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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학창시절과 성공에 이르른 길
- 영해고등학교 특강-
김 인 현(고려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아래 내용은 지난 2011년 12월 14일 고려대학교 법과대학의 김인현 교수(영해중 23회, 영해고 20회)가 모교인 영해고등학교에서 “나의 학창시절과 성공에 이르는 길”이라는 제목으로 전교생 300여명을 대상으로 특강을 실시한 내용을 영덕신문 독자들에게 필요한 부분을 정리한 것이다.
영해고등학교(교장 권명훈)와 총동창회(회장 이태규) 및 재경동창회(회장 박태환)는 연중 2-3회씩 선배초청 강연회를 실시하고 있다. 동창회는 재학생들에게 여러 가지 어려움을 헤치고 명문대학교의 교수로 초빙된 김인현 교수의 예를 소개함으로써 학생들에게 자신감과 자부심을 심어주기 위하여 이 특강을 준비하게 되었다고 한다. (편집국장).
1. 유년 시절
나는 상대적으로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게 되었다. 그래서 조부모님, 부모님은 물론, 숙부모님, 그리고 외가로부터 많은 정신적인 도움을 받으면서 자라났다. 특히, 집안의 외손인 고 정수창 회장님, 한용호 회장님과 같은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교육을 어릴 적부터 조부님으로부터 받았다. 그리고 중학교, 고등학교에 다닐 때는 숙부모님으로부터 진로에 대한 도움을 받았다. 이러한 것이 또래의 다른 학생들에 비하여 나에게 주어진 큰 행운이었다고 생각한다.
2. 중학교 시절
조부님과 아버님이 경영하던 수산업이 실패하자 가정형편이 어려워져 삼촌들과는 달리 서울의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영해중학교에 진학하였다. 1학년 때 우수반이 편성되어 나도 우수반에서 또래들과 경쟁하면서 성장하게 되었다. 2학년 때부터 우수반이 폐지되었다. 황병득, 박재모, 이태희등과 최상위권을 형성하면서 중학교를 졸업하였다. 물론 반에서는 항상 1등을 하였다. 학급의 반장을 하면서 항상 선생님들이나 동기생들로부터 인정받는 착실한 학생으로서 긍정적인 마음가짐을 가지고있었다. 고등학교를 대구로 진학하고 싶었지만 다시 가정형편상 도시로 진학을 하지 못하고 영해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되었다.
3. 고등학교 시절
1학년 1학기동안 대구로 진학하지 못한 아쉬움에 공부를 제대로하지 않아서 성적을 최상위권으로 유지하지 못하였다. 이 때 작은 집에서 나를 서울로 올라오게 하여 학원에 다니게 하여 주었다. 나는 정신을 다시 차리고 현실에서 최선을 다하기로 하였다. 다시 전교 1-2등을 하기 시작하였다. 축산항에서 30분씩 차를 타고 통학을 하면서 열심히 하였다. 이상열 교장선생님, 윤칠균/방태표/홍성채 선생님들이 열정적으로 지도를 하여 주셨다. 여름방학에도 특강이 이어졌다. 대학 진학을 목표로 하였던 20여명의 동기생들은 열심히 하였다(이 때 목표를 세우고 열심히 하던 친구들은 2-3년 뒤에라도 모두 대학에 진학하여 현재 훌륭한 사회인이 되어있다). 졸업하는 해에 진학에 실패하였다. 서울에서의 재수생활이 시작되었다.
4. 한국해양대학교 시절
재수를 하여 한국해양대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마도르스 교육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3, 4학년이 되어 문과과목을 많이 배우면서 해운경영에 관심을 가지고 몇 년 승선 후에 육상에 진출할 때 필요한 공부를 별도로 하게 되면서 다양한 독서를 하게 되었다. 항해학과 200명 중에서 20등 정도로 졸업을 하게 되었다. 역시 해양대학에서도 엘리트의식을 가지고 생활하게 되었다. 학교와 선배들도 우리는 한국해운을 짊어지고 나갈 엘리트임을 누차 강조하여 우리는 자연 이런 교육의 영향을 받았다.
