은 예기하지 못한 사건과 고통을 마주하는 인간이 지녀야 할 자세를 모범적으로 알려 줍니다.
먼저, 의로움입니다.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유다인들에게 ‘약혼’은, 함께 살지는 않더라도 이미 부부와 같은 신원을 가진 상태가 됨을 뜻하였습니다. 이 경우 여성이 배우자가 아닌 다른 사람의 아이를 가지면 율법에 따라 처벌(투석형)되었습니다(신명 22,21 참조). 요셉은 마리아를 배려해서 조용히 ‘파혼’하는 것으로 피의 복수를 면하게 하여 주려 합니다. 그러나 꿈에서 하느님의 뜻을 알게 되자, 곧바로 자신의 계획을 거두고 하느님의 뜻을 따릅니다. 요셉에게 ‘의로움’(정의)은 법의 준수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따름으로써 구현되는 덕목이었던 것입니다.
둘째로, 신앙입니다. 이러한 의로움은 언제나 ‘믿음’을 바탕으로 이루어집니다. 제2독서는 아브라함의 모범을 통하여 요셉과 아브라함의 공통점을 부각시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얻은 의로움”을 실천한 이들이었고, 하느님께서는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십니다. 의로움(정의)의 구현은 믿음(신앙)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실천입니다.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합니다. 한마디 저항이나 이의 제기 없이 하느님의 뜻을 그대로, 묵묵히 실천합니다.
요셉의 생애는 결코 힘없는 공허도 의미 없는 희생도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을 흠숭하고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을 성실히 행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빛날 수 있음을 보여 준 진정한 존엄의 삶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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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요셉>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탄생하셨다.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요셉이 그렇게 하기로 생각을 굳혔을 때,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아내를 맞아들였다."(마태 1,18-21.24)
이 이야기를 겉으로만 보면, 요셉을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사람으로, 또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라는 말 때문에,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 혼자서만 빠져나가려고 했던 사람으로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좀 더 깊이 생각해보면, 요셉은 적극적으로 마리아와 아기를 보호하려고 했고, 능동적으로 자신이 해야 할 일과 할 수 있는 일을 찾았고, 그러면서도 신중하게 그 일을 진행하려고 애쓴 사람이었습니다.
천사가 마리아를 찾아가서 예수님의 탄생을 예고했을 때의 이야기를 보면(루카 1,26-38), 천사는 마리아의 약혼자 요셉이 할 일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약혼자 요셉에게 성령 잉태를 알리는 일과 요셉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하는 일은 온전히 마리아가 스스로 알아서 해야 할 일이 되었습니다.
마리아는 곧바로 요셉에게 가서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알렸을 것이고, 아마도 두 사람의 관계는, 즉 약혼 관계는 변함이 없고, 결혼도 예정대로 해야 한다고 말했을 것입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요셉이 마리아를 믿었고, 마리아의 말을 믿었다는 점입니다. <안 믿었다면 율법대로 처리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라는 말은, 요셉이 마리아를 적극적으로 보호하려고 했음을 나타냅니다. 또 그는, 자신은 마리아의 말을 믿지만, 세상 사람들을 믿게 만드는 것은 어렵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남모르게’라는 말은, 마리아가 잉태한 아기는 자신의 아기라고 주장하려고 했다는 뜻이 됩니다. 요셉이 그렇게 주장하면 마리아는 안전해집니다. 그러면 파혼은 왜 하려고 했을까? 아기의 진짜 아버지는 하느님이시니까(루카 1,35) 자기는 뒤로 물러나려고 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남모르게’ 함으로써 마리아와 아기를 보호하는 일은 하려고 했습니다. <파혼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은 요셉과 마리아를 변함없는 부부로 생각할 것이고, 같이 살기 전에 아기를 잉태한 일에 대해서도, 조금 이르게 이루어진 일이긴 하지만 부부 사이의 자연스러운 일로만 생각할 텐데, 그러면 모두가 다 안전하고 평화롭게 됩니다. 그 모든 계획은 철저하게 마리아와 아기를 위해서 희생하고 헌신하겠다는 요셉 자신의 각오에서 비롯된 계획입니다.>
그렇다면 요셉은 왜 작정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았을까? 약혼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남모르게 파혼하려면, 여러 가지로 고려해야 할 일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천사가 나타난 시점은, 요셉이 어떻게 할까 고민하면서 망설이고 있을 때가 아니라, 자기 생각을 실행하려고 할 때입니다. <실행하기 직전에 천사가 나타났다고 말하는 것이 맞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요셉이 주님의 천사를 천사로 알아보았고, 천사의 말을 그대로 믿었다는 점입니다. <이야기 속에서는 당연한 것처럼 표현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보통 사람들이 천사를 천사로 바로 알아보는 것과 천사의 말을 그대로 믿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꿈에’ 천사가 나타났다고 표현되어 있는데, 그 ‘꿈’은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꿈’이 아니라, 특별한 환시 체험일 것입니다. 아마도 요셉은 기도 중에 응답을 들었을 것입니다. 천사가 한 말에 ‘두려워하지 말고’라는 말이 들어 있어서, 요셉이 두려워하고 있었거나 고민하고 있었거나 무척 힘들어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상상하기가 쉬운데, 이 말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전하려고 할 때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말입니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예수님의 탄생 예고를 할 때도 “두려워하지 마라.”라는 말부터 했습니다.(루카 1,30) 천사가 요셉에게 한 말은, 마리아가 요셉에게 한 말을 다시 확인해 준 것과 같습니다.
