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사물 사전] 유리 ⓒ이현경 |
유리의 시절
세상에는 온갖 종류의 물건들이 있다. 흙을 구워 만든 그릇, 나무를 잘라 만든 의자, 플라스틱이나 이름도 생소한 신소재로 만든 것. 책과 장난감 등 다양한 물건을 파는 가게를 하다 보니 물건에 대한 욕심이 많이 줄어들었는데, 유리로 만든 물건을 보면 나는 맥을 못 춘다. 그래서 집에는 유리로 만든 물건이 늘어간다. 유리컵, 빈티지 약병, 기포가 들어가 있던 유리 접시, 갤러리에서 구입한 유리로 만든 집 등. 잦은 이사를 하면서 짐을 꾸릴 때마다 필요 없는 것들을 늘리지 말아야지, 다짐을 하면서도 유리로 만든 물건 앞에서 그 다짐은 쉽게 무너진다. 내가 처음 본 가장 아름다웠던 유리는 엄마의 싸구려 찬장 안에 들어 있던 마티니 잔이었다. 와인 잔처럼 가는 손잡이에 잔 안에는 라임 색과 노란색의 색유리 장식이 들어 있어 보석처럼 빛나던 마티니 잔. 엄마는 왜 그 마티니 잔을 샀던 걸까? 우리 집에는 마티니를 마실 사람도 없었고, 손님이라곤 한밤중에 불청객처럼 들이닥쳐 술상을 차리라던 아버지의 직장 동료들뿐이었는데. 그들은 기껏해야 소주와 맥주만 마셨는데.
유리는 아이들이 함부로 만질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깨지면 다치고 상처 입으니까. 유리는 언제나 아이들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보관되며 어른들이 관리하는 물건이었다. 아이가 마음껏 만질 수 있는 유리는 고작 구슬치기용 유리구슬 정도였다. 남동생이 즐겨 가지고 놀던 유리구슬 중 푸른 왕구슬은 동화책 속 마녀의 수정 구슬을 연상시켰다. 나는 자주 유리구슬을 눈에 대고 나의 운명과 세상에 대해 미리 훔쳐보고 싶어 하던 꼬마 몽상가였다.
1년에 서너 번 명절 때나 제사 때 찾아가던 큰집의 담벼락 위에는 깨진 유리 조각이 잔뜩 붙어 있었다. 도둑을 막기 위해서였다. 꺾인 골목에 들어서 날카로운 유리 조각이 있는 큰집 담장이 보일 때면 나는 괜히 주눅이 들곤 했다. 큰댁에는 저토록 지켜야 할 것이 많을까, 하는 의문과 한밤에 담벼락을 기어오르다 피투성이가 될 낯모르는 이가 오버랩 되면서 섬뜩해지곤 했다.
어렸을 때 나에게는 나만의 것이 별로 없었다. 언니한테 물려받은 옷, 언니와 함께 사용하는 책상. 그런데 돌이켜보니 그건 엄마도 마찬가지였으리라. 8남매의 장녀로 자라 결혼하고 나서는 네 아이의 엄마가 된 엄마에게도 엄마만의 근사한 주방이, 멋진 외출복이 없었다.
결혼을 하고 내 취향에 맞는 살림살이를 하나하나 장만할 때마다 나는 엄마에게 한 번쯤은 물어보고 싶었다. 평생 좁은 부엌에서 복닥거리며 가족들을 위하여 끊임없이 삼시 세끼를 차려온 엄마에게 그 마티니 잔은 어떤 의미였냐고. 어쩌면 그 마티니 잔은 엄마만의 비밀스러운 소망 같은 게 아니었냐고. 언젠가 번듯한 살림을 꾸리게 되면 기다란 식탁에 저 예쁜 유리잔을 죽 늘어놓고 손님을 초대하는 안주인이 되고 싶었으리라. 그러나 엄마의 소망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고, 엄마는 지금 작은 아파트에서 아빠와 노년을 보내고 있다.
10여 년 전까지 나는 여전히 그 마티니 잔에 관심이 있었고, 아름다운 물건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디자인의 유리컵이나 유리 소품들을 하나둘 장만해가며 엄마의 마티니 잔에 대해 가졌던 흥미는 점점 사라져갔다. 세상엔 엄마의 마티니 잔보다 예쁜 유리컵들이 많고, 난 이제 그런 잔들을 실컷 만지고 때론 거기에 맥주나 주스를 따라 마시니까. 그래도 흑요석처럼 깊은 밤이면 나는 엄마의 싸구려 찬장 속 마티니 잔이 유리 구두로 변하는 꿈을 꾼다. 다음에 집에 내려가면 그 마티니 잔이 아직도 엄마의 찬장 제일 안쪽에서 희미하게나마 빛나고 있는지 한번 찾아봐야겠다. 아니면 엄마의 눈에만 보이는 유리 구두로 변했는지.
성미정(시인) |
성미정
1994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했다. 시집 《대머리와의 사랑》, 《사랑은 야채 같은 것》, 《상상 한 상자》, 《읽자마자 잊혀져버려도》가 있다.
_ 한겨레 문학웹진 <한판> 2015.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