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헨리 조지의 생애
1. 가 족
헨리 조지(Henry George)는 1839년 9월 2일, 미국의 필라델피아에서 출생했다. 그의 부친인 리차드(Richard Samuel Henry George)는 웨일즈의 전통을 이어 받은 영국인의 혈통을 가졌으며, 모친인 캐서린(Catherine Pratt Vallance)은 스코틀랜드계 영국인이었다. 이들 부부는 10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딸이 여섯, 아들이 넷이었으며 조지는 장남으로서 둘째였다.
2. 소년기 : 취직 그리고 항해
조지는 정규교육의 혜택을 많이 받지 못했다. 14세까지 받은 학교교육이 정규교육의 전부였다. 아버지가 세관 서기직을 통해 벌어들이는 한 달 봉급 800달러를 생각하면서 그는 독립해야 겠다는 생각을 차츰 갖게 되었으며, 마침내 14살에 아버지를 설득하여 학교를 그만두고 돈을 벌기 시작했다.
조지는 비록 학교는 그만 두었지만 청교도적인 가정생활을 통해 성경에 대한 이해와 교양을 쌓았으며, 그리고 부친이 출판업을 했기 때문에 항상 책을 가까이하며 지냈다. 이러한 독서를 통한 바깥 세상으로의 동경은 호주의 멜버른, 인도의 캘커타 등으로 항해하게 된 지적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그 때가 1855년, 그의 나이 16세였다.
1년의 항해를 마치고 고향에 돌아온 후에도 바다에 대한 동경을 떨치지 못했으나 부친인 리차드는 조지가 다시 위험한 바다로 나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친구를 통해서 조지를 필라델피아의 「킹 엔 베어드(King & Baird)」출판사에 취직시켰다. 조지는 식자공으로 일하면서 철자법을 제대로 익힐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셈이었다. 이 경험은 또한 그가 캘리포니아에서 인쇄업을 할 때에도 도움이 되었다.
당시 주요한 사회문제는 노예문제였다. 반 노예정책을 표방하며 공화당은 1856년 존 프레몬트(John C. Fremont)를 후보로 내세워 대통령 선거에 나섰지만 노예제도를 지지하는 민주당의 제임스 부캐넌(James Buchanan)에 패했다. 그러나 4년 이후의 선거에서는 공화당의 아브라함 링컨(Abraham Lincoln)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856년 9월부터 1857년 6월까지 킹 엔 베어드에서 경험을 쌓은 후, 조지는 다시 아버지의 주선으로 또 다른 인쇄소에서 일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역시 임금이 만족스럽지 않아 그는 제안을 거절하였다. 조지는 여자 친구였던 엠마 커리(Emma Curry)와 그녀의 어머니인 레베카(Rebecca D. Curry)에게 자신의 사정을 이야기했고, 그들은 조지가 오레곤 주에 가서 일할 것을 제안하였다. 조지 역시 그 곳에 가기를 원했다. 평생의 직장으로 삼을 곳을 원하였던 것이다. 「머천트(The Merchant)」라는 주간잡지사에 자리를 잠시 얻기는 했으나 임시직이었기 때문에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으며, 오레곤이나 아니면 던킨(Dunkin George) 삼촌댁의 사촌이 살고 있는 캘리포니아로 가고 싶어했다. 그러나 당시의 교통은 매우 열악하였기 때문에 곧장 실천에 옮길 수는 없었고, 우선의 생계를 벌기 위해 그는 다시 바다로 나가야만 했다. 여기에는 경제적인 이유도 있긴 했지만, 아마도 집안의 엄격한 신앙생활과 규율을 벗어나고 싶었던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학교에서 정규교육을 받은 기간은 비록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는 독서를 무척 좋아했다. 친구들과 함께 「로렌스 문학모임(The Lawrence Literary Society)」을 만들어서 조그만 폐가에서 모임을 가졌다. 당시 조지가 쓴 「인생의 시(The Poetry of Life)」와 「몰몬니즘(Mormonism)」의 두 단편은 아직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자생적인 문학써클은 또 다른 성격을 갖고 있었다. 조지와 친구들은 서로의 우의를 시험하기 위해 레드 아이(Red Eye : 값싸고 독한 위스키의 종류.)를 마시기도 하고, 담배도 피웠다. 행동의 동기가 아무리 순수하였다 하더라도 술이나 카드놀이에 대해 알고 있다는 것 사실 자체가 엄격한 가정교육을 받아 온 그에게 있어서는 심각한 것이었다. 이러한 모든 것이 그가 더욱 독립적이기를 바랬고, 또 바다로 나가기를 원했던 이유들을 설명해 준다. 어찌 되었건 조지는 다시 잠시 배 여행을 하게 되는데, 필라델피아를 떠나 보스턴으로 떠나는 배에서 선원으로 근무했다. 미합중국의 증기선인 슈브릭(Shubrick)호에 탑승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지역구 의원이었던 토마스 플로렌스(Thomas B. Florence)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를 쓰는 열심을 보이기도 했다.
그 결과 조지는 슈브릭 호에 탑승하게 되었고, 그뿐만 아니라 한 달에 40달러를 받는 보급계 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선원들이 일반적으로 그렇듯이, 캘리포니아로 항해하는 조건에 대해서가 아니라 일년간 탑승한다는 조건으로 고용되었다. 1857년 12월 22일 그는 사랑하는 가족들과 작별인사를 나누고, 델라웨어 강을 따라 내려가 남 아메리카를 도는 긴 여행을 시작하게 되었다. 배는 리오데자네이로, 몬테비데오, 마젤란 해협, 발디비아, 파나마, 산디에고 등을 거쳤으며, 1858년 5월 27일 1백55일의 항해를 마치고 마침내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3. 캘리포니아에서의 경험
조지는 만일 오레곤주로 가는 것이 성사되지 않는다면 캘리포니아에 그냥 머물면서 돈을 벌 참이었다. 자신을 오레곤으로 초청한 커리부인의 편지를 기다리면서 며칠을 보낸 후 마침내 편지를 받았지만 그곳으로 오라는 말은 없었다. 조지는 일단 항구에 도착한 후 사촌형인 짐(Jim George)을 만났다.
조지는 그 곳에서 로드아일랜드 출신의 미국인 조지 윌버(George B. Wilbur)를 만나게 된다. 윌버는 당시 캘리포니아에 몰려든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돈을 벌고자 했다. 윌버와 조지는 곧 친해졌으며, 배경과 성향은 달랐지만 그들의 우정은 끝까지 지속되었다.
그 즈음의 6월에 대규모 금광이 발견되었다는 소문이 퍼졌다. 영국령의 미국 국경에 걸쳐 있는 프레져(Frazer)강 근처였다. 이러한 소문은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많은 사람들을 흥분시켰고, 농사보다는 일확천금을 바라는 많은 사람들이 모든 것을 내버려 둔 채 도시로 몰려 들었다. 당시 슈브릭 호의 항해장부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대부분의 선원과 직원들이 배를 버리고금광으로 떠날 정도였다.
오레곤에서는 격려가 될 만한 소식이 전혀 오지 않고, 샌프란시스코에서도 당장 무언가기회가 될 만한 것이 나타나지 않아 항해 때 벌어 두었던 몇 안 되는 돈마저도 거의 다 떨어져가고 있었을 즈음, 마침내 오레곤에서 소식이 왔다. 하지만 그 곳 사정이 사업하기에는 여의치 않다는 소식이었다. 조지는 샌프란시스코에서도 별다른 직업을 얻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단 금을 캐러 가기로 하였으며, 그것이 만일 실패하면 사촌형 짐과 함께 프레저 강 유역에서 금광업자들에게 공급할 의류상에서 일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일확천금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조지는 짐의 가게에 가는 수 밖에 없었다.
젊고 꿈에 가득 부푼 그였지만 모든 것이 제대로 되는 것이 없었다. 짐과의 사업도 잘 안 되자, 조지는 윌버와 합세하여 다시 금을 캐러 갈 계획을 짜고 있었지만, 이미 프레저 강에서는 매우 소량의 경제성 없는 금만 발견될 뿐이어서 포기하고 1858년 11월말 무렵, 19살 때 결국 샌프란시스코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
그는 일거리를 찾아 돌아다녔으나 계속 거절당했다. 이 때 필라델피아의 인쇄소에서 근무했을 때 알았던 한 사람의 도움으로 프랑크 이스트만(Frank Eastman)인쇄소에서 식자일을 맡을 수 있게 되었다.
조지는 코딩턴(Coddington), 호펠(Hoppel)이라는 두 젊은 친구와 또 그들을 통해서 몇 명의 여자 친구들도 사귀게 되었다. 코딩턴과 호펠은 신실한 감리교인이었는데, 특히 호펠은 그 동안 무감각해 있던 신앙에 대해서 신선한 생각들을 불러 일으켜 주었다.
1860년, 9월 2일, 그는 유레카 식자협회(Eureka Typographical Union)에 가입하였다. 그리고 견습공 수준의 임금을 받으면서 일간지의 식자공으로 일하였으며, 얼마 후출판자로 그의 이름을 낼 수 있는 「홈 저널Home Journal」로 가게 되었다.
4. 앤니와의 만남, 그리고 결혼
이 즈음 조지는 앤니(Annie Fox)를 만나게 되었다. 당시 그녀는 유망한 한 청년과 약혼해 있었으나, 조지의열정적인 구애에 이끌려 심경의 변화를 겪는 중이었다.
한편 1860년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이 승리를 거두게 되어 링컨이 당선되었다. 그리고 몇 주 후 사우스캐롤라이나 주는 합중국에서 탈퇴하였다. 그 뒤를 이어 미시시피, 알라바마, 죠지아, 플로리다, 그리고 루이지애나 주도 연방을 탈퇴했다. 조지는 다섯명의 다른 동업자와 함께 「이브닝 저널Evening Journal」을 만들었는데, 이 잡지는 미 합중국당의 지원으로 순조롭게 성장할 수 있는 여건을 가지고 있었다. 조지는 다른 동업자들과 동일한 지분으로 사업에 참여했으며, 전 시간을 회사운영에 투입하기로 동의하였다. 그러나 1861년 10월, 대륙을 횡단하는 전신이 완공되자 이브닝 저널이 누리고 있던 경쟁력이 급감하게 되었고 동업자들 중 조지를 포함한 세 명은 그 사업에서 물러났다.
조지는 그의 나이 22세에 18세 였던 앤니와 결혼을 한다. 신혼여행도 없이 식을 마친 후, 다음날 아침 5시에 조지는 밖에 나가서직장을 구하러 돌아다녀야만 했다. 그는 식자뜨는 일을 맡아 하루종일 일을 한 후 저녁에 또 나가서 직업을 구하러 다녔다. 이와 같은 불규칙한 직장생활을 통해서 하숙비 정도는 충당할 수 있었지만 여전히 어려운 생활이 지속되었다.
5. 여동생 제니의 죽음, 그리고 조지의 눈뜨는 신앙
조지의 가족은 모두들 새 식구인 앤니를 환영하여 맞이하였으나 여동생 제니의 건강이 악화되어 위급한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그녀와 조지는 매우 우애가 좋았기 때문에, 떨어져 있는 동안에도 서로간에 사랑과 신뢰가 담긴 서신왕래가 끊이지 않았다.
사랑스럽고 귀여운 여동생 제니가 죽게 되었을 때 그가 받은 충격은 대단히 큰 것이었다. 그녀의 사망소식을 전하는, 슬픔에 잠긴 어머니의 편지를 읽자마자 그는 흥분했을 때의 습관대로 벌떡 일어나 거실을 빠른 걸음으로 왔다 갔다 했다. 그는 사랑하는 그녀가 죽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으나, 이때 갑작스런 확신이 다가왔다. 반드시 또 다른 삶이 있어야 하며, 또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고. 영혼은 불멸일 것이라는 그의 느낌은 확신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간구였다. 이제 그는 영혼의 불멸을 믿기를 원했다. 그의 젊은 시절부터 신앙에 귀 기울이지 않았지만, 몇 년이 지나지 않아 그가 『진보와 빈곤』을 위한 연구를추구하기 시작했을 때 그는 "장엄한 단순성과 우주법칙의 말할 수 없는 조화"가 있음을 확신하게 되었으며, 이 후 영원이라는 개념은 확고한 신앙이 되었다.
6. 언론인으로서의 출발
조지의 결혼 초기의 생활은 경제적으로 무척이나 어려웠다. 그는 여러 가지 일을 닥치는 대로 했었다. 작가로서의 경력을 그가 시작하게 된 때는 그 어려운 생활이 거의 막바지에 이른 1865년, 26살 때였다. 식자일을 계속 하고 있었으나 또한 글을 쓰는 연습을 시작하였다. 그의 일기장에 적힌 습작들중에 처음으로 가장 중요한 글은 「시간사용에 관하여The Use of Time」라는 글이었다. 또한 「초자연성에 대한 주장(A Plea for the Supernatural)」을 썼는데, 이것은 곧 「캘리포니아(California)」지와 또 「이브닝 가제트(Evening Gazzette)」지에 실렸다. 이 후 그는 글 쓰는 것을 계속해서 훈련하게 되었다.
얼마 후에 「알타(Alta)」지가 그를 기자로 고용했는데, 그는 멕시코의 독립전쟁 취재를 맡게 되었다. 미국이 남북전쟁에 휩싸여 있는동안 나폴레옹 3세는 멕시코에 군대를 보내어 제국정부를 세우고, 오스트리아 출신의 막시밀리안 공을 왕위에 앉히려고 하였다. 그러나 후아레즈 휘하에 있는 멕시코 애국주의자들의 저항이 강력하였고 미국 역시 후아레즈를 동조하는 분위기였다. 조지는 후아레즈 당을 지원하기 위해 조직된 원정대에 합류한 가운데 취재를 하였다.