요셉은 천사의 말을 통해서 자기가 마리아와 마리아의 말을 믿은 것이 옳은 일이었음을 확신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을 종합해서 생각하면, ‘의로운 사람’이라는 말은, 단순히 착하고 온유하고 자비로운 사람이라는 뜻만은 아니고, 늘 하느님과 함께 살면서 ‘하느님의 뜻’을 적극적으로 실행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을 뜻하는 말입니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한 말을 보면, ‘메시아의 왕권’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루카 1,32-33), 요셉에게 한 말을 보면, ‘메시아의 구원사업’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뜻으로는 큰 차이가 없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그 두 가지를 합해서, “예수님은 온 세상의 주님이신 분으로서 사람들을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시는 분”이라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요셉은 태어나실 아기가 그런 분이라는 것을 믿었고, 그래서 기꺼이 마리아와 아기의 보호자가 되라는 부르심에 응답했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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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노성호 요한보스코 주교님]
<사랑으로 하나 된 요셉과 마리아>
세례식을 앞둔 시점이 되면 세례명 짓기에 여념이 없다. 성인사전을 찾아보고, 인터넷 사이트에서 검색하고, 심지어 사제관이 무슨 작명소도 아니고 어찌나 세례명을 정해 달라는 전화가 많이 오는지 ‘그냥 확 작명소를 차려 ?’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 형제님한테는 ‘요셉으로 하세요.’ 자매님한테는 ‘마리아가 좋잖아요.’ 하면서 정해 줄라치면 너무 흔하다는 둥 좀 성의 있는 답변을 부탁한다면서 이건 어때요, 저건 어때요, 이런다.
마태오복음 1장, 예수님의 족보에는 참으로 많은 이름이 등장한다. 발음하기도 어려운 이름의 조합 속에 최종적으로 요셉이 들어 있고, 예수님께서는 그를 통해 이 세상에 오실 수 있었다. 예수님께서 오시기까지 어려운 이름들만큼 많은 고난이 따랐을 테고, 이름의 수만큼 많은 일꾼들의 협력이 필요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아브라함의 믿음에서부터 시작된 불씨는 세상 모진 풍파에도 꺼지지 않고, 결국 요셉의 의로움으로 완결되어 우리 안에서 환하게 타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안에는 믿음이나 의로움보다 더 커다란 보화가 숨어 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이다.
만일 아브라함이 믿음만 간직한 사람이었다면 어땠을까 ? 그리고 요셉이 의롭기만 했더라면 어땠을까 ? 과연 이사악과 야곱으로 이어지는 이스라엘의 역사가 이뤄질 수 있었을까 ?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통해 이 세상에 오실 수 있었을까?
아브라함은 하느님을 믿기에 앞서 그분을 사랑했고, 요셉은 의로움을 실천하기에 앞서 하느님과 마리아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이사악을 바칠 수 있었고, 요셉은 처녀의 몸으로 잉태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일 수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믿음과 의로움은 덤으로 받게 될 것이다. 사랑하면 우리도 믿게 되고 의로운 자가 되어 하느님을 맞아들일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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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김찬진 베드로 신부님]
<가식 없는 믿음>
요셉의 고통과 생각, 겪었어야 하는 혼란을 생각합니다. 그는 남 보기에는 아내에게 배반당한 남자였습니다. 착하고 그윽하고 겸손하던 그의 좋은 평판과 사람들의 존경이 아내로 인하여 동시에 무너져내리는 것을 보고 있었고, 손가락질의 대상이 된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잉태한 아이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천사의 말 이외에 요셉을 이해시킬 말은 없었지요. 그러나 요셉에게는 허식 없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하느님은 결코 배반하고 속이고 우롱하지 못할 것이라는 믿음만이 그의 영혼을 편안하게 해주었고 힘이 될 수 있었습니다.
알아들으려고 애쓰지 마십시오. 눈으로 보겠다고, 확인하겠다고 고집하지 마십시오. 그분은 순수한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그래서 겸손한 이들만이 그분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습니다. 아시는지요. 하느님은 자기 아들 옆에 있도록 부른 이들에게 쉬운 길을 허락하는 법이 없습니다.
