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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단계 현실 - 베다 사상과 힌두교 (1)
지난번 블로그의 요지는 이것이다: 변하고 사라져 가는 육체의 차원과 변하지 않고 영원한 정신이 차원, 이 두 차원의 구분이 서양 이원적 세계관의 기본을 이룬다는 것이다.
현실을 육체 단계의 저 차원과 정신 단계의 고차원의 나누어 보는 다층적 세계관은 다른 종교 사상 체계에서도 반복하여 보인다. 여기서 동양의 전통들, 즉, 힌두교, 불교, 도교, 유교 등을 차례로 살펴보면서 이런 중층적 세계관의 공통적 요소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 중층 구조의 역사적 뿌리를 이해하는 것이 오늘날 전개되는 그물망 사고의 맥락을 파악하는 데에도 매우 중요하게 작용할 것이다.
다만 앞서 보았던 서양의 중충론이 이원적 구조에 머물러 있는 것에 비해 동양에서는 이들이 더 세부적으로 나뉘어 훨씬 복잡하고 풍부한 구조를 갖는다. 그러나 그 복잡한 구조도 여전히 일상의 가장 구체적인 경험에 기초하고 있다. 즉 일상의 경험을 육체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으로 나누어 설명하는 자연스러운 생각의 태도가 연장되어 세계에 대한 개념으로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사실 역사적으로 가장 오래전에 중층적 세계관을 구성했던 것은 서양의 헬레니즘이나 히브리즘도 아니고 인도의 베다 철학이다. 베다 철학은 기원전 3천여 년 전에 즉 지금으로부터 5~6천 년 전에 지금의 인도 북부지역에서 태동하였다. 베다 철학이 갖는 깊이와 방대함은 오늘의 철학과 과학에 견주어 결코 초라하지 않다. 오히려 상당 부분 베다 철학은 현대에도 유통되는 많은 생각의 원형들이 출발한 지점이었다.
베다 철학의 영향은 지대하게 계속되면서 후에 힌두교, 불교 등 다른 종교 사상의 기본적 틀을 제공한다. 그 후 16세기 실크로드나 해양 경로를 통하여 동서양의 문물이 교류될 때 불교와 더불어 서양에 소개되었다. 그 파급 효과는 이후 스피노자를 비롯한 서양의 범신론적 사고에 영향 미치게 된다.
당시의 서양의 억압적인 종교적 분위기 때문에 공공연히 이런 동양의 사상의 영향을 고백하기가 쉽지 않았으리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런 연유로 베다 철학자 불교철학의 수용은 슬며시 지나가는 정도로만 언급되곤 했다. 이런 경향은 그 이후에도 계속되어 쇼펜하우어 니체 등의 철학자나 칼 융등의 심리학자 등 19세기 20세기 사람들에 와서도 여전했다. 사람들은 그들이 받은 영향에 비해 극히 제한적으로 동양의 사상에 대해 언급하였다.
그럼 에제 베다 철학의 중층적 세계관을 살펴보겠다.
베다의 기본 경전(바가바드 지타, 우파니샤드)에 의하면 세상은 진리의 지배하에 있다. 이 진리를 브라만이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 브라만이 그것을 덮은 무지(아드비야)에 의해 가려져 있다. 이 무지가 걷혀 나가는 정도에 따라 순도가 높은 차원들이 점점 드러나게 된다.
그러므로 여기까지 보면 베다의 세계관은 서양의 이원적 구조와 비슷한 요소를 갖고 출발한다. 베다에서 말하는 세상은 크게 무지로 오염된 저 차원의 세계와 그 무지가 걷힌 고차원의 세계로 나뉜다.
이렇게 기본적으로는 같은 출발점을 갖는 베다 세계관은 바로 이원적 구조에서 한발 더 나아가게 된다. 저 차원 고차원의 단순 이중구조가 아니라 여러 복수의 차원들로 이루어진 세계를 제시하게 된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무지의 오염이 걷히는 정도에 따라 고차원으로 나아가는 단계를 여럿으로 더 세분화하기 때문이다. 그 복수 차원은 우선 삼원 구조를 거치게 된다.
