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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과 횡재
본문 말씀: 데살로니가후서 1:3-5
(1:3)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지니 이것이 당연함은 너희 믿음이 더욱 자라고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며
(1:4) 그리고 너희의 참는 모든 핍박과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을 인하여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함이라
(1:5) 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요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함이니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으리니
‘하나님의 나라’의 합당한 조건은 하나님께서만 만들 수 있지 인간은 못 만듭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스스로 만족스러운 상태로 만들어놓고 그것은 천국 백성의 합당한 조건이 되게 해달라고 억지를 부리게 됩니다. 즉 환란이나 고난이 없는 상황에서 천국에 들어가게 해달라는 것이지요.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환란과 고난 밖에는 천국이 없다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성도가 당하는 환란은 이 땅에 오셨던 예수님의 생애의 반복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당하신 환란과 핍박은 소위 자칭 하나님을 안다고 우긴 집단 내에서 일어났습니다. 즉 인간들은 자신의 ‘있음’을 근거로 자기를 있게 하신 바로 그 당사자가 저기 하늘에 있다는 것으로 하나님을 규정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런 창조물과 하나님의 조합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하나님께서 집어넣으신 방식은 ‘편지’입니다. ‘사도의 편지’입니다. 성령으로 쓰여진 사도의 편지가 모든 인간들의 하나님 규정을 거짓으로 드러냅니다. 왜냐하면 이 편지에는 ‘하나님의 심판’소식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은 심판이나 저주나 지옥이라는 개념을 싫어합니다. 도대체 인간 안에 무엇이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과 저주를 싫어하도록 부추기는 것일까요? 그것은 인간들 속에 비-본질적인 것들로 가득차 있기 때문입니다. 비-본질적인 것이 바로 ‘선악을 아는 지식체계’입니다. 이것은 ‘아무리 악해서 선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부여합니다.
소위 말하는 윤리와 도덕을 뜻합니다. 그러나 정작 본질적인 바는 윤리와 도덕이 아니라 “정녕 죽으리라”입니다.(창 2:17) 즉 윤리와 도덕의 뒷면에서 ‘정녕 죽으리라, 정녕 저주받으리라, 정녕 심판받으리라’가 있습니다. 더나아가서 선과 악 너머에 인간은 없습니다. 오로지 죽음 뿐이요 죽이시는 하나님만 계실 뿐입니다.
모든 인간은 죽는 것이 당연하고 저주받는 것이 당연하고 지옥가는 것이 당연합니다. 모든 인간은 있으니 실은 없는 존재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구약 때 요셉을 통해서 알려졌습니다. 창세기 41장에 보면, 애굽나라의 바로왕이 두 개의 꿈을 연이어 꿉니다. 이 꿈에 대해서 요셉은 다음과 같이 해석해줍니다.
요셉이 꿈을 제대로 해석할 수 있었던 것은, 요셉은 인류사의 모든 미래가 담긴 계시가 통해서 그 길목에 있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즉 바로가 꾼 꿈은 단순히 바로 개인이나 애굽나라 뿐만아니라 전 인류사의 운명을 일괄적으로 보여주는 겁니다. 택한 백성, 하나님 나라 백성이 어떤 상황에서 새로이 등장하는가를 보여주기 위해 인류사는 계속 지속되어야 했던 겁니다.
꿈은 내용은 이러합니다. 살진 좋은 암소가 일곱 마리가 먼저 나오고 곧 이어 흉측한 암소 일곱 마리가 나옵니다. 두 번째 꿈은 찰진 이삭 일곱이 나오고 그 다음에 바짝 마른 이삭 일곱이 나옵니다. 그런데 앞서 나온 살진 좋은 암소나 좋은 이삭은 후에 등장되는 흉측한 암소나 마른 이삭에 의해서 그 풍성함이 다 무효됩니다.
즉 인류사는 어떤 방향성을 갖고 있는데 그것은 어쨌거나 저쨌거나 철저하게 다 망한다는 겁니다. ”정녕 죽으리라”가 한 시도 멈춰선 적이 없다는 겁니다. 아무리 풍성하고 번영해도 망하기는 결정난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풍성하고 넉넉한 것을 마치 당연한 것처럼 여깁니다. 마땅한 것처럼 여깁니다.
곧 자신의 선행으로 획득한 복인양 여깁니다. 자신의 자율성이 하나님으로부터도 통한다고 여깁니다. 뭘 해도 스스로 하고 스스로 자기 인생을 수습해서, “나는 그동안 헛되이 인생을 살지 않았다”로 자부하고 싶어합니다. 교회 다녀도 내가 알아서 다니고, 헌금을 하거나 기도를 하거나 전도를 하거나 뭘 해도 내가 하고 싶을 때 한다는 겁니다.
이런 외톨이적 발상은 바보가 하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 모습이 ‘버림받은 자’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번성케 했다가 도로 망하게 하시는 이유는, 그 번성이 인간들로 당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하는 분의 은혜라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바로 심판의 기준이요 하나님 나라의 기준입니다.
즉 인간은 시체인데 그 동안 하나님의 은혜로 덮혀진 채 살아온 겁니다. 이제 그 은혜가 하나 둘씩 벗겨나는 작업이 바로 환란과 핍박과 고난입니다. 마치 평생 직장에서 그만두고 시골로 내려가 전원생활을 시작하는 것과 같습니다. 허름한 촌 주택을 손댈 것도 없습니다. 먼저가 덮히면 덮힌 채로, 잡초 자라면 자라는대로, 벌레 달려들면 그대로 다 맞아가면서 그 주택과 더불어 그 안에 사람도 같이 허물어 지는 겁니다.
이미 그곳이 자신의 무덤이 되었으니까요. 자기 쇄신은 불필요합니다. 사람이 죽으면 고인의 유품은 불에 태우는 것처럼, 주님께서 친히 우리의 유품들을 환란과 핍박을 통해서 뒷정리해 주시는 겁니다. 따라서 성도의 관심사는 자기 것에 있지 않습니다. 사람이 지킬 게 있으면 알 수 없는 공포심이 평생 따라 붙습니다.
인간들은 홀로 자신을 챙기고 싶어서 하나님의 법과 지시에 따라주려고 하지만 이는 마치 채무 관계에 있어 빚쟁이에게 해줄 것 다 해주면서 나머지 남은 그 소박한 나의 것 간에서 최후의 행복을 누리고자 합니다. 하지만 그것마저 “정녕 죽으리라”에 다 허물어집니다. 따라서 성도는 새삼스럽게 자기 인생을 끌어모아 통합적 자아로 살 것이 아니라 에스겔 선지자처럼 이미 완료된 사랑과 심판을 증거하면 됩니다.
