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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21호 :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密經) 동국
대학교 1981.07.15 지정
이 책은 후진(後秦)의 구마라습(鳩摩羅什)이 번역한 것에 명나라의 천노(川老)가 풀이를 덧붙인 것이다. 닥종이에 찍은 목판본으로 처음에 두루마리 형식으로 만들었던 것을 다시 책의 형태로 고쳐 만들었으며, 크기는 세로 56㎝, 가로 19.1㎝이다.
책머리에 있는 글에 의하면 유향과 강인부가 우왕의 왕비에게 도움을 받아 책을 간행했음을 알 수 있다. 이때 지담(志淡)이 간행을 주관하고 이색(李穡)이 발문(跋文:책의 내용과 그에 관계된 일을 간략하게 적은 글)을 지었으며 글씨는 각지(角之)가 썼다는 내용도 확인할 수 있다. 책 끝부분에는 부처의 깨달음이나 소원을 기원하는 진언(眞言)이 있고, 특히 다른 책에서는 볼 수 없는 영험찬(靈驗讚)이 있다. 영험찬은 사람의 기원에 대해 부처가 반응을 나타내는 영묘한 효험을 증명하는 글을 말한다.
글자가 많이 닳고 인쇄상태가 깨끗하지 못한 것으로 보아 판을 새기고 한참 뒤인 조선 초기에 와서 다시 찍어낸 것으로 보인다.
제722호 : 삼국사기<권44∼50>(三國史記<卷四十四∼五十>) 조병순
『삼국사기』는 고려 인종 23년(1145)경 김부식이 신라·고구려·백제 3국의 정치적인 흥망과 변천을 중심으로 편찬한 역사서이다.
인종의 명에 따라 김부식의 주도하에 11명이 참여하여 편찬되었다. 이 책이 만들어진 12세기 전반의 상황은 고려 건국 후 200여년이 흘렀고 문벌귀족문화가 절정기에 이르렀으며, 유교와 불교가 서로 어우러져 고려 왕조가 안정되어 있었다. 따라서 자기 역사의 확인 작업으로 전 시대의 역사정리가 필요하였다. 조정에서는 거란을 물리친 후 자신감에 차 있었고 여진의 위협에 대한 강렬한 국가의식이 고조되어 있었다. 또 한편 문벌귀족간의 갈등과 대립이 심각했는데, 분열과 갈등을 국가가 망할 수 있는 원인으로 강조함으로써 현실비판의 뜻과 역사의 교훈을 후세에 알리려 하였다.
이 책은 13세기 후기에 찍어낸 것으로 현존하고 있는『삼국사기』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크기는 가로 19.5㎝, 세로 25㎝이고, 상태가 좋지 못하다. 지금까지 알려진 것으로 완전한 것은『옥산서원본(玉山書院本)』과 이 책의 2질(帙) 뿐이다. 이 책을 통해 중종대 간본(刊本)의 잘못된 글자와 빠져 있는 글자를 바로 잡을 수 있게 되었다. 원판이 이미 닳아서 복구가 불가능한 곳이 있고, 글자가 잘못되어 있거나 빠져 있는 등의 결점이 있기는 하나 현재로선 가장 완전한 것이다. 이 책은 통일신라시대를 포함한 한국고대사를 연구함에 있어 일연의『삼국유사』와 더불어 최고의 사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평가된다.
제723호 : 삼국사기<권1∼50>(三國史記<卷一∼五十>) 조병순
이 책을 간행한 경위는 경주부윤(慶州府尹) 이계복의『삼국유사』중간에 밝힌 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즉 ‘우리나라의 삼국본사(三國本史)와 유사(遺事) 두 책이 다른 데서는 간행된 적이 없고 본부(경주부)에 판이 있기는 하지만 오래되어 판이 망가져 한 줄에 겨우 4∼5자 밖에는 알아볼 수 없다 ’고 한 부분이 바로 그것이다.
