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임시정부에 생명을 불어넣다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전체대회에서는 선생을 대한인국민회 원동위원으로 선출하고 상해파견을 결의하였다. 선생의 상해 행으로 독립운동의 중심축은 미주중심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로 이동하였다. 6월 28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서리로 취임한 선생은 곧바로 임시정부의 시정방침을 발표하였다. 시정방침으로는 인구조사를 행하고 국채를 발행해 재정을 확보할 것과 인두세를 징수하고 군사에 노력할 것, 그리고 구국재정단을 조직할 것과 파리와 워싱턴을 중심으로 외교에 힘쓰고, 한인관계사를 조사, 편찬하는 일을 할 것 등이 발표되었다. 그 외에도 선생은 연통제 실시와 교통국 설치를 추진해 국내와 임시정부와의 연락 교통망을 구축해 국민적 기반을 마련하고자 했으며, 북간도와 서간도 등지에 선전원과 특파원을 파견해 만주의 독립군 조직을 정부산하로 통합하고자 했다. 또한 임시사료편찬위원회를 조직해 독립국으로서의 역사정립을 위한 사료편찬에 착수하였으며 인성학교를 정비해 공립학교로 출범시키고 정부기관지로써 <독립>을 창간해 언론, 선전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대한적십자회를 재건해 독립전쟁에 대비하였다.
8월 이후에는 정통성을 가진 민족정권을 수립해 독립운동을 통일적으로 지도하고자 3개의 임시정부 통합운동을 진행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정부 통합에 성공해 통일 임시정부가 출범할 수 있었음은 선생의 정력적인 통합운동의 결실이다. 초기의 임시정부의 조직과 운영은 이처럼 선생의 방침과 방략에 따라 진행되었으며 이 때 지도자로서의 역량과 리더십이 크게 발휘되었다. 그러나 통일정부에서 선생은 한성정부의 법통성을 계승함에 따라 노동국 총판이 되었다. 이후 이승만 대통령과 기호파 내각의 견제를 받게 되면서 임시정부 내에서 선생의 입지가 크게 축소되었다. 그렇다고 임시정부의 행보를 늦출 수 없었던 선생은 1920년 교민단 사무소 신년축하회 석상에서 ‘우리 국민이 결단코 실행할 6대사’라는 연설을 통해 우리의 독립운동이 어느 한 부분이 아닌 군사, 외교, 교육, 사법, 재정, 통일의 6대사업으로 진행되어야 할 것과 구체적 진행방법과 실행을 주창하면서 우리 민족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통일임을 힘주어 강조하였다. 그리고 선생은 국민개병, 국민개납, 국민개업의 방침을 통해 국내외 모든 한인은 독립전쟁 시에 병역의 의무를 수행하고 인두세를 내어 조세의무를 지며, 직업을 갖고 생산에 종사함으로써 정부를 유지해야 할 책임감 있는 의무를 가진 국민임을 주지시켰다.
그러나 선생의 통일노력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의 위임통치안에 의해 결집된 반정부세력은 이승만의 외교노선에 반대하며 반정부활동을 전개해 임시정부의 지도력에 큰 타격을 입혔다. 현재의 정부조직이 미주, 러시아, 만주 등 각각의 운동조건이 다른 곳으로부터 모여든 독립운동의 세력 모두를 만족시킬 수 없다는 현실에 직면하자 선생은 그 대안으로 독립운동 세력을 횡적으로 연대시킨 ‘대독립당’을 결성해 정부와는 별개로 정당에 의한 독립운동을 지도하고자 하였다. 1921년에 들어와 위기에 처한 임시정부 독립운동 방략의 돌파구를 마련하고자 선생은 여운형과 함께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요구하고 국민대표회의기성회를 조직해 나갔다. 1923년 1월 3일에 시작된 국민대표회의는 국내는 물론 미주, 만주, 중국관내, 러시아 등지에서 대표권을 인정받은 140명이상의 대표들이 참석한 대대적인 민족회의였다. 여기서 선생은 부의장에 선임되었고 외교분과위원과 헌법기초위원으로 활약하였다. 국민대표회의는 5월 15일까지 총 63회에 걸쳐 회의가 진행되었지만 정부유지파와 새로운 정부 구성을 주창한 창조파, 그리고 정부개조를 주창한 개조파로 나뉘어 그 어떤 합의도 끌어내지 못하였다. 선생은 현정부유지파와 창조파를 중재하며 중도안으로 정부개조안을 주창했지만 국민대표회의는 끝내 결렬되고 말았고, 실망한 독립운동 세력들은 상해를 떠나 버렸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도 선생은 결코 좌절하지 않고 또다시 대독립당 결성과 이상촌건설운동에 매진하였다.