성도에게 사랑이란, 전혀 없는 데서 우연과 횡재와 행운으로 찾아온 것이기에 그 자체서 ‘성공’입니다. 따라서 성공되고 완료된 그 가치에 대한 정황으로서의 환란이요 고난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 5절의 ‘심판의 표’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주신 사랑을 지키기 위한 전쟁을 하시는 겁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이미 오늘날 성도들처럼 성신받은 입장에서 충분히 하나님에 의해서 세상 멸망의 모습과 행태를 선지자의 삶을 통해 미리 보이게 하십니다. (겔 4:8-17/12:4-8/24:15-
18) 특히 선지자는 자기 아내가 죽었어도 이를 슬퍼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억울한 죽음이 아니라 이 백성이 마땅히 죽을 만해서 죽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성령받은 성도로 하여금 주님의 사랑 없이는 천국백성 되지 못한다는 그 특이성을 시대적 환란과 고난을 통해서 알려주십니다. 번성과 망함이 이 신약시대에서는 중첩되어 있습니다. 성도가 보기에 일상은 ‘심판의 일상’입니다. 기도합시다.
『 하나님 아버지, 내 힘으로 살지 않고 주님의 사랑 안에서 지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우리교회

22-03-20 18:33 2강-데살로니가후서 1장 3-5절(심판과 횡재)220320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데살로니가후서 1장 3-5절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1:3-5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찌니 이것이 당연함은 너희 믿음이 더욱 자라고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며 그리고 너희의 참는 모든 핍박과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을 인하여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함이라 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요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함이니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느니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조건에 환난이 필수적이고 그리고 필연적이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본능적으로 고생하는 것, 이 핍박과 환난을 상당히 싫어하지요. 그런데 그걸 싫어해버리면 그것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합당한 조건보다 다른 조건을 제시하는 셈이 되어버립니다.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조건이 마음에 들지 않으니까 그냥 본인이 스스로 만족스러운 상태로 인생을 사는 그 조건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이 된다고 억지를 부리는 셈이 되지요. 그래서 사도의 편지라는 것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여기에 있음을 가지고 ‘하나님이 계시니까 현재 나를 만들었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여기 있다는 것과 하나님이 있다는 것과 서로 원만하게 조합이 가능하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있게 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내 인생에 대해서 책임져야 된다 아마 사랑하실 거야.’ 그런 식으로 안일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신에 대해서 인간들은 자기가 만족스럽게 있는 조건을 충족시키는 그런 하나님을 찾아다니고 또 그런 하나님을 원하고 있는 거예요. 어떤 목사가 설교하기를 하면 된다, 라고 주장했습니다. 조폭들이 하는 이야기지요. 조폭들이 하는 소리, “하면 된다. 뭐든지 할 수 있다.”
여기에 대해서 그 교회에 참석한 어느 교인들도……, 물론 성도라고 볼 수 없어요. 그냥 교인이에요. 그런 교인들도 ‘이게 성경하고 다른데?’라는 생각을 함부로 감히 못해요. 왜냐하면 목사가 어떤 설교를 할 때 여러분이 노리고 들어온 것을 이미 캐치해서 설교하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여러분들은 고생 직사하게 해야 됩니다.” 세상에 이런 설교 해 가지고 교회 되겠어요?
오늘 본문 내용은 이거예요. “환난과 핍박을 참으면 나중에 좋은 날 옵니다.” 이게 아니고 “환난과 핍박 벗어나는 순간 당신은 하늘나라에서 탈락이다.” 이렇게 이야기 되는 거예요. 환난과 핍박과 고난을 벗어났다? 그것은 하나님이 정해준 조건 말고 인간이 생래적으로 느끼는, 불편함이 없이 편안하게 살고자 하는 그 조건을 고집하는 게 들통나 버리지요.
그래서 자꾸 사람들은 자기 마음에 드는 하나님을 자꾸 고르는데 신, 하나님, God, 하나님과 그리고 편지 어느 것이 진리냐, 를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 인간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이냐, 인간을 창조했다는 그 창조의 하나님과 그리고 편지를 지금 대결 붙이고 있는 거예요. 편지냐 하나님이냐?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서 부정하지 않는 한 그 사람을 신자라고 간주하는 경향이 있어요. 그런데 고린도후서 11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편지하기를…, 이 사도 바울의 편지가 문제에요. 편지가 없었으면 자기 마음껏 자기 기분상 뭐 하나님 대충 믿으면 되는데 이 편지가 문제에요. 그 편지에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성령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편지에!
그리고 갈라디아서 1장 8절에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 저주를 언급하고 있어요. 어디에? 편지에. 편지 말입니다, 편지. 사도 바울의 편지, 성령으로 쓴 이 편지 말입니다.
우리는 연애편지는 기다리지만 도대체 이 사도의 편지에 대해서 별로 안 기다리는 경향들이 있어요. 그것은 우리가 관성상, 일상을 사는 우리 관성상 편하게 살고 싶고, 내 욕망에 만족스럽게 살고 싶은 것이 뒤에서 썰물처럼 치면서 앞으로 밀어내고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어어어어? 하다 보면 우리는 계속 세상 조류에, 세상 사조에 어느새 휩쓸려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스스로 위로하기를 ‘우리 하나님 믿으니까 하나님이 알아서 해주시겠지. 좋은데 보내주겠지.’ 하는데 그러면 편지는? “편지 읽어봤냐?” “무슨 편지요?” “편지 읽어봤어?” “무슨 편지 말입니까?” “사도의 편지” “그거 꼭 굳이 읽어봐야 됩니까?”
하지만 사도의 편지 안에 바로 심판에 대해서, 구원에 대해서 기준이 나와 있다는 겁니다. 어느 인간치고 자진해서 자기가 심판 받아야 된다고 주장할 사람 아무도 없어요. 항상 인간은 자기는 자기편에 서 있기 때문에 좋은 쪽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거든요. 그래서 편지를 대하면서도, 사도의 편지를 대하면서 선입견 자체가 ‘나 하자 없을 것이다. 나 별로 문제 없을 걸?’ 그런 식으로 성경을 편지를 대하는 경향이 있어요.
그러나 여기에 5절에 보면 “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요.”라고 되어 있어요. 이 말은 뭔 뜻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이 세상 일상 전체를 심판으로 이끌고 있는 거예요. 이걸 심판의 일상성, 일상생활 가운데서 하나님의 심판을 세세하게 네가 찾아내 봐라, 그 말입니다. 일상생활을 하나님의 심판의 생활로 바꿔서 생각하라, 그 말이에요.