책의 크기는 가로 20.7㎝, 세로 30.2㎝이며, 원판이 닳아서 복구할 수 없는 곳, 잘못된 글자, 빠져 있는 글자 등의 결점은 있지만『옥산서원본(玉山書院本)』과 함께 현재까지는 가장 완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제724호 : 성주도씨종중문서(星州都氏宗中文書) 논산
조선 태조 2년(1393)부터 6년(1397)까지 도응(都膺)에게 하사한 사령왕지 4매와 녹패 등 5매의 고문서이다. 도응은 고려말 충신으로 두문동 72인 중 한 사람이다. 고려 공민왕 때 중대광문하시중찬성사를 역임하였는데,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한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관직을 하사하였으나 이에 응하지 않았다.
고문서를 보면 도응위조봉대부전의소감사령교지(1393), 도응위선절장군흥위위좌령장군사령교지(1394), 도응위선절장군용우무위사좌령장군사령교지(1395), 도응위보공장군호용순위사간대장군사령교지(1397), 회사선절장군흥위위좌령장군사령녹패 등이다. 이 왕지에는 고려말 조선초의 관직이 섞여 있으며 ‘조선지보’라는 도장이 찍혀 있다. 이것은 태종 이후에 ‘조선왕국지보’나『경국대전』반포 후에 사용된 ‘시명지보’와는 다름을 알 수 있다.
이것들은 조선 전기 관제의 변천과정, 새보(국왕의 도장)의 사용경위, 서체의 변천 그리고 고문서 양식의 변천과정을 연구하는데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유물은 보물 제724-1호에서 보물 제724-5호까지 구분.지정되어 있음)
제725호 : 남원양씨종중문서(南原楊氏宗中文書) 국립전주박물관
고려 공민왕 4년(1355)부터 조선 선조 24년(1591)까지의 고문서 7매이다. (보물 제725-1에서 제725-7호까지 구분.지정)
양이시가 고려 공민왕 4년(1355) 과거에 합격했음을 알리는 합격증서인 홍패(1355)와 그의 아들 양수생 역시 우왕 2년(1376) 문과에 급제했음을 알리는 홍패 등 2건을 주축으로 하고 있다.
이 외에도 양공준이 조선 중종 3년(1508) 생원시에 급제했다는 교지와 다시양공준이 문과에 급제했다는 교지, 생원인 양홍이 중종 35년(1540)에 문과에 합격했다는 교지, 그리고 양시성이 선조 24년(1591)에 생원시에 급제했다는 교지 등의 합격증서가 있으며, 명종 14년(1559) 양홍을 청도군수로 임명한다는 발령장인 사령교지도 있다.
이들 문서는 고려 후기에서 조선 전기의 홍, 백패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며 특히 양이시급제홍패와 양수생급제홍패는 조선시대의 합격증서에 교지라 쓴 것과는 달리 왕명이라 기록되어 있으며, 시험관의 관직, 성명 등이 기록되어 있어 문서의 형식 및 고려시대 과거제도 연구에 있어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제726호 : 창산군장관의원종공신록권(昌山君張寬의原從功臣錄券) 정읍 장해근
공신녹권이란 공신으로 인정하는 증서를 말하는데, 이것은 태조 4년(1395)에 창산군 장관(張寬)에게 내려진 원종공신 녹권이다.
태조는 태조즉위년(1392) 8월에 공신도감을 설치하고 개국의 의거에 참여하고 공을 세운 신하는 개국공신에 봉하고 개국의거에는 참여치는 않았지만 태조를 따르고 신변을 도와주며, 왕위에 오르기까지 적극 밀어준 이들에게 원종공신에 봉하였다. 이 녹권은 원종공신 각 개인에게 발급된 유일한 문서로 붉은색 바탕에 길이 67.6m, 폭 34㎝ 정도의 크기이다. 내용은 공신의 공로사례를 열거하고 공신의 직명단자 등 그리고 본문머리를 비롯하여 9군데에 이조지인(吏曹之印)이 찍혀있다.
개국당시의 공신전기자료일 뿐만 아니라 조선 전기의 녹권문서와 관제(官制) 및 이두문자 등을 연구하는데 소중한 자료이다.
제727호 : 남양전씨종중문서(南陽田氏宗中文書) 논산 전갑식
남양 전씨 종중에 전해 내려온 문서들로 남양 전씨 6대에 걸친 왕지 및 교지, 호적단자와 유서 등이다.