요셉의 가식 없고 우직한 믿음을 기억하세요. 어둔 밤에도 온갖 모순 안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구원의 길을 걸어갈 수가 있습니다. 순수하고 투명하지 않으면 결코 복음을 알아들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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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구 김종기 세례자 요한 신부님]
<요셉의 꿈>
마리아의 남편 요셉의 꿈에 관해 생각할 때면 동시에 구약 성경의 야곱의 아들 요셉의 꿈이 생각납니다. 구약 성경의 요셉은 이집트에서 파라오 왕의 꿈을 해몽함으로써 왕의 신뢰를 얻어 최고 통치자로서 영예를 누렸습니다. 또한 야곱 가족은 요셉 덕분에 흉년에도 잘 지낼 수 있었고 마침내 이집트에서 평안히 부를 누리며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신약 성경의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약혼한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한 사실을 알고 의심과 갈등으로 괴로워하며 고민하고 있을 때 꿈에 천사의 말을 듣고 마리아를 아내로 받아들입니다.
구약 성경의 요셉이 형들로 인해 미움과 시련을 겪고 그 후 하느님께서 꿈을 통해 이끌어주셨다면,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신앙의 시험을 거친 후 구세주이신 예수님의 아버지가 되셨습니다. 우리도 언제든지 다양한 아픔과 갈등으로 인해 신앙의 위기를 겪을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또한 신앙의 위기를 맞을 때 쉽게 포기하지 말고 인내하면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닫도록 기도할 수 있는 은총을 청해야 함을 보여줍니다.
많은 일 때문에 염려하고 힘겨워하며 생활하고 있는 우리는 이제 인류 구원을 위해 성모님과 함께 충실히 살았던 요셉 성인의 믿음과 신앙을 본받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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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안도현의 《연어》 중에, 은빛 연어가 초록강에게, “아저씨, 이유 없는 삶이 있을까요?”, “네 말대로 이유 없는 삶이란 없지. 이 세상 어디에도” “그럼 아저씨, 존재하는 이유는 뭔가요?” “그건 내가 지금, 여기 존재한다는 그 자체야.” “존재한다는 게 삶의 이유라고요?”, “그래! 존재한다는 것, 그것은 나 아닌 다른 존재들의 배경이 된다는 뜻이지”, “배경이란 뭐죠?”, “내가 지금 여기서 너를 감싸고 있는 것, 나는 지금 여기 있음으로 너의 배경이 되는 거야.”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의 배경으로 살아간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를 의식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할 뿐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고 기념하는 성 요셉은 자신의 존재 자체로 아내인 마리아와 아들 예수의 배경으로 사시다가 돌아가신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감사송에는 “아버지께서는 의로운 요셉을, 하느님의 어머니 동정 마리아의 배필로 삼으시고, 충실한 지혜로운 종 요셉을 성가정의 가장으로 세우시어, 성령으로 잉태되신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살피게 하셨나이다.”라고 요셉의 존재 이유를 찬양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신 것처럼”(로4,22) 요셉이 의로운 사람이었다는 점은 “마리아의 일(=잉태한 사실)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작정했다.”(1,19)는 사실로도 입증됩니다. 더욱 꿈에 천사의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1,20)라는 말을 듣고 이를 신앙으로 받아들여 순명한 사실로도 드러납니다. “아브라함이 모든 믿는 이들의 조상이었듯이”(4,16) 요셉 성인도 모든 믿는 이들의 참된 믿음과 순명의 본보기입니다. 믿음은 들음으로부터 시작하여 순명으로 완성되는데, 바로 성 요셉은 들을 귀를 가진 분이셨습니다. 요셉 성인은 단지 듣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들음을 순명의 삶으로서 응답하신 분이셨습니다. 요셉 성인은 자기의 뜻보다 하느님의 뜻을, 자신의 안위보다 자신의 보호와 배려에 맡겨진 마리아와 예수님의 안위와 행복을 먼저 고려해서 희생하고 헌신하며 자신에게 맡겨진 역할에 최선을 다해 생을 마치신 성가정의 배경과도 같은 존재이셨습니다. 자신을 드러내기보다 마리아와 예수님의 그림자로 은둔의 존재와 겸손한 삶을 사시면서 기꺼이 한 생을 하느님께 봉헌하신 요셉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언어로서가 아니라 자신의 존재와 삶을 통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오늘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을 맞아 침묵하며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아버지에게 위로와 희망을 전해 주고 싶은 마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셉의 의로움과 그의 소리 없는 침묵을 생각해 봅니다. 요셉의 의로움에서 나온 긍정적인 소리 없는 침묵은 그의 전 생애의 음율(音律)이었다고 느껴집니다. 사랑하는 여인과의 혼인을 앞둔 꿈 많은 청년에게 닥친 약혼자의 임신 소식 앞에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책은 오직 약혼자에 대한 배려와 호의에서 모든 일은 가슴에 묻고 침묵하는 길밖에 없었을지 모릅니다. 18세기 프랑스 사제였던 ‘죠세프 디누아르’는 《침묵의 기술》에서 "지켜야 할 비밀이 있을 때에는 아무리 입을 닫고 있어도 지나치지 않다. 아는 것을 말하기보다는 모르는 것에 대해 입을 닫을 줄 아는 것이 더 큰 장점이며 미덕이다."라는 표현에서도 드러나듯이 요셉은 침묵의 성인이었습니다.
