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존 만지로와 조선의 문순득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존 만지로(1827〜1898)라는 인물은 1841년 동료 어부 4명과 함께 고기잡이를 하러 나갔다가 풍랑을 만나 조난을 당한 표류민입니다. 그는 운 좋게 미국 포경선 존 하우랜드호에 의해 구조되어 하와이에 갑니다. 선장인 Whitefleld는 그를 양자로 삼아, 고향인 메사추세츠주 페어헤븐으로 데려가 학교에 입학시켜 영어, 수학, 측량술, 항해술, 조선기술을 배우게 했으니, 그는 엄청난 행운아라 할 수 있습니다. 1846년 그는 포경선 프랭클린 호의 사무원으로 일했고, 다음해에는 일등 항해사 부선장이 승진하면서 3년 4개월간 대서양, 인도양을 거쳐 태평양까지 항해 경험을 쌓습니다. 22세가 된 1849년 미국에 돌아온 그는 일확천금의 꿈을 안고 골드러시의 진원지 캘리포니아로 가서, 3개월간 금광에서 일한 후, 거기서 얻은 자금으로 어드벤처호를 구입해 호놀룰루에 머물던 동료 3명과 함께 1851년 귀국하게 됩니다.
그가 돌아오자, 사츠마번주 시마즈 나리아키는 만지로를 귀빈으로 대접하고 그에게 해외 사정과 지식을 열심히 듣습니다. 1852년 고향인 도사번으로 돌아온 그는 번주인 요시다 도요로부터 70일간 조사를 받았습니다. 이때 그를 조사했던 가와타 쇼료는 만지로의 표류부터 귀국까지 과정을 기록한 자료를 토대로 『표손기략(漂巽紀略)』4권을 삽화와 함께 책으로 펴냈는데, 이 책은 사카모토 료마 등 당시 일본 개혁파 인물들에게 큰 자극이 됩니다.
1854년에는 막부로 초빙되 하타모토라는 파격적인 벼슬을 받고 일하게 됩니다. 그해 페리의 내항으로 미국 정보가 필요했던 막부에서는 통역, 조선, 항해, 측량, 포경 등 그의 지식을 필요로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일개 어민을 상급무사인 죠시로 임명한 것은 대단한 파격입니다. 그는 미국 항해학 서적인 『신실전항해서』를 번역을 시작해 1857년에 완성하였고, 또『영미 대화첩경』이라는 영어 회화 서적을 출간하기도 합니다. 30세에는 군함교수소에서 교수가 되었는데 그곳에서 카츠 가이슈와 만나, 그와 의기투합을 합니다. 카츠 가이슈는 료마의 스승이며, 일본 근대해군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인물입니다. 가이슈는 1860년 사절단을 이끌고 미국에 갔다 왔는데, 이때 만지로로 함께 다녀옵니다. 만지로는 메이지 정부에서도 크게 활약해, 1870년에는 보불 전쟁 시찰단으로 유럽과 미국을 방문해 은인인 Whitefleld를 만나기도 합니다. 그는 교육자로 남은 삶을 살아갑니다.
일본에 만지로가 있다면, 우리나라에는 문순득(1777〜1847 ?)이 있습니다. 전남 신안군 우이도에서 태어난 그는 1801년 12월 대흑산도 남쪽에 있는 태사도에 홍어를 사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풍랑을 만나 일본 남쪽에 위치한 유구국에 도착합니다. 그곳에서 약 8개월간 머물다가 배를 타고 돌아오다가, 또다시 풍랑을 만나 유구국보다 더 남쪽인 여송의 일룸(필리핀 루손섬 일로코스)에 도착합니다. 그는 9개월간 머물다가, 상선을 타고 마카오에 도착해서 3개월간 머물며 마카오에 전파된 유럽의 문화를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북경을 거쳐 1805년 1월에야 고향에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에게 행운이 하나 있었는데, 1801년 신유박해로 인해 정약전(1758∼1816)이 유배당해 우이도에 와 있었습니다. 정약전은 문순득이 보고 들었던 체험담을 글로 써 『표해시말(漂海始末)』을 저술합니다. 이 책에는 문순득이 보고 들었던 유구, 여송, 중국 지역의 풍속과 언어를 비롯하여 표류 일정, 궁궐문화, 의복, 선박, 토산품, 기후 등이 체계적으로 서술되어 있습니다. 문순득은 마카오에서 본 화폐의 유용성에 대해서 이야기 했고, 이 소식은 정약전을 통해 정약용(1762~1836)에게 전해져, 그가 『경제유표』에서 새로운 화폐 개혁안을 제시하는 계기가 됩니다. 정약용의 제자인 이강회(1789〜?)는 우의도까지 문순득을 찾아와, 그가 본 외국의 선박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우리나라 최초로 선박 관련 글인 『운곡선설』을 쓰기도 합니다.