심판 이야기가 딱 나오니까 이 편지를 보는 사람이 심판에 대해서 양미간이 갑자기 찡그려지는 거예요. ‘부정적 사고방식’ 이러면서 찡그려져요. ‘힘들게 교회 왔는데 또 부정적 사고방식을 또 들어야 돼?’ 이렇게 찡그려지는 겁니다. 하나님의 심판, 어느 책 제목이 이런 것이 있어요. <지옥의 하나님>이라는 책이 있어요. 누가 썼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겠습니다. 그걸 보고 누가 평하기를 “제목 꼬라지 하고는! 이래서 팔리겠나? 천국의 하나님이라 해도 사볼까 말까 한데. 지옥의 하나님, 제목부터가 거부반응을 유발시키는데 그 책을 누가 사보겠나?” 이렇게 나오지요
사도 바울의 편지에 심판이라 딱 나온다는 말은, 하나님이 하는 일, 심판하는 일에 너희들이 어떤 모습으로 대응하느냐, 반발하고 배척하고 강력하게 저항하는 요소가 네 속에 있다는 겁니다. 편지를 읽지 않고 하나님 그냥 믿어버리면 내 속에 뭐가 들어 있는지를, 어떤 괴물이 들어 있는지를 몰라요.
하나님께서 편지를 통해서 심판 이야기가 딱 오니까 ‘심판 같은 소리, 저리 가세요.’ 하고 강력하게 밀어내는 그러한 발작 같은 것이 일어나기 시작하는 겁니다. 무엇이 하나님의 심판을 가로막고 무엇이 하나님의 저주를 가로막습니까? 우리 안에 도대체 무엇이 들어있기에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그렇게 인상을 그리고 거부반응을 나타내는 거예요?
그것은 바로 비본질적인 것이 우리 안에 이미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비본질적인 것. 그러니까 본질적인 것은 그 전에 있었는데 그 후에 나타나는 비본질적인 것이 본질적인 것을 철저하게 가로막고 있었던 겁니다. 그 본질이 후차적인,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선악적으로 모든 세상을 보고, 내가 선악적으로 행동하고, 선악적으로 합당한 인간이 되겠다는 후차적인 것, 악마와 결탁된 이 후차적인 선악, 쉽게 말해서 윤리와 도덕이 본질적인 것을 철저하게 저항하고 가로막고 있습니다.
윤리와 도덕이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내가 아무리 악해도 선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것이 윤리와 도덕의 취지에요. ‘그래. 나 나빠. 그래. 죄지었어. 가정환경 나빠서 내가 철모를 때 나쁜 짓 했지. 하지만 이제는 개과천선해서 새사람되었기 때문에 나는 선을 행할 수 있는 사람이 된 거야.’ 이게 바로 선악 체계에서 나온 사고방식입니다.
거기에다가 하나님 말씀 보고 이렇게 하니까 어떤 생각이 드느냐 하면, ‘일단 하나님의 법이 요구하는 대로 들어주자. 그러나 나머지 이후는 내가 챙기겠다.’ 이게 채무 관계거든요. 채무 관계. 하나님께서 요구하는 어떤 의무에 대해서는 충실하게 다 들어줘요. 들어주면서 ‘하나님, 봤지요? 하나님, 이정도 하면 되었지요? 내가 시키는대로 다 했습니다. 그것 말고 여분의 그것은 나의 소박한 나만의 행복, 이것은 내가 내 것으로 간직하고 싶습니다.’
왜? 하나님 지시에 다 따랐잖아요. 명령 그대로 다 해줬잖아요. 뭐하라, 뭐하라, 다 했다 그 말이지요. 그러고도 난 뒤에 나머지, 떨어지는 어떤 이윤, 이자, 그것은 나만의, 소박한 나만의 세계는 간직하고 싶고 그 안에서 나는 행복해지고 싶다는 거예요. 나로 인하여 행복, 이것은 순전히 내 거예요. 나만의 것이에요. 그걸 간직하고 싶은 거예요. 교인들이 그런 자세로 교회 나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선악 체계의 그 뒤쪽에 뭐가 있느냐 하면, “정녕 죽으리라.”(창 2:17)가 있습니다. 그 뒤편에. 선악 체계에 대해서 여분의 나머지 따로 챙기는 게 있는 게 아니고 “정녕 죽으리라.”가 있어요. 정녕 심판받으리라, 정녕 저주받으리라, 가 있어요. 소박한 나만의 것, 정녕 저주받습니다. 정녕 죽으리라, 가 있어 버리면 진짜 여분은 나로 인하여 내가 즐거워하는 소박한 작은 것 하나 그것조차 허락이 안 되고 용납이 안 되는 세계가 선악과, 선악 체계 그 막 뒤쪽에 있어요.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어떤 네모난 물통이 있는데 물이 한 반쯤 차 있어요. 투명한 유리막 가지고 물통에 딱 꽂아서 왼쪽에서부터 좍 밀칩니다. 오른쪽으로 가, 가, 하면서 밀칩니다. 3분의 1쯤 밀치게 되면 원래 있던 물은 3분의 2 공간 안에 조밀하게 다 모이지요. 수면은 높아집니다. 처음에는 반쯤에 있다가 높아지겠지요.
그런데 강력하게 투명한 유리판으로 좍 밀어버리면 그 밀린 그만큼 남는 게 있지요. 빈 공간이 된다 이 말이지요. 악마가 인간에게 선악 체계를 주고 난 뒤에 인간세계 전체가 완전히 선악의 출렁이는 바다가 되었어요. 윤리 도덕의 바다가 되었어요. 윤리 도덕이란 다시 말씀드려서, 내가 선을 행할 수 있고, 내가 의롭게 될 수 있고, 내가 구원받을 수 있는 가능성들이 출렁이는 그 바다를 말합니다.
악에서 선으로 갈 수 있는 여지를 남기는 것, 그런 희망을 제공하는 것이 바로 기존의 비본질성이에요. 선악과 따먹기 전이 아니라 따먹고 난 후의 상황이다, 그 말이지요. 그런데 여기서 편지를 통해서 주님께서 오셔 가지고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합당한 기준, 환난이라는 기준을 딱 유리판으로 좍 당겨버리니까 선악 체계 뒤쪽에 선악 체계가 다가 아니라 그 뒤쪽에 빈 공간이 발생 되는 겁니다. 그 빈 공간은 십자가의 취지로 가득 차 있는데 그것은 뭐냐? “인간이냐? 그렇다면 정녕 죽으리라.”