물론 요셉과 마리아의 침묵의 무게는 분명 인간적이고 신앙적이라는 점에 있어서 차이가 있었습니다. 즉 마리아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했기에 약혼자인 요셉을 이해시킬 수 없었기에 신앙으로 침묵했다면, 요셉은 이런 사실을 알 수도 없었기에 약혼자인 마리아를 배려하는 마음에서 인간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의로움에서 침묵했습니다. 어쩜 그러기에 천사가 요셉에게 “두려워하지 말라.”(1,20)는 위로에서 요셉의 마음 상태가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요셉의 이런 심정은 하느님과 배우자에 대한 사랑의 어리석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요셉 성인은 생애 동안 소리 없는 침묵 가운데서 자신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면서 성가족의 배경이 되고 바람막이가 되었으며 그림자 역할로 만족하며 하느님을 섬기며 살았습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요셉은 성가정의 든든한 나무처럼 살았는데, 본디 ‘나무란 내〔我〕가 없다〔無〕’는 뜻이라고 합니다. 요셉이 있었기에 성가정을 이룰 수 있었으며 그는 침묵의 성인이자 겸손과 배려의 성인이십니다. 우리 모두 착하고 성실한 하느님의 종 요셉을 본받도록 노력합시다. “성 요셉,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오늘 요셉 축일을 맞는 모든 형제와 자매들에게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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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바오로 사도께서는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필리 4,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어떻게 하면 늘 기뻐할 수 있을까를 묵상하게 됩니다. 돈 많이 벌고, 승진 척척 되고, 아프지 않고, 시험에 늘 좋은 성적을 맞고, 자기 원하는 대로만 된다면 늘 기뻐할 수 있을까요? 어린이가 썼다는 다음과 같은 일기의 내용을 봤습니다.
“수건은 집안의 더러운 것들을 깨끗하게 만들고 걸레가 된다. 걸레가 더러워진 만큼 우리 집은 깨끗하게 된다. 나는 걸레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어떠십니까? 걸레 같은 삶도 멋질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러나 부모는 자기 자녀가 걸레 같은 삶을 살겠다고 하면 아마 도시락 싸 들고 다니면서 말릴 것입니다. 그 삶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삶 안에서 더 큰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자기를 희생해서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고 행복하게 하는 것, 자기를 희생해서 다른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삶이었습니다. 따라서 우리 역시 이 길을 쫓아갈 때, 예수님과 함께하게 되고 진짜 기쁨을 갖게 될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과 우리가 함께할 수 있었던 것은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이신 성 요셉 덕분입니다. 요셉 성인은 단 한 번도 주인공이 되지 않았습니다.
약혼자 마리아가 아기를 잉태하자 그저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마음먹습니다. 단호하게 마리아를 법정에 세우지도 율법 학자들에게 고발하여 돌로 치게 하지도 않습니다. 이런 요셉에게 꿈에 천사가 나타나 주님의 계획을 전합니다. 말없이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합니다. 이렇게 그는 조용하게 주님의 뜻이 세상에 펼쳐질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의 구원을 가능한 일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이 세상 안에서 반드시 주인공이 될 필요는 없습니다. 초등학생이 말했던 걸레면 또 어떻습니까? 의미가 충만하다면, 분명히 기쁘고 행복한 삶이 될 수 있습니다. 요셉 성인께서 바로 그런 행복을 가지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따라서 깨끗이 닦여진 귀한 명품만 되려고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사실 명품은 피곤합니다. 어떤 분이 제게 명품 만년필을 선물해 주셨습니다. 한 번 쓸 때마다 부담됩니다. 즐겨 쓰는 만년필은 아무렇게나 쓸 수 있는 보급형 만년필입니다. 만년필 쓰는 기쁨 역시 명품 만년필이 아닌, 막 쓰는 보급형 만년필에서 생겼습니다.
많이 사용되는 ‘나’, 비록 걸레처럼 지저분하지만, 다른 이들에게 도움을 주고 사랑을 베풀며 기쁘게 사는 ‘나’가 되어야 합니다. 요셉 성인의 모범을 기억하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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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남모르게>
마태오 1,16.18-21.24ㄱ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탄생하셨다.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요셉이 그렇게 하기로 생각을 굳혔을 때,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
<남모르게>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마태 1,19)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마태 1,20)
홀로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도 아프지만
그대를 살리려
남모르게
한걸음 물러섭니다
홀로
보듬기에는
너무나도 두렵지만
주님의 뜻 이루려
남모르게
한걸음 물러섭니다
홀로
남모르게
한걸음 또 한걸음
물러서고 물러선 듯한
더 물러설 수 없는
나 없는 자리가
홀로
남모르게
한걸음 또 한걸음
내디디고 또 내디뎌
마침내 주님과 하나 되는
나 있을 자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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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믿음의 사람은 흔들리지 않는다>
산부인과 의사가 제일 싫어하는 사람은 ‘무자식이 상팔자’라는 사람이랍니다. 그렇다면 변호사가 제일 싫어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법 없이도 살 사람’이랍니다.