문서의 연대는 태종 16년(1416)에서 명종 20년(1565)까지 해당하는 것으로 전흥에게 태종이 내린 왕지 1건, 교지 1건, 전가생의 교지 2건, 전지의 교지 1건, 전우평의 교지 1건, 그리고 전화가 장자인 전경업에게 봉사조(조상의 제사를 받드는 조건)로 물려준 전답 및 노비를 나누어 준 기록 등 8건이 있고, 호적단자는 숙종 28년(1702)에 작성된 전유성의 것 3장이다.
이 문서들은 8건 27매를 일괄하여 지정한 것으로, 왕지 및 교지 2건은 조선 전기의 왕지와 교지의 문서양식을 알아볼 수 있도록 하는 귀중한 자료이며, 전답과 노비의 분금기인 유서는 당시의 가족제도 및 사회경제사 연구의 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고 평가된다.
(보물 제727-1에서 제725-27호까지 구분.지정)
제728호 : 설씨부인권선문첩(薛氏夫人勸善文帖) 순창
이 문첩은 조선 단종 때부터 성종 때까지 문신으로 활약한 신말주의 부인 설씨가 선(善)을 권장하는 내용을 담아 쓴 글과 그림이 있는 문서이다. 내용을 보면 설씨가 남편 신말주와 함께 전라북도 순창에 있을 때, 이 곳 강천산에 있는 강천사를 복원하기 위해 신도들에게 시주를 얻고자 권선문(勸善文)을 짓고 사찰도를 그려 돌려보게 했던 것이다. 전체 16폭 가운데 그 가운데 14폭은 권선문이고 나머지 2폭은 사찰의 채색도가 그려져 있으며, 뒷면에는 후손들의 집에 전해내려오던 편지글과 권선문이 쓰여져 있다.
또한 성화 18년(성종 13년 1482) 7월 정부인 설이라는 연대와 인장이 찍혀있다. 이 문첩은 조선시대 여류 문인이 쓴 필적으로는 가장 오래되었고, 사대부 집안의 정부인이 쓴 인과법에 의한 글이라는 점에서 높이 평가된다.
제729호 : 예천용문사교지(醴泉龍門寺敎旨)
세조 3년(1457)에 내린 교지로, 용문사에 잡역을 면제할 것을 인정하는 사패교지(공로가 있는 자에게 나라에서 부역을 면해주는 것을 입증하는 문서)이다. 이 교지의 내용은 ‘일찍이 감사와 수령에게 지시한 대로 경상도 용문사는 다시 심사하여 더욱 보호하고 잡역을 덜어 주라’는 것이다. 이 교지는 가로 44.8cm, 세로 66.5cm로 국왕의 수결(지금의 서명)이 있는 것으로 조선 전기 용문사의 지위를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제730호 : 불영사응진전(佛影寺應眞殿) 울진
불영사는 신라 진덕여왕 5년(651) 의상이 세웠다고 하는데, 당시 이 지역 냇물 위에 다섯 부처님의 영상이 떠오르는 모습을 보고 거기 살던 용을 쫓아낸 뒤 절을 지었다는 전설이 전한다. 조선 태조 5년(1396) 나한전만 남긴 채 화재로 모두 불에 타 버렸고 임진왜란 때에도 영산전만 남기고 모두 불 타 버렸던 것을 훗날 다시 짓고 많은 수리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응진전은 석가모니를 중심으로 좌우에 아난·가섭과 16나한상을 모시고 있다. 1984년 수리 공사 때 발견한 기록으로 임진왜란 전·후에 여러번 고쳐 지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원래는 영산전이었다고 한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이고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앞면 가운데 칸에는 4짝 여닫이문을, 양쪽 칸에는 작은 창을 달아 놓았다.
건물 안쪽은 천장 속을 가리기 위해 우물 정(井)자 모양의 천장으로 꾸몄다. 건물에 남아 있는 단청은 안쪽이 비교적 잘 남아 있어 조선 중기의 문양을 살펴볼 수 있다.
제731호 : 의령 보리사지 금동여래입상(宜寧 菩提寺址 金銅如來立像) 동아대학교
1948년 5월 경상남도 의령군 가례면 갑을리 도굴산에 있는 보리사에서 출토된 것으로 1981년부터 동아대학교에서 보관하고 있다.