취재를 마치고 돌아온 후 「타임즈(Times)」라는 일간지가 샌프란시스코에서 창간되었을 때 그는 문필직에 응했지만, 1866년 11월 5일부터 우선 식자실에서 근무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는 시사문제에 대한 글을 계속 썼으며 초대 편집인이었던 제임스 맥클래치(James McClatchy)는 조지가 쓴 세 개의 글을 읽고서 잡지에 실어 주기로 했다. 「콘스탄티노플에게To Constantinople」가 잡지 창간 후 7일째 인쇄되었다. 나중에 조지는 「타임즈」의 기자로서 주당 30달러를, 논설위원으로서 주당 35달러를, 편집주간으로서 1867년 6월부터는 주당 50달러를 받게 되었다. 이 즈음, 그는 이미 가장으로써 두 명의 자녀를 거느리고 있었고, 곧 세 번째 아이를 가지게 되었다.
조지는 1868년 8월 12일까지 편집주간으로 일하였다. 그 기간동안에 정규적인 사무 외에, 하와이의 「가제트(Gazette)」지와 여러 신문사의 비상임 특파원으로도 활동하였다. 따라서 그의 소득은 과거 어느 때보다 많았으며 더욱이 이제 그가 하는 일들은 대화를 나누고 친구를 사귀고, 그리고 그의 영향력을 키우는 일들이 되었다. 「오버랜드 월간지(Overland Monthly)」에 1868년 10월에 기고한 「철도가 우리에게 가져다 주는 것(What the Railroad Will Bring Us)」라는 글은 당시 거의 완공단계에 있던 대륙간 횡단열차의 엇갈린 명암에 관한 글로서 문제를 정확히 꿰뚫어 보았다는 평을 받았다.
7. 뉴욕 근무
1868년 8월에 그는 「타임즈」지를 떠났다. 월급이 바랬던 만큼 인상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제필라델피아로 가고자 하는 오랜 동안의 계획을 실천에 옮길 수 있는 때가 되었다. 조지와 고향 친구 존 헤슨(John Hasson)은 필라델피아에 샌프란시스코「헤럴드(Herald)」지의 독립적인 기지국을 차려 사업을 시작하였다. 처음 얼마동안 기사를 보내주는 일이 순조롭게 되는 듯 했지만, 서부지역으로 보내는 전신료가 문제 및 사업 초기부터의 「헤럴드」지로 부터의 미송금 문제로 사무실을 철수하여 가족들을 데리고 다시 샌프란시스코로 떠났다.
8. 뉴욕에서 느낀 소명
30세 즈음에 되조지는 거대한 도시 뉴욕에 존재하는 부와 빈곤을 비교하면서 경제사회의 진보로 인해 빈곤의 문제가 결코 해결되지 않는 이유를 캐묻기 시작했다. 빈곤과 결핍은 물자가 부족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문제라는 식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의 생각에는 창조되는 그 어느 곳에나 질서가 있다고 확신했다.. 그리고 아직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그는 자연법적인 질서를 찾고자 하는 임무에 스스로를 헌신하기로 한다. 1883년 2월 1일자로 아일랜드의 토마스 도슨Thomas Dawson 목사에게 당시를 회상하면서 쓴 편지는 다음과 같다.
"당신은 나의 벗이며, 또한 사제이자 종교인이기 때문에 제가 말하고 싶지 않은 그것에 대해서도 말하고자 합니다. 전에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어느 날, 대낮이었는데 시내 거리에서 그것들이 하나의 생각, 하나의 비전, 하나의 소명으로서 나에게 다가왔습니다. 그것을 무엇이라 하든지 간에 당신께서 편리한 대로 부르십시오. 그러나 저는 온 신경이 다 떨렸습니다. 그리고 그 때 그곳에서 저는 맹세를하였습니다. 선을 통하여, 그리고 악을 통하여 제가 무엇을 했고 무엇을 하지 못했든 제 자신이 진실해지기를."
9. 최초의 실마리 발견
샌프란시스코에 다시 돌아온 조지는 「헤럴드」지에서 편집과 식자업, 그리고 몇 편의 글들을 쓰는 한 편, 국회 민주당원의 지명을 얻기 위해 활동하였다. 조지는 뉴욕에서의 경험을 통하여 전신·통신회사, 철도회사의 독점적 횡포를 막는 투쟁을 벌이고자 했으며, 캘리포니아의 전체가 대규모로 부동산 투기장화 하는 것을 막고자 했으나 이는 민주당원의 지명을 얻지 이루어 지지 않았다. 만일 당에서 요구한 정치후원금을 냈더라면 지명되었을 것이다. 동부지역에서 귀환한 후 이와 같은 일련의 실패를 계속 경험했다. 안정된직업을 아직 구하지 못했으며, 진보와 빈곤에 관해 연구하고자 했던 것도 제대로진행시킬 처지가 못되었다. 이제는 그날그날의 생계를 걱정해야 할 처지가 되어서 그의 정치적인 목표를 일단 내려놓아야 했다.
마침 민주당 계열의 「트랜스크립트(Transcript)」지는 조지의 정치적 성향과 중국인에 관해 쓴 글을 보고서 그가 바로 그들이 찾던 사람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편집위원의 자리를 제안하였다. 조지는 그 제안을 받아들여 우선 안정적 수입을 확보한 다음에 이전부터 연구하고자 했던 문제 - 빈곤이 발전하는 문명사회에서 진보와 함께 하는 이유 - 를 계속 탐구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는 대륙횡단열차가 완성되어 순금으로 만들어진 못이 종착지 철로에 기념 삽입된 지 수개월이 채 지나지 않은 시기였다. 캘리포니아의 기존 종착지인 새크라멘토에서 오클랜드까지 확장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한계지 가치가 급상승했고 사람들은 열차가 들어 오는 것에 따른 인구의증가를 통한 토지가치 상승을 기대하며 가능한 한 토지를 많이 구입하려고 하였으며, 토지보유자가 '토지미보유자'로 속이는 상황도 허다했다. 결국 토지에 대한 투기는 그것의 실수요를 앞질러 버렸고 땅값은 폭등했다.
이 즈음, 어느날 조지는 말을 타고 산책을 하다가 문득 언덕위로 올라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생각에 몰두한 채, 나는 말이 헐떡거릴 때까지 언덕위로 올라갔다. 말이 잠깐 숨을 돌리도록 멈추고 나서, 나는 지나가던 짐꾼에게 어느 땅이 그곳에서 가장 비싸냐고 물어 보았다. 그는 풀을 뜯고 있는 소가 마치 쥐처럼보일 만큼 멀리 떨어진 곳의 소떼들을 지적하면서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만, 저기에 일 에이커를 일천달러에 팔려는 어느 사람이 있습니다.'라고 했다. 그 때 문명의 발전과 함께빈곤도 발전하는 이유가 마치 번개같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인구의증가와 함께 토지의 가치는 증가하고, 노동자는 그 대가로 더욱 많은 값을 지불하게 된다."
10. 정치적 활동의 시작
그러는 동안에 주지사였던 헤이트의 정치적 계획은 차츰 무르익어 갔다. 그는 당시 샌트럴 패시픽(Central Pacific) 철도회사의 막대한 독점적 지위에 대해 우려하면서 이를 막고자 정치활동을 벌였다. 철도회사에 보조금을 지불하는 정책을 반대했던 헤이트는 주요한 당 언론지인 「새크라멘토 리포터(Sacramento Reporter)」의 경영을 조지가 맡도록 제안하였다. 조지는 이 제안을 받아들여 「트랜스크립트」지를 떠나 1870년 2월에 세크라멘토로 이사하였다. 조지는 글을 써서 철도회사와 대립하는 헤이트를 지원하고 있었다. 1871년 6월, 샌프란시스코의 민주당회의는 조지를 비서관으로 지명하였고, 헤이트를 주지사 선거 후보로 재 지명 하였다. 8월 10일에 조지는 샌프란시스코 지구의 의원공천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대규모철도회사의 공격은 막강한 것이었고, 헤이트의 선거본부는 완전히 패했다. 조지 역시 샌프란시스코에서 패하였다.
11. 토지에 관한 첫 저술
정치적으로 어려운 과정 중에서도 조지는 일전에 자신을 두고 맹세한 바를 꾸준히 지켜 왔다. 1871년 3월 26일 주일날 저녁에 쓰기 시작한. 『우리의 토지와 토지정책, 국가와 주』라는 글에서 이미 그의 『진보와 빈곤』에 나타나는 논리와 결론의 맹아가 보이기 시작한다.
1871년, 조지는 윌리엄 힌튼(William Hinton)이라는 사람과 함께 「데일리 이브닝 포스트(Daily Evening Post)」신문사를 만들었다. 그는 편집을 맡았다. 1872년 7월초, 메릴랜드 볼티모어에서 열리는 민주당 회의에 대표로 선출되어 필라델피아를 거쳐서 그곳에 가게되었다. 캘리포니아 대표단의 비서관으로 선출된 것이다. 일련의 정치활동과 함께 조지가 발간하는 이 신문은 과감한 개혁을 내세우는 신문으로 평가되었으며, 샌프란시스코의 의식 있는 시민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네바다주의 합중국 상원의원이었던 존스(John P.Jones)는 신문사를 하나 만들 계획을 조지에게 내비쳤고, 이에 조지는 뉴욕의 벌록 사(Bullock)와 계약을 맺어 사업을 확장하였다. 조간신문을 창설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며칠 후 버지니아 시와 네바다에서 대형화재가 발생하여 자금의 유통사정이 좋지 않게 되었고, 이 때 존스 의원은 대출금을 상환하거나 아니면 조지의 신문사를 넘길 것을 요구하여서 마침내 그들은 그 신문사에서 손을 떼게 되었다. 조지는 이 후 주지사 어윈(Irwin)에게 자신이 조용하게 글을 쓰면서 보수를 받고 일할 수 있는 직장을 가질 수 있도록 요청하였고, 주지사는 자신의 선거운동에 기여하였던 조지를 위하여 가스 검사관직을 제공하였다. 조지는 비록 간헐적이지만 그 곳에서 호사스럽지 않은 정도의 생활을 위한 수입을 얻게 되었다.
12. 신앙생활
사상적으로 편협 되어 있지 않은 조지는 그의 아내와 아이들이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자유롭도록 했으나 그 자신은 어느 교회, 어떤 종파에도 속하고자 하지 않았으나, 하나님에 대해 매우 강한 외경심을 갖고 있었다. 아이들이 밤과 아침기도를 하는 것을 바랬으며, 서재에 누워있는 동안 아내와 아이들이 찬송가를 부르는 것을 듣기 좋아했다. 풍요와 함께 왜 빈곤이 존재하는지에 대한 대답을 구하면서부터는 종교는 새로운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지로 인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규율을 어겼기 때문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신의 섭리라고 가르치거나 다른 한 편으로 무자비한 숙명이라고 가르치는 종교에서 벗어나기를 원했다.
13. 캘리포니아 대학에서의 강연
1877년 캘리포니아 대학은 당시 별도의 정치경제 학부가 없었다. 대학은 그의 여러 글들을 통해서 교수로서의 자질을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경제학부를 만들고 그 자리에 조지를 청할 예정이었다. 대학은 조지에게 강연을 요청하였는데 그 강연은 일종의 교수직 수락연설과 같은 것이었다. 3월 9일, 대학 총장이었던 콩트(Le Conte) 교수와 오찬을 가진 후, 학생들과 대부분의 교직원들이 모인 강당에서 연설을 하였다.
그의 강연은 학생이나 일반 청중들로부터 호응을 받았지만, 정치경제학 및 기존 학문에 대한 그의 논조로 인해 교수들이 좋아할 리 없었다. 캘리포니아 대학에서의 강연으로 말미암아 그는 오히려더욱 학계와는 거리가 멀어졌다. 물론 그에게 주어지고자 했던 교수직에 관해서도 이후 한 마디 말도 없었다고 한다.
14. 『진보와 빈곤』을 집필하다
1877년 9월 18일, 그의 노트일기장에 다음과 같은 간단한 글이 있다.
'진보와 빈곤' 시작하다
당시 미 전역은 산업불황으로 말미암아 고통을 받고 있었고 이에 따른 각종 파업 및 폭동, 이를 위한 폭력적 진압 등올 미국의 대다수 도시가 사회적 무질서에 빠져 있었다. 캘리포니아도 예외가 아니었다. 게다가 캘리포니아는 가뭄까지 겹쳐 불황이 더욱 악화되었다. 샌트럴 패시픽 철도회사는 임금을 삭감하고자 했고, 노동자들은 이에 대응하여 노동운동을 벌였다.
조지는 처음에는 진보와 빈곤이라는 주제에 관하여 잡지에 낼 사설을 쓰고자 했다. 그는 일단 초고를 마친 후, 절친한 친구였던 테일러(Edward R. Taylor) 박사에게 글을 논평을 부탁했다. 그리고 그 외의 사람들에게도 비평을 부탁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깊은 인상을 받고 조지에게 좀 더 내용을 확대하여 써 보라고 했다. 조지는 그 작업이 쉽지 않은 것은 알았지만, 자신 역시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에 우선 지대문제를 살피는 것에서부터 출발하였다.
같은 해 10월 2일 그는 네 번째 아기를 얻어서 그는 이 제 해리(Harry), 딕(Dick), 제니(Jennie) 그리고 안젤라(Anna Angela), 네 자녀를 거느린 아버지였다.
조지의 친구들 중 몇 몇은 그의 생각에 찬성하는 의미에서 조지가 제시하는 원칙들을 기초로 하여 모임을 결성하고자 했다. 1877년 말, 그들은 조지를 만나 『우리의 토지와 토지정책, 국가와 주』의 경제적 측면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러한 모임이 연속적으로 이루어지는 가운데 캘리포니아 토지개혁 연맹이 결성되었다. 연맹은 토지독점의 철폐를 목적으로 하고 있었으며, 조지의 사상을 세상에 확산하고자 하는 첫 조직으로 만들어지게 되었다. 변호사인레겟이 회장을 맡았고, 신문기자인 머피가 서기를 맡았다.