오늘 기억하는 요셉은 “법대로 사는 사람”,“의로운 사람”입니다. 성경에서 의로움이란 하느님의 속성으로 사랑과 용서로 인간을 구하시는 하느님의 의(로마 3,5 2코린 5,21), 인간의 죄를 위해 무죄한 피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마 5,17),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서의 의(로마 9,30. 필리 3,9)를 일컫고 있습니다.
의로운 사람이란,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며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하느님의 의로움이 인간의 징벌이 아니라 구원을 위한 것이었듯이 요셉의 의로움은 바로 한 여인을 살리는 사람에 대한 애정과 생명의 존중으로 나타났습니다.
우리는 가끔 화가 났다. 또는‘화병이 났다’는 말을 합니다. 정말 화는 불입니다. 아주 뜨거운 불입니다.
그러나 그 불로는 방을 따뜻하게 덥힐 수도 없고 밥을 지을 수도 없습니다. 더군다나 나무를 태울 수도, 쇠를 달굴 수도 없습니다. 오로지 자신의 속만 태울 뿐입니다. 그러니 병이 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화를 다스리는 법을 터득하면 좋겠습니다. 화가 나도 무조건 참는다는 것은 용수철을 눌러놓는 것과 같습니다. 무조건 누르지 말고 하늘을 보면서 잘 풀어야 합니다.
오늘 기억하는 요셉은 정말 화를 다스릴 줄 아는 분이셨습니다. 요셉과 약혼한 마리아는 결혼하기 전에 임신한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바라보는 요셉의 모습은 놀라울 정도입니다.
신명기 22장을 보면 간음에 관한 규정을 말하고 있는데 “젊은 여자의 처녀성이 증명되지 않으면, 그 여자를 제 아버지의 집 대문으로 끌어내어, 그 성읍의 남자들이 그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여야 한다.”(신명 22,20-21)고 되어 있습니다.
법대로 사는 요셉이 이러한 규정을 알진대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마태 1,19)고 합니다.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결혼을 준비하며 꿈에 부풀었을 텐데 너무도 황당한 사실에 접하게 된 것이니 실망과 좌절감 속에서 마리아에게 망신을 주고 서운함을 되갚아 주어도 시원찮을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에 드러낼 생각을 갖지 않았다니 그러한 마음이 어디서 왔겠습니까?
돌에 맞아 죽을 허물까지도 덮어줄 수 있었던 것은 사랑 때문이라고밖에 달리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마리아를 사랑했기에 사랑하는 이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 배려입니다. 사실 사랑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힘이요, 능력입니다.
그리고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더 많은 일을 행할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합니다. 화를 다스리는 방법은 결국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니 지금까지 내가 하느님과 이웃으로부터 사랑받았다는 것을 일깨우는 것입니다.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꿈에 나타나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마태1,20).했을 때 곧바로 자기의 생각을 접고 천사가 일러준 대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군말이 필요 없었습니다. 그저 하느님의 뜻을 따른 겁니다. 깊은 신앙은 어려울 때 드러난다고 했는데 바로 이 순간이 그의 믿음을 확인해 주었습니다. 화를 다스리는 또 하나의 방법은 철저한 믿음을 간직하는 것입니다. 믿음 위에 서 있는 사람은 결코, 흔들리지 않습니다.
요셉 성인은 아주 사소한 일에도 마음 상하고 서운함을 오래도록 기억하는 우리들의 모범이십니다. 의로운 사람이란 하느님께 마음을 두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생활하며 기쁘고 진실한 마음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요셉이 그런 분입니다. 그리고 요셉은 자신이 겪고 있는 일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결코 그것에 대해 알려고 하거나 해명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그저 받아들이고 살았을 뿐입니다. 어떠한 처지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의로움을 간직한 성인의 마음을 닮고 싶습니다. “믿는 이에게는 질문이 없고, 믿지 않는 이에게는 대답이 없다”고 합니다. 오늘은 사랑으로 그리고 믿음으로 화를 다스리시길 바랍니다.