우선 사람을 이루는 요소가 육체와 정신이라는 이원적 구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삼원적으로 본다. 즉 사람을 육체, 정신, 영의 요소로 만들어져 있다고 본다. 이렇게 세 구성요소로 인간을 보는 것은 이후 동양에서 매우 자주 나타나는 사고 패턴이 된다. 중국이나 한국에서 요즈음 흔히 말해지는 정 기 신 또는 영 혼 백의 삼원적 구분도 역사적으로 베다의 세 가지 요소로 인간을 구성하는 생각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 세 가지 요소는 각각을 산스크리트어로는 카라나 사리라(Karana sarira), 숙스마 사리라 (Suksma sarira) , 스튤라 사리라 (Sthula sarira)라 불린다. 이들의 문자 그대로의 뜻은 무거운 몸, 가벼운 몸, 씨앗으로서의 몸이라고 풀이할 수 있다. 사실 육체, 정신, 영으로 풀이하는 것이 원래 베다의 생각을 방해하여 왜곡하는 여지가 있다.
육체, 정신 영으로 풀면 이 세 가지가 원래 질적으로 다른 기원을 갖는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원래 베다 철학은 이들이 본래 질적으로 같은 기원을 갖는다고 본다.
그 같은 기원의 근거는 바로 프라나(prana)에 있다. 프라나는 우주의 에너지이다. 이 에너지가 기본 재료인 아카샤 (akasha)와 합쳐지면서 사람이 생겨난다. 이때 사실은 사람이 하나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무거운 몸, 가벼운 몸, 씨앗 몸의 부분들이 만들어져서 합쳐짐으로써 하나의 사람이 생겨나게 된다.
즉 순도가 떨어지는 프라나는 무거운 몸을 만들고, 그보다 순도가 높은 프라나는 가벼운 몸, 가장 순도가 높은 프라나가 씨앗 몸을 이루게 된다. 이렇게 세 가지 다른 순도, 현대식으로 말하면 세 가지 다른 진동의 파장을 갖는 에너지가 각기 다른 몸의 구성 요소를 이루어 낸다는 것이다. 에너지가 무거울수록 브라만의 순수한 경지에서 멀어져서 무지(아비디야)의 영향 하에 더 놓이게 된다. 즉 무거운 에너지를 지니는 육체적 부분은 그만큼 더 무지에 오염된 정도가 큰 요소이다. 가벼운 에너지는 그 보다는 무지에 오염이 덜 되고 브라만에 더 가깝다. 씨앗 부분은 사람의 요소 중에서는 가장 브라만에 가까운 상태를 갖고 있다.
그러므로 육체, 정신, 영은 질적으로 서로 다른 요소들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파장의 크기가 다른 정도에 따라, 즉 순도에 따라 동일한 에너지(프라나)가 다른 양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프라나(우주 에너지) +아카샤(질료) = 인간
순도가 떨어지는 프라나는 무거운 몸 = 육체
순도가 높은 프라나는 가벼운 몸 = 정신
가장 순도가 높은 프라나가 씨앗 = 영
물론 이렇게 순도에 따라 요소를 나누어서 보는 추상적인 이론도 사실은 우리의 구체적인 경험을 확장하면서 상정되었을 수도 있다. 이미 우리는 그 가능성을 서양의 이원적 세계관을 소개할 때 언급하였다. 세상을 둘로 나누어 보는 방식, 그것이 비록 세속과 하나님의 나라로 나누어 보는 것이던 또는 현상과 이데아로 나누어 보는 것이든 간에 그 기원은 우리가 세상과의 경험을 정리하는 기본 방식에 좌우된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 말이 뜻하는 정확성에 관계없이 일상적으로 이것은 내 몸이다 또는 이것은 내 생각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한다. 이런 자연스러운 구분에서 한발 더 나아가면 육체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을 구분해서 생각하는 단계로 간다.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 일반화를 하면 육체적 세계와 정신적 세계를 아예 구분하여 상정하는 논리적 귀결을 맞게 된다.
