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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6사단 청성 전우회 휴계실 원문보기 글쓴이: 김원주(84.07.11~86.10.16)
2. 작전경과 : 중공군 1월공세간 후방지역작전 전례 적성리 전투
3. 전 훈
가. 진지사수의 현명한 판단 : 적의 1차공격을 격퇴한 후 중대장 및 대대참모들은 이곳을 철수하자는 건의를 하였다. 왜냐하면 아군은 후속부대가 없는 탐색부대이기 때문에 이곳에서 전투력을 소모할 필요성이 없다는 것이며, 포위속에서 대결하다가는 전멸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가정과 아직까지 남쪽으로는 퇴로를 개척할 수 있을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한편 대대장도 위기를 벗어나고 싶은 것은 솔직한 심정이었고, 미 고문관들도 대대장의 결심을 촉구하게 되었다. 대대장의 판단으로서는 이곳을 탈출할 수는 있겠지만, 그대신 많은 희생을 각오해야만 하였다. 또한 적이 동서부의 삼면을 포위하고 있는데, 남쪽의 아군 보급로를 그대로 방치하고 있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철수하다가 죽을 바에야 죽던살던 현 진지에서 지탱해 보기로 결심하고 진지사수를 명령하였다. 그리고 대대장은 "날이 밝게되면 아군 증원부대가 오게될 것이다"하면서 부하들을 격려하였다.※ 참고 : 반면 중공군 5월공세시 중공군 제20군 일부가 오마치고개를 점령함으로써 제3군단 3, 9사단과 군단직할 일부부대가 현리일대에서 고립되었을 때, 방대산을 넘어 무질서하게 철수하다가 부대가 와해되고 많은 피해를 본 사례도 있음
나. 지휘관의 진두 전투지휘 : 적의 2차공격이 제2중대 정면의 적성리 쪽에서 가하여 왔으나 이미 어둠이 트이기 시작하였기 때문에 아군은 조준사격으로서 적병을 저지할 수 있었다. 숫적으로 우세한 적은 희생을 무릅쓰고 파상적으로 육박하여 왔으나 제2중대장은 대원들을 격려하면서 3.5" 로켓포로 적을 직접사격하기도 하였고, 대대장도 경기관총 사수가 고장배제를 하지 못하자 이를 직접 도와주는 등 지휘관의 진두지휘로 적의 공격을 막아내었다.
적은 2차공격이 실패하자 이번에는 제3중대 정면인 서쪽과 서남쪽에서 공격을 가해왔으나, 엄폐물이 없는 지형상 불리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눈앞에 있는 아군들을 섬멸시키려고 아군의 강력한 화력을 무릅쓰고 무모하게 공격하다가 이들도 아군 진전 50m를 넘지 못하고 많은 시체를 남기고 또 퇴각하였다. 이로써 장병들은 싸우면 이길 수 있다는 필승의 신념을 더욱 갖게 되었다. 3차례의 전투에서 대대장은 탄약 휴대량을 감안할 때 탄약을 절약할 필요성을 느끼고 각 병사들에게 적이 10~20m의 지근거리에 이르렀을 때 정확한 사격을 하라고 강조하는 한편 결정적인 시기에는 수류탄을 사용하도록 지시하였다.
이 전투에서 대대가 거둔 전과는 사살 1,247명, 포로 7명, 총기노획 370정, 박격포 2문 이었으며, 피해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전사 9명, 부상 4명에 불가했다. 적성리 전투는 적 제10사단의 1개 연대를 완전 섬멸시킨 통쾌한 일방적인 대승리로 막을 내렸다.
이와같이 위기에 직면했을시는 전투력의 보존과 발휘를 위하여 신속, 정확한 상황판단과 과감한 결심 및 전투지휘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대대장은 적의 계략을 예측하고 진지사수를 결심한후 시간을 최대로 이용 적절한 진지강화와 사격통제 조치를 취하고 장병의 전투의지를 유발시켜 진지고수를 관철시킴으로써 적을 격퇴시켰으며, 위급한 상황에서 지휘관의 진두지휘와 솔선수범은 병사들의 감투정신을 불러 일으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 전투에서 장교들이 진두에서 사격하고 백병전을 선도하여 "최후까지 싸운다 "는 산 모범을 보여줌으로써 전 부대원이 혼연일체가 되어 싸워 이겨야겠다는 강한 정신력을 발휘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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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6사단 청성 전우회 휴계실 원문보기 글쓴이: 김원주(84.07.11~86.1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