『진보와 빈곤』을 쓰면서 가끔씩은 강연을 하였지만 그때를 제외하고는 계속 반복하여 교정하고, 내용을 추가하고, 축약하고, 세련되게 문장을 다듬는 등 집필에 매달렸다. 글쓰기에 대한 그의 좌우명, '읽기 쉽도록 글을 만드는것은 고된 글쓰기를 통해서'에서 알 수 있듯이 다른 사람들이 편히 읽을 수 있도록 자신과는 힘들게 인내싸움을 하는 과정이었다.
세상을 놀라게 할 책을 쓰고 있는 그였지만 정작 자신은 그것을 예상하지 못했다. 다만 진실을 적고 있다는 사실이 그로 하여금 지속적으로 글을 쓰도록 재촉했다. 이러한 내적인 갈등과 함께 외부적인 압력과 싸움, 빚과 그 외의 여러 어려움들도 겹쳐 있었다. 한 때는 급히 현금이필요하여 시계를 전당 잡히기도 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1879년 3월 중순에 그는 일단의 작업들을 마치게 되었다. 일을 시작한 지 일년 반 만이었다. 그의 다른 저서인 『정치경제학』서문에서 그 날 밤의 경험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내가 『진보와 빈곤』의 마지막 장을 끝냈던 그 날 밤에 나는 자신에게 맡겨진 달란트가 이것이구나 하는 것을 느꼈으며, 내 발 아래에 세상 모두가 놓여있는 것 이상의 완전한 만족감으로 깊은 감사를 느꼈다."
15.『진보와 빈곤』출간의 어려움
원고를 몇 번 더 수정하고 재차 협상 끝에 마침내 뉴욕의 애플톤 사(D. Appleton & Co.)와 계약을 맺게 되었다. 조건은 그 책을 1권당 2달러에 팔아서 14%의 로열티를 조지에게 주는 것이었다.
처음 자비로 출판한 몇 부를 조지는 몇 명의 사람들에게 우편으로 보냈다. 그 중에는 토지문제에 대해 급진적인 경향의 연설을 하였던 글래드스톤(Gladstone), 뉴질랜드의 조지 그레이(George Grey)경, 허버트 스펜서 등도 있었다. 스펜서로부터는 아무 응답이 없었지만, 글래드스톤은 감사의 말과 함께 토지문제를 위해 조지가 보인 열의에 공감을 보였다. 그레이 경은 조지의 글을 매우 높이 평가하고, 자신에게 큰 도움이 되는 것으로 인해 고마움을 표시했다. 그 외의 여러 곳으로부터 격려의 소식이 있었다. 그러나 정작 고향에서의 반응은 느렸다. 「샌프란시스코 이즈재미너(SanFrancisco Examiner)」와 「새크라멘토 비(Sacramento Bee)」는『진보와 빈곤』에 대한 평은 별달리 없이 축하의 뜻을 표했다. 대부분의언론들은 조롱하는 투의 침묵 아니면, '어린 조지(little George)'의 취미작이라고 경멸하였다.
애플톤 사로부터 회신이 왔는데, 영국에서 책을 출판할 업자를 물색하는데 실패했다고 전하였다. 영국에서는 기존 정치경제학이 가르치는 바에 대해 적대적인 이 책을 인쇄하기를 꺼려했다. 상황이 별로 개선되지 않고 있는 이 즈음에 게다가 그가어윈 주지사의 도움으로 얻었던 가스 검사관 자리도 어윈이 물러가고 공화당의 조지 퍼킨스C. Perkins가 들어서자 내놓아야 했다. 그의 생계는 더욱 어려워지게 되었다. 오랫동안의 과로와 신경피로 때문에 경련, 담즙, 방광병이 생겨서 휴식을 취하도록 의사가 권하였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은 형편이었다. 당시 캘리포니아의 경제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거리에서는 한 블록만 걸어가도 10센트를 구걸하는 사람들을 여럿 만나기가 일쑤였다.
모든 상황이 그에게 우호적이지 않은 이때에 뜻밖의 소식도 있긴 했다. 구쵸프(C.D. F.von Gutschow)라는 독일인이 캘리포니아에 와 있었는데, 우연히 『진보와 빈곤』을 읽고서 감명을 받아 그 책을 독일어 판으로 출판하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조지는 그가 성의껏 번역해 주는 것을 조건으로 허락을 하여, 『진보와 빈곤』의 첫 외국어 판이 나오게 되었다.
이 무렵에 뉴욕의 「헤럴드」지가 자리 하나를 제공했다. 신문사는 조지가 사무실에 얽매이지 않고 그 자신을 위해 더 많은 시간을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가족들을 미국 동부에 한꺼번에 데리고 가기에는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우선 조지 자신만 먼저 뉴욕으로 떠났다.
『진보와 빈곤』은 처음에는 2달러에 팔렸으나 나중에 1달러로 팔리게 되었지만 그래도 판매부수는 얼마 되지 않았다. 하지만 『진보와 빈곤』을 격찬한 사람들 중에는 존경받는 유명인사들도 상당수 있었는데 그 중의 한명이 상당한 재력가이기도 한 휴잇(Abram S. Hewitt) 의원이었다. 그는 국회에 내고자 하는 위원회 보고서를 작성하기 위하여 조지의 도움을 받고자 조지를 잠시 청했다.
16. 아일랜드 토지개혁 운동에의 참여
1881년에 접어들면서부터 그의 책은 세간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주문이 매 분기마다 쌓일 정도로 곳곳에서부터의 호응이 좋았다. 조지는 아일랜드의 토지문제에 관한 사설을 썼다. 1879년 4월 20일, 『진보와 빈곤』완성 후 몇 개월 안 지났을 때, 아일랜드 독립운동으로 7년의 징역을 마치고 석방된 마이클 데빗(Michael Davitt)이 아이리쉬타운(Irishtown)에서 대중집회를 가졌다. 그들은 "인간을 위한 토지"를 부르짖으면서 지주들의 폭정에 대항하고 나섰다.
1879년 가을 더블린에서 아일랜드민족토지연맹(Irish National Land League)이 결성되었다. 연맹의 당면한 목적은 강제지대를 감소시키는 것이었다. 연맹은 자금을 모으기 위해회장이었던 팔넬과 총무 데빗을 미국에 파견 보냈다. 그들은 62개의 도시에서 연설집회를 가졌고, 위싱턴 국회에서도 연설을 하였다. 그리고 1880년 3월 미국을 떠나기에 앞서 아일랜드 연맹의 지원기구 격으로 미국토지연맹(American Land League)을 조직했다.
조지는 데빗이 1880년 가을, 토지연맹 사업차 미국에 왔을 때 그를 만났고, 데빗은 『진보와 빈곤』의 출간을 영국에서도 적극 추진하겠다고 약속했다. 조지는 「아일랜드 토지문제:문제의 성격과 해결방안)The Irish Land Question: What It Involves, and How Alone It can be Settled)」라는 글을 통하여, 유일한 해결책은 토지의 공유원칙을 따르는데 있음을 입증하고자 했다. 터무니없는 강제적인 지대를 부과하는 지주 계급들이 그동안 누려왔던 것들을 토지가치세라는 수단을 통하여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으로 돌려야 한다고 말했다. 결국 조지는 1881년 10월 15일, 토요일에 그의 아내와 두 딸들을 데리고 리버풀을 향해 떠났다.
「프리맨즈 저널(Freeman's Journal)」의 소유주인 에드워드 그레이(Edward D.Gray)의 요청으로 그는 처음으로 영국에서 강의를 하게 되었다. 1881년 11월 14일에 있었던 강의는 대성공을 거두어 관중들의 반응은 매우 열광적이었다. 더블린에서도 강의가 이어졌다.
『진보와 빈곤』과 「아일랜드 토지문제」의 저자로 널리 알려진 조지는 영국에서 사람들을 사귀게 되는데 별 어려움이 없었다. 특히 조지는 밀의 의붓딸인 헬렌 테일러(Helen Taylor)를 알게 되었다. 그녀는 만약 밀이 살아있더라면 아일랜드에서의 소작농 투쟁에 참여했을 거라고 믿고 있었다. 그리고 『진보와 빈곤』이 비록 밀 자신이 이전에 가르쳤던 것과 일면 모순되는 내용들도 담고 있지만 분명히 찬사를 표하는 사람들 중의 한 명이 되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조지는 런던언론계의 오랜 지도급인사중의 한 명이었던 힌드만(Hyndman)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아일랜드의 운동에 대해 매우 동조적이었다. 사회주의자이기도 했던 그는 민주연립의 의장이기도 했으며 그 사상을 영국에서 확산시키고자 했다. 그는 조지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는데 관심을 가졌다.
17. 허버트 스펜서와의 만남
이 무렵에 조지는 허버트 스펜서도 만나게 되었다. 아일랜드의 문제와 관련해서 조지가 영국정부를 비난하고, 토지연맹을 칭찬하자 스펜서는 격렬히 분개하면서, 토지연맹은 사람들을 꾀어서 지주들이 권리상 당연히 누릴 지대의 지불을 거부하도록 하고 있다고 했다. 이것은 『사회정학(Social Statics』에서 형평성을 위해서 토지소유가 허용될 수 없다고 말했던 저자가 말하리라고는 예상할 수 없던 내용이었다. 조지는 매우 놀랐고, '이 문제에 관하여 우리가 동의할 수 없는 증거'라고 말하는 것 말고는 어찌할 수 없어 그는 자리를 떠났다. 조지는 깊은 상처를 받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8. 아일랜드 토지운동의 심화
조지가 아일랜드로 출발하기 전 뉴욕에 있었을때 프란시스 셔(Francis G. Shaw)라는 거부가 1천권의 『진보와 빈곤』을 구매하여 그것을 미국 전역의 도서관에 비치하려고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셔와는 이 때부터 서신왕래가 있었는데, 그는 영국에 있던 조지에게 500달러를 전달하기도 하는 등 재정적으로 지원하는데 힘썼다. 어느날 셔로부터 소식이 왔는데, 자신보다더 재력가인 익명의 거부로부터 『진보와 빈곤』의 보급을 위하여 3,000달러를 기부하기로 신청했다는 것이다.
1882년 6월 6일, 리버풀에서 데빗은 팔넬의 반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강연을 하였다. 그는 토지의 국유화를 주장했다. 데빗은 방법론적인 면에서 세금을 통한 토지가치의 흡수라는 조지의 방법을 택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는 알프레드 왈라스(Alfred Rusell Wallace)류의 토지매입 방식에 가까웠다. 시가의 절반 수준으로 토지를 구입한다는 것은 사회주의자들에게 있어서는 그들의 방식을 택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당시 조지는 방법의 적용을 부차적인 문제로 여겼고, 토지의 공유라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으므로 데빗을 적극 지지해 주었다. 팔넬과 그의 세력들은 조지가 데빗을 지원해 주는 것을 불만족스럽게 여겼기 때문에 그를 '미국인', '대도시에나 맞는 정치가'로 칭하면서 아일랜드인의 민족적인 감정을 부추겼다.
미국 시민 조지는 아일랜드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환대 받은 것은 아니었다. 토지연맹에 있는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고집스럽다는 아일랜드인답게 그들은 외지인의 충고를 즐겨 들으려고 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영국 정부당국도 조지를 계속 감시하고 있었고, 그는 두 번이나 체포되는 경험을 하였다. 한 번은 경찰의 실수로 체포되었지만, 두 번째는 그의 서적과 글에 나와 있는 사상들 때문이었다. 그는곧 석방되었다. 그러나 그의 체포소식은 그에게 있어서 호기로 작용하였다. 영국본토와 아일랜드의 신문들은 이 소식을 기사로 다루었으며, 그가 『진보와 빈곤』과 「아일랜드 토지문제」를 출간하고자 하는 것과 때를 맞추었다. 초판으로 1만 2천권의 『진보와 빈곤』이 인쇄되었으며, 2천 권은 무상으로 배포되었다. 런던의 「타임즈(Times)」지는 정기적으로 『진보와 빈곤』에 대한 사설을 썼다. 한편 태평양 건너 멜버른에서는 1,300권, 뉴질랜드에서는 300권이 주문되었다.
1882년 초 런던에서 토지국유화협회(Land Nationalisation Society)가 조직되었다. 협회의 회장은 왈라스였다. 협회회원의 대다수는 왈라스와 마찬가지로 사회주의적 접근방법을 통해 토지의 강제매수를 주장하는 사람들과, 그리고 조지처럼 토지에 대한 보상은 없지만 세금을 통해 토지를 공유화하는 방법을 주장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후자의 그룹에 속하는 사람들은 위 조직에서 이후 이탈하여 토지개혁조합(Land Reform Union)을 독립적으로 결성하였다. 어쨌든 조지는 토지국유화협회에서의 초청강연을 수락하여 런던에서의 첫 연설을 하게 되었다. 조지는 영국을 떠나기 얼마 전에 영국국교 성직자 모임에서 자신의 정책에 관해 연설하고 질문에 답하는 3시간의 시간들을 가졌는데, 그는 이 모임의 결과에 대해서 매우 만족하였다. 그가 영국에 더욱 머물도록 요청하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자신이 할 일은 다 했다는 생각으로 1882년 10월 4일 가족과 함께 뉴욕으로 떠났다.
19.뉴욕으로의 금의환향
1년 전에 그가 뉴욕을 떠나 아일랜드로 출발할 때는 사람들이 거의 알지 못하였다. 하지만 이제 그는 유명인사가 되었다. 신문들은 그를 다투어 기사로 썼으며, 노동 조합들도 환영하며 나섰다. 아일랜드의 도슨 목사에게 쓴 편지에는 '선지자는 심지어 자기 고향에서도 존경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썼을 정도였다. 뉴욕에 돌아와서 조지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에드워드 맥글린(Edward McGlynn) 신부를 방문하는 것이었다.