머리 위에 있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는 마치 밥그릇을 엎어 놓은 것 같으며, 풍만한 얼굴에 비해 입은 매우 작게 표현되었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은 가슴부분에서 리본 모양의 매듭을 지었고 배에서 밑으로 반원형의 무늬가 가늘게 그어져 있다. 오른손은 옆에서 허리까지 내리고 왼손은 수평으로 들었는데 모두 손바닥을 위로 하고 있다. 8각 대좌(臺座)는 앞면과 뒷면을 완전히 뚫어서 모양을 냈다.
전체적으로 완전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고 조각 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제732호 : 조대비사순칭경진하도병(趙大妃四旬稱慶陣賀圖屛) 동아대학교
조선시대 헌종의 어머니인 조대비(1808∼1890)의 40세 생신을 축하하는 잔치모습을 그린 병풍이다. 조대비는 순조 19년(1819) 세자빈으로 책봉되었으나 세자가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일찍 죽어 왕비는 되지 못하고, 후에 그의 아들인 헌종이 왕위에 오르자 후에 왕대비가 되었다. 가로 458㎝, 세로 169㎝의 8폭으로 된 병풍으로 7폭은 전각, 나무, 산수를 채색하여 그렸고 마지막 1폭은 도총관 조기영 등 9명의 관등과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헌종 13년(1847) 정월 초하루 창덕궁 인정전 앞뜰에서 거행된 잔치에는 400여명이 참석했는데, 관직에 따라 서로 다른 관복을 입은 문무백관과 행사에 참여하는 인물 그리고 창검을 들고 도열해 있는 군관들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표현해 당시 궁중의식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다. 화려한 색깔의 당채를 사용하여 그린 전각, 나무, 산수 등과 인물들의 섬세한 표현에서 도화서의 일류급 화원들이 그린 작품으로 추정된다. 이 작품은 회화사에서뿐만 아니라 당시 복식연구와 130년 전의 궁중풍속을 볼 수 있는 기록화로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제733호 : 헌종가례도병(憲宗嘉禮圖屛) 동아대학교
헌종(재위 1834∼1849)이 효정왕후와 혼인할 때의 모습을 그린 병풍으로 크기는 가로 115㎝, 세로 51㎝이며 비단에 채색되었다.
헌종의 첫 왕비인 효현왕후 김씨가 헌종 9년(1843)에 죽고 이듬해 10월 효정왕후와 가례를 올렸는데 이 때 그려진 것으로 모두 8폭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1폭은 예식을 맡아보던 예문제장 조병구가 쓴 축하의 글이 실려 있고 제8폭에는 선전관청에 있는 사람들의 관등·성명·본관 등을 기록한 글이 있다. 그리고 제3∼7폭까지는 혼례를 치르는 장면과 함께 창덕궁 인정전을 비롯한 궁궐내의 모습이 질서정연하면서도 화려하게 그려져 있다. 140여년 전 궁중혼례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어 회화로서 뿐만 아니라 역사자료로서도 가치가 있으며 보관상태도 매우 양호하다.
제734호 : 해인사고려각판(海印寺高麗刻板)
경상남도 합천군 해인사에서 보관하고 있는 고려시대의 불교경전과 유명한 승려들의 저술, 시문집 등이 새겨진 목판이다. 해인사에 있는 목판은 모두 54종 2,835판인데 이 중 28종 2,725판이 국보 제206호로 지정되어 있고, 26종 110판이 보물 제734호로 지정되어 있다.
해인사 고려각판은 국가기관인 대장도감에서 새긴 해인사 대장경판과는 달리 사찰이나 지방관청에서 새긴 것이며, 현재 해인사 대장경판전 사이에 있는 동·서 사간판전(寺刊版殿)에 보관되어 있다.
이 목판들은 금강경·화엄경 등의 대승불교 경전과 신라·고려·중국의 유명한 승려, 개인의 시문집 및 저술들이다. 이곳의 불교경전들에는 대부분 간행한 연대와 목적 등이 남아 있어서 고려시대 불교경전의 간행과 유통 등 불교신앙의 경향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고승 및 개인의 시문집과 저술 등에는 간행기록이 남아있지 않고 일부분이 훼손된 것들이 많다. 하지만 그 내용이 전하지 않거나 역사적으로 희귀한 자료들로서 당시의 불교사상과 문화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된다.