쉽게 말해서 ‘나는 하나님이 창조했다. 그래서 나는 인간이 되었다.’라는 자체는 앞에 있는 선악 체계에서 나온 거예요. 본질적이 아니라 비본질적이에요. 하나님이 나를 만들었기 때문에 나는 여기 있다고 여기는 이것은 본질이 아니고, 성경의 내용이 아니고 비본질적이에요. 그 뒤에는 뭐가 있느냐 하면, 인간은 없어요. ‘없음’만 있습니다. 왜? 죽었기 때문에. 죽은 인간은 인간으로 취급을 안 하거든요. 없어요. 인간이 없다고요.
없는 인간이 무슨 기도를 하고, 없는 인간이 무슨 헌금을 해요? 없는 인간이 무슨 예배를 드립니까? 없는데! 없는 인간이 무슨 구원을 받고, 없는 인간이 무슨 하늘나라를 가요? 안돼요. 하늘나라에 들어갈 인간은 없습니다. 아예 ‘없음’이에요. 왜? 정녕 죽으리라, 가 막이 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내가 있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을 끌어당겨서 생각하다 보니까 ‘나도 여기 있고 하나님도 여기 있으니까 서로 아는 사이’라고 여기고 그 조합은 정상적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아요. 우리 자신이 없어요.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것은 어떤 사람이냐 하면, 예수님의 환난에 참여한 사람만이, 예수님의 환난에 참여한 사람만이 하늘나라에 합당한 조건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환난에 참여한 사람은 예수님이 가셨던 그 일대기를 그대로 보여주기 때문에 거기서 하나님은 뭐만 뽑느냐 하면, 죽은 인간을 살리는 주님의 은혜만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것을 뽑아내요. 그게 하늘나라에 합당한 조건입니다.
내가 알아서 기도하고, 내가 알아서 헌금하고, 내가 알아서 예배드리고, 내가 알아서 성경 공부하고, 내가 알아서 교회 나오고, 내가 알아서 공부하고, 내가 알아서 취직하고, 또 일하고, ‘바보야!’ 그게 버림받은 거예요. 알아서 하는 게 아니고 성경에서는 그걸 버림받았다고 하는 거예요, 그걸! 제가 ‘바보야’ 이런 소리 잘 안 하는데.
혼자서 밥을 먹고, 혼자서 TV보고, 혼자서 춤을 추고, 그걸 가지고 버림받았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목사님, 제가 바빠서 교회 못 나오는데 언젠가 교회 나올게요.” 그게 버림받은 거예요, 그것은. ‘내 자율성이 있고 내 의지가 있고……’ 무슨 되도 않는 이런 이야기를? 시체에 은혜의 옷을 입힌 거예요. 시체인데! 아, 성경, 편지를 볼 때 제대로 보세요. 시체인데 은혜의 옷을 입힌 거예요.
그런데 환난은 뭐냐? 그 은혜의 옷을 한 꺼풀 한 꺼풀 벗기는 거예요. “옷이 많이 무겁지? 70, 80, 90년까지 산다고 옷이 얼마나 무거우냐? 내가 그 옷 벗겨줄 게. 그래서 시체 되게 해줄 게.” 이게 얼마나 큰 사랑입니까? 내게서 주의 은혜가 있음을 자각하도록 하기 위해서 내 힘으로, 자율적으로 살려고 하는 이 모든 것을 힘들게힘들게 가져가는 그 세상과 더불어 일어나는 그 작업, 그게 환난과 핍박입니다.
“안 살아도 돼. 그만 살아도 괜찮아.” 이게 환난과 핍박이에요. “너한테 은혜가 있잖아. 네가 굳이 살 필요 없어.” 이게 환난과 핍박이에요. 이 세상 안 믿는 사람, 마귀들 다 동원 시켜서 성도로 하여금 그렇게 하게 만듭니다. 그러면서도 성도는 그 환난 가운데서 뭐냐? 사랑이 계속 더 커지는 거예요.
3절에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찌니 이것이 당연함은 너희 믿음이 더욱 자라고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며……” ‘풍성’이라는 것은 풍선이 늘어나고 커지는 거요, 바람 불어넣으면 풍선 커지지요, 환난은 환난대로 더욱 가속되는데 사랑은 사랑대로 더 풍선 커지듯이 점점 커지는 거예요.
이게 주님 가신 길이었고요. 성도는 거기에 참여된 자에요. 왜? 그냥 버려두지 않고 주께서불러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 나이 들어서 촌에 집 지어서 전원생활 하고 싶은 사람들 있을 거예요. 가까운데 군위도 괜찮아요. 비행장 생기고 있어서 좀 그렇지만.
그런데 이 전원생활 하는 사람들이 늘 집을 쓸고 닦고 그렇게 하는데 제가 보니까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에요. 전원생활 한다는 것은 쇄신하는 것, 날마다 쇄신하는 그게 아니고 날마다 세월의 무상함이 주는 무게 있잖아요, 그 무게에 같이 허물어지는 것이 전원생활이에요.
모기, 파리, 잡초, 벌레, 그리고 바람 불면 먼지. 도시보다 촌에는 먼지가 왜 그리 많이 끼는지? 왜 그러냐 하면, 사방에 아무것도 없으니까 그냥 날라 들어오는 거예요. 그 바깥에 있는 세월의 무상한 무게, 시간의 무게가 인위적이고 인공적으로 지어진 이러한 전원주택을 완전히 허물어 버려요. 지붕의 칠도 다 낡아서 떨어지고.
그러면 그 안에 사는 사람은 그게 자신의 무덤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 전원생활이라 하는 것은 세월과 같이 무너지면 돼요. 왜? 그게 자기 무덤이니까. 그게 얼마나 살기 편해요? 지붕 무너지면 같이 무너지면 되잖아요. 그게 제대로 인생 사는 게 아닙니까? 그걸 왜 수리합니까? 고물이 고물로 돌아가는 게 당연하지요.
전원생활 한다면서 호텔을 지어놨어요. 수리비가 더 많이 들어요. 수리비야 돈이 있으면 좋은데 말년에 무슨 돈이 있겠어요? 먼지 끼면 그냥 창문에 먼지 끼는 것이고 나중에 하도 먼지 껴서 보이지도 않아요. 잔디가 마당에 깔린 집 샀는데 나중에 잡초가 완전히 점령을 했어요. 그걸 점령군이라 합니다. 완전히 점령을 했어요.