일전에 맥글린 신부는 아일랜드에 와서 토지문제에 관하여 연설을 한 적이 있었다. 그는 뉴욕에서 가장 큰 교회중의 하나인 성 스테판 카톨릭 교회의 신부였는데, 토지문제에 관해 개인적으로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데빗의 요청으로 아일랜드로 가서 연설을 하기도 했는데, 연설 중에 조지에 대해 적극적인 지지를 표명했었다. 맥글린 신부는 『진보와 빈곤』과 그 저자인 조지와 강한 일치감을 이루고 있었다. 이 즈음, 조지에게 많은 도움을주었고, 영국의 토지운동에도 재정적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프란시스 셔가 숨을 거두었다.
조지와, 친한 몇 몇 동료들이 뉴욕에서 「자유로운 땅 모임(Free Soil Society)」을 만들었다. 토지를 투기로부터 자유롭게 하자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법률가, 목사, 변호사, 교수, 언론인 등 다양한 회원으로 구성되었다.
셔가 조지에게 남겨준 1천달러의 자금으로 인해 그는 관세문제에 관해 책을 쓸 수 있었다. 관세문제는 조지는 관세문제에 관해 글을 쓰면서도 실은 목적은 딴 데 있었다. 그는 관세에 관한 문제는 바로 토지에 관한 문제라는 것을 노동자 계층에게 보여주기를 원했던 것이다.
20.『사회문제』집필
예일 대학교의 정치경제학 교수인 윌리엄 섬너William G. Sumner의 책임 하에 전집물을 내는 계획이 있었는데, 조지에게도 원고청탁이 들어왔다. 조지는관세에 관해 쓰는 글을 잠시 멈추고 당대의 사회적 문제를 자신의 관점에서 다루는 것에 초점을 옮겼다. 제목은 「오늘날의 문제(Problems of the Time)」로 붙였다. 그 책은 여러 개의 논문으로 구성될 예정이었는데, 네번째 글 '(토지)집중의 행진(The March of Concentration)'에서는 토지소유의 규모가 확실히 커져 가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1870년과 1880년에 관한 미국 센서스보고서가 영농규모가 감소하고 있다고 보고한 것은 잘못된 것으로서 신뢰할 수 없다고 지적하였다. 조지는 완성한 글을 단행본의 형태로 출간하여 각 논문을 하나의 장으로 구성하고 여기에 추가 또는 교정을 더하여 『사회문제Social Problem』이라는 이름으로 프란시스 셔에게 헌정했다.
21.영국으로 다시 가다
영국의 토지개혁조합은 조지가 다시 와서 후원연설을 해 주기를 요청했다. 조지는 『사회문제』의 집필을 마무리하는 대로 그곳으로 가기로 했다. 그가 영국에 도착 했을 때 그는 4만권 이상 팔린 『진보와 빈곤』으로 더욱 유명해져 있었다.
조지가 리버풀에 도착한 것은 1883년 12월이었다. 그는 데빗을 만났다. 당시 데빗은 토지국유화를 열정적으로 주장하고 있었으며 아일랜드인들의 이와 같은 요구에 대해 대내외적인 인식을 제고시키기 위하여 영국에서 폭발적인 운동을 준비하고 있었다. 조지는 버밍햄에서 밤을 새우고 『진보와 빈곤』의 영국 보급책임자인 토마스 워커(Thomas F. Walker)를 만나 협의한 후 런던으로 올라갔다.
22. 사회주의자들과의 마찰
토지개혁조합을 움직이는 은 조지가 참여할 캠페인을 조직했다. 영국 본토의 주요 도시와 마을 대부분에서 연설할 예정이었으며, 캠페인은 1884년 1월 9일 런던의 성 제임스 홀에서 시작될 계획이었다. 그러나 조지는 이에 앞서 두 가지의 문제를 해결하여야만 했다. 첫째는 사회주의자들과의 관계였고, 둘째는 토지보상에 관한 문제였다.
토지개혁조합의 몇몇은 칼 마르크스의 사회주의를 따르고 있었다. 이들 두 사람들은 조지가 자신의 개혁에 사회주의 정책을 포함시킬 것과 토지의 공유뿐만 아니라 기계류를 포함한 모든 자본의 국유화를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조지는 미국에 있었을 때 토지개혁조합이 자신의 정책에 관하여 연설해주기를 요청했기 때문에 이 곳에 온 것이며, 만일 그것이 싫다면 그것은 싫어하는 사람의 문제일 뿐이라고 응답했다. 사회주의운동의 지도자인 힌드만은 이때부터 조지에 대해 은근히 반대하기 시작했다.
23. 토지보상문제에 관한 마찰
조지가 해결해야 할 다른 문제는 토지의 몰수 또는 토지보상에 관한 문제였다. 그는 『진보와 빈곤』에서 보상없이 토지가치세를 부과하여 지대를 공유화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토지보상에 관한 확실한 연설이 있다.
"보상이요? 예, 저는 지주들에 대해 보상해 준다는 것이 마음에 듭니다. 그리고 이것은 매우 쉽게 합의될 수 있습니다. 먼저, 지주들이 국가에 찰스 2세 시대-그 때부터 그들은 거의또는 전혀 지불하지 않았습니다-때부터 그들 토지의 실제가치에 대하여 1파운드당 4실링의 세금을 지불하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또한 그 동안 보류되었던 돈에 대해 복리의 이자로 국가에게 지주들이 지불하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이 거대한 기금으로부터 우리는 현재의 개별적인 경우마다 보상할 수 있습니다."
24.영국에서의 캠페인 본격 시작
성 제임스 홀에서의 강연은 성공적이었다. 이어서 플리마우스와 카르디프에서도 연설을 가졌다. 그리고 카르디프에 이어서 브리스톨과 버밍햄에서 연설을 하였다. 청중들은모두 조지의 강연을 듣고 큰 박수로 호응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성공에는 항상 또 다른 반대가 있기 마련이었다. 자유당 정부와 팔넬의 세력들은 조지를 터부시했다.
조지는 스코틀랜드로 갔다. 스코틀랜드에서 있었던 조지의 강연들 중 일부는 경건한 사람의 기도로 시작하여 기도로 마쳐졌다. 그의 강연은 모두 성공적이었지만, 글래스고우에서 두 번 있었던 강연 역시 대성공이었다. 사람들은 그들이 방금 들었던 내용에 대해 선교사적인 열정으로 나아갔다.
25.옥스포드 경제학계와의 만남
이 후 조지는 영국 옥스포드로 갔다. 그는 온갖 종류의 반대, 계급갈등, 지역적 편견, 그 밖의 어려움을 예상하였다. 조지는 막스 뮬러F.Max Muller 교수의 초청으로 왔기 때문에 예의를 갖춘 대접은 받았으나, 연설 중에 청중의 중간정도에 앉아 있던 학생들로 보이는 젊은이들의 조소와 여러 잡음 속에서 강연을 진행해야만 했다.
그의 강연이 끝나고 나서 알프레드 마샬(Alfred Marshal)로부터 시작해서 그에 대한 비난은 뮬러 교수의양자인 코니비어(Conybeare)에서 절정에 달했다. 하지만 코니비어는 사실 『진보와 빈곤』을 한 번도 읽어 본 적이 없었으며, 그 내용에 대해도 적절히 판단할 수 없었다고 한다.
케임브리지에서의 강연은 옥스포드 때보다는 훨씬 조용하고 단정하게 진행될 수 있었다. 청중들도 많았으며, 토지가치세의 원리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질문들도 있었지만 예의를 갖추었다. 그렇다고 헨리 조지가 경제학계 일반적으로 터부시된 것은 아니다. 그의 업적과 탁월한 지성은 헨리 조지 당대보다는 그 이후의 학자들에 의해 보다 인정 받았다.
26. 맨닝 추기경과의 만남
영국본토에 있는 동안 몇 명의 사람들을 만났다. 카톨릭의 「위클리 리지스터(Weekly Register)」의 편집장 메이넬(Meynell)이 조지를 맨닝(Manning) 추기경에게 소개하였다.
27.계속된 강연
미국으로 돌아온 조지는 뉴욕에서 짬짬이 연설을 하면서 관세문제에 관한 글을 마무리 짓고 있었다. 어린시절 친구였던 뉴톤(R.Herber Newton) 목사의 요청으로 디트로이트의 성공회 제9기 회의에서 "우리의 문명화가 노동자들에게 정의로운가?"라는 주제로 연설을 하였다.
스코틀랜드의 토지회복연맹(Land Restoration League)도 조지에게 회신을 보내어 그 곳에서 연설해주기를 요청했다. 캠페인에 많은 관심을 유도하기 위해서 영국 연맹의 후원 하에 런던의 성 제임스 홀에서 대규모 집회를 열었고, 이어서 11월 21일부터 글래스고우의 시티홀에서부터 스코틀랜드의 집회를 가졌다. 조지의 연설이나 그의 서적은 영국과 아일랜드 내에서 꾸준한 영향을 미쳐 매일 언론들이 그를 다루었다.
고국으로 돌아오면서 조지는 몇 차례의 강연계획을 잡았다. 그러나 강연시기로는 좋지 않았으며, 두 세 차례의 연설이 있었지만 재정적으로는 적자였다. 그래서 그는 다음 해 1886년 여름 때까지 집필에 몰두하였다. 이 무렵에 그는 31세의 자수성가한 부유한 철도사업가였던 톰 존슨(Tom L.Johnson)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조지의 『사회문제』를 우연히 읽고서 『진보와 빈곤』까지 읽게 되었다. 자기 자신이 부를 누리게 해주는 독점적 지위를 위태하게 만듦에도 불구하고 그는 조지의 정책을 받아들이고 뉴욕에 갔을 때 조지를 만나 이후부터 그의 절친한 동료가 되었다.
28. 뉴욕시장 선거 출마
1886년 여름 조지는 『보호냐 자유무역이냐(Protection or Free Trade)』를 발간, 배포하느라고 바쁜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조지가 동료들과 담소하고 있던 어느 날 신문이 도착했는데, 뉴욕 시 노동조합이 뉴욕시장 선거에 조지를 후보로 추대하기로 했다는 기사였다. 유쾌한 기사이기는 하였지만, 조지를 포함하여 그 장소에 있던 그 어느 누구도 그 기사를 중대하게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조합측에서 세 번씩 계속 찾아와서 요청하였고, 그는 동료들과 상의하였다. 맥글린 신부의 권유로 결국 조지는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에 응하기로 했다.
카톨릭 교단측에서는 맥글린이 조지와 가까이 지내는 것을 달갑지 않게 생각했다. 코리건(Corrigan) 대주교는 칙커링 홀 집회에 맥글린이 참여하는 것을 금하였으며, 맥글린은 2주간 동안 정직 되었다. 하지만 노동자단체의 영역을 넘어서서 시민, 학계, 종교계 등 다양한 많은 사람들로부터 지지를 받았다.
선거운동기간에 조지에 대한 악성루머가 많이 나돌았다. 그를 '다른 사람들의 권리에 대한 약탈자', '혁명주의자', '가난한 자의 강탈자' 등 반대언론의 매도가 있었으며, 심지어는 그가 젊었을 때 멕시코 혁명에 관한 취재여행을 해적행위로 오도한 기사도 있었다. 민주당 휴잇의 선거운동 관계인에게 몬시뇨르 프레스톤(Monsignor Preston) 목사가 써 보낸 편지에는 조지의 사상이 교회의 가르침에 대한 불건전하고 불안정하며 배치되는 가르침이라고 하였으며, 사회에위험한 사상이라고 씌여져 있었다. 이 편지는 투표일 전날의 주일날 교회의 문 앞에 붙여지도록 배포되었다.
선거운동기간은 끝났고, 투표일이 왔다. 노동자들이 많이 거주하는 지구는 투표에 있어 불리하였다. 투표장소에는 투표수를 세는 대표자가 없었으며, 투표용지를 배포하는 사람도 없는 곳도 많았다. 조지의 지지자들은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자원봉사로 일하였다. 투표결과, 휴잇이 90,552 표, 조지가 68,110 표, 루즈벨트가 60,435 표를 획득하여 휴잇이 시장으로 선출되었다.
29. 맥글린 사건의 발단
조지는 선거가 끝나고 나면 주간신문을 발간할 참이었다. 창간호의 발행 날짜를 새해 1887년의 1월 8일로 잡았으며, 신문사경영진을 구성하였다. 조지는 창간호 서문에 발행 목적이 진실의 힘을 신뢰하는 가운데 산업노예의 철폐에 있다고 말하였다. 첫호는 정치와 경제에 관한 글들을주로 싣고 있었으나 사실 주요한 내용은 맥글린 정직사건이었다.
선거 후 약 2주일이 지난 때에 대주교가 뉴욕의 모든 카톨릭 교회에서 공개되는 교서에서 현재 재산권을 침해하는 불건전한 원칙과 이론이 존재하고 있다고 공격하였다. 그 교서에는 헨리 조지라는 이름은 없었지만 바로 그가 비난의 대상이었던 것은 틀림 없없다. 이로부터 며칠 후 「뉴욕헤럴드」가 맥글린 신부와 인터뷰한 기사가 실렸다. 그는 대주교가 경멸한 바로 그 원칙에 자신이 맹세한 바가 되며, 그것은 교회의 교리에 배치되는 것이 아니라고 직접적으로 언급하였다. 이 문제로 인하여 대주교는 맥글린을 그 남은 해까지 계속 정직처분 내렸으며, 카톨릭해외포교성성에 편지를 썼고 맥글린은 로마로 가야 했다. 그러는 사이에 조지는 「스탠다드」지의 창간호에 그 주제를 중요하게 다루었던 것이다.
「스탠다드」지의 창간호 7만 5천부가 바닥이 났으나 맥글린의 기사를 다루는 신문은 「스탠다드」지 말고는 없었다. 대개의 신문들은 이 사건에 대해 지켜 보고 있기만 원하였다.