육체적인 것, 정신적인 것에, 하나를 더 추가하여 영적인 것 셋으로 보는 삼원적 사고 역시 우리가 기본적으로 경험하고 생각하는 방식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육체는 나의 것임이 바로 느껴진다. 정신은 어느 만큼은 나의 것인 것 같고 어느 만큼의 나를 초월하는 것이 내 안에 있는 듯 여겨진다. 내가 어떤 절대적인 원리나 힘을 느끼거나 생각할 때 그것은 내 안의 유한한 정신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것을 파악한 듯하기 때문이다.
이런 내면의 경험을 바탕으로 정신을 다시 나누어 나의 유한한 내부의 정신 부분과 나의 유한함을 초월하는 정신 부분으로 나누기 시작한 것이다. 즉 육체와 정신의 이원 범주에서 육체, 정신, 영의 삼원 범주로의 발전은 인간 사고의 발전에서 그리 먼 길이 아니다. 더욱이 이원 범주화와 삼원 범주화는 질적으로 다른 사고 체계라기보다는 같은 축의 사고가 발전하여 간 것일 가능성이 충분해 보인다.
그러나 베다의 사고는 비록 이런 삼원적 사고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훨씬 더 세밀하고 복잡하게 범주를 나누고 그에 따라 세계의 차원들을 나눈다. 이러한 더 세밀한 세계관을 다음 블로그에서 살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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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단계 현실 - 베다 사상과 힌두교 (2)
앞의 블로그에서 보았듯이 베다 철학은 삼원적 구조를 갖고 있다. 우주 에너지인 프라나가 세 가지 다른 크기의 파장으로 구현되어 한 인간이 만들어진다. 세 가지 에너지 파장은 무게에 따라 가장 무거운 것, 가벼운 것, 가장 가벼워 거의 무게 없는 것이다. 무거울수록 순수한 우주의 진리인 브라만에 멀어져 무지한 세력의 영향에 더 놓여 있다. 그런 무거운 에너지 (Sthula sarira)는 우리의 육체를 구성한다. 가벼운 에너지 (Sukma Sarira)는 우리의 정신을 구성한다. 가벼운 만큼 그 파장은 브라만에 더 가깝게 맞추어져 있다. 즉 그만큼 무지의 영향을 덜어낸 것이다. 가장 가벼운, 거의 무게가 없는 에너지 (Karana Sarira)는 그 순도가 인간이 갖고 있는 에너지 중에서는 가장 브라만에 가깝다.
인간을 몸을 이루는 에너지에 대한 생각을 확장하면 우주 자체가 에너지의 파장의 크기, 에너지의 순도에 따라 다른 층을 이루고 있다고 상정할 수 있다. 실제로 베다 철학은 우주를 그렇게 나뉜다. 세상이 인간이 구성에서 보이듯 세 가지 다른 에너지 차원으로 존재한다고 본다. 이 세 차원은 각각 다른 파동의 에너지가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또 다르게 표현하면 세 가지 다른 에너지가 함께 존재하지만 그 조합의 비율이 달라서 세 가지 차원이 나뉜다고도 할 수 있다. 무거운 에너지가 가장 많이 배합되어 있는 세계가 제일 낮은 차원의 물질적 세계이고, 가벼운 에너지가 정신적 차원의 세계를 이루고, 가장 가벼운 에너지의 비율이 가장 많은 세계가 정신보다 더 높고 순수한 세계를 이룬다고 본다. 이 셋을 각각 불로카(Bhuloka), 안타로카(Antarloka) and 시바로카(Sivaloka)합니다. 이렇게 삼층으로 이루어진 세계를 삼계(triloca)라 한다.
이렇게 무지의 정리안 된 에너지를 덜어낸 정도에 따라서 세 단계의 차원으로 세상을 나누는 방식은 이후 힌두교의 기본 세계관을 이루게 되고, 그 이후에 불교에도 건네지고, 그를 거쳐 도교, 유교에까지 전해지게 된다. 그리하여 triloca를 비롯한 산스크리트어 어휘 체계는 비록 중국화 된 불교와 도교 유교에서는 잊히지만 그 기본 프레임과 개념들은 면면히 이어지게 된다. 앞서 말했듯 오늘날 도교와 유교에서 정기신( 精氣神)의 삼원체계가 기본 개념으로 거론되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다. 심지어 서양에서는 19세기 무렵 신지학 등에서 베다의 세계관을 서양의 언어로 풀면서 삼계에 대응하는 그리스적인 이름을 만들기까지 했다: 에테르계(ethel), 아스트랄계(astral), 코잘계(causal).