잡초가 나중에는 자라다 자라다 기어 올라오는데 현관까지 기어올라요. 바람 부는데 풀잎 씨앗이 날아 들어와서 이제는 현관에서 막 풀이 올라오고 꽃이 피어요. 그 얼마나 좋습니까? ‘아, 내가 이렇다. 내가 허물어져야 되고 이게 삭아져야 되는구나.’ 이게 환난과 핍박입니다. 그게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조건이에요. 다른 조건은 없습니다. 그냥 무너지는 거예요.
그러면 아무것도 없는데 무슨 천국 백성이 나오느냐? 소돔과 고모라 심판할 때 롯이 나오거든요. 롯이라는 이름은 나오는데 롯의 아내의 이름이 없어요. 롯의 아내 이름을 모릅니다. 이름이 없다는 것은 숫자에 치지 않는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생명책에 숫자가 들어가지를 않는 겁니다. 숫자를 제거해 버리거든요.
출애굽기 32장 32절에 보면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주옵소서.” 책이 먼저예요. 이미 모든 인간은 없습니다. 인간 같은 인간은 없어요. 인간이 있더라도 그것은 시체니까, 먼지 덩어리니까 그것은 인간이라 할 수 없지요.
따라서 책이 먼저고요. 인간 같은 인간은 그 책의 명단에, 숫자에 있는 사람을 이 지상에서 새로 만들어냅니다. 그렇게 새로 만들게 되면, 편지 내용이나 성경책 내용이나 그게 나오는데 이 편지 내용이나 성경책 내용은 오직 신자들에게 성도들에게 준 책이고 편지입니다. 다른 사람은 읽으면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고 격분과 분노만 일어나고 그다음부터는 이 성경책을 밀어내게 되어 있어요. 안 볼란다, 하고 밀어내게 되어 있어요. 이 성경책이 별로 달갑지도 않고 반갑지도 않은 책이에요.
그런데 성도가 되게 되면 성령께서는 성도로 하여금 이 사도의 편지에 주목하게 되어 있어요. 내가 하나님을 정하기 전에 하나님이 먼저 나를 찍은 겁니다. 인간도 아니고 그냥 시체에 불과한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사랑을 주셨거든요. 결국 하나님께서는 사랑을 지키기 위한, 자기가 준 사랑을 지키기 위한 전쟁을 벌이는데 그 사랑을 줘버리면 사랑은, 사랑 자체가 왔다는 것 자체가 이게 성공적인 거예요.
그 이야기가 어디 나오느냐 하면, 데살로니가후서 1장 5절에 나옵니다. “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요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함이니” 이게 뭐냐 하면, 환난과 핍박은 이것은 인생이 실패한 것이 아니고, 이미 성공시키고 완료된 가치에 대한 정황으로서의 고난입니다. 모든 사태가 완료되었고, 끝나버렸고, 하나님 편에서 성공했다는 표시로서 너희에게 환난과 핍박이 주어지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서는 선악 체계 말고, 선악 체계 이것은 끝났거든요, 선악 체계 말고 그 뒤에 주어지는 게 뭐냐 하면, 횡재입니다. 행운, 횡재, 어려운 말로 우연. 그렇게 굳혀진 것이 뭐냐 하면, 사랑이에요. 사랑은 내가 쟁취하는 것이 아니고 노력해서 얻는 게 아니에요. 그냥 횡재한 겁니다. ‘이 웬 횡재냐? 이게 웬 떡이냐?’ 하는 것처럼 횡재했고, 행운이고.
횡재와 행운의 그 가치 있잖아요. 완성된 가치. 그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 횡재가 아니고 우연이 아니고 뭔가 열심히 하는 그런 모든 것은 환난과 고난을 통해서 뜯어내는, 강제로 뜯어내는 작업이 되는 거예요. 제가 말한다고 받아주는 것은 아니지만 성경에 있는 예를 들면 창세기 41장에 있는 예가 아주 적절한 예라고 생각됩니다.
요셉이 애굽에 팔려갔을 때 바로 왕이 꿈을 꿉니다. 꿈을 두 개 꿔요. 첫 번째 꿈이 뭐냐 하면, 창세기 41장에 보면 처음에 일곱 좋은 암소가 올라와요. 바로라는 통치자가 애굽전역을 다 관할하지요. 바로 왕의 꿈의 운명이 애굽나라 전체의 운명을 말해줍니다.
처음에 아주 살진 일곱 암소가 나타납니다. 그런데 그다음에 흉하고 파리하고 흉측한 일곱 암소가 또 올라와요. 원래 소는 육식 동물이 아니고 채식을 하는데 꿈속에서는 어떻게 된 일인지 나쁜 소가 앞의 좋은 소를 다 잡아먹어요. 참 무시무시한 소지요. 잡아먹는 듯 잡아 먹히지 않은 듯 하여튼 잡아먹어요.
두 번째 꿈은 아주 충실한 일곱 이삭이 올라옵니다. 이야기가 창세기 41장 14절부터 죽 나오는데 너무 길어서 생략하고 설명하는 겁니다. 그다음에는 아주 바짝 마른 빈 껍질 같은 일곱 이삭도 또 올라와요. 올라와서는 앞에 있는 풍성한 이삭의 풍년을 무효화시켜버립니다.
이게 애굽나라 전체에 대한 운명인 동시에 인류사에 대한 모든 운명인데 바로 왕에게 하나님께서 꿈으로 나타냈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계시가 내려오는 빈 파이프, 통로기 때문에 요셉을 통해서 인류사 전체를 보여주는 겁니다.
인류사는 뭐냐 하면, 마땅히 멸망하고 심판하고 저주해야 되는데 하나님이 인류 전체를 구하기 위함이 아니고, 요셉에 내려온, 요셉을 통한 하나님의 언약 백성, 하나님의 이스라엘 택한 백성을 살리기 위한 작업으로써 마땅히 멸망해야 될 그런 나라조차도 살진 암소처럼, 아주 알찬 이삭처럼 풍년을 허락해요.