“성 요셉의 침묵과 겸손, 절대적인 신앙이 있었기에 하느님께서는 요셉을 통해 당신의 뜻을 온전히 행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우리도 하느님께 완전히 내맡겨 드린다면 그분은 우리 안에서 당신의 일을 충분히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가경자 알베리오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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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 좋은 배경의 성 요셉>
-성가정 교회 공동체-
“하느님의 사랑을 영원토록 노래하리라, 내 입으로 그 진실하심을 대대로 전하리라.”(시편 89,2)
사순시기 및 3월 성 요셉 성월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오늘 3월19일은 우리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의 주보성인인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이신 성 요셉” 대축일입니다. 또 오늘은 우리 요셉 수도원이 1987년 3월19일 설립됐으니 설립 37주년이 되는 날이자, 2014년 3월19일 원장좌 자치 수도원으로 승격됐으니 승격 10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참 영예스럽고 자랑스런 성 요셉입니다. 저절로 3월 성 요셉 성월에 자주 부르는 “성 요셉 찬양하세” 성가 280장이 생각납니다. 3절까지 가사가 다 좋지만 1절만 인용합니다.
“성 요셉 찬양하세 주님의 양부를,
정결하신 성 요셉 마리아의 정배.
의로우신 성 요셉, 우리 양자로 삼아,
언제나 우리 마음을 정결케 하시며.
의롭게 생활하도록 우리를 이끌어 주소서.
가톨릭교회가 위기를 겪을 때마다 교회 수호자가 된 요셉 성인을 생각하면 저는 늘 하는 “만세육창”에다 오늘은 “성 요셉 만세!” 하나를 더 추가하고 싶습니다. 교회 위기 때마다 큰 빛을 발한 성 요셉의 역사를 간략히 소개합니다. 교회가 혼란과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큰 도움이 됐던 성가정 교회 공동체의 영원한 배경 성 요셉입니다.
1870년 교황 복자 9세는 성 요셉을 보편 교회의 수호자로 선포했고, 1889년 교황 레오 13세는 성 요셉을 성가정의 보호자이자 가장의 모범으로 공포했고, 1920년 교황 베네딕도 15세는 성 요셉을 노동자와 임종자의 수호자로 선포했고, 1937년 교황 비오 11세는 성 요셉을 사회정의의 수호자로 선포했고, 1955년 교황 가경자 비오 12세는 5월1일 노동절을 ‘노동자 성 요셉 기념일’로 정했고, 1961년 교황 성 요한 23세는 성 요셉 축일에 회칙을 발표하고 성인에게 공의회를 보호해 달라고 청했고, 1989년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성 요셉이 ‘구세주의 보호자’라는 사실을 거듭 강조했고, 2020년 교회가 코로나 19 펜데믹으로 혼란을 겪을시, 교황 프란치스코는 ‘보편교회의 수호자 성 요셉 선포 150주년’을 맞이하여 그해 12월8일 교서 ’아버지의 마음으로’를 발표하고 이듬해 2021년 12월8일까지 1년을 ‘성 요셉의 해’로 선포했습니다.
참으로 교회가 위기를 겪을 때마다 든든한 배경이 되어 주셨던 성 요셉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 가득 지니게 됩니다. 성가정 공동체하면 참 좋은 배경의 성 요셉이 생각나듯,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하면 참 좋은 배경의 불암산이 생각납니다. 제가 자주 인용하는 자작 애송시 두편의 불암산이 상징하는바 성가정 공동체의 배경인 성 요셉입니다.
“언제나 거기 그 자리에 머물러
가슴 활짝 열고 모두를 반가이 맞이하는
아버지 산 앞에 서면
저절로 경건 겸허해져 모자를 벗는다
있음 자체만으로 넉넉하고 편안한
산의 품으로 살 수는 없을까?
바라보고 지켜보는
사랑만으로,
큰바위 얼굴(the Great Stone Face)로
늘 행복할 수는 없을까?
산처럼!”-2000.11.17.
또 하나 침묵에 잠긴 저녁 불암산을 보며 쓴 짧은 자작시입니다.
“아! 크다, 깊다, 고요하다
저녁 불암산!”-
바로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의 참 좋은 배경인 불암산 같은 성 요셉입니다. 세 측면에 걸쳐 성인의 위대한 덕을 나누고 싶습니다.
첫째, 요셉 성인은 참 큰 분이십니다.
참으로 자비하시고 지혜로우신 분, 한마디로 의로우신 분이십니다.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을 때, 성인의 자비롭고 지혜로운 신속한 처신이 참으로 놀랍고 고맙고 감동적입니다. 자비와 분별의 지혜는 함께 갑니다. 다음 구절에서 성인의 고결한 인품이 잘 드러납니다.
‘마리아의 남편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마리아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봉착했을 때, 성 요셉의 우선적 관심사는 자기가 아니라 마리아의 안위요 마리아를 살리는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자비하고 지혜로운 하느님 아버지를 닮은 성 요셉입니다.
둘째, 요셉 성인은 참 깊은 분이십니다.
