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는 고려가 원의 부마국이 되어 원의 간섭이 심하고 국권이 쇠약하던 시기에 보각국사 일연(普覺國師 一然:1206~1289) 스님이 민족의 우월감을 고취시키기 위하여 신라·고구려·백제 3국의 유사(遺事)를 모아 저술한 역사서이다. 삼국유사는 책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인종 23년(1145) 김부식이 펴낸 삼국사기에서 빠뜨린 것을 보완한다는 성격이 강한데, 한 사람의 승려에 의해서 저술되고 문장도 조잡해서 야사에 가깝다는 단점이 있지만 오히려 왕명에 의하여 체제가 정연하게 저술된 삼국사기 같은 정사가 아니었기에 가능했던 즉, 정사에서는 고의로 빠뜨리거나 누락할 수밖에 없었던 많은 사실들이 그대로 수록되어서 중요한 가치를 갖고 있다. 특히 현재 삼국시대의 기록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전부인데, 삼국유사에는 삼국사기에서 볼 수 없는 고조선이래 후삼국시대까지 약3000년의 역사로 기자조선·위만조선에 대한 기록과 단군의 곰·석탈해의 까치·혁거세의 백마 등에 관한 여러 가지 설화를 수록함으로서 우리 역사의 유구함을 중국과 대등하다고 보았고, 혜성가(彗星歌) 등 신라의 향가 14수까지 실려 있어서 국문학상으로도 매우 중요하다. 또, 저자 자신이 국사(國師)를 역임한 고위승려이었기 때문에 더욱 자세히 알 수 있는 불교관련 자료는 정사 이상의 가치를 갖고 있어서 삼국의 역사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사서이다(국보 제306호).
인각사는 일연 스님이 은거 후 입적할 때까지 5년동안 머물면서 삼국유사 등 100여 권의 불교서적을 저술한 역사의 산실이다. 사진은 인각사 전경. |
경북 군위군 화북면 화북리의 인각사(麟角寺)는 충렬왕 10년(1284) 일연 스님이 은거 후 입적할 때까지 5년 동안 머물면서 삼국유사 등 100여권의 불교서적을 저술한 역사의 산실이다(사적 제374호). 선초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과 읍지(邑誌) 등에 의하면 인각사는 산세가 기린의 형상을 닮은 화산(華山)에서 기린의 뿔끝 같은 위치에 절을 지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고, 문헌통고(文獻通考)에 의하면 인각사가 기린이 노닐다가 뿔이 암벽에 걸려서 떨어진 곳에 지은 것이라는 구전이 전해 온다고도 했다. 아무튼 인각사 북쪽에 기린 뿔(麟角)이란 전설이 있는 학소대(鶴巢臺)와 옥녀봉이 병풍처럼 높은 암벽으로 서있고 그 앞에 위천(渭川)이 흐르는데, 학소대란 이곳에 수백 마리의 학이 살았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일연 스님의 초상. |
인각사를 찾아가는 길은 경부고속도로 구미나들목을 빠져나가 안동~영천간 28번국도 중 하수삼거리에서 고로 방면으로 들어서거나 중앙고속도로 군위나들목에서 5번 국도를 타고 우회전하여 효령면~부계면~고로면의 908번 도로에서 인각사를 고르면 된다. 또, 전라도에서는 대구를 거쳐 팔공산순환도로~한티휴게소~부계남산리~산성면~갑티재~인각사로 가는데, 한티휴게소를 지나서부터는 도로가 좁고 산길이 험해서 세심한 주의를 요한다. 그러나 정작 인각사는 도로변에 있다.
인각사는 신라 선덕여왕 12년(643)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하지만, 문헌에 처음 나타난 것은 고려 충렬왕 때 일연 스님의 하안소로 지정된 이후부터이다. 불교국가인 고려의 국사였던 일연 스님이 77세 되던 1284년 고향인 군위로 내려간 이듬해에 어머니가 죽고, 은거 5년 후 일연 스님도 입적한 점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스님이 고령이고 어머니의 임종이 가까워 옴을 알고 임금께 청하여 낙향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스님이 머무는 동안 인각사는 크게 중수되고 대법회를 두 번이나 열었던 대가람이었지만, 1597년 정유재란 때 가람이 전부 소실된 이후 중건되지 못하고 1721년 극락전과 요사채를 지었다. 1992년 이후 5차례의 발굴조사 결과 나말여초의 석등 및 고려석탑 등으로 통일신라시대부터 창건된 사찰이었음을 알게 되었지만, 현재 사찰은 속세와 구분되는 일주문이나 담장도 없이 다소 황량하다. 극락전을 중심으로 왼편에 요사채, 오른쪽에 명부전, 국사전, 일연스님 기념관 등이 있으며, 중요문화재로는 국사전 뒤편에 보각국사정조지탑과 비(보물 제428호), 인각사미륵당석불좌상(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426호), 3층 석탑, 정조탑 앞의 높이 약1.5m의 석불 등이 있다. 현재 복원공사 중이다.