풍년을 허락하니까 인간들은 우리가 잘 먹고 잘사는 게 당연한 줄 알아요. 이게 마땅한 줄 알고. ‘역시 내가 착한 일 좀 했더니만 하나님께서 복을 내리는구먼.’ 이런 식이에요. 그런데 이게 꿈이거든요. 꿈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혼자 홀로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더 센 무엇이 너를 덮치는 그러한 상황 속에 인간이 놓여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처음에 여기서는 좋은 삶의 상황, 그다음에 그걸 무효화시키는, ‘언제 그런 것이 있었나?’ 할 정도로 완전히 처절하게 망가져 버린 나쁜 상황, 이렇게 되거든요. 구약에 이렇게 돼요. 그런데 신약에 오게 되면 좋은 상황 밑에 나쁜 상황이 밑으로 진입을 해버리면 이게 동시적으로 중첩된 세대가 되어 버립니다. 좋은 것은 하늘로 올라가 버리고 나쁜 것은 이 세상 모든 것을 장악하게 돼요.
지구 지각에 해양층 밑에 대륙지각이 삽입된다, 진입하면서 지진이 발생되는 것처럼, 지각이 흔들리는 것처럼, 이동하는 것처럼 위에 있는 좋은 것 밑으로 들어가면서 다 갉아먹어요. 그러니까 좋다는 게 우리한테 마땅한 것이 아니고 우리한테 합당한 게 아니에요. 뭔가 이것은 횡재한 거예요. 우연이고 횡재고 낯선 것입니다.
‘내가 왜 건강하지? 뭐가 이거 잘못된 것 아니에요? 주님, 저는 선악 체계로 살아가는 사람인데 어제부로 제가 왜 안 죽었지요? 오늘 아직도 왜 살아 있습니까?’ 이런 식으로 의아해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뜻은 모든 것을 무효화시키는 거예요. 처절하게 비본질적인 것을 벗어나서 본질적인 것으로 돌아갑니다. “정녕 죽으리라. 정녕 죽으리라.”
여기에 인간이 선악으로 아무리 몸부림쳐도 따라갈 수 없습니다.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그다음부터는 모든 것이 자기가 주인공이 되었어요. 뭘 해도 자기가 결정하고 자율적으로 자기가 의지로 한다는 거예요. 그런 외톨이들이 모인 곳이 교회입니다. 나 하나님 믿으니까 날 알아달라는 겁니다. 날 인정해 달라는 겁니다.
그래놓고 모여가지고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려고 해요. 소기의 목적이 뭐냐 하면, 보다 많은 교인들 모아서 이 나라, 이 세상을 하나님 나라 만들겠다는 소기의 목적, 거기에 뭐 당연히 돈 필요하지요. 어떤 목사는 시편 121편을 이용해서 이렇게 합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여러분, 눈을 들어 산을 보세요. 모든 도움이 돈에서 옵니다. 울진 산불 났을 때 산 한 번 보세요. 금강송이 다 돈이에요. 도로 난 것, 다 돈입니다. 아스팔트 새로 깔아야 되고 거기 불탄 주택들이 다 돈이에요. 우리의 도움은 돈에서 와요. 이걸 애써 자꾸 감추려고 하면 안 돼요.
외톨이니까 인간은 자기밖에 모르거든요. 자기밖에 모르면서도 자꾸 다른 사람을 원하고 있어요. ‘혼자 있고 싶지만 혼자 있기 싫다.’ 어쩌란 말이에요? 그래서 모여 가지고 소기의 목적을 이루자, 교회 부흥, 그러면 이것은 정치적 단체가 되지요. 노조입니다. 정치적 성향을 띤. 우리 경상도에 있는 부울경, 부산, 울산, 경상, “부울경은 윤 석열 찍기로 전체 교회에서 결정했습니다.” 이게 뭐냐? 정치적 성향 아닙니까?
사람이 지킬 게 있다는 것은 매사가 공포스럽다는 뜻이에요. 인간에게는 혼자 살려고 애쓰다 보니까 여기에 강력한 강박증이 있어요. 트라우마가 있습니다. 뭐냐? “정녕 죽으리라.”의 트라우마를 갖고 있습니다. 살려고 하는데 자꾸 성경은 정녕 죽으리라, 하니까 싫어, 이 편지가 싫고 하나님이 너무나 싫은 거예요.
그래서 자기 인생을 자꾸 수습하려 합니다. 깨진 파편이 있으면 자기가 자기한테 격려해요. ‘걱정하지 마. 다시 일어서면 돼.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째 일어서면 돼.’ 자꾸 수습해서 조각조각 난 내 몸뚱이, 나다움, 다 깨진 거울 조각을 스카치 테입으로 붙여서 그거 가지고 수습해서 내 모습을 내가 보고 싶은 거예요.
그리고 남들에게 이렇게 외치고 싶습니다. 나는 헛되이 인생을 살지 않았다고. 무슨 이런 객기가 있습니까! 그게 예수님과 충돌되는 거예요. 그게 바로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않은 조건입니다. 주님께서는 선악과, 그리고 횡재, 사랑이지요, 횡재 사이에 그물을 쳐 놓았어요.
그 그물이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마태복음 13장 47, 48절에 나옵니다.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마지막에 그물이 있어요. 이거 못 빠져 나갑니다. 48-50절 “그물에 가득하매 물가로 끌어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어 버리느니라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 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지옥 보낸다는 이 이야기가 아담에 속한 모든 인간에게 트라우마가 되는 겁니다. 강박증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그걸 통과하면 되지 않느냐? 통과할 방법이 없어요. 선악 체계를 갖고 있는 이 자체가 독소조항이기 때문에 선악 체계를 내가 스스로 뽑아내지 않는 한 이 선악 체계 자체가 우리를 망하게 만드는 요소가 되는 거예요. 마약으로 망가진 몸을 마약으로 치료시킬 수는 없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 속에 있는 마약이 뭐냐? 선악 체계, 윤리 도덕이 마약이에요. 나는 선할 수 있다, 착할 수 있다, 그래서 착하면 당당하게 복 받을 수 있다. 이게 마약이라니까요. 예수 믿는 착한 일이 하나님께 복 받을 수 있는 요건이 된다. 이게 마약 같은 거예요.
그 마약을 어디서 파느냐? 교회에서 팔고 있지요. 그러면 그 선악 체계를 어떻게 뚫고 나가느냐? 뚫고 나가는 것은 예수님만 뚫고 나갑니다. 누가복음 4장 28-30절에 보면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분이 가득하여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그 동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낭떠러지까지 끌고 간 그 대목입니다. “끌고 가서 밀쳐 내리치고자 하되 예수께서 저희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 그냥 통과해버리는 거예요. 죽으라고 미는데 그들 사이를 그냥 통과해서 지나갔어요. 주님만이 통과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통과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성도는 어떻게 통과합니까? 성도는 통과하는 게 아니에요. 이미 통과되어버렸어요. 이미 모든 환난이 온다는 것은 우리에게 하늘나라에 합당한 조건, 횡재한 것, 행운, 우연, 사랑, 성령, 이것이 우리에게 완성된 것으로 주어졌기 때문에, 시체 같은 우리에게 이 은혜가 덮쳤기 때문에 이제 평생 무겁게 짊어진 나의 잘남과 나의 우수함과 자랑질 하는 것, 그것, 인생 살면서 들이닥치는 환난과 핍박 앞에 우리는 그걸 버텨낼 수가 없습니다. 다 무너져 내리는 거예요.
