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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사로 보는 세상] 의학은 신학에서 어떻게 독립했을까
2022.10.25 13:27
신학 중심의 사고와 문화에서 벗어나면서 이루어진 유럽 중세의 종말
넘치는 지식과 정보를 작은 두뇌에 담기 위해 인간이 선택한 방법은 구조화, 조직화, 단순화 등의 방법이다. 역사를 고대, 중세, 근대, 현대로 구분하는 것은 각 시기의 특징을 토대로 전체 지식을 효과적으로 정리하기 위함이다. 서양사에서 중세와 근대를 나누는 기준은 1453년이다.
1453년은 동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이 이슬람 세력에 의해 정복된 해다. 지금처럼 교통과 통신이 발달한 시기가 아니었으므로 1453년에 동방정교회 중심지인 콘스탄티노플이 이슬람세력에 의해 정복당했다는 소식이 유럽 전역에 알려지기까지는 적어도 수년이 필요했다.
중세적 사고와 문화가 한 순간에 근대적 사고와 문화로 바뀐 것은 아니다. 역사책이 “중세는 십자군 전쟁에서 패배한 유럽인들이 진리라 생각한 가톨릭을 믿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개하기 이를 데 없는 이슬람인들의 책을 보니 학문 수준이 자신들보다 더 발달했음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이유를 찾아본 결과 유럽인들이 성서의 내용만 믿고 학문 발전에 관심을 가지지 않고 한 밀레니엄 가까운 시간을 보내는 동안 이슬람인들은 그리스와 로마 문명의 유산을 공부하고, 더 깊은 지식을 알고자 노력한 것이었다. 이에 자극을 받아 신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 사람 중심으로 돌아가자는 르네상스 운동이 일어났고, 약 200년 동안 르네상스 시기가 지속되는 동안 서서히 유럽인들의 사고와 문화에 변화가 생겨 200년에 걸쳐 중세가 근대로 바뀌었다”고 쓰기보다는 어느 한 시점을 정해야 했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이 동의를 한 것이 동방정교회의 중심부가 타종교에 의해 함락된 1453년이고, 이를 기준으로 중세와 근대를 나누는 것이다.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476년부터 동로마제국이 멸망한 1453년까지를 중세라 하지만 1000년과 1300년을 기준으로 중세전기, 중세중기, 중세후기로 구분하기도 한다(중기와 후기를 합쳐서 후기라 하기도 한다). 신학중심의 사회를 구성한 것은 공통점이지만 1000년에 세상의 종말이 올 것이라며 면죄부를 판매했으나 종말은 오지 않았고, 중기에 일반인들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십자군 전쟁을 일으켰지만 예상치 못한 실패로 돌아갔다.
후기에 페스트(흑사병)가 유행하면서 인구가 크게 감소하고, 인간 중심의 사고가 싹트기 시작했다. 이로써 고대 그리스와 로마 문명을 부활시켜 찬란했던 과거의 영광을 되찾자는 운동이 일어났고, 이를 학문 또는 예술의 재생 또는 부활을 의미하는 르네상스기라 한다. 그러는 가운데 동방정교회의 중심지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자 이제는 기독교 중심의 유럽이 이슬람세력과 직접 마주치는 상황이 되었다.
중세가 암흑시대라고?
“중세는 암흑시대”라는 표현을 쓰는 이들이 있다. 이보다 빈도가 낮기는 하지만 “중세는 빛의 시대”라거나 “중세는 암흑시대가 아니다”라는 주장을 대할 수도 있다. 두 가지 서로 다른 주장이 존재하는 것은 보는 관점과 태도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중세는 암흑시대”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이탈리아의 페트라크(Francesco Petrarch, 1304-1374)였다. 르네상스 초기의 시인이자 인본주의자인 그는 새로운 시대를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에 학계를 짊어지고 있던 이들은 세계역사를 고대와 현대로 구분했다. 그 시대에 현대란 기독교가 세상 곳곳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면서 사람들의 사상을 지배하던 시기, 오늘날 우리가 중세라 하는 시기를 가리킨다.
