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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적 관점
예수의 세례에 관한 마가의 이야기는 앞으로 전개될 예수의 사역과 고난을 이해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맥락을 제공한다. 하나님이 예수를 인정하는 장면을 통해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뜻이 예수의 말씀과 행위 속에서 실현됨>을 목격하게 된다는 것이 확실해진다. 비록 이 구절이 나중에 신조의 중요 어휘가 되는 신성이나 인성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는 않고 있지만, 신학자들은 이 구절이 성육신 교리의 의미에 중요한 단서를 주는 것으로 이해했다.
예수는 하나님이 인류를 대하시는 방식의 토대가 된다. 세례 요한은 예수를 하나님의 행동의 과거, 현재, 미래의 맥락 속에 위치시킨다. 전형적 설교자/증인으로서 요한은 예수를 과거 이스라엘과 맺은 하나님의 약속과 연결한다. 광야라는 배경 설정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준비시킨 광야 기간을 기억나게 한다. 예언자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요한은 인류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기 위해 인간의 역사 속에 개입하실 하나님의 임박한 임재를 앞서 가리키는 역할을 한다. 우리의 부서진 삶과 피 흘리는 세상이라는 광야 속에서 새 생명을 주는 세례의 약속이 선포된다. 세례 요한의 동시대인처럼 고통스러운 과거와 불확실한 미래 사이에 낀 우리는, 지금 고백과 회개와 희망적인 기대로 반응해야 한다.
이 이야기의 절정부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것이 하나님에 의해 선포된다. 이 호칭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하늘이 갈라졌다. 동양 정교회 (Eastern Orthodoxy)는 다른 전통보다 하늘이 갈라진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하느님께서 예수에 관한 주장을 말씀하심으로, 하나님의 가려진 신비가 밝게 드러나 모든 사람들에게 보였다. 칼 바르트(Karl Barth)는 이 이야기에 나오는 하나님의 예수에 관한 주장이 복음의 핵심을 요약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하느님이 하늘 높은 곳에 숨어 계시기를 원치 않으시고 우리 유한한 피조물에 의해 눈으로 보이고 귀로 들려지기 위해 이 땅의 가장 낮은 곳까지 오셨다는 놀라운 주장이다.
예수를 "아들"로 지칭하는 것은 마가복음의 다른 중요한 사건으로 가는 길을 암시적으로 안내하는 의미도 있다. 변화산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라는 하나님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막 9:7). 이 호칭은 너무 위험하여 예수의 정체성을 알아보는 귀신들이 그것을 누설하는 것을 금하였다.(막 3:11, 5:7) 재판정에서 예수가 신성모독이라는 치명적인 판결을 받은 이유는 바로 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예수가 인정했기 때문이었다.(막 14:61-62) 이 문구는 십자가 옆에 있었던 백부장의 인간적이고 공개적인 고백 속에서도 메아리치고 있다.(막 15:39) 이 순간에도 장막(이번에는 하늘이 아닌 성전의 장막)이 갈라졌고, 예수가 숨을 하나님께 돌려드렸다. 골고다는 요단강의 선포를 확인한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하여 신학자들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높이는 순간 예수가 십자가로 인도하는 길로 접어든 것이라고> 결론짓는다. 아들이라는 명칭은 십자가와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다.
십자가는 예수 세례 시 선언된 예수의 아들됨이 순종적 고난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이것은 세례 장면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예수는 참회가 필요한 죄인의 자리에 자발적으로 서셨기 때문이다. 이 궤적은 복음서가 묘사하는 여러 형태의 고난을 예수가 수용하는 과정을 통해 지속되었다. 사실 마가의 유명한 "메시아적 비밀"은 메시아가 죽음까지 포함한 고통을 받아야 한다는 난해한 진리이다. 부활의 승리와 재림의 기대는 순종적 고통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십자가 없이 왕관도 없다.