참으로 잘 들으시는 경청의 겸손한 성인이십니다. 귀기울여 주님 천사의 말을 겸손히 경청하는 성 요셉입니다. 깊은 산이 좋은 산이듯, 겸손의 깊은 사람이 참 좋은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전폭적 신뢰를 받고 있는 경청과 겸손의 사람, 성 요셉입니다. 하느님은 자신의 속내를 당신 천사를 통해 소상히 성 요셉에게 드러냅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구원하실 것이다.”
성 요셉의 책임감이 얼마나 막중한지 깨닫습니다. ‘주님께서 구원하신다’를 뜻하는 예수란 이름은 얼마나 은혜로운지요! 늘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제2독서 사무엘 하권의 예언자 나탄의 다윗을 향한 예언이 흡사 요셉을 향한 말씀처럼 들립니다. 다윗에 버금가는 존재가 오늘 복음의 다윗입니다. 그대로 우리 구원자 예수님의 출현에 대한 예언처럼 들립니다.
“네 몸에서 나와 네 뒤를 이을 후손을 내가 일으켜 세우고, 그의 나라를 튼튼하게 하겠다. 그는 나의 이름을 위하여 집을 짓고, 나는 그 나라의 왕좌를 튼튼하게 할 것이다.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될 것이다. 너의 집안과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굳건해지고, 네 왕좌가 영원히 튼튼하게 될 것이다.”
사실 나탄의 이 예언은 예수님을 통해, 2000년 유구한 역사를 지닌 가톨릭교회를 통해 영원한 현재 진행형으로 실현되고 있음을 봅니다.
셋째, 요셉 성인은 참 고요한 분이십니다.
고요한 물은 깊이 흐르고, 깊은 물은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정수유심靜水流深, 심수무성深水無聲) 바로 요셉의 고요한 믿음이 그러합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에 버금가는 요셉의 믿음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아브라함에 대한 고백은 요셉을 넣어도 그대로 통합니다.
‘그는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너의 후손들이 저렇게 많아질 것이다.” 하신 말씀에 따라 “많은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을 믿었습니다. 바로 그 때문에 “하느님께서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에, 아브라함의 의로움에 비해 전혀 손색이 없는 요셉의 믿음, 요셉의 의로움입니다. 희망이 없어도 희망한 아브라함의 믿음, 요셉의 믿음을 본받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 대목,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에서 요셉의 순종과 믿음이 통쾌하게 드러납니다.
주님은 일방적으로 일하시지 못합니다. 인간의 자발적 믿음의 순종의 협조를 통해 일하시는 주님이요 요셉의 믿음과 순종이 너무나 기쁘고 고마웠을 것입니다. 성가정 교회 공동체의 영원한 배경이신 성 요셉이야말로 우리가 평생 보고 배워야 할 참 사람의 모델입니다. 참으로 하느님 아버지를 닮은 크고, 깊고, 고요한 성 요셉이요, 자비와 지혜, 경청과 겸손, 순종과 믿음의 성 요셉입니다. 그대로 이런 양부 성 요셉을 보고 배웠을 예수님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렇게 날로 주님을 닮은,
“크고 깊고 고요한 삶을,
1.자비와 지혜의 삶,
2.경청과 겸손의 삶,
3.순종과 믿음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마태 25,2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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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다."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는 약속은 율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얻은 의로움을 통해서 주어졌습니다."
오늘은 성 요셉 대축일입니다. 이 축일에 복음은 요셉에 대해 의로운 사람이라고 얘기하고, 제2독서는 아브라함의 의로움을 얘기하면서 성 요셉이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의로운 사람이 되었음을 얘기합니다.
그런데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믿음으로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을 율법으로 의로운 사람과 비교하며 설명을 합니다. 한자어로는 이신득의(以信得義)와 이행득의(以行得義)의 차이입니다.
이행득의란 인간의 행위 또는 공로로 의로움을 얻는 것이고, 이신득의는 믿음으로 의로움을 얻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어떡해서 의롭게 되었느냐 그 얘기를 하는 거지요.
그렇다면 오늘 축일을 지내는 요셉은 어떻게 의롭게 되었을까요? 그의 의로움은 어떤 것일까요?
요셉이 의롭다고 할 때 그때의 의로움은 율법의 의로움이었습니다. 다윗 가문의 후손으로서 어렸을 때부터 율법을 배우고 익혀 의로운 사람이 되었으며 그렇지만 점잖고 따듯함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율법의 가르침에 따라 파혼을 하지만 소문을 냄으로써 마리아를 궁지에 몰 생각은 없었습니다. 이렇게 율법으로 의로움의 바탕이 되어 있는 그가 이제는 그리스도로 인해 은총으로 의로운 사람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은총의 짝이 바로 믿음이라는 점입니다. 은총으로 의로워진 것은 그가 은총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인간의 믿음이 합쳐져 의로워지는 겁니다.
도둑이나 강도에게는 문을 닫고 믿으면 문을 열 듯 믿을 때 하느님의 은총이 우리의 열린 문을 밀고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기적도 마찬가지잖아요? 주님께서 기적을 행하시곤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라고 늘 말씀하시잖습니까?