마치 바닷가에 작대기 하나 꽂고 밑에서 모래 조금씩 긁어내면서 누가 마지막에 무너지는가, 게임 하잖아요. 주님께서 이미 너는 하늘나라에 합당하다고 꽂아놨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주님의 우연적인 사랑, 주님의 횡재한 사랑이 있기 때문에 다른 것들, 네가 너로 인하여 자랑질하는 것은 다 밑둥치부터 다 긁어내는 거예요. 긁어내는 겁니다.
주님께서 뒷정리해 주시는 거예요, 뒷정리! 사람 죽고 난 뒤에 유품 나오지요. 유품 어떻게 처리합니까? 지금은 산불 때문에 그렇게 못하지만 옛날 촌에서는 뒤뜰에서 다 태웠어요. 그게 불심판 아닙니까? 우리의 시체는 불심판, 환난, 핍박, 주께서 해주시는 겁니다. 그래서 성도의 특징은 뭐냐? 관심사가 없어질 것에 관심 두지 않고 이미 주어진 것에 관심 두고 사는 그들이 바로 성도입니다.
에스겔에 보면 환난과 고난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잘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에스겔이 구약 선지서에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걸 잘 안 보려 하는데 이번 여름 수련회를 저는 에스겔로 정했습니다. 제목은 <없는 성전>으로 일단 한번 정해봤어요. 전부 다, 땅도 없고 하여튼 없어요. 교회도 없고요. 그냥 인간도 없고요. 없는 성전.
에스겔 4장 긴 이야기인데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시킵니다. “에스겔아, 너 스스로 네 몸을 묶어라. 묶고 네가 390일 묶인 채로 누워 있어라.” 5-11절에 보면 “내가 그들의 범죄한 햇수대로 네게 날수를 정하였나니 곧 삼백 구십일이니라 너는 이렇게 이스라엘 족속의 죄악을 담당하고 그 수가 차거든 너는 우편으로 누워 유다 족속의 죄악을 담당하라 내가 네게 사십일로 정하였나니 일일이 일년이니라 너는 또 에워싼 예루살렘을 향하여 팔을 벗어메고 예언하라 내가 줄로 너를 동이리니 네가 에워싸는 날이 맟도록(마ㅊ도록) 몸을 이리 저리 돌리지 못하리라 너는 밀과 보리와 콩과 팥과 조와 귀리를 가져다가 한 그릇에 담고 떡을 만들어 네 모로 눕는 날수 곧 삼백 구십일에 먹되 너는 식물을 달아서 하루 이십 세겔 중씩 때를 따라 먹고 물도 힌 육분 일씩 되어서 때를 따라 마시라.”
그러니까 390일 동안 스스로 자기를 묶는 거예요. 이것은 왜 그러냐? 물론 하나님의 택한 백성입니다. 이방나라 아닙니다. 항상 하나님의 편지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에게 주어져요. 거기에 하나님이 함께 계시기 때문에. 택한 백성들의 운명은 이제 미리 선지자가 당하고 있는 그 신체를 그대로 반복해서 당한다는 겁니다.
이것은 마치 예수님께서 이 땅의 삶 자체가 고난이고 환난인 그것이 오늘날 우리 성도들에게 그대로 주어지는 것하고 똑같은 원리입니다. 성도의 인생은 이미 누가 결정하고 규정했는가? 주님께서 이미 먼저 그걸 하셨고 주님이 했던 그걸 그냥 복제판, 복사판으로 우리 성도가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그걸 여러분 못 느낍니까? 갑자기 뭐 어깨 아프고, 못 느꼈어요? 갑자기 전원생활 하고 싶은 생각 없습니까? 주께서 그만 데려갔으면 좋겠다는 그런 생각 안 들어요? 더러워서 안 살란다, 그런 생각 들지 않습니까? 이 세상에서 출세하려는 나 자신이 치사스럽게, 추접스럽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뭐 미련 있다고, 뭐 볼 것 있다고?
성신 받은 에스겔이 오늘날 성령 받은 성도하고 판박이에요. 똑같이 갑니다. 성도에게만, “이 세상이 망한다는 그 기쁜 소식을 너희들에게만 알려줄 게. 너희들은 주저하지 말고 망하는 품새를 가져라. 품새를 보여라.” 하는 겁니다. ‘교회, 이 교회 망합니다.’ 이런 마음가짐을 가지고 그 교회 나가라 그 말이지요.
‘이 교회 곧 망합니다. 그게 몇 년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우리 식구 망합니다. 벌써 아버지 망했고요, 엄마 망하고, 그다음 내 차례고요.’ 신나지 않습니까? 자기 것을 가지면 그만큼 매사가 공포스러워요. 자기 것을 챙기면. 집 나간 귀신도 불러모으는 거예요. 내 것이 있으면.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 ‘소박하나마 이거라도 있어야 되겠습니다.’ 이러면 이제 귀신 열댓 마리 달려드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주님으로 하여금 우리가 망각한 우리의 죄를 주께서 기억하사 무엇 때문에 내가 이처럼 십자가 고난받았는가를, 그 환난과 고난 가운데서 우리에게 주님의 자기 기억을 되새겨 주면서 우리가 챙기던 나의 소박한 기억이 얼마나 죄스럽다는 것을 들춰내십니다.
‘나 이 교회 한 2백 명 하고 싶어.’ 하는 그런 것들이, 있는 교인 확 나가고 나면 ‘아, 2백 명이 아니고 그때 12명 있었던 것이 그렇게 귀한 일이었구나.’ 나의 죄를 들춰주는 거예요. ‘한 달 수입 한 2천만 원 되었으면 좋겠다.’ 그게 기초연금 받아보면 ‘야, 25만 원이 이렇게 귀한 거구나.’