예수의 세례에는 사랑하는 아들의 순종적 고통의 여정의 개시를 알리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고난 당하고 순종하는 아들로서 예수의 신분과 성령에 의한 예수의 능력 사이에 신비한 관계가 암시되어 있다. 성령의 내려옴이라는 이 중요한 현상은 예수가 앞으로 귀신, 죄, 율법, 심지어 자연에 대해 권세를 행사할 예수의 공생애 사역을 위한 촉매 역할을 한다. 하나님이 예수에게 성령을 주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성화적 은총을 강조하는 전통에서는 매우 중요하다. 예수께서 성령을 받으신 것은 영적인 유익을 개인적으로 누리기 위해서가 아니고,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해주기 위해서이다. 교회는 예수가 세례를 받으신 것은 우리가 그와 연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하나가 되고 그와 함께 성령의 능력을 받기 위함이라고 고백해 왔다. 우리가 세례를 통해 예수의 세례에 참여하는 것이고, 예수의 세례가 그의 순종적 고난의 사역의 개시를 알리는 것이라면, 우리의 세례에도 그와 유사한 자기 부인이 포함되어 있음은 명백해진다. 세례를 통해 열리는 길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자신의 생명을 잃음으로 생명을 구하는 일이 기다리는 길이다.(막 8: 34-35)
이 구절들은 역사적으로 두 가지 신학적 논란을 일으켜 왔다. 가장 논란이 되었던 것은 예수의 순종, 하나님의 인정, 예수의 아들로서의 지위의 상호 관계에 관한 것이었다. 역사상 "양자론"으로 분류되는 다양한 견해들이 등장하여 예수는 순종의 결과로 세례 시 하나님의 아들로 입양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신자들은 이 주장이 예수의 인성을 너무 강조하고, 예수의 전 생애가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의 실현이라는 믿음을 손상시킨다고 여겼다. 결과적으로, 4세기의 아타나시우스로부터 20세기의 칼 바르트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예수의 세례를 통해 원래 있었던 예수의 정체성이 명백하게 밝혀진 것이라 주장하였다.
자주 논란의 대상이 되었던 두 번째 주제는 요한의 물세례와 예수의 성령 세례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다수의 오순절파 교회를 포함한 일부 기독교인들은 죄 사함을 받기 위한 물세례는 성령에 의한 세례를 통해 완성되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대부분의 개신교인들은 요한과 예수의 세례를 교회 입문 의식의 각각 다른 측면이라고 여긴다. 칼뱅에 따르면, 교회는 요한을 따라서 보이는 상징인 물을 통해 공적으로 세례를 주며, 이 순간에 성령의 숨은 역사를 통해 세례를 받는 영혼은 성령의 능력에 사로잡힘을 당한다.
주석적 관점
예수의 사역은 세례 요한의 활동으로 시작한다. 요한은 유대 광야에서 설교와 세례를 행하던 예언자였다. 그는 헤롯 안티파스가 그를 체포하여 처형해야할 만큼 ‘유명한’ 사람이었다(막1:14; 6:17-29). 사해문서의 발견은 요한이 문서를 만들었던 공동체의 일원이었다는 결론을 낳았다. 확실히 요한의 메시지의 종말론적 성격에는 사해 공동체의 묵시적 관점이 담겨있다. 확실히 쿰란의 정교하게 지어진 물(water) 시스템에서 보이듯, 제의적 정결에 관심이 있었던 공동체는, 회개의 표시로 세례의식을 사용하는 요한과 유사점이 많다. 쿰란공동체는 유대사회를 파괴해온 예루살렘의 귀족 성직자들 대신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이 강림할 것을 믿었던 다수의 지방 사제들로 구성되었다. 누가는 요한이 사제 가문에서 왔기 때문에 세례 요한이 쿰란 공동체의 일원이거나 적어도, 어떤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설득력있게 그린다. 그러나 아직도 쿰란 공동체와 세례요한이 관계가 있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없다.
또 다른 인상적인 질문은 요한과 예수의 관계의 성격이다. 누가는 요한과 예수가 친척이라고 기록한다(눅1:36). 마태와 마가 모두 요한과 예수의 사역을 예언의 성취로 소개한다(마3:3; 4:14-16; 막1:1-2). 마가는 헤롯 안티파스가 요한을 체포한 이후 예수의 설교 사역이 시작되었다고 주장한다(막1:14). 예수는 요한이 더 이상 그의 사역을 이어가지 못하게 되었을 때 세상에 갑자기 나타난 요한의 제자였을까? 네 번째 복음서(요한복음)는 적어도 예수의 제자들 중 몇 명은 원래 세례 요한의 제자였다고 말한다(요1:35). 예수는 그도 요한의 제자였기 때문에 이 제자들과 가까운 사이였을까? 복음서들은 세례 요한의 사명은 예수의 오심을 준비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마가는 이사야 40장을 막1:2-3에 인용하면서 예수의 오심을 예비하는 요한의 사역을 예언적 말씀의 성취로 소개한다. 그러나 아직도 요한과 예수 사이의 개인적인 관계의 정확한 윤곽은 드러나지 않는다.