로마에 있던 맥글린의 오랜 친구이자 법률상담가인 기본스(Gibbons) 추기경은 로마 교황과 시몬 추기경과의 개인적인 면담에서 그들은 맥글린에 대한 판결을 내리지 않았으며, 맥글린을 별로 비난하지 않았다고 뉴욕으로 서신을 보냈다. 그는 맥글린에게 로마로 와 줄 것을 청했다. 그러나 맥글린은 자신이 로마에 간다 하더라도 자신의 생각을 전할 수 있는 청문회를 얻을 기회가 없다고 여겼기 때문에 이 제안을 꺼려했다.
그는 사람들을 위한 토지에 대한 사상과 교회의 근본적인 가르침간에 상충되는 것이 전혀 없다고 믿었다. 그는 3월말에 「새로운 십자군의 십가가(The Cross of the New Crusade)」라는 제목으로 성 스테판 교회의 교구 신도들과 그 밖의 카톨릭 교인들이 모인 음악당에서 연설하였다. 그는자신이 믿는 바 토지에 대한 하나님의 가르침을 말했을 때, 계속하여 갈채를 받았다.
이 운동은 가난한 자의 생각과 마음을 일깨우고, 사회의 정의에 기초하여 문명화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들을 확산하는 운동으로 즉시 번져 나갔다. 운동을 조직화하기 위한 첫 모임은 「스탠다드」의 사무실에서 있었는데, 빈곤퇴치협회(Anti-Poverty Society)로 명명했다. 만장일치로 맥글린신부가 회장, 조지가 부회장을 선출했다. 첫 공개모임은 1887년 5월 1일, 주일날 저녁에 칙커링 홀에서 있었다. 수 천명의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맥글린의 연설이 있었다.
빈곤퇴치협회의 모든 회원들은 종교인이어야 했다. 5월 초에 대주교는 시몬 추기경으로부터 서신을 받았는데, 거기에는 편지접수일로부터 50일 이내에 맥글린을 로마로 소환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를 위반하면 맥글린은 파문이었다.
빈곤퇴치협회는 맥글린의 지도 하에 이제 막 시작하려는 참이었다. 그의 이전 교구신도들의 상당수가 운동에 참여하고 있었으며 그를 따르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로 떠날 수 없었다. 50일이라는 기한이 만료되자 그의 파문이 결정되었다. 그러나 성 스테판 교회의 교구신도들이 갖고 있는 맥글린신부에 대한 존경은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맥글린 자신도 파문이 되었다 해서 자신이 카톨릭 교인이나 또는 사제가 아니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코리건 대주교는 맥글린의 파문에 만족하지 아니하고 맥글린에 대해 공개적인 비난을 하지 않았던 몇 명의 사제들을 처벌하였다.
30. 정치적 어려움
그러는 동안에 조지는 몇 차례의 강연을 하였다. 이 즈음에 '단일세(Single Tax)라는 용어가 나왔다. 비록『진보와 빈곤』중에 단일한 세제라는 개념이 예상되기는 하였지만, 그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887년 뉴욕의 토마스 쉬어맨(Thomas G. Shearman)이 단일세를 제안하고 나서부터였다. 그러나 조지는 단일세라는 용어가 자신의 철학을 반영해주는 것으로 여기지는 않았다.
뉴욕주와 지방자치단체의 정치운동이 시작되자 1887년 8월에 뉴욕의 주요 노동조합이 모였다. 조지와 그 지지자들은 그 해의 노동운동을 통해 상당히 많은 투표를 획득하리라고 예상하였으며, 새로운 정당도 만들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1886년의 뉴욕시장 선거에서 조지를 지지했던 일단의 사회주의자들이 그들의 정책을 내걸면서 정면에 나섰고 사회주의정강을 채택하여 후보를 선출하였다.
뉴욕시의 연합노동당의 회의에서 조지는 정강을 작성했다. 조지 자신은 그 당시에 출마하기를 원하지는 않았지만 주 정부의 장관투표에 대한 약간의 당선희망이 보이자 지명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조지는 먼저 주지사인 데이빗 힐(David B. Hill)에게 자신과의 논쟁을 요청했으나 주지사는 거절하였다. 그러나 사회주의자였던 세르기우스 쉐비치(Sergius E. Shevitch)가 조지에게 도전장을 내밀자 그들은 토론을 벌이게 되었다. 맥글린도 뉴욕주의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연설을 하였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반대세력의 운동이 강화되었다. 그리고 투표결과는 그의 실패였었다. 그는 15만 표를 예상했으나 오직 7만2천표만 얻었다. 공화당과 민주당은 각기 45만 9천 표, 48만 표를 얻었다. 조지는 뉴욕 시 자체 내에서도 전해의 6만 8천 표보다 부진하여 38,000표만 얻었다. 이 선거를 마친 후 조지는 자유무역을 주장하는 현직 대통령인 클리블랜드(Cleveland)를 지지하였으나 민주당의 클리블랜드는 패하고 공화당의 블레인(Blaine)이 당선되었다. 그리고 연합노동당에서 조지의 지지세력과 반대세력과 그 외의 파벌이형성되었고, 빈곤퇴치협회도 분열되었다.
1888년에 접어들면서 「스탠다드」는 발간시작 후 2년째를 맞게 되었지만, 그 판매부수가 2만에서 2만 5천 사이였다. 이 정도의 판매부수는 당시의 다른 주간지에 비하면 수 배나 많은 것이었지만, 잡지의 진보적 성향으로 인해 광고수입이 작았기 때문에 재정이 어려워 지출경비를 많이 축소할 수 밖에 없었다.
당시 민주당 클리블랜드 대통령은 관세문제를 주요 정책으로 다루었는데, 국회에서 관세의 삭감에 대해 연설할 만큼 자유무역주의자였다. 조지는 대통령의 노선에 호응하여 자신의 단일세주의자들과 함께 관세의 철폐에 관한 연설을 하였다. 1888년, 클리블랜드는 대통령 후보에 재지명되었다. 단일세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클리블랜드를 적극 지지하면서, 민주당 내부에서 관세문제를 회피하는 사람들을 자극하였다.
31. 영국과 호주, 뉴질랜드를 방문
이 무렵에 영국의 국회의원 윌리엄 선더스(William Saunders)가 조지를 초청하여 순회연설을 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영국에 간 조지는 자신이 놀랄 정도로 많은 환영을 받았다. 도착하는 역마다 조지를 기다리는 인파가 대단했다. 영국과 아일랜드에서 조지의 『진보와 빈곤』을 이해하는 층은 더욱 확대되어 있었다. 정치경제학 교과서에도 조지의 토지가치세가 새로운 주제로 나오기 시작했으며, 사법부의 콜러리지(Coleridge)경은 대영제국의 토지법을 재검토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톨스토이(Leo Tolstoi) 백작은 한 인터뷰 기사에서 조지의 정책을 적극 지지하였다. 조지는 여러 교회에서 연설하였으며, 영국에 와 있던 동안 끊임없이 여행하면서 연설을 하고, 환영을 받았다. 그러는 중에 영국의 유명한 사회주의자인 힌드만과, 그리고 기득세력의 보호역할을 맡았던 사무엘 스미스와 논쟁하는 기회를 가지기도 했다. 미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잠시 프랑스 파리에 들러서 그 곳에서 독일의 플뤼샤임(Flurscheim)을 만나기도 했다.
1889년 가을 영국에 있던 조지는 시드니의 단일세협회(Single Tax Association)의 회장이자 뉴사우스웨일즈의 국회의원인 찰스 갈란드(Charles L. Garland)를 만났는데, 갈란드는 조지가 호주와 뉴질랜드를 꼭 방문해서 그 곳에서도 연설해 줄 것을 청했다. 그는 아내와 함께 1890년 호주를 향해 떠났다.
호주를 가기 위해 미국의 동부 지역을 거쳐, 샌프란시스코에서 배편으로 출발하기로 했다. 샌프란시스코로 가기까지 환영연설과 함께 각계의 사람들을 만났다 신문들은 조지 내외를 환영하는 기사를 실었으며, 그가 세상을 향해 승리하였다고 평하였다. 그들이 시드니로 떠날 때 많은 동료와 친구들의 따뜻한 전송을 받으면서 1890년 2월 8일 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넜다. 하와이의 호놀룰루에서 잠시 머문 후 그들은 뉴질랜드의 오클랜드에 도착했다. 항구에는 빈곤퇴치협회의 오클랜드 지부 사람들이 모여서 그를 맞이 하였고, 곧 조지 그레이 경을 만났다. 그는 『진보와 빈곤』을 제일 처음 읽은 몇 안 되는 사람들 중의 한 명이었다. 그는 귀족집안에서 태어나 독재권력에 저항하였고, 식민지의 주지사와 수상을 역임한 민주주의자였다. 조지는 연회를 즐기지는 아니하였지만, 어쨌든 그가 호주에 있는 동안 잠자고 여행하는 것을 제외하고 모두가 다 회합, 리셉션, 인터뷰, 연회연설 등이었다. 그가 그 곳에 받은 친절한 환대는 미국의 그것과는 매우 대조적이었다.
이미 호주에서는 단일세주의자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그들은 적극적으로 글을 쓰고 책을 출간하기도 했는데, 조지의 방문을 통하여 그 곳 내에서 토지에 대한 관심이 더욱 고조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조지의 방문 중 가장 성공적이었던 곳은 빅토리아에서 였다.
조지 내외는 인도를 경유하여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여 유럽의 몇 개국을 들르고 나서 귀국하였고 1890년 9월 1일, 뉴욕에 도착하였다.
32. 계속되는 집필과 맥글린 사건의 해결
1891년, 봄부터 조지는 이전부터 쓰기를 바라왔던 정치경제학에 관한 집필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 작업이 막 시작되었을 때 교황 레오 13세의 회칙이 화제가 되었다. 회칙의 제목은 『노동의 조건(The Condition of Labor)』이었는데, 주교, 대주교, 추기경 등 카톨릭 전 세계에 다 돌려졌다. 회칙의 내용을 보면 단일세를 사회주의나 무정부주의와 혼돈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조지나 단일세 이름이 직접 거론되지는 않았지만, 뉴욕의 코리건 대주교는 회칙을 읽고 환호할 정도로 그 내용은 조지나 맥글린이 주장하는 것과는 달랐다. 이에 조지는 정치경제학 서적을 쓰는 것을 잠깐 미루고 레오13세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을 썼다. 그 서한은 뉴욕과 런던, 그리고 이탈리아에서 동시 출간되었다.
이 즈음에 카톨릭교회 일각에서는 맥글린사건을 재심사하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교황은 싸톨리(Satolli) 대주교를 대표로 미국에 파견하였고, 교회법전문가인 버트셀(Burtsell)이 파문의 철회에 관하여 자문하였다. 우선 맥글린이 자신의 생각들을 세심하게 글로 옮기고, 그 글들을 워싱턴의 카톨릭 대학의 교수위원회에서 심사하였다. 심사결과 그들은 맥글린의 사상이 카톨릭 교회의 가르침과 전혀 배치되는 것이 없다고 결론지었고, 맥글린은 다시 복직 되었다. 여기에는 조지가 레오 13세에게 보낸 공개서한이 큰 기여를 하였다고 한다.
조지의 경제학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의 본질은 윤리적인 것이었다. 즉, 자연질서와 정의에 관한 것이었다. 모든 것을 만드신 분께 대한 믿음이 있었고, 하나님의 부성애와 인간의 형제애에 대한 확신으로 고동쳤다. 이러는 중, 허버트 스펜서는 영국의 신문과 정기간행물을 통하여 토지문제에 대해 자신이 이전에 갖고 있던 사상에 대해 철회의사를 표하였으며, 하나님이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토지를 만들었다는 조지의 생각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하였다. 조지는 이러한 스펜서의 공격이 한 때 믿고 따랐던 신념을 스스로 부인하는 한 철학자의주장정도로 여겨지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물질주의를 갖다 놓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또 1890년에 토마스 헉슬리(Thomas H. Huxley) 교수가 물질주의적인 시각으로 자연권을 부인하는 글을 썼다. 조지는 자신이 이 당대에서 인정 받는 철학자들과 싸운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러한 움직임에 대해 방관할 수는 없어서 결국 『갈피를 잃은 철학자(A Perplexed Philosopher)』를 쓰게 되었다. 그러나 이 책은 많은 관심을 불러 일으키지는 못했다.
그 동안에 조지의 절친한 동료였던 톰 존슨은 조지의 충고를 따라 정치에 뛰어 들어 국회에 진출하게 되었다. 그는 자유무역주의자이자 단일세를 주장하는 민주당원이었다. 1888년, 선거에서 패하지만 이후 1890년 당선되었다. 존슨은 조지의 『보호냐 자유무역이냐』의 내용을 국회보고서에 실었다. 존슨은 워싱턴에서 자유무역정책을 입법화하기 위하여 매우 적극적으로 활동하였고 그 과정에서 조지와 상호간에 도움을 많이 주고 받았다.
셋째 딸 제니가 손녀를 데리고 조지를 만나러 왔을때, 그녀는 며칠 안 지나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조지는 크게 상심하였다. 그리고 정치활동에 있어서도 그의 뜻대로 잘 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이제 자신의 인생이 종점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느꼈다. 자신이 살아왔던 인생에 대해 회고해야 겠다는 생각도 들어 『정치경제학』에 그 회고내용의 일부를 실었다.
33. 뉴욕시장 재출마와 임종
1897년, 선거기간이 다가오자 조지가 뉴욕시장에 재출마한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브룩클린과 그 밖의 지방을 몇 개 흡수하여 거대도시로 성장한 뉴욕에서 가지는 첫 선거였다. 조지는 출마의사가 없음을 표시했고, 그의 친한 친구들도 건강을 걱정하여 이제 정치에 나서지 말고 그냥 하던 집필과정에 매달리라고 권하였다. 그러나 정말 조지의 마음을 알고 있던 가까운 친구들은 그에게 출마를 권하였다. 조지는 존슨의 회사에서 동료들을 불러 모아 회합을 가진 후, 결국 재출마하기로 결정하였다.