에스겔 4장은 그렇게 하고, 에스겔 12장에 보면 이번에는 이삿짐을 지고 갑니다. 그런데 그냥 가지 않고 12장 4절부터 죽 보면 이삿짐을 지고 문이 있는데 문으로 안 가요. 성벽에 구멍을 뚫어요. 이 말은, 너희들이 장차 너무 급해서 이삿짐 지고 그것도 밤중에, 정문은 적군이 막고 있으니까 억지로 두꺼운 성벽을 뚫어서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도망치듯이 너희들의 미래는 그렇게 될 것이라는 것을 선지자가 앞당겨 보여주는 겁니다.
“너는 낮에 그 목전에서 네 행구를 밖으로 내기를 이사하는 행구 같이 하고 저물 때에 너는 그 목전에서 밖으로 나가기를 포로되어 가는 자 같이 하라 너는 그 목전에서 성벽을 뚫고 그리로 좇아 옮기되 캄캄할 때에 그 목전에서 어깨에 메고 나가며 얼굴을 가리우고 땅을 보지 말찌어다 이는 내가 너를 세워 이스라엘 족속에게 징조가 되게 함이니라.”(에스겔 12:4-6)
이게 바로 환난과 고난이에요. 모든 것이 비본질적이니까, 엉터리니까, 거짓이니까 그 앞에 있는 본질적인 것을 선지자를 통해서 보여주듯이 오늘날 성도의 삶을 통해서 성도의 특이성을 통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그다음에 에스겔 24장, 이것은 아주 기가 막힙니다. 24장 15절부터 보면, 하나님께서 에스겔 선지자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희 집에 사랑하는 사람 있지?” “예, 제 아내입니다.” “그 아내 오늘 밤 죽는다.” 뜬금없지요. “인자야 내가 네 눈에 기뻐하는 것을 한번 쳐서 빼앗으리니 너는 슬퍼하거나 울거나 눈물을 흘리거나 하지 말며”
참 비정한 남편 만들어놨습니다. 아내가 죽었는데 슬퍼하거나, 울거나 그리고 장례 치른다고 장례 음식 먹거나, 장례식 치를 때 어떤 차림이 있어요, 옷차림 그런 것 하지 말라. 이 말은 뭐냐? “네가 죽어도 억울할 잽이 안되는, 억울할 가치조차 없는 마땅히 죽을 죽음을 이 하나님 내가 너에게 시행할 것이다. 뭐가 아깝다고 뭐가 아쉬워서 우냐?” 그 말이지요. 아직 너한테 미련 있나, 이 말입니다. 아직도 소박하나마 뭐 챙길 게 있나, 그 말입니다.
그전에 네 비본질적 자체가, 그 자체가 하나님 보시기에 정녕 죽으리라, 대상이 되었는데 하나님에게 네가 대든다는 식으로, 하나님께 네가 뻗댄다는 식으로 “왜 저를 죽이십니까?” “뭐야, 네가! 너 뭔데?” “저는 하나님의 창조를 믿습니다.” “그러니까 네가 내 편지를 안 읽었잖아. 그러니까 너는 하나님하고 직접 상대하려고 했지. 예수님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십자가가 왜 벌어졌는가를 네가 모르고 있잖아.” 그걸 따지는 거예요.
인간의 모든 문제는요, 줄 것 주겠다는 거예요. ‘에이, 더러워라. 더러워서 헌금 해버리자. 줄 것 주고 나머지 자기 이윤 챙기듯이 그것만 챙기면 하나님도 나한테 닦달 낼 필요 없겠지. 줄 것 줬으니까. 십일조 했겠다, 헌금했겠다, 기도했겠다, 전도했겠다, 하라고 하는 것은 다 했으니까 이것만큼은 손대지 마라, 제발. 모든 것은 좋지만 내 자식만큼은, 내 외손자 외손녀 만큼은 손대지 말라.’ 이런 감추지 못하는 타고난 선악 체계의 길들여진 그런 모습을 우리가 보여줍니다.
그래서 진짜 아내가 죽었어요. 그러니까 만약에 그날 밤에 계시받고 아내가 죽었다면 그때 여러분이 에스겔 선지자라고 간주하고요, 딱 두 개예요. 1번, 기쁘다. 2번, 슬프다. 아니 안 묻겠습니다. 강의 시간이 아니기 때문에 안 묻겠습니다. 3번은, 놀랍다. 정답은 3번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냐?’ 말씀은 내가 지킬 때 현실화 되는 것이지 어떻게 내가 지키기 이전에 먼저 지켰다는 완성된 것, 내가 안 지켜도 완료된 것을 어떻게 선물로 그냥 안겨주느냐는 거지요. 그게 바로 사랑이에요, 사랑! 그게 사랑입니다.
내가 사랑하지 않아도 사랑했다는 그 사실, 이 엄청난 일방적인 조치, 우리는 그것 때문에 그 가치를, 그 사랑의 가치를, 우리는 내 것 때문에 다 말아먹은 거예요. 그동안 내 것 지키고 내 것 키운다고, 내 행복 때문에, 남들 앞에 성공한 사람으로 인정받으려고 하는 그것 때문에.
목욕탕에 애 데려가는 엄마가 두 살 먹은 애한테 “여기는 옷 벗고 들어가는 거야. 옷 벗자.” 할 때처럼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인생을, 내가 하나님이 주신 그 귀한 인생을 우리 스스로 망쳤습니다. 망치고, 긴장했고, 아슬아슬하고, 벌벌 떨고, 두려웠습니다. 그 공포의 대상이 어디서 오는지도 몰라요. 무조건 무섭고, 무조건 걱정되고, 염려되고, 성경 이 편지에 범사에 감사하라, 항상 기뻐하라, 백날 해도 그것은 남의 이야기고 우리는 우리 자신을 지키는데 평생을 나한테 복무하고 나한테 충성 다 했습니다. 남는 게 뭡니까? 나중에는 그게 유품에 지나지 않는데 그게 불에 태워질 폐기물인데 갈수록 점점 더 중고 돼요.
끝으로 이 말씀 하고 마치겠습니다. 어느 드라마에 보니까 여자가 두 개의 이름을 사용해요 하나는 신금희, 또 하나는 신하리. 신금희, 신하리. <사내맞선>이라는 드라마에 나옵니다. 자기 직장 사장, 재벌 3세인데 이 여자가 속이고 그 사장과 대타 맞선을 나갑니다. 이름이 신하리인데 신금희로 나갔어요.
나중에 재벌 3세가 “뭐냐 너? 신하리야, 신금희야?” 다그치지요.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입니까, 나의 백성, 악마의 백성입니까? 한쪽을 지워야 됩니다. 우리 이름을 지우고 우리는 이제 주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사람,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에 합당한 조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