(유물은 제734-1호에서 제734-26호까지 구분.지정되어 있다.)
제735호 : 부석사고려각판(浮石寺高麗刻板)
이 판은 부석사에 있는『화엄경』정원본 40권, 진본 60권, 주본 80권 등 3종(보물 제736-1, -2, -3호로 구분 지정)의 대방광불화엄경을 나무판에 새긴 것이다. 대방광불화엄경은 줄여서 ‘화엄경’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화엄종의 근본경전으로 법화경과 함께 한국 불교사상 확립에 가장 크게 영향을 끼친 경전이다.
정원본(貞元本)은 반야가 번역한 화엄경 40권을 가리키고, 진본(晋本)은 불타발타라가 번역한 화엄경 60권을, 주본(周本)은 실차난타가 번역한 화엄경 80권을 가리킨다. 이 판은 모두 합쳐 634판이며 한 줄에 34자씩 글자를 배열한 특이한 형식이다.
13∼14세기경 거란에서 불경을 수입하여 나무판에 다시 새긴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 전해지는 유일한 거란본 계열의 각판으로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우리나라 화엄종의 창시자인 의상대사가 창건하여 화엄사상을 발전시켜 나간 부석사에 소장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더욱 크다.
제736호 : 정명경집해관중소(淨名經集解關中疏) 연세대중앙도서관
정명경은 ‘유마경’의 뜻을 풀이한 명칭이다. 유마경은 ‘유마힐소설경’을 줄여서 부르는 말로, 유마거사가 부처님을 대신하여 설법한 내용을 희곡 형식으로 정리한 것이다.
이 책은 진나라의 승려 승조(僧肇)가 주석을 달아 놓은 유마경에 당나라 도액(道液)이 자신의 의견을 더하여 펴낸 것이다. 닥종이에 찍은 목판본으로 권3, 4가 한 권의 책으로 되어 있으며, 크기는 세로 34.2㎝, 가로 29.5㎝이다. 정명경관중소는 중국 돈황에서 발견된 2종과 의천이 수집해온 4권만 알려져 있는데, 이 책은 의천의『신편제종교자총록』에 수록된 4권 중 권3, 4의 남아있는 1책이다.
각 권의 끝에 고려 헌종 1년(1095)에 흥왕사에서 간행했다는 기록이 있어서, 의천이 간행한 교장(敎藏) 판본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글자체나 새김, 인쇄상태, 종이질 등이 세조 때 간경도감<刊經都監:세조 7년(1461) 불경을 한글로 풀이하여 간행하기 위해 설치한 기구>에서 찍어낸『금강반야경소개현초』와 비슷하여 조선 세조때 교장(敎藏)을 보고 다시 새겨 찍어낸 판본으로 추정된다.
제737호 : 불조역대통재(佛祖歷代通載) 담양 용화사
불조역대통재는 석가여래 탄생부터 원통 2년(충숙왕 복위 3년,1334)사이 학덕이 높은 스님들의 전기(傳記)를 연대순으로 적어 놓은 책이다. 이 책은 닥종이에 찍은 목판본으로 전체 22권으로 이루어진 것을 7권의 책으로 엮었으며, 크기는 세로 28.2㎝, 가로 16.8㎝이다. 김수온이 쓴 발문(跋文:책의 간략한 내용과 간행에 관계된 일을 적은 글)에 조선 성종 3년(1472)에 인쇄하여 펴냈다는 내용이 있다.
인수대비가 세조, 예종의 명복과 정희대왕대비, 성종, 공혜왕후의 장수를 빌기 위해『법화경』등 29종류의 불교경전을 간행하였는데, 이 책은 그 중 하나에 해당한다. 권22의 표지 안쪽에 있는 기록에는 묵담(默潭)이 세상을 떠난 스승으로부터 대대로 물려받아 간직해온 것이 현재 용화사 주지(住持) 스님에게 전해졌다는 내용이 있다.
전권을 하나도 빠짐없이 갖춘 유일한 것으로 조선 전기의 목판인쇄술과 왕실의 불교신앙을 살펴볼 수 있는 소중한 자료이다.
