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 4:5-6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너희가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뇨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야고보서 4:5-6)
천국은 싸움과 다툼이 없는 나라입니다. 왜 그럴까요? 천국에 들어가면 다들 온유해지고 남에게 양보할 줄 아는 사람이 되기 때문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천국은 모든 것이 충족된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충족된 나라라는 것은 세상에서 소원했던 것들이 넘칠 정도로 주어졌다는 뜻이 아니라, 소원하고 사모하는 것이 달라졌다는 뜻입니다. 즉 세상의 것을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던 마음이 하늘의 은총에 모든 가치를 두고 귀하게 여기는 마음으로 달라졌다면, 그런 마음으로 천국에 거한다면 원하는 것이 모두 충족된 마음이기 때문에 갖기 위해서 싸우고 다투는 일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상과 똑같이 싸움과 다툼으로 살아간다면 그것은 원하는 것이 하늘의 것이 아니라 땅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세상과 벗이 되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의 것을 사모하고 세상의 것으로 위로를 얻고 힘을 얻고 싶어 하는 그것이야 말로 세상을 벗으로 삼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우리를 두고 5절에서는 “너희가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뇨”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구절을 보면 마치 하나님이 신자를 성령이 시기하도록 까지 사모하신다는 뜻으로 생각되기 쉬운데 성령이 하나님을 시기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구절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사모하시는 그 마음이 얼마나 큰가를 뜻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셨습니다.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의 것으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피로써 우리를 구속하시고 하나님의 소유로 삼으셨기 때문에 성령을 보내서 인치시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백성으로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 성령을 보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성령이 거하는 하나님의 전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사모하시는 것은 그냥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은혜로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하나님의 백성된 신자를 사모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과 벗되어 살아가는 자를 사모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것을 소망하면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을 사모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형편은 그렇지를 못합니다. 오히려 세상과 벗이 되어서 하나님의 원수의 길만을 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지 않겠습니까? 즉 세상과 벗되어 살아가는 것을 두고 시기하신다는 뜻입니다. 그토록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은총을 기뻐하고 감사하는 자로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철저히 외면해 버린 채 오직 세상에서의 내 인생만 생각하고 관심두면서 세상과 벗이 되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우리에게 여전히 은혜를 베푸십니다. 이것을 더욱 큰 은혜라고 말합니다.
6절의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고 말씀하는 것을 보면, 멸망에 있는 자를 예수님의 피로 구속하시고 하나님의 소유로 삼으신 은혜로 은혜가 종결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를 구속하신 은혜 외에 또 다른 은혜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계속되는 은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죄인된 우리를 구속하신 은혜로 끝난 것이 아니라 은혜를 배반한 채 세상과 벗이 되어 하나님의 원수로 살아가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붙들어 주시고 말씀으로 깨닫게 하시고 징계하시면서 끝까지 하나님의 백성된 자리에 붙들어 놓고자 하시는 은혜가 우리를 살린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더 큰 은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피의 은혜를 주시고 그 피를 믿고 구원 얻는 것은 우리의 책임으로 맡겨 놓으셨다면 생명에 이를 자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의 은혜의 가치를 알아볼 자가 아무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세상의 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살아가면서 자신들의 악함을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에서 하늘의 은혜를 깨달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은혜를 주시고 또 다시 우리의 악함까지 다스리시면서 하늘의 은총을 깨달아 알 수 있는 자리까지 이끌어 가시기 위해 성령을 보내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두고 은혜 위에 은혜라고도 말하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34:14절을 보면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 하는 질투의 하나님임이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질투의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것은 질투라는 인간적 속성이 하나님께도 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이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시는 분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른 신을 섬긴다면 심판을 해서라도 기어코 하나님만 섬기는 백성으로 만들고야 말겠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고 참으로 강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사랑이 지금 우리들을 붙들고 있기 때문에 우리 마음이 그나마 예수님에게서 끊어지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무엇을 의지하겠습니까? 나를 지금 신자의 자리에 있게 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지 세상의 그 무엇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6절에서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말합니다. 교만한 자란 주를 의지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다른 힘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어떤 힘도 죄인된 우리를 생명에 도달하게 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힘을 의지하는 것이야 말로 교만이 아닐 수 없습니다. 따라서 겸손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만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신자의 마음에 점점 크게 부각되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세상에 원하는 것을 얻는 값싼 은혜가 아니라 아무것도 아닌 나를 사랑하는 독생자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하시고 백성으로 삼아주신 그 은혜가 크게 부각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신자의 마음은 자연히 하나님을 향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런 은혜를 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피로써 족함을 누리고 싶어 하기보다는 여전히 세상의 것으로 마음의 족함을 누리고 싶어 합니다. 그러니 싸움과 다툼이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교회 역시 싸움과 다툼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교회에서 예수님에게만 마음을 두고 하늘의 것만을 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모여서 하늘의 것만을 구하고 하늘의 것으로만 감사하고자 한다면 싸울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교회에서의 싸움과 다툼은 세상과 다를 바 없이 자기 이름을 높이고 자랑하고자 하는 욕심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이 아니라 자기가 중심에 있기 때문에 타인보다 높아지기 위한 싸움이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의 것으로만 감사하고자 한다면, 이미 예수님의 피의 은혜로서 원하는 모든 것들은 충족될 것입니다. 즉 부족함이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미 부족함이 없는데 또 무엇을 채우려고 하겠습니까? 예수님으로 채워진 심령이기 때문에 자신의 높아짐으로 자기를 채우고자 하는 욕망은 이미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싸움이 있을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이것을 천국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백성을 사모하십니다. 그래서 세상과 벗되어 살아갈 때 성령이 시기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눈만 뜨면 여전히 세상이 크게 보이는 우리로서는 하나님의 더욱 크신 은혜를 사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은혜가 우리를 생명에 있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