베다 철학에서 그리고 그 후 힌두, 불교, 도교 철학 등에서 강조하는 것은 우주의 존재들은 인간을 비롯하여 무거운 에너지, 즉 어리석은 정보에 많이 지장을 받는 에너지를 덜어내면서 점점 더 가벼운 에너지만으로 스스로를 구성하기 위해 나아가기를 지향한다고 본다. 달리 말하면 무거운 에너지의 세상에서 점점 더 가벼운 에너지의 세상으로 도약해가기를 지향하는 것이다. 그래서 상위 세계에는 인간보다 상위의 존재들 즉 우리가 신이라고 부르는 존재들이 살고 있다고 본다. 그렇게 에너지, 즉 프라나를 순화하는 일련의 방법들을 프라나야마라고 한다. 우리가 말하는 요가는 그런 프라나야마의 한 갈래로 시작된 것이다.
베다 철학에서의 우주관은 기본적으로는 삼원적이지만 그 논리를 연장하여 훨씬 더 많은 단계로 구성된 세계관을 갖고 있다. 우리 인간이 사는 단계인 브로카는 그대로 두고, 그위의 안타로카와 시바로카를 더 세분하여 6단계로 나눈다. 이 6단계는 모든 브로카보다 높은 차원의 세계들이다. 브로카와 이 6단계를 합해 7개의 단계가 있다.
이 7단계는 각각 소우주로서의 우리 몸안에 대응점이 있다. 즉 각 단계에 중심이 되는 에너지 파장이 우리 몸의 7개의 부분에서 각각 상대적으로 잘 흐르게 되어있는데 그 7개의 부분을 7개의 차크라라 부른다. 각 차크라는 상 중 하의 단전들과 유사하여 불순한 파장이 정화되어 가면서 각 차크라가 단계적으로 문이 열리면서 점점 높은 파장이 몸에 강하게 흐르게 된다.
그러나 베다의 우주관은 여기서 더 나아가 우리의 무지의 정도 벗겨지고 우리의 프라나가 순수해진 정도에 따라 14가지의 다른 단계로 세상을 나눈다. 각 단계마다 우주 에너지 (프라나)는 다른 파장으로 작용한다. 그 파장의 차이에 따라 간 단계에서는 다른 수준의 존재들이 존재한다. 이 각기 다른 존재들은 각기 파장이 허락하는 범위만큼만 진리를 접할 수 있다.
브로카 위의 상위 6단계는 각각 부바로카(Bhuvarloka), 스바로카(Swarloka), 마하로카 (Maharloka) 자나로카 (Janaloca) 타파로카 (Tapaloka) 사트야로카(Satyaloka)가 있다.
부바로카는 태양계의 존재들이 거주하고, 스바로카는 인드라신과 그 외 3억 3천 종류의 신들이 거주하며, 마하로카는 그보다 높은 차원의 마카데야 신과 그 외의 깨달음을 얻은 존재들이 거주하고 타파로카는 그 보다 더 높은 차원 아효니자, 사낫, 사나카 등의 존재가 거주한다. 마침내 최고 차원인 사트야로카는 브라만로카라고도 하는데 그것은 우주의 근원 존재인 브라마가 거주하는 곳이다.
이렇게 브로카와 상위 6단계를 합한 7 단계를 스발가로카로 통칭하기도 한다. 그런데 우주에는 인간의 세계인 브로카 밑의 세계도 있는데 그 하위 단계들도 7 단계로 나뉘어 있다. 그래서 상위 7단계와 하위 7단계를 합하여 총 14단계의 차원들이 베다 철학에 보는 우주를 형성하고 있게 된다.