후보연설을 하기 위해 조지는 다시 바쁜 나날들을 보내었지만 과거와는 달랐다. 그도 불안했었던지 선거유세장에 항상 아내가 동반해 주기를 바랬다. 조지를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의 대부분이 가난하고, 늙고, 창백하고, 마음에 상처 받은 사람들이었다.
오페라하우스에서의 연설 때 조지는 갈수록 힘이 들어 하는 것 같았다. 연설을 마친 후, 가족과 친구들과 함께 호텔로 돌아왔을 때는 자정 무렵이었다. 동료들은 그가 피로해 하는 것 같아 걱정하였으나, 간단한 식사를 한 후 다행히 휴식을 잘 취하고 있는 것 같았다. 다음 날 아침 아내가눈을 떠보니 조지는 침대에 일어나 있었다. 그녀가 부르자 그는 괜찮다고 답했다. 그러나 다시 침대로 돌아가지는 않았다. 잠시 후 그녀가 일어 났을때, 옆방에서 한 손을 의자에 얹어 몸을 지지하면서 서 있는 조지를 보았다. 그의 얼굴을 하얗게 변해 있었으며, 몸은 조각처럼 굳어 있었다. 어깨는 뒤로 쳐진 채 머리를 위로 들고서 그의 눈은 마치 무언가를 보는 것처럼 열려 있었다. 그는 단 마디로 '예'라는 말을 여러 번 반복하였다. 처음에는 조용히 강조하다가 차츰 힘찬 마음으로 답하는 것 같았다. 아내는 그를 부드럽게 침상으로 데리고 갔으나, 그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모르는 것 같았다. 조지의 친구이자 주치의인 켈리(Kelly)가 왔을 때는 이미 의식 불명 상태였다. 몇 분 지나지 않아 그는 숨을 거두어 만인의 아버지 품으로 돌아갔다. 장례식은 카톨릭식으로 치러졌다.
그의 묘비에는 조지가 자기 자신을 두고 서약한 글이 새겨져 있다.
"내가 분명히 이루고자 노력해 왔던 그 진리는 쉽게받아들여 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이 가능했다면 이미 오래 전에 받아들여졌을 것이고 결코 숨겨져 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동지들을 발견할 것이다. 이를 위해 수고하고 고난 받으며, 필요하면죽기까지 할 사람들. 이것이 진리의 힘이다."
■ 헨리 조지의 세계관 (저서와 연설문에서 뽑은 명구)
Ⅰ. 빈곤의 문제
1. 진보 속의 빈곤
엄청난 사회의 진보 속에 극심한 빈곤도 함께 존재한다.(즉, 부가 엄청나게 증대된 것도 사실이고 평균적으로 보아 더 안락해 지고 여가가 많아 지고 교양이 향상된 것도 사실이지만 이러한 개선이 일반화되지는 못했다.)
이러한 경향 속에서 빈곤에 대한 두려움의 산물인 죄악, 범죄, 무지, 잔인함 등은 계속적으로 거듭되는 진보 속에 발생한다.
2. 자연은 풍요롭다.
한정된 면적의 토지에서 무언가를 취하면 그 토지의 생산성은 일시 줄어들 것이다. 되돌아 가는 곳이 다른 토지일 수 있고 그 토지와 다른 토지 내지 모든 토지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가능성은, 대상 면적이 넓어짐에 따라 줄어들다가 전 지구가 대상이 되면 사라지고 만다.
사람 아닌 곰이 유럽에서 북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왔다고 해도 현재의 곰의 숫자는 콜럼버스가 대륙을 발견했을 때보다 더 많지 않을 것이다. (중략) 그러나 사람의 경우, 미국에 국한시켜 말하면 과거 수십만에 불과했던 인구가 현재 4천5백만 명으로 늘어났으나 일인당 식품의 양은 과거보다 훨씬 늘어났다. 이로써 식품증가가 인구증가의 원인이 아니라 반대로 인구증가가 식품증가의 원인임을 알 수 있다.
자연이 인색한 곳에서 20명이 일하면 자연이 풍요로운 곳에서 한 사람이 생산하는 부의 20배보다 더 많이 생산한다. (중략) 문명상태가 일정할 때 많은 인구는 적은 인구보다 부의 상대적 생산량도 많고 필요물자의 조달도 쉽다.
3. 사회문제와 사고의 힘
우리는 자신의 지식을 믿지 않는 게 좋겠다. 그 지식을 검증하기 전에는 소위 이성적인 추론이라는 것도 믿지 않는 게 좋겠다. 그러나 이성 그 자체를 불신해서는 안된다.
사회개혁은 소란과 고함으로, 불평과 비난으로, 정당 결성이나 혁명 추진으로 달성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의 각성과 사상의 진보에 의해 달성된다.
Ⅱ. 용어의 정의
1. 토지 : 생산에서의 자연적·수동적 요소, 인간이 접근할 수 있는 모든 외부세계
2. 노동 : 부의 생산에 들어가는 모든( 육체적 / 지적 / 정신적 ) 형태 의 인적 노력
3. 자본 : 부의 생산 과정에서 노동과 토지가 결합한 이후에 그 결합의 결과로 생겼으며, 노동을 지원하기 위해 생산에 투입되는 부
4. 부 : 인적 생산 요소인 노동을 통해 자연적 생산 요소를 인간의 욕구 충족에 적합하도록 변화시킨 것
5. 임금 : 생산된 부 중 노동에 돌아가는 부분으로서 인적 노력에 대한 모든 대가.
현대의 복잡한 생산 과정을 단순화시켜 보면 고도의 (중략) 일도 결국 (중략) 원시시대의 사람의 일과 마찬가지이다. 즉 자신의 힘을 사용하여 자연으로부터 욕구를 만족시키려고 하는 노력이라는 것이다. 이런 점을 분명히 이해하고 또 사회의 모든 생산은 각 개인의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모두가 협동하는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각자가 자기 노력에 대해 받는 보상은 원시인이 그랬던 것과 같이 노력의 결과로 자연으로부터 얻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다른 모든 직업의 임금률에 기초가 되는 이 일차적이고 기본적인 작업은 자연으로부터 부를 직접 획득하는 직업이다. 따라서 이 직업에서 임금법칙은 임금의 일반법칙이 된다. 그리고 이 직업에서의 임금은 노동이 관습적으로 투입되는 자연 중 생산력이 최저인 자연에서 노동이 생산할 수 있는 양에 의해 정해 진다. 따라서 임금은 일반적으로 경작의 한계,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지대를 지불하지 않고 노동을 자유롭게 투입할 수 있는 자연의 최고생산점에 의존한다.
6. 지대 : 토지 사용에 대한 대가.
토지가 교환가치를 가지는 곳에는 언제나 정치경제학적 의미의 지대가 존재한다. (중략) 토지가 가치를 갖게 되는 이유는 바로 이 지대 발생 능력에 있다. 토지소유권이 어떤 이익을 주기 전에는 토지는 가치를 갖지 않는다. 토지의 능력이 어느 정도이건 간에 토지사용권을 얻는 대가로 노동 또는 노동 결과를 지불하려는 사람이 없다면 지대로 생기지 않고 가치로 발생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사용자가 지불하려고 하는 대가는 당해 토지 자체의 능력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고 대가 없이 사용할 수 있는 다른 토지에 대한 상대적 능력에 의존한다.
뒤집어 말하면, 노동과 자본을 투입하여 어떤 생산을 하건 이 두 요소가 임금과 이자로 받는 대가는 지대를 지불하지 않고 사용할 수 있는 토지에서-즉 사용되는 것 중 최저생산 토지 또는 최저생산점에서-얻을 수 있는 생산물에 국한되기 때문에 지대법칙은 필연적으로 임금과 이자의 법칙을 포괄하게 된다.
이제 풀, 꽃, 나무, 시내 등 모든 조건이 동일한 토지가 무한히 펼쳐져 있는 광대한 평원을 상상하고 여기에 최초의 이주민 마차가 들어 왔다고 해보자. (중략) 좋은 장소를 헤매다 지쳐서 결국은 어디에선가 멈추고 가정을 꾸미게 된다. (중략) 자연은 그야말로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중략) 그러나 이 사람은 가난하다. (중략) 이러한 상황에서는 자연이 아무리 풍요롭다고 해도 가난하게 사는 수 밖에 없다. 먹을 것은 쉽게 구할 수 있겠지만 혼자의 노동으로는 아주 원시적인 생활의 단순한 욕구나 충족시키는 정도밖에 할 수 없다.
이제 또 다른 사람이 이주해 온다고 하자. (중략) 모든 토지가 동일하지만 이 사람에게 유리한 위치는 한 군데이다. 이 곳은 바로 먼저 이주한 사람이 정착한 곳 즉 이웃을 둘 수 있는 곳이다. (중략) 먼저 이주한 사람의 상황은 대폭 개선되며 지금까지 불가능했던 여러 일이 가능하게 된다. (중략) 이주자가 계속 들어오면 첫 이주자의 주변에 작은 마을이 형성된다. 이제 노동은 혼자서는 얻을 수 없었던 효과성을 갖는다. (중략)토지에서 수확되는 밀이나 옥수수나 감자의 양은 전만 못하겠지만 이 토지로 인해 생기는 생활필수품과 편리품은 훨씬 많다. 다른 이주자의 존재 즉 인구의 증가가 토지에 투입되는 노동의 생산성을 높였고 이러한 생산성 향상으로 인해 이 토지는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의 동일한 질의 다른 토지보다 우수한 토지가 되어 있다. (중략) 마을의 토지가치 내지 지대는 변두리 땅 이상으로 그 토지가 갖는 유리함에 의존한다. (중략) 인구 증가가 계속되고 그로 인해 경제성이 높아지면 토지의 생산성도 높아진다. (중략) 기술자, 공장 주인, 상점 주인, 전문직 종사자는 교환의 중심이 되는 곳에 노동을 투입하면 변두리에서 일하는 것보다 많은 수입을 올릴 것이다. 이러한 경우에 생기는 생산의 초과분에 대해서는 토지소유자가 대가를 요구할 수 있다. 따라서 이 토지를 소유하는 첫 이주자가 자기 토지의 일부를 떼어 택지로 팔면 토지의 비옥도가 몇 배 높은 토지에서 밀을 재배하는 경우에도 받을 수 없는 비싼 가격을 받을 수 있다. (중략) 토지사용자는 인구 증가로 인해 토지가 갖게 된 높은 생산성을 이용하는 대가로 토지소유자를 위해 고급 주택과 고급 가구를 마련해 주는 셈이 된다.
인구가 자꾸 증가하면 토지의 효용이 엄청나게 커지고 토지소유자의 부도 크게 불어난다. (중략)이곳은 모든 방면에서 인간 생활의 중심이 된다. (중략) 이 토지에 결부되는 모든 유리함은 이 토지가 아닌 곳에서는 누릴 수 없다. 이곳이 인구의 중심이며 교환의 초점이자 고급 산업이 입지한 곳이기 때문이다. 인구 밀집으로 인해 이 토지에 결부된 생산력은 토지의 비옥도가 수백 배, 수천 배 증가한 것과 맞먹는다. 그리고 이 토지의 지대는 이 토지와 사용 토지 중 최열등지 간의 생산성 차이를 의미하므로 당연히 상승한다. 이 토지의 첫 정착지 또는 그에게서 권리를 승계한 사람은 이제 거부가 되어 있다. (중략) 이러한 토지를 한 조각만 소유하여도 기계기술자보다 더 많은 소득이 생긴다. (중략) 인구증가가 지대를 상승시키는 이런 모습은 진보하는 지역에서라면 누구나 직접 목격할 수 있다. (중략) 사용되는 여러 토지간의 생산성 차이가 커지면 지대 상승폭도 커진다. 이러한 결과는, 인구 증가로 인해 필연적으로 열등한 토지를 추가 사용함으로써 생긴다기보다는 인구 증가가 기존에 사용하던 토지에 더 높은 생산성을 부여하기 때문에 생긴다.
7. 이자 : 부의 분배에서 추상적인 용어로서의 이자는 자본 사용에 대한 모든 대가
Ⅲ. 사회생활의 법칙
1. 정치경제학
자연현상에만 법칙이 있는 것이 아니다. 물질과 운동의 법칙처럼 정신과 도덕의 세계에 그리고 사회의 성장과 사회생활에 적용되는 확고한 법칙이 있다. 사회 생활을 건전하고 행복하게 만들려면 이러한 법칙을 발견하여 그에 조화되는 행동을 하여야 한다.
최소의 노력으로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성향은 노동이 불편했던 경험으로 인해 이를 피하려고 하려는 데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그보다 더 심층적으로 인간의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원리에서 비롯된 것인지 간에, 너무나 보편적이고 예외가 없어서 변함없는 원리 내지 추론의 안전한 기초가 되는 자연법칙이라고 할 수 있다.
2. 교환, 생산, 분배
인간을 생산자이게 하는 바로 그 이성의 작용으로 인해 인간은, 교환이 가능한 경우에는, 역시 교환자가 된다. 경제체제가 발전하는 것은 교환의 덕이며 또 문명이 발달하는 것도 기본적으로 교환의 덕이다.
생산의 세가지 방식
적응시키기(Adapting) : 자연의 산물의 형태나 장소를 인간의 욕구 충족에 적합하도록 바꾼다.
키우기(Growing) : 식물이나 동물을 기르는 경우처럼 자연의 생명력을 활용한다.
교환하기(Exchanging) : 자연의 힘은 위치에 따라 다르고 인간의 힘은 상황, 직업, 성격에 따라 다르므로, 부의 총량을 증가시키기 위해 그 중 더 큰 힘을 활용한다.