제738호 : 문수사리보살최상승무생계경(文殊師利菩薩最上乘無生戒經) 통도사
문수사리보살최상승무생계경은 석가모니가 보리수 아래에서 설법한 내용을 경전에 담은 것이다. 원나라에 귀화한 인도의 고승 지공(指空)이 고려 금강산법기보살도량(金剛山法起菩薩道場)에 참가하였을 때, 고려 충숙왕이 지공에게 설법을 요청하자 이 책을 내놓고 설법하였다고 한다. 나무에 새겨서 닥종이에 찍은 것으로, 3권이 하나의 책으로 묶여 있으며, 크기는 세로 26.1㎝, 가로 19.2㎝이다.
고려 우왕 12년(1386)에 쓴 이색(李穡)의 간행기록을 통해 1353년에 강금강(姜金剛)이 간행한 것을 고려에서 다시 간행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때 예안군 우공(禹公)이 옮겨 새기려다가 완성하지 못한 것을 성암사(聖庵寺)의 시주로 1386년 5월에 완성하여 간행한 것이다.
제739호 : 고희초상외문중유물(高曦肖像 外 門中遺物) 부안
제740호 : 감지은니보살선계경<권8>(紺紙銀泥菩薩善戒經<卷八>) 동국대학교
보살선계경은 보살수행의 방법을 폭넓게 설명한 경전이다.
이 책은 검푸른 색의 종이에 은색 글씨로 경문을 정성들여 옮겨 쓴 것으로, 유송(劉宋)의 구나발마(求那跋摩)가 번역한『보살선계경』9권 가운데 제8권이다. 종이를 길게 이어붙여 두루마리 형태로 만들었으며, 펼쳤을 때의 크기는 세로 31㎝, 가로 1,300㎝이다.
책 끝에 있는 간행기록을 통해 고려 충렬왕 6년(1280)에 왕이 발원하여 대장도감(大藏都監)에서 간행한 대장경 가운데 하나임을 알 수 있다. 충렬왕이 발원하여 간행한 책은 여러 종류가 전해지고 있는데 모두가 정성을 들여 판각하였기 때문에 글자의 새김 등이 뛰어나고 장엄하다. 이 책은 경기도 안성시에 있는 청원사의 삼존불을 금칠할 때 불상 속에서 나온 것으로, 그 출처가 확실하며 보존상태도 양호한 귀중한 책이다
제741호 : 민애대왕석탑사리호(敏哀大王石塔舍利壺) 동국대학교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보물 제247호) 내에서 발견된 통일신라시대의 사리 항아리이다.
사리를 탑에 보관하기 위해 사용된 이 항아리는 높이 8.3㎝, 아가리 지름 8.0㎝, 밑지름 8.5㎝이다. 현재는 크고 작은 4개의 조각으로 깨졌고, 뚜껑도 없어졌으며 몸통도 완전하지 않은 상태이다. 이와 같은 손상은 도굴 당시에 입은 피해로 보인다.
아가리가 넓고 어깨가 부풀어 있으며, 아랫부분이 좁은 항아리 모양으로 작고 아담하다. 이러한 형식은 법광사 삼층석탑, 취서사 삼층석탑에서 출토된 사리 항아리와 같은 것으로 9세기 중엽 신라에서 유행하던 양식이다. 항아리 표면 전체에 흑칠을 한 점이 특이하다. 어깨부분에는 꽃 구름무늬와 촘촘한 빗금 꽃무늬를 두 칸에 나누어 새겨 둘렀다.
몸통에는 가로, 세로로 칸을 내어 7자 38행의 글자를 음각하였다. 글 중에는 이 항아리가 신라 민애왕(재위 838∼839)을 위하여 건립된 석탑과 연관이 있으며,민애왕의 행적들이 꼼꼼하게 적혀있다. 또한 탑을 만든 시기가 경문왕 3년(863)임을 알 수 있게 하는 내용이 있다.
제742호 : 삼존불비상(三尊佛碑像) 동국대학교
제743호 : 정조대왕필파초도(正祖大王筆芭蕉圖) 동국대학교
조선시대 정조(재위 1776∼1800)가 그린 그림으로, 바위 옆에 서 있는 한 그루의 파초를 그렸다. 정조는 시와 글에 능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림에도 뛰어났다고 한다.
