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수미 오클랜드 초청 공연을 다녀 와서...>
명성이나 명예가 헛되이 퍼진 것이 아니고, 이름 날 만한 까닭이 있음을 이야기 할 때, ‘명불허전(名不虛傳)’이라는 말을 쓴다. 그런 의미에서 조수미 오클랜드 공연은 역시 ‘명불허전’의 진가를 보여 주기에 충분한 공연이었다. 그녀의 무대는 예술적 가치로 바라보자면 완벽에 가까운 아름다운 공연 이었고, 이땅에 살고 있는 한국인의 긍지로 바라볼 때는 가슴 울먹해지는 자랑스런 공연이 아닐 수가 없었다
공연 전 날 오케스트라 ( Auckland Philharmonia )와 호흡을 맟추는 리허설에 참여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는데, 이 자리에서 나는 이미 이번 공연의 성공을 어느 정도 확신 할 수 있었다. 그토록 작은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그녀의 목소리는 크리스탈보다 영롱하고 선명했으며, 마치 예민한 붓 하나를 손에 들고서 노래라는 물감을 흠뻑 묻혀 자유자재의 그림을 그려내는 천사와 진배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겨우 단 한곡의 연습을 마쳤을 뿐인데 발을 동동 굴러 환호하는 단원들은 이미 마음에서 우러나는 기쁨으로 조수미와 함께 하는 자신들의 협연에 대한 만족감을 보여주고 있었다. 솔로 연주자가 이렇듯 협연 하는 오케스트라를 실력으로 장악 할 수 있다면, 그 무대는 이미 절반 이상의 성공을 한 것이 분명 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나는 마음이 놓일 수 밖에 없었다.
12월 7일 공연 시간이 다가오자 오클랜드 중심부 퀸스트리트에 위치한 타운홀 주변은 공연에 대한 기대와 들뜬 모습으로 모여드는 한인들의 발걸음으로 열기가 후끈 달아 오르고 있었다. 물론 이렇게 멋진 공연에 현지인들이 예상보다 많이 보여지지 않은 아쉬움은 있었지만, 그래도 어려운 교민 경제를 감안해 볼 때 상대적으로 좋은 공연에 목말라 하면서 예술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리를 가득 메운 우리 한인 동포들의 모습과 협조가 새삼 감사하게 느껴졌다 ..
이번 공연에서 조수미는 자신만의 장기인 콜로라투라 창법의 화려함과 세밀한 기교를 마음껏 보여 줄 수 있는 낭만주의시대에서 현대곡에 이르기까지 품격 있으면서 무겁지 않은 오페라 아리아 위주의 레파토리를 선정했다. 이 말의 의미는 오클랜드 공연을 그저 쉽게 가기보다는 자신의 예술성과 한국인의 문화적 가치를 보다 품격이 있는 전문 연주로 나타내고 싶은 마음을 엿볼 수 있어서 흐뭇했다. 이 날 협연을 맡은 오클랜드 필 하모니아 오케스트라에 대해서 약간의 아쉬움을 구지 이야기하자면 조수미의 정교한 소리가 더 잘 전달 될 수 있도록 전체적인 연주의 소리 크기에 신경을 써야 했었고, 특히 콜로라투라 소프라노의 극치라 할 수 있는 고음 부분이 부각 될 수 있도록 피아니시모 부분에서 오케스트라의 자제력과 집중력이 요구되긴 했으나, 짧은 시간에 이러한 협연을 이룬 것 만으로도 오클랜드 필 하모니의 역량은 충분히 증명 되었다고 생각한다 .
이날 공연은 요한스트라우스의 오페레타 “ 박쥐” 서곡 (Overture) 을 연주한 오케스트라의 무대로 막을 열었고, 이어서 우아한 하얀 드레스 차림으로 마치 미끄러지듯이 사뿐히 무대에 등장한 조수미는Charles Gounod 의 오페라 로미오와 줄리엣에 나오는 월츠풍의 아리아 < 아! 나는 꿈 속에서 살고 싶어>와Eva Dell’acqua의 Villanelle (목가)를 들려 주었다.
두 곡 모두 고음 부분의 테크닉에 있어서 소리와 음계를 컨트롤하지 못하면 불러 낼 수 없는 곡들이었는데, 옥타브를 물 흐르듯이 넘나들면서 모든 음정이 대충 뭉개지는 일 없이 완전히 악보가 요구 하는 대로의 성공적인 표현력에 넋을 놓게 되었다
“나 노래 참 잘했지요?”라고 관객에게 사랑스럽게 뽐내는 듯한 그녀의 자연스런 무대 매너를 뒤로 하고 오케스트라의 차이콥프스키의 호두까기 인형 발레곡 모음연주가 이어졌다. 잠시 휴식을 취한 그녀는 어깨를 다 들어낸 도발적인 검정색 의상으로 눈길을 끌면서 무대에 모습을 나타냈다. <반짝반짝 작은 별…>의 멜로디로 잘 알려진 Adolphe Adam의 프랑스 오페라 “투우사”중의 아리아 < 아! 어머니께 말씀 드리지요>는 플루트 솔로 연주자와 함께 마치 음악으로 서로 대화를 나누는 것 같은 훌륭한 앙상블을 이루어냈고, 이어서 베르디의 오페라 ‘리골레토’에 나오는 유명한 서정적인 소프라노 아리아 ‘그리운 그이름(Caro nome)’을 들려 주었다.