마가가 요한에 대해서 말해주는 것은 매우 적다. 마가는 요한을 사람들을 회개하도록 부르는 설교자이며, 그의 부름에 응답한 이들에게 세례를 주는 사람으로 그리고 있을 뿐이다. 마가는 요한의 세례를 “죄사함을 위한 회개”의 예식으로 특정한다(막1:4). 이는 요한에 의해서 세례를 받았던 사람들은 그의 다가오는 심판에 대한 선포를 믿었음을 짐작케 한다. 다가오는 심판이라는 관점 하에 그들은 그들의 죄를 회개했고, 용서를 받았다. 마가는 요한이 예수에게 세례를 베풀었음을 분명하게 언급하는 유일한 복음서이다. 마태에서는 요한이 세례를 받고자 하는 예수의 뜻을 반대했다고 서술한다. 마태복음에서도 물론 예수가 세례를 받았지만 요한이 정말 그 세례를 집례했는지는 정확히 말하고 있지 않다(마3:13-17). 누가는 다른 이들을 따라 세례를 받는다(눅3:21-22). 당연히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의 경우에 이런 예식이 불필요하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요한복음의 기자는 특별히 “육신이 된 말씀”이 회개하고 죄 사함을 받을 필요가 있다고 쓰지 않으려 했을 것이고, 그래서 요한 복음서는 (예수의 세례받으심이) 전제된 상황임에도 언급하지 않는다(요1:32-34; 3:26).
요한의 세례와 죄의 회개가 관련이 있다고 여겨짐에도 불구하고,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가 요한에 의해 세례를 받는다라는 사실을 소개하는것을 어려워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오히려 복음서 저자들이 매우 조심스러워했음에도 예수의 수세에 대하여 기록했다는 관점에서, 예수가 세례 요한의 메시지에 끌렸고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분명하다. 마가가 더 중요하게 여긴 것은 예수가 요단에서 올라올 때 나타난 환상과 소리였다. 당연히 이것들은 세례의 의미에 관한 이전의 모든 오해를 일소하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기름부음 받은 메시아라는 진정한 정체성을 독자에게 알려주기 위한 것이다. 마태는 예수의 수세를 겸손과 순종의 행위로 그린다(마3:13-17). 누가는 성령이 그에게 비둘기처럼 내려오고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는 하나님의 목소리가 들리기까지의 전주곡으로 세례사건을 그린다.(눅3:21-22). 마가와 누가는 대신 예수의 수세 전승을 기독론적 관점에서 사용한다. 특별히 마가는 독자에게 예수가 진정 누구인지를 그의 사역과 죽음의 이야기의 시작부분에 알려준다. 마가의 이야기의 등장인물들은 조금씩 점진적으로 이것을 알아간다. 마가복음서의 클라이맥스는 골고다에서 백부장이 “진실로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막15:39)고 고백하는 장면이다. 모순되게도, 그의 진정한 정체성은 그의 죽음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복음서에 기술된 세례 요한의 사역 가운데 핵심적인 요소 중 하나는 그의 설교와 세례가 예비하는 것이라는 점이다(막1:7-8). 세례요한의 운동은 그의 죽음 이후에도 계속 되었고 신약성서는 이것을 강조한다(행18:25; 19:3-4를 보라). 요한은 다가오는 심판이라는 관점에서 사람들을 회개하도록 불렀다. 요한의 회개는 명백하게 종말론적인 것이었다. 그는 “또 다른 이”가 그의 뒤에 온다고 알렸다. “더 강력한” 분이 요한이 선포했던 심판의 시간을 시작할 것이다. 막1:4-11은 다가오는 심판이라는 주제를 계속 이어가면서, 세례 요한이 했던 것처럼 신자들에게 준비하라고 말하고 있다.