만지로의 경험과 지식을 쇄국 정책을 펼치던 일본 막부가 즉시 받아들인 것은, 조선과 달리 네덜란드와 꾸준히 교역하면서 매년 1번씩 ‘풍설서’라는 세계 정세보고서를 받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1842년 아편전쟁에서 중국이 영국에게 대패한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영국을 포함한 서양에 대해 적극적으로 알려고 했었습니다. 막부뿐만 아니라, 사스마 번주, 도사 번주 등 지방 다이묘, 사카모토 료마를 비롯한 하급무사까지 모두 적극적으로 외국의 정보를 얻으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만지로의 경험과 지식은 일본 근대화의 큰 자양분이 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문순득의 경험과 지식은 조선에서 묻히고 말았습니다. 정약전, 정약용 형제는 유배당한 몸이었고, 이강회는 벼슬을 못한 지방의 지식인이었습니다. 그러니 학계, 정계에 미치는 영향은 거의 없었습니다. 하지만 문순득이 만난 사람은 이들만이 아닙니다. 책문(조-청 국경)에서 그를 만난 원재명(1763〜1817)은 뒷날 성규관대사성까지 지낸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문순득의 경험담을 듣고 크게 감명 받았던 인물입니다. 또 문순득은 귀국 후에 여러 곳에서 조사를 받았기 때문에 『실록』에도 등장합니다. 하지만 조선 정부에서 그의 지식을 활용한 것은 단 한번뿐이었습니다.
1801년 8월 여송인 5명이 제주도에 표착했는데, 조선에서는 말이 통하지 않아 이들을 돌려보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문순득이 귀국 후 그의 경험담이 알려진 후 한참 시간이 흐른 후 그가 여송을 다녀왔다는 것을 알게 된 제주목사는 나주목사를 통해 정보를 다시 확인하고서야, 비로소 그를 활용해 1809년 6월 여송인을 고향으로 돌려보낼 수 있었습니다. 문순득은 조선 최초의 필리핀어 통역관이란 타이틀을 갖게 되었지만, 만지로에 비한다면, 너무나 아쉽습니다.
1800년대 초반 국제정세와, 1850년대 국제정세는 물론 크게 다릅니다. 하지만 조선이 신분에 상관없이 만지로의 능력을 널리 활용했던 일본처럼 문순득의 지식과 경험을 활용했더라면 어떠했을까요? 그가 마카오에서 본 것처럼 3종류의 금속으로 9종류의 돈을 만들어 유통시켰더라면? 일본이 만지로를 군함교수소 교수로 임명해 근대해군을 육성한 것처럼, 조선도 문순득이 본 외국의 다양한 배들의 장점을 살려 빨리 선박개조사업에 뛰어들어 외국과 교역했더라면 어떠했을까요?
그는 명예직인 종2품 가선대부에 임명한다는 교지를 받았을 뿐, 정부의 정책 결정에 아무런 영향을 행사하지 못했습니다. 능력보다 신분이 중요한 닫힌 조선에서 문순득에게 만지로와 같은 활약을 기대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억지였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조선시대가 아쉬워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지금 조선시대처럼 새로운 정보와 유능한 인재를 못 본 체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때와 같은 잘못을 범하고 있지는 않은지 되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참고 : 시바료타로 저, 이길진 역, 『료마가 간다』, 창해, 2003년
서미경, 『홍어 장수 문순득, 조선을 깨우다』, 북스토리, 2010년
http://www.johnmung.info/john.htm
첫댓글 능력보다 신분이 중요한 것은 그냥 전근대 보편 아닌가요? 조선은 전근대 사회 중에서는 그나마 신분차별이 덜 한 시대였는데 말이죠. 고구려 백제 신라는 조선보다 더 하면 더했던 시대니까요. 저건 신분의 문제가 아니라 조선이라는 나라가 지닌 폐쇄성의 문제니까요. 신분제로 논할 문제는 아닌 듯 합니다. 양반 출신 정약용도 비슷한 건의를 했지만 막혓죠..
조만지로는 그냥 그 시절 운이 좋앗던 거죠. 일본 막부가 필요했던 바로 그 정보를 갖고 있었다는 것. 문슨득도 1880년대였다면 높이 등용되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