보각국사정조지탑과 미륵당석불좌상(왼쪽), 스님의 업적을 기린 탑비. |
국사전 뒤의 보각국사 탑은 자연석으로 된 바닥돌 위에 8각의 받침돌을 놓고, 그 위에 탑을 세웠는데, 8각형의 중대석에는 각 면마다 동물이 새겼으며, 탑의 정면에는 두 줄로 '普覺國師靜照之塔(보각국사정조지탑)'이라 새겼다. 이 부도탑은 원래 스님이 입적한 석 달 뒤 인각사에서 동남쪽으로 약1.2㎞쯤 떨어진 둥딩마을 뒷산에 세웠는데, 성리학을 신봉하던 조선시대 선비들이 부도를 무너뜨리고 산주가 다시 부도탑을 옮긴 뒤 조상의 무덤을 설치하는 등 버려지다시피 있다가 1962년 인각사로 옮겼다고 한다. 한편, 국사전 왼편 산령각 앞에 세운 탑비는 스님이 입적한 6년 뒤 왕명으로 당대의 문장가 민지가 스님의 업적을 쓰고, 제자 죽허(竹虛)가 왕희지의 글씨를 집자한 것으로서 탑비는 멀리 중국과 일본에까지 알려질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선비들이 왕희지체를 모방한다고 탁본을 많이 떳을뿐만 아니라 탁비를 갈아 마시면 과거에 급제한다는 속설을 믿고 떼어가서 많이 훼손되었지만 다행히도 오대산 월정사에 비문의 사본이 남아있다.
또, 부도탑과 일연 스님기념관 사이에 있는 미륵당석불좌상은 원래 인각사 인근인 괴산리 동정마을 아랫골에서 옮겨온 것으로서 높이는 약1.5m이고, 머리는 육계와 나발의 표현이 뚜렷하고, 항마촉지인의 모습이다(경북도유형문화재 제339호). 한편, 2008년 10월 발굴된 불교관련 금속공예품 중 10여 점은 9세기경 작품으로 밝혀졌는데, 그중 청동병향로, 청동향합, 청동정병 등은 중국 허난 성 낙양 신회선사 묘탑 발견 공양품과 비교되는 국내 최초의 일괄 출토품으로서 매우 귀중한 유물이다.
인각사는 산세가 기린의 형상을 닮은 화산에서 기린의 뿔끝 같은 위치에 절을 지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
고려 희종 2년(1206) 경북 군위에서 김언정의 아들로 태어나 속명은 견명(見明), 자는 회연(晦然)이라고 하는 일연 스님은 9살 되던 1214년(고종 원년) 지금의 전라도 광주 지방인 해양의 무량사에서 불법을 공부하다가 14살 되던 1219년 강원도 설악산 진전사(陳田寺)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22살 되던 1227년(고종 14) 승과에 장원으로 합격한 이후 대구 비슬산(琵瑟山) 보당암에서 참선에 몰두하고, 1236년 10월 몽고가 침입하자 문수의 계시로 보당암의 북쪽 무주암으로 거처를 옮겨 깨달음을 얻었다. 이해에 삼중대사에 올랐는데, 1246년에 선사(禪師), 54살 때인 1260년에는 대선사가 되었다. 1264년 영일 오어사(吾魚寺)에서 대구에서 가까운 인흥사(仁弘寺)로 옮겼는데, 이때 학승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고 한다. 1277년(충렬왕 3년) 72세의 나이로 운문사의 주지가 되어서 왕에게 불법을 강론하고, 1283년에는 국존으로 추대되었으며, 불교계에서의 지위와는 별도로 1249년 대장경 주조 작업에 참여하였으며, 그 이듬해인 원종 2년(1261)에는 왕의 부름을 받고 선월사 주지가 되어 지눌 대사의 법통을 이어받기도 했다.
사실 일연 스님이 삼국유사를 간행한 정확한 연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가 77살 되던 충렬왕 10년, 96살 된 그의 어머니가 죽자 그때부터 고향 근처인 인각사에서 머물러 있던 5년 사이에 집필한 것으로 보고 있다. 물론, 방대한 내용이 짧은 기간 안에 저술되었다기보다는 이전부터 기록해두었던 내용을 이때 집중적으로 정리해서 완성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나마 생전에 간행되지 못하고 사후 제자 무극(無極)에 의해서 1310년에야 처음 목판본으로 간행되어 세상에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