5. 상선사관 시절
운이 좋아서 세계 최고의 대형 선박회사에 입사하게 되었다. 일본의 산코기센(三光汽船)이라는 회사였다. 한번 출국을 하면 1년 정도 있다가 귀국하였다. 나는 성실한 근무태도를 이어갔다. 남는 시간에는 영어공부를 열심히 했다. 미국의 소리 방송을 들으며 테이프에 레코딩을 하여 받아쓰기 연습을 하면서 듣기 연습을 하였다. 그리고 미국에 기항하면 중고서적에 가서 읽기 쉬운 자서전등을 구입하여 1년에 10권 정도를 읽고 하선하게 되었다. 나의 상선에서의 근무로 어려웠던 집안이 경제적으로 도움을 받았고 막내 동생은 서울대학에 합격하여 큰 보람을 느끼게 되었다. 조기에 하선을 하려고 하였지만 1985년 조부님께서 운명을 하시면서 배를 몇 년 더 타서 집안을 안정시키라는 유언을 하셨고 이를 실행하고자 하였다. 23살부터 시작한 선박에서의 근무가 연장되어 32살까지 이어졌고 나는 드디어 최연소 선장으로 1991년말 진급하게 되었다. 기쁨도 잠깐이었다. 나는 해난사고를 당하여 다른 길을 택하게 되었다.
6. 고려대학교 및 김&장 법률사무소
해난사고를 통하여 해상법에 흥미를 느낀 나는 선장경력과 해상법은 잘 어울리는 것이니 비록 33세라고 하여도 새롭게 시작하는 법학 공부가 늦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집안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나는 1년 동안 고학을 하여 고려대학교 법학석사과정에 당당히 합격하였다. 선박에 근무하면서 열심히 공부한 영어가큰 도움이 되었다. 고려대학교 법과대학은 나를 흔쾌히 받아주었고 나는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 많은 것을 짧은 시간안에 흡수하여 들어가기 시작하였다. 선장이니 하는 타이틀을 나는 다 버렸고 처음 시작하는 초년병으로서 낮은 자세로 지도교수님의 조교로서 아침 8시면 연구실에 나가서 방청소부터 하고 밤 11시까지 공부하다가 동생 집으로 오는 생활을 줄곧 이어나갔다.
석사과정을 마칠 무렵 우리나라 최고의 법률사무소인 김&장 법률사무소에서 나를 해상팀의 선장으로 초빙하여 같이 일을 하고 싶다고 연락하였다. 선장경력에 법학석사를 겸비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내가 돋보이게 되었다. 1996년 9월 나는 좋은 대우를 받으면서 우리나라 최고의 인재들이 모인 김&장의 프로페셔녈이 되었다. 대단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라서 한껏 긴장이 되었다. 선박, 해운관련 법률분쟁을 처리하는 것이기 때문에 한국해양대학의 파워가 도움이 되기도 하였지만 한편으로는 내가 잘못하면 모교인 한국해대가 조롱거리가 될 판이었다. 선장으로서 또 한국해대 출신으로서 상당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나는 최선을 다하며 성실한 자세로 임하였다. 1년이 지나자 나는 크게 인정받게 되었다. 가끔 팀내에서 멸시와 조롱을 받는 말을 듣기도 하였지만, 그럴수록 실력을 기르는 길 밖에는 없다고 생각하고, 고려대학교 박사과정에 다니면서 법학실력을 더 배양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7. 교수생활