정치경제학 저술에서는 생산법칙은 자연의 법칙이고 분배법칙은 인위적인 법칙이라고 잘못 가르치고 있으나 두 가지 법칙은 모두 자연의 법칙이다. 진정한 차이점은 생산에 관한 자연법칙은 물질적 법칙이고 분배에 관한 자연법칙은 도덕법칙이라는 점이다뀉 부의 생산에 관한 법칙에서 부의 분배에 관한 법칙으로 연구 대상이 이동하면 당위와 의무의 관념이 중심이 된다. 모든 분배법칙은 윤리적 원리와 연결되어 필연적으로 당위와 의무를 고려하게 되며 정당성과 정의의 관념이 출발점에서부터 연관된다.
3. 협동과 경쟁
협동을 통해 생산력을 증가시키는 2가지 방식
1) 노력의 결합 : 이 방식으로는 개인의 힘을 모두 합한 것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다 Ex) 여럿이서 무거운 바위나 통나무 치우기
2) 노력의 분리 : 이 방식으로는 힘을 합할 필요가 없는 일에서 각자가 한 사람 분 이상의 일을 할 수 있다. Ex) 노동의 분업
협동이 이루어 지는 2가지 과정
1) 외면적 과정(강제적/의식적 협동) : 특정의 목적을 가진 의도적인 지시 내지 통제에 의한 협동 Ex) 대규모 군대의 이동
2) 내면적 과정(자발적/무의식적 협동) : 각 개인이 전체적인 결과를 의식하지 않고-전혀 무시한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각자 자신의 의지에 따라 자신만의 목적만을 추구하지만 이런 개별 행위가 서로 관련을 맺어 생기는 협동 Ex) 대도시에서 주민이 필요로 하는 다양 물자의 공급과정
정치경제학 저자의 상당수는 교환을 분배의 한 부분으로 취급하고 있다. 그러나 교환은 생산에 속한다. 사람은 교환에 의해서 또 교환을 통해서 협동의 힘을, 문명의 발달과 더불어 부의 생산력을 크게 증가시키는 협동의 힘을, 획득하고 또 발휘한다.
생활과 노동의 필수 요소에 대한 권리를 부정 당하는 계층이 있다면 경쟁은 일방적이 되고,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그런 최하계층은 사실상의 노예상태, 심지어는 굶주리는 상태에까지 몰린다. 그러나 모든 인간의 자연권이 보장된다면 경쟁은 모든 당사자에게 작용하여 피고용자 사이에 만이 아니라 고용주 사이에도 경쟁이 있고 판매자 사이에 만이 아니라 구매자 사이에도 경쟁이 있게 되므로 아무도 해를 입지 않는다. 오히려 경쟁으로 인해 가장 단순하고 광범위하고 탄력적이고 세련된 협동체제가 이룩된다.
Ⅳ. 사회주의와 자유방임
Ⅴ. 실업과 토지사유제
1. 일자리는 자연권
흔히 노동의 공급과 노동에 대한 수요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이 두 용어는 상대적인 의미를 가질 뿐이다. 노동의 공급은 어느 곳에서나 동일하다. 입이 하나 태어나면 손이 두 개 같이 생기며 (중략) 노동만으로도 생산할 수 있는 물자가 인간에게 필요한 한 노동에 대한 수요는 항상 존재한다고 보아야 한다. 또 흔히 "일자리가 부족하다"는 말도 하는데 인간이 물자를 필요로 하는 한 일자리의 부족이란 있을 수 없다. 노동생산물이 부족한데도 노동의 공급이 너무 많거나 노동에 대한 수요가 너무 적은 경우는 분명히 있을 수 없다. 문제의 원인은 수요에 맞는 공급이 어디에선가 제약된다는 데 있으며 또 필요한 물자를 노동이 생산하는 것을 막는 장애가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수많은 실업자 중 아무나 예로 들어보자. 멜서스가 누구인지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도 세상에는 인구가 너무 많다고 생각할 것이다. 자신이나 근심에 잠긴 부인이나 제대로 양육 받지 못하고 굶주림과 추위에 떠는 자식에게는 필요한 물자가 많다. 그러므로 노동에 대한 수요는 충분하다. 이것은 하늘도 안다. 일하려는 손이 있으므로 공급도 있다. 무인도에 이 사람을 데려다 놓으면, 문명사회의 협동과 분업과 기계의 혜택이 없어도 두 손으로 자신에게 딸려 있는 식구의 입을 채워 주고 등을 따스하게 해 줄 수 있다. 그러나 생산력이 최고도로 발달한 곳에서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 왜 그런가? 한 곳에서는 자연의 원료와 힘을 이용할 수 있고 다른 곳에서는 그 이용을 거부당하기 때문이 아닌가?
모든 인간이 가진 자연권은 다른 사람에게 고용이나 임금을 요구할 권리가 아니라, 스스로 일자리를 마련할 권리이며 창조주가 모든 인간을 위해 토지에 마련해 주신 무한한 창고에 자신의 노동을 가할 권리이다. 우리가 단일세를 수단으로 하여 이룩하려는 것처럼 이 창고가 개방된다면 노동에 대한 자연스러운 수요는 공급과 일치하고, 노동을 사고 파는 사람간에는 상호 이익이 되는 자유로운 교환이 이루어지며, 노사쟁의의 모든 원인이 사라질 것이다. (중략) 스스로 일해서 벌 수 있는 것보다 낮은 보수를 받고 남을 위해 일하려는 사람이 없을 것이므로 임금은 필연적으로 완전한 수준으로 상승하게 되고 노동자와 고용주와의 관계는 상호 이익이 되는 수준에서 결정된다.
.
인간이 창조주의 평등한 허락을 받아 이 땅에 존재한다고 하면 우리 모두는 창조주의 하사품을 평등하게 향유할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으며 또 자연이 공평하게 제공하는 모든 것을 평등하게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다 이것은 자연적인 권리이며 양도할 수 없는 권리이다. 이것은 또 모든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면서 취득하는 권리이며 생존하는 동안에는 다른 사람의 동일한 권리에 의해서만 제약될 수 있는 권리이다. 자연은 상속무제한 토지소유권(fee simple)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토지의 배타적 소유를 정당하다고 인정할 수 있는 권한은 어디에도 없다. 현재 살고 있는 모든 인류가 합의하여 토지에 대한 자기들의 평등한 권리를 포기한다고 하더라도 후세대의 권리까지 포기할 수는 없다. 인간은 지구에 임시로 세 들어 사는 자에 불과하지 않은가? 후세대가 세 들어 살 권리를 우리가 대신 결정하다니, 도대체 우리가 지구를 만들기라도 했단 말인가? 인간을 위해 지구를 그리고 지구를 위해 인간을 창조한 전능자는 만물의 헌법에 명시된 섭리에 의해-인간의 행동으로는 저지할 수 없고 실정법으로 좌우할 수도 없는 섭리에 의해-지구를 인간의 모든 후손에게 베풀었다. 확실한 토지 문서가 아무리 많고 토지를 아무리 오래 보유해 왔더라도 자연적 정의는 다른 사람의 동등한 권리를 부정하는 개인의 토지 보유 및 향유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다.
잔치에 가장 먼저 도착했다고 해서 연회석의 의자를 돌려놓고서 자기와 계약을 하지 않으면 아무도 음식을 먹을 수 없다고 할 권리가 있는가? 극장에 제일 먼저 표를 고 입장했다고 해서 극장 문을 닫아걸고 자기 혼자서만 공연을 관람할 권리가 있는가? 기차에 먼저 승차했다고 해서 자기 짐을 온 좌석에 흩어 놓고 뒤에 타는 승객을 세워 둘 권리가 있는가?
2. 사유재산의 근거
소유에 대한 정당한 권원 - 생산자의 권원과 인간의 자기 자신에 대한 자연권에서 도출
단순하고 자명한 두 원리는 다음과 같다.
1) 모든 사람은 자연이 베풀어준 것을 사용하고 향유할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
2) 각인은 자신의 노도에 의해 생산한 것을 사용하고 향유할 배타적인 권리를 가진다.
두 원리 사이에는 모순이 없고 오히려 상관성이 있다. 노동의 산물에 대한 개인의 완전한 권리를 보장하려면 자연이 베풀어 준 것을 공동의 재산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자연의 법칙은 창조주의 뜻이다. 자연법은 노동의 권리 외에 어떠한 권리도 인정하지 않는다.
도덕적으로 모든 종류의 결혼을 인정할 수는 없듯이 사유재산도 그렇다. 적절할 결혼이 하나님의 법에 합치한다고 해서 일부다처제, 일처다부제, 근친혼까지-일부 국가에서는 법적으로 허용되고 있지만-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부도덕한 결혼이 있을 수 있듯이 부도덕한 사유재산도 있을 수 있다.
재산권의 침해가 관습과 법에 의해 오랫동안 인정이 되면 진정한 재산권을 주장하는 사람을 처음에는 오히려 이를 부인하는 자라고 생각하기 쉽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재산권이라는 과념은 혼란스러워지고 재산권을 침해하는 것을 오히려 재산권이라고 생각한다.
3. 토지사유제는 노예제
토지사유제는 노예사유제와 마찬가지로 진정한 사유재산권을 침해하는 제도이며 둘 다 형태는 달라도 모두 강탈행위를 정당화하는 제도이다.
새로운 고용주인 지주는 과거의 노예소유자처럼 노예를 몰아 부쳐 일을 시킬 필요가 없다. 빈곤과 빈곤에 대한 두려움이 채찍보다 더 효과적으로 몰아 부쳐 주기 때문이다. 이들은 일손을 구하러 다니고 노동을 고용하는 수고를 할 필요도 없다. 또 노예가 일을 할 형편이 못 될 경우에 돌보는 비용을 지출할 필요도 없다. 이런 것은 모두 노예의 부담으로 넘어갔기 때문이다. 노동에서 착취하는 부분도 이제 자발적으로 지불한 것처럼 되었다. 실제로도 이들은 지대 수입을 생산에 결과에 대한 자신의 정당한 몫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생산에 토지를 제공하였다는 것이다! 소위 기독교 섥교자는 물론이고 정치경제학자라는 사람마저도 지주에게 그렇게 설명해 주고 있다.
도덕수준이 동일하다고 하면 두 가지 노예제도 가운데 토지를 사유재산으로 인정하는 노예제도보다 사람을 사유재산으로 인정하는 노예제도가 인간적으로 더 낫다는 점에 의문이 없다고 생각한다. 노예사유제 하에서 자행되는 잔혹행위는 개인의 의식적인 행위라는 점에서 더 충격적이고 분노를 야기한다. 그러나 세련된 방식의 노예제도인 토지사유제 하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받는 고통에 대해서는 아무도 책임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뀉 그러나 바로 이 사실이, 노예사유제에서라면 용서 받지 못할 잔혹행위가 토지사유제에서는 거의 주목을 받지 않은 채 지나간다.
4. 빈곤과 타락의 원인
진정한 원인은 과거에도 노예제도를 초래했고 또 언제나 초래할 수 밖에 없는 그 원인이다. 즉 자연이 모든 사람에게 베풀어 준 것을 일부가 독점한다는 사실이다뀉 토지사유제는 맷돌의 아랫돌이다. 물질적 진보는 맷돌의 윗돌이다. 노동 계층은 증가하는 압력을 받으면서 맷돌 가운데서 갈리고 있다.
물질적 진보가 쓰디쓴 열매를 낳는 것이 창조주가 인간의 마음으로도 승복할 수 없는 부정의한 오점을 자연법에 남겼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의 고도 문명 속에서 결핍으로 인해 인간이 쓰러지고 죽어 가는 것은 자연의 인색함이 아니라 인간의 부정의에 기인한 것이다. 죄악과 비참, 빈곤과 궁핍은 인구 증가와 산업 발전의 당연한 결과가 아니다. 이런 결과가 인구증가와 산업발전에 뒤따르는 이유는 토지가 사유재산으로 인정되기 때문이다.
국민으로부터 삶의 터전인 토지를 빼앗는 경우에는 강탈행위가 지속된다고 하겠다. 이는 세대를 이어가면서 새롭게 강탈하는 것과 같고, 매년 매일 새로운 강탈행위를 하는 것과 같으며, 노예의 자식을 다시 노예로 삼는 것과 같다.
Ⅵ. 근본대책
1. 지대를 환수하자
악을 제거하는 방법은 단 하나이다. 원인을 제거하는 방법 뿐이다. 부가 증가하는데도 빈곤이 심화되고 생산력이 커지는데도 임금이 억제되는 이유는 모든 부의 근원이자 모든 노동의 터전인 토지가 독점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빈곤을 타파하고 임금이 정의가 요구하는 수준 즉, 노동자가 벌어들이는 전부가 되도록 하려면 토지의 사적 소유를 공동소유로 바꾸어야 한다.
세 아들이 배 한 척을 물려 받았다고 해도 톱으로 배를 세 조각 낼 필요가 없다. (중략) 그러므로 토지에 대한 평등권을 보장하기 위해 토지를 동일하게 나눌 필요는 없다. 단지 지대를 징수하여 공동의 이익이 되도록 사용하면 된다.
우리의 주장은, 사회의것 즉 사회의 성장으로 인해 토지에서 발생하는 가치는 사회로 돌리고 개인의 것에 대해서는 불가침의 권리를 주자는 것 뿐이다. 그리고 독점이 불가피한 것은 국가의 기능으로 하고, 공중의 건강, 안전, 도덕, 편의에 필요한 것만 제외하고는 모든 제한과 금지를 철폐하자는 것 뿐이다.
조세는 생산비를 올리고 공급을 억제함으로써 가격을 상승시킨다. 그러나 토지는 인간의 생산 대상이 아니며 지대에 매기는 조세는 토지의 공급을 억제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조세로 인해 토지소유자의 세액이 늘어나더라도 토지소유자가 토지의 사용대가를 올릴 힘이 없다. 오히려 투기 목적으로 토지를 보유하는 사람은 토지를 시가대로 매각 또는 임대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이 조세는 토지소유자 간의 경쟁을 촉진하고 따라서 지가를 하락 시키는 효과를 갖는다.