소우주로서의 인간은 그러한 전체 우주의 구조를 자신 안에 반영한다. 우리 몸안에도 14 계층의 우주와 대응하는 구분이 있다.
영화 매트릭스에는 단지 두 개의 현실 가상현실 (파란 약)과 실제 현실(빨간 약)이 있었다. 파란 약의 세계는 가짜 정보가 불순하게 무지와 무명을 증폭시키는 저 차원의 세계이다. 빨간약은 그런 세계를 초월하여 진실의 세계로 깨워날 수 있게 도와준다. 파란 약의 세계는 가상현실을 코드화 한 프로그램을 업로드한 세계이다.
이에 비교할 때 베다 철학에서는 인간이 거하는 덜 진실한 세계에서 6단계의 점진적으로 더 진실한 세계가 펼쳐있다고 본다. 또 그 밑으로 더 미옥과 무지가 점점 더 영향을 펼치는 7단계의 세계도 있다.
이렇듯 베다 철학은 복수의 계층적 사고의 기반을 만들어낸 가장 오래된 사고 체계이다. 이 체계는 후에 불교, 도교, 유교를 비롯하여 현대 과학에 이르기까지 그 영향을 미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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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스퍼드 대학 철학교수 닉 보스트롬의 가상세계 시뮬레이션 가설
결국 무엇이 진실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가가 중요합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어쩌면 우리는 정말로 '매트릭스'에서 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이 세계가 가상현실이 아니라는 증거가 어디 있는가?" 철학과 과학은 이 물음을 놓고 진지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옥스퍼드 대학의 철학과 교수인 닉 보스트롬(Nick Bostrom)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컴퓨터 시뮬레이션이라고 말합니다. 과학기술이 고도로 발달하면 다수의 인공적인 의식을 만들 어낼 수 있다고 합니다. 컴퓨터가 극도로 발달한 시대라면 인공적인 의식을 하나만 만들어서 가동하지는 않을 겁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가상세계 시뮬레이션'을 만들어서 가동하고 있을 겁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과 아주 비슷한 시뮬레이션을 돌릴 확률도 매우 높습니다. 그 가상세계 속의 가상의 인간들은 자신 이 가상의 인물이며 자신의 세계가 가상세계라는 사실을 모릅니다. 여기서 또 한 가지 상상이 가능합니다. 가상 세계 속 사람들이 문명을 발전시켜서 자신의 창조주와 똑같이 창조주가 되어 가상세계 속 가상세계를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가상세계 속 세계를 만듭니다. 이것은 무한이 될 수 있습니다. 인간이 1년 동안 하는 계산을 컴퓨터는 10초 만에 할 수 있습니 다. 실제로 이런 가상세계를 만들어서 운영할 수 있는 생명체가 우주에 있으며 가상세계 속 가상세계가 수없이 반복된다면 결과적으로 가상세계는 수백억 개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와 우리의 세계는 어느 쪽에 속할 확률이 높을까요? 하나의 진짜 현실인 '1'에 있을 확률이 높을까요, 아니면 수백억 개의 세계 가운데 하나일 확률이 높을까요? 우리 세계는 수백억을 넘어 수조, 수경 개의 세계 가운데 하나일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일개 철학자의 사고실험에 불과할까요? 놀랍게도 의 가상세계 가설은 과학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닉 보스트롬 교수의 가상세계 시뮬레이션 가설>
1. 우리와 다른 문명이 인공적인 의식을 컴퓨터 시뮬레의 션으로 구축했을 가능성이 있다
2. 그 문명은 수천억, 수천조에 달하는 가상세계 시뮬레 의션을 실행하기도 할 것이다
3. 시뮬레이션 내부의 존재는 자신이 시뮬레이션 내부에 있다고 눈치 채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단지 자신이 현실 세계라고 믿는 세계에서 일상을 보내고 있다.
결론a: 우리는 그러한 가상세계 시뮬레이션을 개발하는 능력을 손에 넘는 실제 우주의 거주자다.
결론b: 우리는 그러한 수십억 시뮬레이션 안의 거주자들 중 하나다(시뮬레이션 내부의 거주자는 자신과 세계가 시뮬레이션이라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