나는 외탁을 하여 태생부터 학문을 좋아하는 성격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해상법분야에는 선장출신의 법학박사가 교수가 되어 학문적으로 처리할 내용들이 참 많다는 점을 알게 되어, 교수가 되어도 평생할 일이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해양대학교와 목포해양대학교 두곳에서 자리가 났지만, 나를 더 필요로 한다며 오라고 하는 후발학교인 목포해양대학교에 1999년 3월 전임강사로 발령받아 갔다. 학교의 평판보다는 나 자신의 실력과 평판에 초점을 두면서 또 현실에 만족하면서 노력하였다. 혼자 목포에 갔기 때문에 학교 근처에 방을 얻어서 연구실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다. 밤 12시에 퇴근하여 새벽 5시경에 일찍 학교에 나가는 생활을 5년 정도 하였다. 1년, 2년 연구업적이 쌓이고 한국정부를 대표한 외교회의의 참석하는 등 활동이 학계와 업계에 알려지고 서서히 인정을 받기 시작하였다. 그런 생활이 4년이 되던 해 나는 다가오는 1년의 연구년을 다른 교수들과는 달리 내가 부족한 법학의 기초를 다지는 데에 바쳐야겠다고 생각하고 준비하여 미국 텍사스 대학 법과대학 오스틴에 1년 과정(2003/2004)을 다니게 되었다. 이 과정은 나의 성장에 큰 도움이 되었다. 학부에서 법학공부를 먼저 하였더라면 미국에서의 공부도 쉬웠을 터인데 하는 아쉬움이 남아 고려대학교 법과대학에 학사편입을 하여 2년을 다녀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되었다. 어려운 결정이었다. 지도 교수님은 사람이 포기할 줄 알아야지 지금 나이가 얼마이며 이미 학자로서 인정받는 사람이 그런 겉모습에 신경쓰지 말라고 야단을 치셨다. 그러나 나는 응시하였고 합격을 하게되었다. 03학번이 되었다. 목포와 서울을 오가며 2005년과 2006년에 걸쳐 월요일과 금요일 그리고 방학을 이용하여 2년간 수업을 마치고 드디어 법학사 자격을 취득하게 되어 결국 순서는 바뀌었지만 법학사, 법학석사 그리고 법학박사를 온전히 갖추게 되어 학자로서 학문적인 겉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전국에 로스쿨이 도입되면서 전문분야에서 전문가를 양성한다는 목표가 세워지자 선장출신에 법학박사이고 법률사무소에 근무한 경력이 있는 나에게도 기회가 주어졌다. 부산대학교 법과대학에서 나를 초빙하였다. 해상법특화에 최선을 다하여 주었다. 곧 모교인 고려대학교에서 지도교수님께서 자신의 후임으로 나를 적극 추천하였고 평소에도 나의 학문적인 진지함에 좋은 평가를 하여주시던 법대의 선생님들이 흔쾌하게 나를 초빙하여주었다.
명문 고려대학교 법과대학의 교수라는 자리는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지방학교 출신으로서 겪어야하던 어려움- 내가 지방학교 출신이지만 성과가 있고 실력이 있음을 일일이 설명하여주어야 한다는 점-이 이제는 사라졌다.
8. 성공에 이른 비결
나는 세계적인 해상법학자로 인정받은 다음에야 성공이라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시골고등학교 출신에 마도르스 출신이 명문대학의 법학교수가 되었다는 것 때문에 현재의 나의 지위를 성공이라고 세상사람들은 칭하는 모양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나의 성공에 이른 비결은 세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주위에 훌륭한 조언자들이 있었다. 조부님은 최고의 조언자였다. “정수창씨가 중학교 때부터 영어교과서를 통째로 외웠다. 영어실력을 인정받아 OB 맥주사장이 되었다”고 하시면서 나에게 영어의 중요성을 강조하셨다. 대학진학을 할 때에는 숙부님과 숙모님이 큰 조언자가 되셨다. 나아주시고 길러주신 부모님도 무언의 조언자이셨다.