토지가치에 부과하는 조세는 사회로부터 특별한 혜택을 받는 사람에게만 부담을 지우며 또 그 혜택에 비례해서 부담을 지운다. 이 조세는, 사회가 창출한 가치를 사회가 거두고 또 사회를 위해 사용하는 조세이다. 이 조세는 공동재산의 공동사용이라는 원리를 구현하다. 모든 지대가 과세되어 사회의 필요경비에 충당되면, 자연이 예정하는 평등성이 성취된다. (중략) 모든 사람은자신이 정당하게 번 것을 갖게 된다. 그 때가 되면, 그리고 그 때가 되어야, 노동은 정당한 보수를 받고 자본은 자연적인 대가를 받는다.
2. 토지보상의 문제
그렇다면 단숨에 해치우자. 토지의 절도는 말이나 돈의 절도와는 달리 행위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매일 매시 계속되는 반복적인 절도에 해당된다. 지대는 과거의 생산물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생산물에서 나온다. 지대는 지속적으로 노동에 부과되는 부담이다.
무엇에 대해 보상한다는 말인가? 과거에 부당하게 취한 것을 포기하는 데 대해 보상한다는 것인가? 토지소유자가 주장하는 보상은 그런 것이 아니다뀉 우리는 노동자로부터 부당하게 취한 것을 원상회복 시키라고 하지 않는다.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로 치부하려고 한다. 과거에 토지가치를 취함으로써 노동의 과실을 빼앗은 사람들이 이미 가져간 것은 그냥 가지도록 놔두자는 것이 우리의 제안이다. 우리의 제안은 단지 앞으로 노동에 대해 강탈하는 것을 막자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해롭게 하면서도 선의로 매입자가 될 수 있다고?(중략) 선의란 고의적인 범죄에 대한 처벌을 면제 받을 수 있는 근거는 될지언정 권리의 근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당신이 내 발을 선의로 밟았다고 할 때 나에게 화를 내지 말라고 부탁할 수는 있어도 내 발을 계속 밟을 권리를 갖게 되는 것은 아니다.
3. 지대세의 효과
모든 단계의 교환을 저해하고 모든 형태의 산업을 압박하는 현재의 각종 조세를 철폐하면 마치 성능이 좋은 용수철에 실린 무거운 짐을 들어내는 것과 같은 효과가 생긴다. 참신한 힘이 주입되므로, 생산은 새로운 모습으로 활기를 띨 것이고 교환도 새로운 자극을 받아 그 효과가 멀리까지 파급될 것이다. 현재의 과세 방식은 인공의 사막과 산처럼 교환을 저해한다. (중략) 현재 부과되는 조세는 인간의 노력, 근면, 기술, 절약에 벌금을 물리는 것과 같은 효과를 낸다. (중략) 이런 세금을 내고도 이윤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부작용이 꼬리를 물게 된다. (중략) 황무지를 옥토로 바꾸어 놓는 사람을 조세로써 처벌하며, 기계를 도입하고 늪을 농지로 바꾸는 사람에게 벌금을 물린다.
노동시장에 미칠 효과를 생각해 보자. 현재와 같은 일방적인 경쟁은 사라진다. 노동자가 일자리를 얻기 위해 경쟁을 벌여 임금이 최저 생존 수준으로 하락하는 대신, 어디서든지 고용주가 노동자를 구하기 위해 경쟁을 벌이고 임금은 정당한 수준으로 올라간다. 왜냐하면 노동수요에 있어 최대의 경쟁자라고 할 수 있는 자가노동 수요가 노동시장에 등장하기 때문이다.
(중략) 이 때 고용주는 교역 확대와 이윤 증대라는 자극을 감지하는 다른 고용주와도 경쟁을 해야 하며 또 토지독점을 막는 조세제도로 인해 활짝 개방된 자연의 기회를 이용하여 자가 노동을 하려는 사람과도 경쟁을 해야 한다.
노동에게 자유로운 일터와 완전한 대가를 주고 사회의 성장으로 인해 생긴 기금을 사회 전체의 이익을 위해 징수하면 여러 가지 변화가 나타난다. 궁핍 내지 궁핍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게 된다. 생산이라는 용수철은 자유롭게 튀어 오르고 부가 엄청나게 증가하여 최하층도 안락한 생활을 할 수 있게 된다. (중략) 궁핍 내지 궁핍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지면 부에 대한 동경도 숙어들고 부의 획득과 과시가 아닌 다른 방법으로 타인의 존경과 인정을 얻으려 할 것이다. 이렇게 해서 공적인 문제의 처리나 공적인 자금의 관리에 있어서도 사익을 추구할 때처럼 신경을 써서 기술을 발휘하고 정성을 들이게 된다.
Ⅶ. 개혁의 길
1. 인간 진보의 법칙
인간 행동의 근본 동기를 이기심이라고 보는 철학은 단견이다. 이러한 철학은 이 세상에 가득 찬 여러 사실을 외면한다. (중략) 모든 민족의 역사에 많은 영웅과 성자가 출현하는 것은 이기심 때문이 아니다. 세계사의 페이지마다 고결한 행동과 자비로운 생활이 빛나는 것도 이기심에 의해서가 아니다. (중략) 여기에는 이기심을 극복하고 몰아내는 어떤 힘이 작용한다. 이것은 도덕세계에서의 전기라고 할 수 있는, 무엇보다도 강력한 힘이다. 이것은 인간이 살았던 모든 사회에 존재했던 힘이고 오늘의 사회도 여전히 이 힘으로 가득 차 있다. (중략) 우리에게 의욕만 있으면 이러한 진정한 힘은, 현재는 아무 쓸모가 없거나 잘못된 형태로 나타나고 있지만, 사회를 강하게 하고 사회를 건설해 나가고 사회를 고결하게 만드는 데 사용할 수 있다. (중략) 우리는 단지 이 힘에 자유와 기회를 부여하기만 하면 된다.
노동의 능률은 언제나 일반적인 임금과 같이 상승한다. 임금이 오르면 자존심, 지적 능력, 희망, 활력도 증가하기 때문이다. (중략) 생산의 큰 원동력은 근육이 아니라 마음이다.
인간에게는 끊임없는 욕구가 생겨서 밖으로는 자연을 향하고 안으로는 자신을 향해서, 뒤로는 감도는 안개를 뚫고 과거를 향하고 앞으로는 드리운 어둠 속의 미래를 향해서 탐구한다. (중략) 욕구는 더 높은 세계로 발전하고 더 큰 세계로 손짓하며, 동녘에 떠오르는 별이 인간을 계속 인도한다. 보라! 심장은 하나님을 동경하여 고동치고 마침내 인간이 천체의 운행을 도울 수도 있다!
정신력은 진보의 동력이며 인간은 진보에 투입하는 정신력-즉 지식의 확대, 방법의 개량, 사회 상태의 개선에 투입하는 정신력-에 비례하여 전진한다.
이렇듯 평등 속의 어울림이 진보의 법칙이다. 어울림은 정신력을 자유롭게 하여 개선에 바칠 수 있도록 해 주며 평등, 정의, 자유는-이 세 용어는 도덕 법칙을 존중한다는 의미에서 동일하다-정신력이 쓸 데 없는 싸움에 소모되는 것을 막아준다.
인간 진보의 법칙은 도덕 법칙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정의를 촉진학도 권리의 평등성을 존중하며 개인의 자유는 타인의 동등한 자유에 의해서만 제약되도록 하는 사회제도는 문명을 발전시킨다. 사회제도가 이렇지 못하면 문명의 발전은 중단되고 퇴보한다. 1,800여 년 전 십자가에 못 박힌 그 분이 가난한 어부와 유태 농민에게 가르쳤던 단순한 진리 이상의 교훈을 정치경제학과 사회과학이 가르칠 수 없다. 이 단순한 진리는, 이기심에 의해 변질되고 미신에 의해 왜곡될 수는 있지만, 인간의 영적인 열망을 담아내기 위해 애를 써 온 모든 종교의 밑바닥에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2. 종교의 임무
정의가 도덕의 계층에서 가장 상위의 덕목이라고는 말하지 않겠다. 그러나 정의는 최우선적인 덕목이다. 정의보다 상위에 있는 덕목은 반드시 정의에 기반을 두어야 하고 정의를 내포하여야 하며 정의를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다. 기독교를 통해 우리에게 영향을 준 헤브루 종교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사랑의 하나님이 나타나기에 앞서 "네 하나님이신 주님은 정의의 하나님"이라고 선언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영원불변의 정의가 인식되기 전에는 영원불변의 사랑은 감추어져 있다. 사람이 진실로 관대하기 위해서는 정의로워야 하듯이 인간 사회가 자비에 기반을 두려면 먼저 정의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
'자비(Benevolence)'보다 더 위대하고 '자선(Charity)'보다 더 존엄한 '정의(Justice)'는 이 잘못을 시정하라고 명령한다. 저울과 칼을 들고 있는 정의는 부정할 수도 없고 제거할 수도 없다. (중략) 빈곤에서 생기는 고통과 야만성을 하나님의 불가사의한 섭리로 돌린다거나 또는 두 손을 모으고 만물의 아버지 앞에 가서는 대도시의 궁핍과 범죄의 책임을 미룬다면 형식상으로는 기도일지 모르나 실제로는 신성모독이다. 영원하신 존재를 폄하하는 행위이다. 정의로우신 분을 욕되게 하는 행위이다.
그리스도가, 들의 백합이 옷 걱정을 할 필요가 없듯이 하나님의 나라와 선행(옮긴이 주 : 정의)을 추구한다면 물질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된다고 하였는데 이는 단순한 몽상가의 말이 아니다. 그리스도는, 정치경제학의 최근 연구결과에 비추어 볼 때 완벽한 진리를 설파한 것이다.
거의 1,900년 전 로마문명이 극도의 불평등으로 치닫고 도처에서 대중이 절망적인 노예상태로 전락하고 있을 때, 한 유대 마을에 교육도 받지 못한 목수가 나타나서 당시의 교단과 형식주의를 비웃으며 노동자와 어부에게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과 모든 인간의 평등함과 형제됨에 관한 복음을 설교하고 하늘나라가 이 땅에 임하도록 기도하라고 가르쳤다.
가장 중대한 문제 앞에서 꼼짝도 못하고 이를 얼버무린다면 종교는 무슨 소용이 있는가? 내세에 대해서 무슨 약속을 하건 간에 현세의 부정의를 방지하기 위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면 종교는 무슨 소용이 있는가? 초기의 기독교는 이런 종교가 아니었다. 그 당시에도 이랬다면 로마의 박해를 절대로 받지 않았을 것이고 후에 로마 전역에 전파되지도 못했을 것이다. 회의주의적인 로마 지도자들은 온갖 신에 대해 너그러웠고 하급의 미신에 대해서조차 무관심했었으나 평등권에 기반을 둔 이 종교에 대해서는 예민하게 대처했다. 노예와 빈자에게 새로운 희망을 불러 일으킨 이 종교, 십자가에 못 박힌 목수를 중심에 둔 이 종교, 하나님이 모든 이의 평등한 아버지이시고 모든 인간은 평등한 형제임을 가르치는 이 종교, 정의가 빨리 지배하기를 추구하면서 "나라이 임하옵시며"라고 기도하는 이 종교를 로마 지도자들은 본능적으로 두려워하였다.
3. 우리가 할 일
자유는 다시 우리를 부른다. 우리는 자유를 따라야 하며 완전히 신뢰하여야 한다. 자유는 우리가 완전히 받아들이지 않으면 떠나 버린다. 사람들이 투표권을 갖는다든가 이론상 법 앞에 평등한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사람들의 생활의 기회와 수단을 이용할 수 있어야 하고 자연의 혜택을 동등하게 누릴 수 있어야 한다.
빈곤이 타파되면, 탐욕이 고결한 열정으로 변하면, 인간을 반목하게 하는 질투와 두려움 대신 인류애가 평등으로부터 피어나면, 최하층민도 안락과 여가를 누리는 상황이 되어 정식력에 대한 속박이 풀리면, 우리 문명이 얼마나 높이 날아 오를지 누가 측정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인간이 몰입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목표입니다. 인생에 있어서 이보다 더 귀한 투쟁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 강연장에 모이신 여러분은 물론이고, 다른 어떤 사람에게도 절대적으로 확실한 단 한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죽음입니다. 어차피 길지 않은 인생인데 얼마를 더 사는가 하는 것이 우리에게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우리가 불의와 싸우고, 여론을 계몽하고, 수많은 사람을 타락과 참담 속으로 몰아 넣는 저주 받은 제도를 깨뜨리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 하며, 그리하여 후손이 보다 선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무언가를 한다면 이것이야 말로 인생을 가장 고귀하고 훌륭하게 활용하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 앞에는 길고도 험한 싸움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 중에는 이 싸움의 성공을 보지 못하는 사람도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게 무슨 문제가 됩니까? 이런 투쟁에 동참하는 것만으로도 특권입니다. 이 투쟁은 모든 시대의 정의롭고 선한 사람들이 세계 곳곳에서 오랜 세월 동안 동참해 온 위대한 투쟁의 일부임을 우리는 압니다. 우리가 이 투쟁에 참여함으로써 이 땅 위에 하나님의 나라를 구현하기 위해 우리 나름의 방식으로 기여하게 됩니다. 또 우리 뒤에 올 사람들-하늘나라에서 승리하게 될 것으로 우리가 믿는 사람들의 삶의 조건을 보장하기 위해 기여하게 됩니다.
"누구도 자신이 영향력이 없는 사람이라고 여겨서는 안 된다. 그가 누구든 어디에 있든 생각하는 사람은 빛이 되고 힘이 된다." - Henry George, '사회문제'
출처:성경적토지정의를위한모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