선생은 임시정부에 대한 지원과 독립운동방략에 대해 재미한인들과 의논하고자 1924년 12월에 미국을 방문하였다. 방문기간 동안 흥사단과 대한인국민회 동지들을 만나 독립운동 방략을 논의하고 이상촌 건설의 지원과 임시정부에 인두세를 내 줄 것을 미주 교민들에게 호소하였다. 13개월간의 방문을 마치고 1926년 4월 22일 선생은 홍콩에 도착하였다.
이데올로기 소용돌이에서 오로지 민족 우선의 신념을 지켜가다
도산이 미국에 있는 동안인 1925년 9월에 임시정부 국무령에 이상룡이 취임했으나 임시정부와의 통합 문제로 인한 정의부 내부의 분규가 일어나자 이상룡은 급히 만주로 귀환하였다. 그 후임으로 1926년 2월 양기탁이 국무령에 임명되었지만 역시 취임을 거부해 국무령자리가 공석으로 남게 되었다. 임시의정원에서는 선생이 상해로 돌아오기 전인 5월 8일, 선생을 국무령에 임명하였으나 선생은 취임을 단호히 거부하였다. 자신은 정부 내에서보다는 재야에서 자유롭게 활동하면서 정부를 후원하고, 독립운동계의 전선통일운동을 지원하는 것이 시세에 유리하다고 보고 취임을 거부한 것이다.
당시 선생이 주장했던 독립운동의 방략은 좌, 우 운동세력의 통합과 전민족의 연대, 그리고 일제에 대한 파괴책을 주창한 바, 미국내의 일부 분자들은 선생이 사회주의자이며 위험분자라고 지목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이런 평가에 아랑곳하지 않고 1926년 7월 8일에 선생의 상해 귀환을 환영하는 연설회 석상에서 ‘주의(主義)’를 초월해 전민족운동계가 역할분담을 한 혁명을 진행시켜 나갈 것을 간절히 호소하였다. 이 때의 연설의 요지는 ‘대혁명당을 조직하자, 임시정부를 유지하자’ 였다. 전 민중이 중심이 될 통일기관의 필요성과 임시정부 유지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천명한 본 연설에서 선생은 우리 민족은 빈민이며, 자신 또한 무산자라고 하며 자본주의가 미발달된 채 국망을 당한 민족이 프롤레타리아, 부르조아의 계급논쟁에 휘말리는 것 자체가 힘의 낭비임을 일깨워주고자 했다. 그리고 민족국가 건설 시에 우리의 경제 방책은 일제 및 일본자본가, 그리고 친일 매판자본가들이 장악한 대생산기구를 독립 달성 후에 국가소유로 한다고 공언하여 사회주의자들을 포용한 노선을 선언하였다. 이러한 견해는 4년 뒤 1930년에 결성된 한국독립당의 당의, 당강에서 다시 천명되었다. |
첫댓글 잘 봤습니다. 그냥 훌륭한 분인줄만 알았는데 거의 초인에 가까운 의지와 능력을 가진 분이셨군요
1900년대 초의 미국이었으면 사는 수준 차이가 대략 아프리카와 우리나라 정도 급쯤 되었을텐데 편안한 생활을 포기하고 조국을 위해 다시 돌아온 것도 대단하네요.
존경스럽습니다. 어릴때 위인전을 읽은 기억이 나는데 다 잃어버렸네요 ㅠㅠㅠ
뉴라이트가 뭐라고 할지 기대되네요...ㅡ.ㅡ;;;
기사 보니까 9월달 기사네요 ㅎㅎ
재미 사회는 엉뚱하게 이승만 받들때가 아니라 도산을 받들어야죠....진짜...
메일로 스크랩좀 해가겠습니다.. 좋은 글 잘읽었습니다..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