의사를 믿지 못하면 의사가 아예 치유할 수 없듯이, 독초라고 의심하면 거부하고 약초라고 믿을 때만 허용하듯이 주님 치유의 힘도 믿지 않는 이에게는 아예 거부되고 믿는 이에게만 들어옵니다.
요셉도 하느님의 말씀을 믿음으로써 은총의 시기가 열리고, 그래서 율법의 의로움이 은총의 의로움으로 승화되고, 자기의 의로움이 그리스도의 의로움으로 승화되었습니다.
자기의 의로움이 자기 힘으로 의로워진 것이라면, 그리스도의 의로움이란 그리스도로 비롯된 의로움이요 그리스도를 위한 의로움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말씀을 믿음으로 이제 자기 자식은 낳을 수 없게 되었지만,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되어 그리스도를 키우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요셉의 위대한 가난이고 요셉의 위대한 정결입니다. 물건을 소유하지 않는 가난보다 자식을 소유하지 않는 가난이 더 큰 가난이고, 그저 여자를 소유하지 않는 것보다 그리스도를 소유하는 것이 더 위대한 정결인데 요셉이 바로 이 위대한 가난과 정결의 삶을 산 것입니다.
마리아를 자기 여자로 소유하지 않고 성령의 정배로 내줌으로써 요셉은 그리스도를 소유하게 되었고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되었으며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우리의 많은 불의는 소유와 욕망에서 비롯되는데 우리는 요셉의 이 위대한 가난과 정결에서 그리스도의 의로움을 얻는 법을 배우는 오늘입니다.
요즘 자주 제가 늦잠을 잔다고, 건강이 안 좋아진 것 아니냐고 걱정해주시는 분들이 있는데 오늘도 일어나 묵상을 하는데 묵상이 깊게 되지도 않고 다른 때보다 조금 늦게 일어나기도 하여 결국 새로운 강론을 올리지 못했습니다. 걱정은 하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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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마태 1,24)
<의로운 요셉을 닮자!>
오늘 복음(마태 1,16.18-21.24ㄱ)은 '마태오 복음이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관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예수님의 족보(마태 1,1-17)'에 이어 전해지고 있는데, 족보 이야기가 예수님을 합법적인 아버지 요셉의 혈통에서 태어난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을 전하고 있다면, 탄생 이야기는 성령으로 잉태된 예수님이 어떤 과정을 거쳐 다윗의 자손이 되었는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탄생에 관한 말씀은 마태오 복음과 루카 복음(루카 1,26-38)에서 전하고 있는데, 루카 복음에서는 예수님 탄생의 핵심 인물이 '마리아'이지만, 마태오 복음에서는 그 핵심 인물이 '요셉'입니다.
오늘은 '하느님의 어머니 동정 마리아의 배필이며, 예수님의 양부인 성 요셉 대축일'입니다. 먼저 오늘 영명 축일을 맞이한 요셉 형제님들과 요셉피나 자매님들께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요셉 성인은 참으로 의로운 사람, 올곧은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 요셉에게 성령께서 하신 엄청난 일이 일어납니다. 요셉과 약혼한 마리아가 같이 살기 전에 임신한 것입니다.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기 때문에,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합니다.
요셉이 그렇게 하기로 생각을 굳혔을 때, 하느님께서 개입하십니다. 꿈에 주님의 천사를 보내시어 이 일을 받아들이라고 명령하십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마태 1,20-21)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의로운 사람답게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합니다. 주님의 천사가 전하는 하느님의 뜻에 순종합니다.
'의로운 요셉을 닮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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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CEo4PzgGaC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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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 (마태 1, 24)
믿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믿음과 아픔은
늘 함께 갑니다.
아파하지 않는
삶이란 없습니다.
아픔과 두려움을
믿음으로 헤치며
나간 요셉 성인의
축일입니다.
주어진 삶을
아름답게 사는 것이
무언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요셉 성인은
사람을 진정
사랑할 줄 아는
분이셨습니다.
사랑을 깨어나게
하는 것은 분명
믿음입니다.
평탄한 믿음은
없습니다.
자신의 뜻을
내려놓고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입니다.
비탈길도
위험한 길도
마리아를
힘껏 떠받치며
함께 걸어갑니다.
가장 믿음직한
모습으로
동행하고 있는
요셉 성인입니다.
우리 또한 소중한
누군가가 가장
필요로 할 때
그의 옆에 있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사순시기가
아름다운 삶이
정녕 무언지를
다시 배우는 은총의
시간이길 희망합니다.
아름다운 삶은
아름다운 사람이
되는 것이며
아름다운 사람은
아름다운 믿음이
만들어내는 축복입니다.
먼저 아름다운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요셉 성인이시여,
삶의 가혹한 시간까지
견딜 진정한 믿음을 위해
빌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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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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