기독교의 세례가 요한의 세례와는 좀 다른 의미이지만, 설교자는 회중들 하나하나가 그들이 받았던 세례의 의미에 대해서 숙고해 볼 수 있도록 기회를 활용해야 한다. 하늘에서 들려온 소리는 예수를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로 말해주고 있다(막1:11). 복음서의 나머지 부분은 이 사랑하는 아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그리고 결과적으로 처형당하게 되는-임무를 어떻게 완수해가는지 기술한다. 기독교 세례는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들로 변화시킨다. 우리는 어떤 희생이 있더라도 그리스도의 사역을 완수하도록 헌신할 것인가?
목회적 관점
복음은 지상으로 내려와서, 구체적이고 감각적인 세상에 자리 잡았다. 오늘 본문에서만 보아도 강물, 낙타 가죽 옷, 벌레 음식, 신발 끈을 묶는 일, 새의 비유, 그리고 흥미로운 기상 현상 등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마가의 현실성은 신앙과 예배가 지나치게 영적이고(ethereal) 타계적이며 추상적이 되지 않도록 하는 대비책을 제공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비둘기가 점잖게 내려오는 장면을 상상하는데, 새들도 때로는 폭격기가 된다(예를 들어, 새끼를 지킬 때). 이런 모습이 오히려 하늘이 갈라지는 장면과 어울린다. 많은 교회들이 강한 바람 / 무서운 불의 성령보다 사랑스러운 하늘의 비둘기를 선호한다. 세례가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의 삶에 침입하도록 초청하는 것이라고 하는 불편한 의미에 대해서 잘 말하려고 하지 않는다.
현실성과 성령은 함께 간다. C.S.루이스는 성령은 물질보다 가볍지 않고 무겁다고 했다. 성령은 창조와 구속과 마지막 화해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실체이다. 그리고 성령은 물질과 연관되어 있다-진짜 물, 진짜 빵, 값싼 포도주, 우리 아이들을 위한 아름다운 침례복, 어른들을 위한 물에 젖은 가운. 성령은 교회 안에서 우리를 충만하게 한 후에 우리를 교회 밖으로 몰아간다(마치 성령이 예수를 요단강에서 광야로 몰아가듯이). 성벽 밖에서 우리는 들짐승들과 씨름하며 구원의 천사를 위해 기도한다. 천사는 공기보다 무겁다.
본문은 고백과 회개와 용서의 제의를 묘사한다. 본문은 그들이 대도시에서 왔든, 유대 시골의 시골뜨기이든, 그 시대의 모든 사람들이 이런 고백이 영혼에 유익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말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본문은 공적인 제의 행위의 가치에 대해 기억하게 한다. 안수하는 것과 물을 느끼는 것은 모든 것을 현실로 만든다. 세례는 참여자와 관찰자 모두에게 강력하고 기억할 만한 경험이 될 것이다. 이사하고, 선교 여행을 떠나고, 중요한 수술을 앞두고 있는 사람들, 주일학교에서 가르칠 준비를 하고 있는 사람들, 입교하거나 목사안수를 받는 사람에게 교회가 안수할 때 사랑과 축복을 구체적으로 느끼게 된다.
본문은 예수의 권위와 겸손 사이에 있는 두드러진 상호작용을 보여준다. 요한은 이 장면에서 예수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권한을 가졌다고 선포한다. 그 다음 장에서는 예수가 이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고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는 것을 본다.
예수는 그의 겸손을 구체화한다. 초대교회는 그들의 주님이 회개하는 죄인들과 함께 세례를 받아야 했다는 기이한 일에 대해 생각해야만 했다. 마가는 삼위일체 교리에 대해서도 알지 못했고, 세례를 받는 신자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세례에 동참하게 된다는 바울의 주장에 대해서도 알지 못했다. 마가가 알고 선포하는 것은 고난 받는 종과 십자가에 달린 메시야이다.
예수의 권위와 예수의 겸손은 두 가지 다른 것이 역설적으로 하나로 묶여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의 권위는 겸손한 사람의 권위이고, 그의 겸손은 모든 권위를 가진 사람의 진정한 겸손이다.
물론 우리의 교회들은 단순히 그리스도의 공적인 변형이거나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을 물려받은 남은 자들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 또한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시라고 담대하게 선포할 수 있는 권위와 그가 교회의 주님만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의 주님이시라는 사실을 아는 겸손 사이에서 균형을 잡기 원한다.
예배에서 우리가 서로의 죄에 대해 용서를 선포할 때, 우리는 권위와 겸손 사이의 긴장을 본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용서한 죄는 실제로 용서받는다. 그러나 죄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용서받지만, 우리는 그리스도 자신의 주권의 종일뿐이다.