로마에서 시인으로 활동한 페트라크는 한 밀레니엄 이전에 화려한 유산을 남겨 준 로마시대 도시의 모습에 경외심을 가지고 있었다. 돌과 대리석을 이용하여 만든, 아름답고 화려한 역사적 유산은 그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페트라크에게 있어서 이제부터의 세상은 지난 약 1000년간의 세상보다 훨씬 더 개선이 필요했다. 그는 역사를 쓰면서 고대와 그 후를 비교했고,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후부터 자신이 살고 있는 시기까지 큰 발전이 없었다는 점에서 ‘암흑기’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했다. 이것이 오늘날 “중세는 암흑시대”라는 말을 들을 수 있게 된 이유다.
페트라크는 지난 1000년간 일상의 모든 일이 가톨릭교회와 신학의 지배를 받으면서 인간 고유의 특성이 철저히 무시되었다고 판단했다. 신학에 종속된 학문은 이성적인 판단보다는 진위가 불분명한 성서의 해석에 따라 진위가 결정되었으므로 발전이 없었다. 결국에는 이슬람인들의 수준에도 이르지 못한 것이다.
르네상스기의 인본주의자들은 이제부터라도 인간 중심의 사회를 재탄생시켜 암흑기의 황폐함에서 벗어나려 했다. 인간이 독립적으로 세상에서 조화를 이루며 살아갈 수 있는 이성적인 존재로 생각하게 된 것이다. 르네상스기를 전후하여 교회의 중심성에 대한 논쟁이 일기 시작했으며, 이와 같은 사고의 변화는 과학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서서히 변화를 가져와 과학사에서 혁명적인 발견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과학사에서 중세의 종말은 1543년
런던박물관 골해부학자 돈 워커가 런던 차터하우스 광장의 지하에서 발견된 유골을 검사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제공
중세의 모든 것이 틀렸다고 할 수는 없지만 맞는 것도 별로 없었다. 1000년 이상 의학에서 최고의 진리로 믿어 온 갈레노스(Claudios Galenos, 129?-199?)의 책이 아무리 방대하다 해도 14세기에 유럽 인구의 약 1/3을 희생시킨 페스트에 대해 어떤 내용도 찾을 수 없었다.
비슷한 시기에 로마에서 활동한 프톨레마이오스(Ptolemaeos Claudios, Ptolemy, 생몰연도 미상)는 천동설을 이용하여 관측가능한 모든 천문현상에 대해 이해가능한 설명을 해 주었지만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 1473-1543)가 보기에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만든 우주가 이렇게 복잡할 리는 없다’는 생각을 가지게 해 주었을 뿐이다.
코페르니쿠스는 더 명쾌하게 우주를 구성하는 별들의 운동을 설명하려 했고, 이 과정에서 태어난 것이 태양이 지구를 도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태양을 도는 모형이었다. 코페르니쿠스는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운동하는 모형을 고안하여 1543년에 『천구의 운동에 관하여』라는 책으로 발표했다.