이 그림은 가로 51.3㎝, 세로 84.2㎝ 크기로 단순하면서도 균형적인 배치를 보여준다. 먹색의 짙고 옅은 정도 및 흑백의 대조는 바위의 질감과 파초잎의 변화를 잘 표현하였다. 그림 왼쪽 윗부분에 정조의 호인 ‘홍재’가 찍혀 있다.
형식에 치우치지 않은 독창적인 묘사가 돋보이는 이 그림은 글씨와 그림 및 학문을 사랑한 정조의 모습과 남종화의 세계를 보여주는 것으로, 국화도(보물 제744호)와 함께 조선 회화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제744호 : 정조대왕필국화도(正祖大王筆菊花圖) 동국대학교
조선시대 정조(재위 1776∼1800)가 그린 국화그림이다. 정조는 시와 글에 능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림에도 뛰어났다고 한다.
가로 51.3㎝, 세로 86.5㎝ 크기의 이 그림은 화면 왼쪽에 치우쳐 그린 바위와 풀위에 세 방향으로 나 있는 세송이의 들국화를 그렸다. 돌과 꽃잎을 묽은 먹으로, 국화잎은 짙은 먹으로 표현하여 구별하였는데, 이러한 농담 및 강약의 조화를 통하여 생동감을 느끼게 한다.
꾸밈이나 과장없이 화면을 처리한 점은 다른 화가의 그림에서 찾아볼 수 없는 특징으로 파초도(보물 제 743호)와 함께 몇 점 남지 않은 정조의 그림으로 회화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제743호 : 파초도 | 제744호 : 국화도 |
제745호 : 월인석보(月印釋譜) 서강대학교 외
『월인천강지곡』과 『석보상절』을 합하여 세조 5년(1459)에 편찬한 불교대장경이다. 이 책은 『월인천강지곡』이라는 명칭으로 발행된 것과 『석보상절』, 혹은 『월인석보』라는 명칭으로 발행된 3종류의 간행본이 있다.
석보는 석가모니의 년보 즉 그의 일대기라는 뜻이다. 조선 세종 28년(1446)에 소헌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아들인 수양대군(후의 세조)이 불교서적을 참고하여 한글로 번역하여 편찬한 것이 곧 『석보상절』이다. 세종 29년(1447) 세종은 『석보상절』을 읽고 각각 2구절에 따라 찬가를 지었는데, 이것이 곧 『월인천강지곡』이다.
『월인석보』는 총 25권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현재까지 발견된 것으로는 처음 간행된 권 1, 2, 7, 8, 9, 10, 11, 12, 13, 14, 15, 17, 18, 19, 23, 25와 재간행된 권 4, 21, 22 등 총 19권이 있다.
이 책은 조선 전기 2대에 걸쳐 임금이 편찬, 간행한 것으로, 우리나라 최초로 불교서적을 한글로 번역한 책이다. 조선 전기 훈민정음연구와 불교학 및 문헌학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1) 권1.2 서강대 2) 권7.8 동국대 3) 권9.10 김민영 4) 권13.14 연세대 5) 권17.18 수타사
6) 권21 리움박물관 7) 권22 김종규. 8) 권23 김종규 9) 권25 보림사 10) 월인석보 제15 구암사
11) 월인석보제20 임흥재 (보물 제745-1호...제745-11호)
제746호 : 성석린좌명공신왕지(成石璘佐命功臣王旨) 진안 성배현
고려 후기부터 조선 전기까지 문신을 지낸 성석린(1338∼1423)에게 내려진 왕지이다. 성석린은 공민왕 6년(1357)에 과거에 급제하여, 국자학유, 사관 등을 거쳐 조선시대에는 성균관사성, 제학, 영의정 등의 벼슬을 했다. 태조 이성계의 옛 친구로 태조와 태종 이방원을 화해시키는데 큰 역할을 한 인물이다.
이 교지는 태종 2년(1401) 제 2차 왕자의 난(방간의 난) 때 난을 평정하고 태종을 왕위에 오르게 한 공로로 익대좌명공신 3등에 봉해지면서 받은 왕지이다. 이 왕지에 쓰인 관직명을 보면 고려말 조선초에 관직이 함께 같이 쓰이고 있으며, 그 위에는 발급한 년월일과 ‘조선국왕지인’이라는 옥새(임금의 도장)가 찍혀있다. 판체는 초서체이며, 종이질은 장지(壯紙:우리나라에서 만든 두껍고 질긴 큰 종이)이고, 가로 61.1㎝, 세로 32㎝ 정도의 크기이다.