기독교의 목회적 돌봄은 다른 사람의 필요와 요구를 겸손하게 듣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목회적 돌봄은 화해를 선언하고, 신실함을 요구하고, 정의를 요청하는 권위를 가진다.
세례요한이 예수가 성령으로 세례를 줄 것이라고 증언할 때, 그는 마가복음이 선언하는 모든 것을 선언하고 있다; 예수의 목회는 종말론적인 하나님 통치의 시작이다. 시대가 변한다는 상징인 성령이 지금 예수에게 부어졌다. 그대로부터 예수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종말론적인 사명이라는 축복을 받고 거기 매이게 되었다: 하나님의 통치를 선포하고 구체화하는 것.
우리는 복음을 길들이고 현재를 신성시하기 원한다. 마가복음은 우리를 낯선 영역으로 초청하고 미래에 대한 약속에 도전하게 한다. 이 복음 안에서 우리는 언제나 우리 주님을 따라 앞으로 전진한다.
The New Oxford Annotated Bible은 “예수 자신은 세례를 받고 그보다 앞서 시작된 갱신 운동에 참여했다”고 지적한다.
예수는 새로운 일을 하셨지만, 전혀 새로운 일을 시작한 건 아니다. 이스라엘, 율법, 예언자들, 세례요한 등 모두가 이 길을 준비해왔다. 하나님은 어느 날 아침 일어나서 그때까지 해온 하나님의 일들이 모두 의미 없다고 결정하신 게 아니다. 아브라함, 사라, 이삭, 야곱, 모세, 미리암, 다윗왕, 이사야, 예레미야, 세례요한 이들 모두가 “길을 준비했다.” 목사인 우리는 우리가 우리 교회의 교인들을 위해서 하나님이 처음 생각해 낸 사람이기라도 한 것처럼 착각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Annotated Bible은 이 부분에서 기관, 그룹, 운동들이 그들 자신의 새로운 버전으로 돌려막기를 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한다. 변화와 혁신이 필요하다.
대단히 성공한 세례자는 그의 혁신적인 목회가 신앙을 표현하는 전부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마가복음은 예수가 그의 이름으로 세워진 운동 안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려 준다: 그는 “항상 [우리]보다 먼저 가신다”(막 16:7).
설교적 관점
-예수의 세례는 기독론, 삼위일체, 그리고 세례에 관해 얽혀있는 문제를 제기한다. 만일 요한이 “죄를 용서하는 회개의 세례”(4절)를 준다면 왜 예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와야 하는가? 그 시점까지 예수는 죄의 권세아래 있었는가? 아니면 그는 단지 죄있는 인간으로 스스로를 규정했는가? 예수를 “아들”이요 “사랑하는 자”라고 부른 그 소리는 [나면서부터] 늘 사실인 것을 단순히 선포한 것인가 아니면 일종의 양자됨을 (adoption)을 보여주는 것인가? 이 사건이 예수에게 준 자의식은 무엇인가? 이 소리를 들은 다른 누군가가 있는가? 만일 마가가 성령을 예수 위에 “비둘기처럼 내려오는 것”(10절)이라고 표현하면, 서방기독교인들은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온다”라는 니케아신조를 어떻게 고백해야 하는가? 질문들은 계속될 수 있고 어느 하나의 질문은 다른 질문들과 연관이 되어 설교자와 회중들을 혼란스럽게 할 것이다.
-설교는 이들 질문들 가운데 어느 하나로부터 시작해도 좋다. 이 질문들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으로 나아가게 한다. 이 질문들은 상아탑 신학자들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고 본문을 읽는 회중들로부터 제기되는 중요한 질문들이다. 자장 좋은 설교는 이 질문들을 잘 다듬어서 회중들로 하여금 살아있는 실천과 끊임없는 성찰을 하도록 돕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만일 예수께서 자신의 죄를 씻기 위해 왔다면 즉 예수께서 요단강에서 아들이 되기까지 하나님의 아들이 진정으로 되지 못했다면 왜 우리는 성탄절을 임마누엘 곧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으로 기념하였는가? 만일 예수께서 그의 죄를 씻기위해 오지 않았다면, 그가 받은 세례는 무엇이었는가?