같은 해에 베살리우스(Andreas Vesalius, 1514-1564)는 『인체의 구조에 관하여』라는 책을 통해 그동안 진리로 믿어온 갈레노스의 책에 틀린 곳이 많이 있으니 직접 해부를 하여 진위를 검증해야 함을 보여 주었다. 검투사를 치료하면서 사람의 몸 내부를 일부라도 들여다볼 수 있었던 갈레노스는 자신의 호기심을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동물을 이용하여 해부를 했고, 이렇게 얻은 지식을 방대한 책 속에 남겨 놓았다. 그러나 동물의 몸과 사람의 몸이 같지 않으므로 베살리우스가 실제로 해부를 하여 갈레노스의 책과 비교를 해 본 결과 차이가 많음을 알 수 있었다. 베살리우스는 의학 발전을 위해 반드시 사람의 몸을 해부하여 지식을 얻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동설을 주장한 코페르니쿠스는 책이 나온 직후 세상을 떠났고, 책 서문에 발행을 맡은 친구 오시안더가 “지구가 태양을 도는 것은 한 가지 이론일 뿐이다”라는 내용을 남겨 놓았으므로 구설수에 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이 옳다고 주장한 브루노(Giordano Bruno, 1548-1600)는 화형에 처해졌고, 연주시차를 측정함으로써 지동설이 진리임을 확인한 갈릴레이(Galileo Galilei, 1564-1642)도 죽을 고비에서 자신의 주장을 굽힌 후에야 살아남을 수 있었다. 짧지 않은 시간이 걸리기는 했지만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오랫동안 믿어 온 진리가 틀릴 수도 있으니 확인이 필요하다는 점을 보여주기에는 충분했다.
벨기에 출신으로 프랑스에서 의학공부를 하고 교수가 된 베살리우스는 해부용 시체를 구하기 어려운 파리대학을 떠나 이탈리아로 갔다. 1539년부터 1546년까지 파도바대에서 해부학교수로 일하며 수많은 인체 해부를 통해 얻은 지식을 책으로 남겼다.
갈레노스의 책을 함부로 믿지 말고, 반드시 확인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많은 새로운 발견을 했지만 엉뚱한 주장을 했다는 이유로 파도바대에서 쫓겨났다. 그 후 스페인에서 자리를 잡기도 했으나 원하던 복직을 이루지는 못한 채 항해중의 사고로 50세에 세상을 떠났다. 다행이라면 그의 우수성이 알려지면서 해부학자들에게 직접 해부를 하려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는 점이다.
코페르니쿠스와 베살리우스가 활동한 16세기에 ‘과학(science)’이라는 용어도 사용되지 않았지만 오늘날에는 이들에 의해 과학적 사고와 과학자의 연구태도에 변화가 생겼음을 인정하여 1543년을 과학사에서 중세와 근대를 구분하는 기준으로 삼고 있다.
삼위일체를 중심으로 한 중세의 신학적 사고가 프톨레마이오스와 갈레노스의 책 내용을 진리로 받아들였지만 중세가 끝날 무렵에는 이들의 주장도 허위일 수 있으니 확인이 필요하다는 태도가 생겨난 것이 과학사에서 중요 전환점이 된 것이다.
성서 내용을 거스른 업적이 보편화된 예
1900년이 될 때까지 수술법이 어느 정도 발전하기는 했지만 쓸만한 약은 거의 없었다. 의사가 환자를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이 별로 없었으므로 19세기까지의 그림을 보면 의사는 한가한 모습을 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가장 많이 이용된 치료법인 사혈(피를 빼는 일)은 효과가 전혀 없었다.
그나마 16세기에 활동한 ‘외과학의 아버지’ 파레(Ambrois Pare, 1510-1590)가 한층 발전시킨 수술법은 1840년대에 마취제가 개발되고, 1865년에 수술실에 무균처리를 함으로써 수술시 가장 문제가 된 통증과 이차감염을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
인체 일부를 절단해야 하는 경우 환자의 통증을 줄이기 위해 빨리 수술하는 것이 외과의사에게 반드시 필요한 능력이었다. 마취제가 발견되기 전까지는 술, 아편을 함유한 약초, 수술할 부위를 아주 차게 하는 등의 방법을 사용했지만 효과가 그리 좋지 못했다.
18세기에는 아산화질소가 기분을 좋게 한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즐거운 파티에서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아산화질소를 들이키는 것을 본 치과의사들이 이를 뺄 때 아산화질소를 사용하기도 했다. 아산화질소의 효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좋지도 않았으므로 에테르를 이용하여 이를 빼거나 종기를 제거하는 수술이 1846년부터 널리 시도되기 시작했다.