둘째, 주어진 환경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최선을 다하려고 하였다. 대구로 서울로 진학을 하지 못하여 실의에 빠지고 친구들을 부러워했지만 결국 현실에서 최선을 다한 나에게 더 나은 결과가 주어졌다. 결국 고등학교 대학교에서 공부하는 것은 자신이 하기 나름이다. 영해고등학교, 한국해양대학교 그리고 목포해양대학교가 모두 최고의 집단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이들 조직에서 두각을 나타내면서 나는 더 나은 결과를 얻게 되었다.
셋째, 나 자신의 처지를 알고 남들보다 2배 3배 노력하여 성과를 내려고 하였다. 나는 시골출신으로서 학연이나 지연으로 도움을 받을 처지가 아니라는 판단을 하게 되었다. 현재의 직장에서 인정받기 위하여는 동료들보다 2배-3배 더 열심히 하여 실력을 배양하고 업적을 내는 것 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런 태도는 법학을 다시 시작한 33세에서부터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성공을 의식한다기 보다 생활의 태도가 이렇게 되어야 하는 것이고 이것은 이미 자라면서 유년시절, 영해중학교, 영해고등학교 학창시절에 형성된 생활의 태도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넷째, 또 하나의 성공의 비결은 시골에서의 유년시절과 학창시절에 있었다고 본다. 만약 내가 처음부터 대도시의 중학교, 고등학교에 다녔다면 결과는 현재와는 달랐을 것으로 생각된다. 나는 집안에서건, 초등학교에서건, 중학교 및 고등학교에서 줄곧 어른들로부터 선생님으로부터 그리고 친구들로부터 주목을 받으면서 사랑을 받았다. 이것이 은연중 나에게 집안과 모교에 대한 자부심으로 이어졌고 이것은 나를 자신감으로 충만하게 하여주었다. 만약, 대도시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면 나는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였을 것이기 때문에 상당히 주눅이 들었을 것으로 본다. 골목대장이 골목에서 나와 큰 조직에서도 대장의 마음을 항상 가지고 생활을 하여 좋은 결과가 나왔다고 본다. 후배들에게 “절대 기죽지 말고 당당하게 학교생활하자” 충고는 나의 이러한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나는 당당하게 대 영해고등학교 출신임을 누구에게나 말한다. 나의 모교인 영해고등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오늘의 내가 있는 것이고 당시 주어진 환경에서 나는 최고의 교육을 열정적인 선생님으로부터 받았다고 생각한다. 비록 세칭 장관, 재벌들은 배출하지 못하였지만 나는 어려운 환경에서도 어려움을 극복하고 경향각지에서 사회인으로서 성실하게 살아가시는 선배님 후배님을 뵐 때마다 나는 내가 “영해고” 출신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게 된다.
9. 재학중인 학생들의 진학과 관련하여
첫째, 공부에는 왕도가 없다고 한다. 그렇다. 나는 13년동안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쳐 왔다. 아무리 우수한 학생들이라도 수업시간에 배운 것을 복습하지 않고 그 과목과 교수에 관심이 없는 학생은 좋은 성적을 얻을 수가 없다. 학교에서나 입시에서의 성적은 결국 두가지이다. 하나는 얼마나 그 과목에 열정을 가지는가 이고 다른 하나는 복습이다. 흥미를 가지고 목표의식을 분명히 하여 공부하여야 하고, 예습은 못하더라도 복습은 배운지 하루가 가지전에 반드시 하여야 한다. 배운 것을 내 팽개치고 시험치기 하루 전에 보는 태도를 가진 학생은 낙제하게 된다. 수업에서 들은 것은 하루가 가기전에 복습을 하고 시험치기 1주일 전에 다시 보고, 시험치기 하루전에 다시 보는 즉, 수업까지 합하여 네 번을 보아주고 시험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한번의 결과에 절대로 낙담하지 말자. 후배 여러분들이 이해하기 어려울지 모르지만, 인생의 성공은 50이 되고 60이 되어야 판가름나는 것이다. 이번 입시에 실패하여 재수를 택하는 학생도 있을 것이다. 열정이 있는 학생들은 반드시 내년에 목표하는 대학에 입학할 것이다. 설령 실패를 한다고 하여도 그러한 일에 대한 열정과 성실함을 유지한다면 10년, 20년이 지나면 원하는 자리에 오를 수 있을 것이다.