제747호 : 최문병의병장안장(崔文炳義兵將鞍裝) 경산시립빅물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한 최문병이 사용한 말안장으로 크기는 56×39×34㎝이고, 안장(鞍裝)자리 크기는 105×26㎝이다.
안장의 앞뒤로 돌출된 부분인 안교(鞍橋)는 나무로 윤곽을 잡았고, 뼈를 이용해 안장가리개(복륜)를 붙였으며, 쇠로 고정시켰다. 안교 바깥쪽은 고슴도치 가죽을 씌우고, 세 곳에 뼈조각으로 꽃모양을 만들어 붙였다. 안교 아래쪽은 둥글게 파내고 테두리를 뼈조각들로 붙였다. 말다래가 달린 안장자리는 가죽으로 만들었다.
발걸이(등자)는 철제이고, 발디딤은 원형으로 되었으며 배띠와 고들개는 마(麻)와 면직물로 되어 있다. 이 안장은 등자·배띠·고들개 등의 부속구를 모두 갖추고 있고, 보존상태가 양호한 희귀한 말갖춤(마구)으로서 그 가치가 있다.
제748호 : 서울 경국사 목각아미타여래설법도 (서울 慶國寺 木刻阿彌陀如來說法圖)
서울 성북구 정릉동 경국사 극락전에 모셔진 조선시대의 목각탱으로 중앙의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모두 13구의 불상과 보살이 있다.
중앙에는 아미타여래가 커다란 광배(光背)를 배경으로, 여러 층으로 된 대좌(臺座) 위에 있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이 붙여 있으며, 넓적한 얼굴은 형식화가 정착된 조선 후기 불상의 특징을 잘 반영하고 있다. 얼굴에 비해 몸은 왜소하고, 양 어깨에 걸치고 있는 옷은 두꺼워서 신체 윤곽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는 아래위의 너비가 같은 조선시대 특유의 형식이다. 불꽃무늬가 위로 솟아서 뻗쳐있고 그 안에 작은 부처들이 표현되어 있다. 본존 좌우에 아미타 8대보살이 있고, 그 밑 좌우에 사천왕 중 증장천과 지국천이 있다. 8대보살은 지장보살을 제외하고 모두 머리에 관(冠)을 쓰고 있으며, 두꺼운 옷을 입고 연꽃을 든 채 활짝 핀 연꽃 위에 서 있다. 본존과 같은 높이에 보살이 서 있고 바깥 좌우에는 나한상이 1구씩 서 있다. 전체적으로 조각수법이 둔중하고 양감이 결여되어, 형식화된 면을 많이 보이고 있다.
제749호 : 태고사원증국사탑(太古寺圓證國師塔) 북한산 태고사.
고려 후기의 승려인 원증국사 보우의 사리탑으로, 3단으로 이루어진 기단(基壇)위로 탑신(塔身)을 올린 후 독특한 모습의 머리장식을 얹었다. 기단의 맨 밑단이 되는 4각의 아래받침돌은 각 면마다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모양의 조각을 새겼으며, 그 윗면에는 굵은 선으로 연꽃무늬를 새겨 두었다. 8각의 가운데받침돌은 각 모서리에 원기둥을 새긴 후 면마다 큼직한 꽃무늬를 새겨 장식하였다. 원형에 가까운 윗받침돌은 굵은 선으로 연꽃을 새겼고, 꽃잎 안에 고사리무늬를 두었다. 탑신의 몸돌은 원형으로 위쪽이 좁아져서 지붕돌 밑면에 들어 맞게 되어있다. 지붕돌은 처마가 거의 수평을 이루며, 각 귀퉁이마다 꽃장식이 투박하게 솟아 있다. 지붕돌 위로는 머리장식이 있다.
태고사원증국사탑비(보물 제611호)의 건립이 고려 우왕 11년(1385)이므로, 이 사리탑은 그 이후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제750호 : 거돈사지삼층석탑(居頓寺址三層石塔) 원주 정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