이 곡을 끝으로 20 여 분간 휴식을 가질 수 있었는데,
비록 무대는 텅 비어 있었지만 공연장 곳곳에서 이루어지는 반가운 만남들을 통해서 오늘 공연이 한인커뮤니티에 미치는 긍정적인 영향력을 찾아 볼 수 있었다.
2부 공연은 오케스트라의 연주인 오페라 < 춘희> 의 1막 서곡으로 시작되었고
이어진 곡이 오늘의 유일한 한국작곡가 (안정준) 의 작품인 ”아리 아리랑 “이었다. 도입부분에 믿기 어려울 정도로 너무도 한국적인 느낌을 완벽하게 살려내고 있는 클라리넷 솔로에 이은 조수미의 노래는 연주자에 따라서 한국 작품을 세계화하기에 충분한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그 다음 무대는 태생적으로 명랑함을 지닌 조수미의 진가가 발휘된 유쾌한 무대 (Offenbach의 오페라 호프만의 이야기 중 “인형의 노래” )였다. 자신을 인형으로 분하여 열심히 노래하다가 태엽의 힘이 다해 기력이 빠진 인형을 지휘자가 손으로 태엽을 감는 시늉을 통해 인형이 다시 소생하여 노래하는 재미있는 퍼포먼스를 연출함으로써 모인 관객들에게 한 없는 즐거움을 선사했다.
이어지는 오케스트라의 캉캉 연주곡은 마치 모두가 프랑스 물랑루즈 바(Bar)에 앉아
흥겨운 유희에 빠져 있는 것처럼 모든 관객이 박자에 맞추어 자발적인 박수로서
화답하게 하였다.
이어서 등장한 조수미의 의상은 마치 몰디브 해안의 푸른 코발트 빛 바다색을 연상케 하기에 충분했다. 미국의 현대 작곡가 번스타인의 오페레타 < 캔디스 중 “ 화사하고 즐겁게” > 는 그야말로 조수미의 거칠 것 없는 쾌할함과 시원함이 더욱 잘 드러나는 무대였다.
여기까지가 가슴 벅찬 오늘의 메인 프로그램이었지만
누구 맘대로 오늘 공연을 마칠 수 있겠는가….
먼 길 마다 않고 웰링턴에서 찾아 주신 박용규 대사까지 체면을 무릅쓰고 기립박수에 연호를 보내고 계셨으니 이런 열광적인 환호를 모른 체 할 우리의 야박한 조수미는 아니었다. 이미 최선을 다한 무대였음을 알기에 무작정 앙콜을 청하는 것이 다소 미안했지만 그래도 그녀를 이대로 보내기 싫은 것이 모두의 공통된 심정이었을 거다.
총4곡으로 이어진 앵콜 무대 중에서도 우리에게 잘 알려진 푸치니 오페라 잔니스키키 중 “ 오! 사랑 하는 나의 아버지 ( O mio babbino caro)”를 노래 할 때에는 이미 약속된 연주로 인해 돌아가신 아버지의 장례식도 참석하지 못했던 세계적인 예술가인 동시에 불효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던 생각이 갑자기 떠올라서 마음이 찡해졌다 .
공연장을 떠나는 모든 사람들의 표정에서는 오늘의 행복한 시간여행이 그대로 환한 웃음으로 나타났고, 무대 뒤를 삼삼오오 빠져 나오는 오케스트라단원들은 엄지 손가락을 치켜 세우면서 오늘의 여신에게 찬사를 보내기에 주저 하지 않았다.
모든 공식일정을 마치고 조수미와 잠깐 시간을 가질 기회가 있었는데
오클랜드 공연의 기억을 묻는 나의 질문에 이런 답이 돌아왔다.
다른 나라 공연의 예로 비추어 볼 때 전문기획사가 아닌 한인회 등이 직접 행사를 주관하는 경우는 매우드문 경우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 성심껏 자신과 공연을 위해 최선을 다 해준 것이 크게 기억에 남는다는 말을 들으면서 이렇게 만들어 내기 쉽지 않은 좋은 공연의 기회를 마련한 오클랜드 한인회에 교민의 한 사람으로서 고마움을 전하고 싶어졌다.
“사람마다 크고 작은 고통이 없는 사람이 없잖아요. 다 힘들어요. 그럼에도 아침에 눈 떠서 오늘 하루를 선물로 받아들이고 계획을 세울 수 있는 여유를 가졌으면 좋겠어요. 그런 사소한 습관을 통해 자기 삶의 의미도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갑자기 어느 인터뷰 기사에서 조수미가 한 이야기가 생각났다.
그리고 오늘 그녀는 우리 모두에게 음악이 아닌 행복이라는 특별한 선물을 남겨 주었다
조수미 선배…. 늘 건강하고 좋은 무대 오래오래 지키시기를 기원합니다
이상호 ( 뉴질랜드 한국전 참전 용사 사랑회 오클랜드 회장/ 팜 스프링스 대표)
첫댓글 뿌듯하네요!!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