셋째, 학교 당국과 동창회에서 논의할 사항이기도 하지만, 여러분들은 롤 모델(본 받고 싶어하는 앞서가는 선배)과 멘토(조언자)를 두어야 한다. 도시의 학생들에 비하여 부족한 것이 조언을 받을 분들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현재 가장 좋은 롤 모델과 멘토는 여러분의 선생님들이다. 선생님들로부터 훌륭한 조언과 많은 정보를 얻기 바란다. 우리 동창회에서 여러분들의 멘토가 될 분들을 찾아서 연결하는 작업을 하겠다. 나는 기꺼이 여러분들의 멘토가 되어주겠다.
(학부모님들에게; 1970년대, 1980년대에 비하여 지방 고등학교에서의 교육환경은 많이 나아졌다고 생각됩니다. 정부에서도 지방고등학교 출신들의 대학진학에 대한 배려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는 영덕에 있는 고등학교에 자녀를 진학시켜도 전혀 불리함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큰 집단에서 꼴지를 하는 것보다는 작은 집단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것이 더 나을 수 있습니다. 저의 경우가 바로 그러하다는 것을 지방의 학부모님들에게 꼭 알려드리고 싶습니다. 학생들이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면 주위로부터의 자극을 받지 못하는 점입니다. 이러한 것은 도시의 대학교 탐방이라던가 선배님들과 멘토 관계를 만들어 이메일로 소통을 하는 것 등으로 얼마든지 해소될 수 있는 것입니다. 반드시 도시로 나가서 다 성공한 것은 아닙니다. 주위를 둘러보시면 도시나간 또래들 보다 고향에서 공부하여 더 잘된 예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도시로 무조건적으로 나가시는 것보다 지방의 고등학교에 진학시키는 것을 진지하게 검토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김교수는 축산항초등 22회, 영해중 23회, 영해고 20회 출신이다. 연락처는
captainihkim@korea.ac.kr; blog.naver.com/captainihkim이다).
첫댓글 좋은글 잘읽었습니다.
임진년에는 좋은일 많으시길 마음으로 두 손 모읍니다.().
감사합니다. 김인현 드림
앞으로도 영해중.고를 널리 알려줄 후학들에게 넓은 지식과 경험을 토대로 좋은 강의 부탁드립니다,그동안 열의와 애정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윤기자님
훌륭한 일을 하신 선배님께 고개숙입니다. 저는 영해중24고21회 출신 공세화입니다. 글을 읽다 아는 이름들과 선생님들의 흔적이 있어 댓글을 남깁니다. 고려대(?)를 나온 재모선배, 육사 출신 태희선배는 같은동네 (성내1동) 앞,옆집에 있었어 어릴때 서로 알고 지낸 사이였는데 지금은 어떡해 지내시는지...이상열교장선생님은 경북대사대부고에서 정년을하시고 방대표선생님과는 사제지간으로 저와같이 근무(대구 범물여중.지금은 범일중) 후 퇴임하셨는데 따님이 경북에서 미술교사로 임용되어 근무중... 제 형님도 산업은행에서 부행장/PF센터장으로 근무하시다 금년에 김&장 법률사무소로 옮기셨죠. 훌륭하신 선배님 후배사랑 감사드립니다
공세화 후배님, 반갑습니다. 기억이 납니다. 재모는 현재 SK에 전무로 있고, 태희는 예편했습니다. 방대표 선생님과는 연락을 하고 싶습니다. 연락처를 아르켜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저에게 전화한번 주십시요. 011-382-3511 김인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