-이러한 질문들은 주님의 수세에 대해 [이후의]기독교인들에게 많은 입장들을 만들어 내게 하였다. 하지만 마가에게는 중요한 질문이 아니었음을 주목해야 한다. 마가복음 1장을 다루는 설교는 그보다는 세례요한이나 하늘이 열린 것에 더 초점을 맞추는 것이 좋다.
-세례 요한에 관해 알고자 하는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그의 스타일 이외에 알 만한 것이 별로 없다. 요한에 대한 일반적 이해는(유명인사들의 이야기를 주로 다루는 잡지 Vanity Fair에서 잠깐 언급하듯이) 그가 먹었던 것, 입었던 것 그리고 그가 했던 난폭한 말 정도이다. 그는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들꿀을 먹으며 (그리고 그는 누군가에게는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부르지 않았던가?) 온갖 종류의 급진적인 것들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존 브라운 (John Brown, 19세기 미국의 노예 폐지론자)으로부터 미스터 티 (Mr. T, 레슬러 출신 전사-warrior- 머리 스타일의 흑인 배우, A-Team이라는 TV시리즈에 출연)까지 이런 류의 사람들을 “오늘날의 세례 요한”(modern-day John the Baptist)라고 부르곤 했다.
-마가가 간단히 묘사하고 있는 요한을 주제로 하는 설교는 그 급진적인 스타일을 고려해야 할 것인데 그것은 시대를 이야기하는 방식이다. 요한의 옷은 그가 새로운 엘리야임을 말하는데, 그의 나타남은 몇몇 사람들에게는 마지막 날의 도래를 뜻했다 (참조, 왕하 1:8). 그가 “광야” (the wilderness)에 출현한 것은 이스라엘이 노예로부터 해방되어 약속된 땅으로 가는 중간에 겪었던 오랜 광야생활을 떠올리게 한다. 광야의 시간에서 죄와 죽음의 세력이 파괴되었고 계약이 맺어졌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들은 온전한 구원을 받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 요한은 요단강 곧 광야와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사이에서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고 있다. 그는 단지 하나의 급진적인 부류의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 경계선에 서서 지금 도래했으나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now-and-not-yet) 그 나라로 사람들을 초대하는 증인이라고 볼 수 있다.
-요한은 그 때를(the time) 선포하고 그 시간은 바로 오게된다. 요한이 오실 그 분이 “여러분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입니다” 라고 약속한 직후 예수께서 거기에 나타나신다 (8-9절). 예수께서 요단강 물에서 나올 때 그는 “하늘이 갈라지는 것”을 본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는 그 때에 하늘과 땅이 서로 분명하게 드러난다. 예수께서는 사랑 안에서 하늘을 우러러보시고, [하늘로부터]한 소리가 사랑 안에서 그를 부른다. 성령 곧 삼위일체에서 성부와 성자사이에 있는 사랑이 드러나고 있다. 그리고 모든 피조물이 이 위대한 사랑 안에 사로잡혀 있다. 하나님께서 “하늘을 가르시고 내려오시리라” (사 64:1)는 예언자의 기도가 응답이 되고 “내가 광야에 길을 내겠으며, 사막에 강을 내겠다”(사 43:19)는 약속이 성취된다.
-마가복음에서 하늘은 다시 열리게 될 것이다. 또 다시 열리는 이야기가 나오고 성부와 성자 사이에 있는 사랑이라는 이야기가 나올 것이다. 그것은 마가복음의 중간 쯤인 변화산 사건 (9:2-8)에서 나타난다. 그리고 이 일은 또 다시 마가복음 거의 마지막에 십자가에서 일어나는 데, 이 때는 제국의 권력도 하나님의 사랑에 사로잡혔다 (15:34-39). 하지만 대부분의 복음서에서 이 사랑은 비밀리에 자라나는 씨앗처럼 보이지않게 존재하고 있다 (4:26-29). 오직 마귀들만 예수가 누구인지를 알고 있다. 제자들은 본 것과 들은 것들을 알지 못하고 끝까지 알아차리지 못한다.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당시 제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하늘이 닫혀있고 봉인되어 조용한 것처럼 보인다.