에테르는 마취효과가 좋았지만 냄새가 좋지 않아서 어떤 이들은 역겨움을 호소했다. 더 좋은 마취제를 찾던 영국의 심슨(James Young Simpson, 1811-1870)은 클로로포름의 마취효과를 발견하여 무통분만에 이용했다. 그의 시도는 아주 성공적이었으므로 산모는 통증을 별로 느끼지 않고 아기를 낳을 수 있었다. 매섭기만 한 출산의 통증을 줄일 수 있게 되자 한편에서 비판이 제기되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선악과를 따먹은 하와(이브)와 이에 동조한 아담을 에덴동산에서 쫓아내던 하나님께서 (창세기 3장 16절에서)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분만시 통증을 느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데 왜 무통분만을 실시하는가?”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심슨은 이런 비판을 미리 대비하고 있던 것처럼 “통증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성서를 잘 읽어 보라. 창세기 2장 21절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신 후 아담의 갈빗대를 하나 뽑아’라는 구절에서 갈빗대를 뽑아도 아담이 통증을 느끼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아담을 마취했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했다.
클로로포름을 이용한 심슨의 대답은 논쟁에서 그를 승리자로 만들어 주었다. 뒤를 이어 스노(John Snow, 1813-1858)는 클로로포름을 이용하여 빅토리아 여왕의 무통분만을 성공적으로 수행함으로써 무통분만의 일반화에 공헌했다.
위에서 역사적으로 신학이 득세하던 시기에 신학 또는 성서에 기반을 둔 사고가 의학과 천문학 발전에 장애물이 된 예를 소개했다. 학문의 발전은 이러한 장애물을 만날 때마다 진리를 향한 학자들의 노력에 의해 새로운 지식이 알려지고, 일반인들의 편리함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진행되곤 했다.
신학 또는 성서의 해석이 의학발전을 지체시키기는 하지만 가로막지는 못했다. 아무리 현대인들의 지식이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아져서 첨단학문을 발전시키고 있다 해도 진리는 단지 그 시대의 진리일 뿐이며, 미래에는 현재의 진리가 잘못되었음이 알려질 수도 있으므로 학자들은 개방된 자세로 새로운 현상을 받아들이는 태도를 가질 필요가 있는 것이다.
※참고문헌
-존 헨리. 왜 하필이면 코페르니쿠스였을까. 예병일 역. 몸과 마음. 2003
-Julie M. Fenster. Ether Day: The Strange Tale of America's Greatest Medical Discovery and the Haunted Men Who Made It. Harper Perennial. 2002
-Vivian Nutton. Vesalius revised. His annotations to the 1555 Fabrica. Medical History. 2012;56(4):415-43.
※필자소개
예병일. 연세대 의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C형 간염바이러스를 연구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텍사스대 사우스웨스턴 메디컬센터에서 전기생리학적 연구 방법을,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의학의 역사를 공부했다. 연세대 원주의과대학에서 16년간 생화학교수로 일한 후 2014년부터 의학교육학으로 전공을 바꾸어 경쟁력 있는 학생을 양성하는 데 열중하고 있다. 평소 강연과 집필을 통해 의학과 과학이 결코 어려운 학문이 아니라 우리 곁에 있는 가까운 학문이자 융합적 사고가 필요한 학문임을 소개하는 데 관심을 가지고 있다. 주요 저서로 《감염병과 백신》, 《의학을 이끈 결정적 질문》, 《처음 만나는 소화의 세계》, 《의학사 노트》, 《전염병 치료제를 내가 만든다면》, 《내가 유전자를 고를 수 있다면》, 《의학, 인문으로 치유하다》, 《내 몸을 찾아 떠나는 의학사 여행》, 《이어령의 교과서 넘나들기: 의학편》, 《줄기세포로 나를 다시 만든다고?》, 《지못미 의예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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