- 주님 수세주일은 회중들이 하늘이 열린 것을 기념하는 멋진 날이 될 수 있다. 다가오는 Ordinary Time (주님 수세주일부터 사순절이 시작되는 재의 수요일 전까지 가톨릭교회의 교회력-역자 주)은 우리에게 제자로서의 훈련기간이 될 것이고 그 때 하나님의 뜻은 희미하게 보여 하나님의 능력을 볼 수 없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 훈련의 여정을 시작하기 전에 마가는 우리에게 주님의 선하심을 맛보고 들을 수 있는 시간을 주고있는 것이다. 이번 주일 설교와 예배도 하나님의 사랑에 관해 단지 말씀으로만 전하지 말고 사랑이 말씀으로, 찬양으로, 성례전으로 그리고 기도로 나타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 날은 흰 옷을 입고 할렐루야를 외치는 날이다. 하늘은 이미 열려져 있고 이 날은 사랑 안에서 그 하늘이 드러낸 사랑을 누리는 날이다.
사회적 관점
이번 주는 교회력으로는 성탄절 후 두 번째 주일이지만 신년주일이기도 하다. 2018년 새해가 시작되었다. 새해에는 FOW(말씀의 잔치)가 더욱 풍성해지기를 기원한다. 사회적 여러 이슈가 있지만 쉬어가는 겸 해서 최근에 관람했던 두 영화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한겨례 21이 다룬 평창동계올림픽과 평화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두 영화는 한국영화로 <강철비>와 <1987>이다. 전자는 남북문제가 소재이고 후자는 제목 그대로 87년 민주대항쟁을 배경으로 박종철고문치사사건을 다룬다. 전혀 다른 소재 같지만 두 영화는 한국사회의 핵심적 사회적 문제를 다루는 영화이니 만큼 연결지점이 있다. 물론 전자가 거의 fiction을 바탕으로 하고 있고, 후자는 documentary성격이 강하다. 강철비는 어렵고 재미없는 남북문제를 fiction을 바탕으로 하지만 재미있게 그리고 내용있게 잘 다루고 있음이 장점이다. 줄거리는 북한의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개성공단 개소식 행사에 참여한 최고지도자(영화에서는 1호라고 칭한다)를 저격 하는데 총상에도 살아나 북한 전직 특수부대원(정우성분)에 의해 남한으로 와 치료받는다는 조금은 허황된 내용이다. 남한의 대통령 통일보좌관(곽도원분)이 이 문제에 대한 책임을 맡아 북한공작원(그들은 묘하게 성은 다르지만 이름이 같다)과 공조하고 협력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북한 매파에 의한 남북간의 전쟁발발을 막고 북한 군사쿠데타가 좌절되며 1호는 부상 치료후에 북한으로 복귀한다. 여기에 남한정부가(영화에서는 권력교체기로 나오는데 현대통령은 북한에 대해 매파시각을 가진 보수파로, 당선인은 비둘기파인 진보파로 설정한다) 권력교체기의 갈등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위기 상황을 잘 넘기고 평화를 가져오는 데 마침내 성공하게 된다는 것이다. 설정이 현실감이 있느냐는 질문은 할 수 있지만 절대로 남북한 전쟁은 막이야 한다는 문재인정부의 정책기조와 연결되어 실제로 대단히 현실적인 화두를 던지고 있다. <1987>은 다시 한번 고문으로 사람이 죽고 최류탄에 난무하던 87년의 현장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영화가 현실보다 더 현실을 보여준다는 점은 이 영화에서도 뚜렷이 나타난다. 그리고 비롯 30년 전의 일이지만 우리가 생생하게 겪고 참여했던 일이기에 더욱 현실적이다. 고문사건을 은폐하려는 권력 핵심과 경찰 공안책임자(박처원치안본부대공처장)의 스토리가 영화의 중요한 한 축을 이루는데 그 근저에 뿌리깊은 반북과 반공주의가 있기에 앞의 영화와도 연결된다. 박종철고문사건과 함께 최류탄에 막아 절명한 이한열열사의 이야기도 함께 전개되는데 <1987>의 캐스트가 화려하다. 박처원으로 나온 김윤석, 공안부장 검사로 나온 이정우, 고문경찰의 진실을 밝히는 데 일조한 당시 영등포교도소 교도관역의 유해진, 그의 조카로 나온 김태리, 이한열열사 역의 강동원 등의 스타들이 총출동하여 한 시대를 정리하는 수작을 만들어 내었다. 87년 그 모든 집회에 함께 참여하고 보았던 역사의 현장이지만 이렇게 한편의 서사시와 같은 영화로 압축하여 보니 더욱 감동적이었다.
한겨레21 특집 신년호(no. 1193)의 제목이 “평화의 창 평창-2018 평창겨울올림픽의 모든 것”이다. 평창을 평화의 창으로 말하며 평창이 열어 접히는 한반도 ‘평화의 문’에 대한 이야기를 전개한다. 마침 어제 김정은이 신년사를 통해 북한의 평창올림픽참가에 대한 가능성을 보여주어 평창이 평화의 창이 되는 것이 더욱 현실화되는 느낌이다.
김연철교수(인제대통일학부)는 “평창이 열어젖히는 한반도 ‘평화의 문’”에서 분단의 공간 평창이 남북관계 개선의 시작점이 되고 북핵 문제가 복잡하지만 올림픽으로 매듭을 풀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평창은 분단의 공간이다. 갈라진 한반도에서도 분단도인 강원도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분단의 땅에서 평화가 열리듯이 평창은 한번도의 기회이며 동시에 도전이다. 평창은 한반도에서 두 번째로 열리는 올림픽이다.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민주의 문을 열었듯이 2018년 평창올림픽은 평화의 문을 열어야 한다. 서울올림픽이 반쪽 자리 80년 모스크바, 84년 LA올림픽을 극복하고 통합올림픽이 되었듯이 새로운 평화의 올림픽이 되어야 한다. 체육행사가 의외로 정치적 관계를 회복하는데 전기를 마련해 준다. 미중관계를 연 핑퐁외교나 미국 쿠바의 관계개선에 작동한 베이스볼 외교와 같이 말이다. 1991년 일본에서 열린 세계탁구선수권 대회에서 남북단일팀인 ‘코리아팀’이 중국을 꺾고 우승했다(이것도 영화화 되었다). 만약 이번 평창올림픽에 북한이 참여한다면 남북교류의 문을 열고, 남북대화의 문도 열고, 북핵 해결의 문도 열린다. 평창에 이어 2020년 도쿄하계올림픽이나 2022년 베이징동계올림픽 열리는데 모두다 동북아시아에서 열리는 평화의 제전이다. 말하자면 동북아시아 평화 구축의 새로운 계기가 될 수 있기에 우리 모두 힘을 모아서 평창으로 가는 문을 열어야 한다.
정윤수교수(성공회대문화대학원)는 “더 나은, 더 많은, 더 넓은 평화를”이란 글에서 북핵 위기, 분단 국가라는 고정값에 평화가 소재로만 남발될 국가주의, 스텍터클에만 매몰되지 않는 평창의 ‘피스 인 모션’을 기대했다. 평창이 평화올림픽이 되기 위해서는 개막식 행사와 같은 이벤트도 대단히 중요하다. 대부분 개막식은 민족신화적 내러티브로 이루어져왔고(올림픽이나 아시안게임과 같은 대규모 행사에서는) 이루어 질 가능성이 많은데 전쟁과 분단, 독재와 민주화, 살인적 경쟁 등 당대의 삶의 조건에서 어떻게 실질적인 사회적 평화를 위해 노력했는지 관점이 필요하다. 그래서 스펙터클한 형식을 넘어, 행사의 준비 과정이 평화적이어야 한다.
스포츠계 자체가 과연 평화라는 주제를 제시할 만한 입장인가에 대해서도 고민이 필요하다. 한국의 스포츠가 냉혹한 경쟁의 세계로 폭력이나 금품수수와 같은 가시적 폭력과 엄격한 위계 질서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내동댕이쳐지는 비가시적 폭력까지 얼룩진 세계였다. 평창 이후, 과연 우리 스포츠계가 국가주의와 남성주의와 성적제일주의를 극복하고 ‘더 나은, 더 많은, 더 넓은’ 평화적이고 인권적인 환경을 조성할 수 있는가가 관건이다. 올림픽 이후에도 스포츠계의 오랜 적폐가 청산되지 않는다면 어떤 이벤트도, 심지어 북한의 올림픽 참가조차 하나의 구경거리이자 동북아의 정치적 이벤트에 그칠 뿐이다. 스포츠계 내부의 평화와 인권을 위한 노력이 풍성해 지고, 그 기반 위에서 스포츠에 의한 평화적 풍경이 사회 전반에 확산되며 그 결실로 국가대사가 펼쳐질 때 비로소 우리는 ‘평화’를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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