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인의 성씨(姓氏) ♣
조선시대때는 만백성을 양반, 중인, 양인, 천인의 네가지 신분으로 구분하였지요
이러한 신분을 양천(良賤)과 반상(班常)으로 나누었는데 양(良)신분에 속하는 계층은 양반, 중인, 양인이었지요 이들은 과거에 응시하여 관직, 진출, 조세나 국역의 의무를 담당하는 자유민이었어요 천(賤)신분은 개인이나 국가기관에 소속되어 천역을 담당하는 부자유민이었는데 여기에 속하는 대표적인 계층은 노비였지요
반상(班常)은 신분상으로 지배자와 피지배자로 크게 구별하는 용어였어요 조선사회를 양반관료사회라고 하듯이 양반은 여러가지 측면에서 온갖 특권을 누리고 있었지요 따라서 반상의 반(班)은 그야말로 양반만을 의미하였고 상(常)에는 양인과 천민 등이 모두 포함되었지요 여기서 중인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예외적인 신분이었어요
조선시대의 양반은 좁은 의미로는 문반(文班)과 무반(武班)의 관직을 가진 사람을 뜻하였지요 중인은 양반과 양인의 중간에 위치한 신분인데 상급지배신분인 양반에 비하면 중인은 하급지배신분에 해당하지요 양반이 천시하던 기술직과 잡직은 중인의 세습직이었으며 또한 중인에는 서리, 장교, 향리 등이 속하였고 양반의 첩의 자식인 서얼(庶孼)도 중인으로 취급되었지요 또 지방관아의 아전(지금의 지방공무원)들도 이 중인에 속한 신분 이었어요
양인은 평민 양민 상민 상인 서민 서인 등의 용어와 함께 쓰였으며 조선사회의 근간이 되는 계층이었지요 양인의 대부분은 농민이었고 상인도 있었지요 원칙적으로 양인은 과거를 통해 양반으로 신분이 상승할수도 있었으며 양인 농민들은 국가에 대해 조세, 공물, 군역 등의 부담을 졌어요
천인은 가장 아래 있던 신분으로 천민으로 불리며 대부분 노비였지요 또한 백정, 광대, 무당, 기녀 등도 여기에 속하였어요 그래서 7천(七賤)이란 말이 있는데 이는 노비ㆍ기생ㆍ무당ㆍ백정ㆍ영인ㆍ혜장ㆍ사령ㆍ승려를 일곱가지 천민(賤民)이라 했지요
노비는 소유주에 따라 공노비와 사노비로 구분되었어요 공노비는 관아에 소속되어 있는 노비이며 사노비에는 솔거노비와 외거노비가 있었어요 사노비는 주인의 의사에 따라 매매, 상속, 증여되는 재산으로 취급되었고 주거지를 옮길 자유도 없었지요 노비는 그 신분이 세습되었으며 부모 중 어느 한쪽이 노비이면 그 소생은 모두 노비가 되었어요
그런데 원래 천민은 옛날부터 성씨가 없었지요 그냥 돌쇠,떡쇠, 끝세,마당쇠, 개똥이, 향단이,삼월이 등 이름으로만 불리웠는데 조선말기부터 시작하여 일제강점기때 까지 천민들도 성씨를 가지게 되었어요 그 천민의 성이 바로 "천방지축마골피(千方池丑馬骨皮)"라 알고 있지요 그럼 그때의 천민들은 위의 7가지 성 밖에는 가질수 없었다는 이야기가 되지요
그런데 갑오경장 이후 처음으로 성씨를 만들때에 돈있는 사람은 돈으로 성을 사고 양반 집에 속한 이들은 주인의 성을 갖기도 했지만 이때 그도 저도 없는 천민들은 자신의 직업에 따라 성씨를 만들기도 했다 하지요 그래서 무당은 천(天)씨로 목수나 미장은 방(方)씨로 지관등 요즘의 장의사는 지(地)씨로 소잡는 백정은 축(丑)씨로 말잡는 백정은 마(馬)씨로 뼈(고리)백정은 골(骨)씨로 가죽백정(갓받치)은 피(皮)씨로 성을 가지게 되었는다 하는데 이것을 7대천민을 일컫던 천방지축마골피(天方地丑馬骨皮)의 백정 성이라 하였지요
그러던 것이 1909년 일제의 민적(호적법)이 시행되면서 발음이 비슷한 양반 성으로 옮겨감으로 해서 아래와 같은 성씨가 되었다는 설도 있어요
천(天)씨는 기존의 양반성인 천(千)씨로 방(方)씨는 기존의 양반성이 있어 그대로 지(地)씨도 지(池)씨로 축(丑)씨는 추(秋)씨로 마(馬)씨도 기존 중국성과 국내양반성이 있어 그대로 골(骨)씨는 갈(葛) 또는 고(高)씨로 피(皮)씨는 기존 중국성과 국내양반성이 있어 그대로 이렇게하여 대한민국 천민들은 모두 양반들의 자손이 되었다고 하지요
또 일설에 따르면 조선말과 일제시대때 성씨도 없던 상,천민들이 흔하디 흔한 양반성씨(김,이,박)로 가장 많이 호적을 신청해 가지면서 그 많던 천민들이 하루 하침에 모두 없어지고 조선사람 모두가 양반들이 되었는데 혹 양반으로 숨어든 것이 들키지나 않을까 비교적 숫자가 적은 양반가문을 천민이였다고 유언비어를 퍼트린 것으로 보여진다 하는군요 원래 천방지추마골피(千方池秋馬葛(高)皮)는 옛날부터 존재하는 양반 성씨 였어요
일제가 성이 없던 밑바닥 천민(노비)계층에게 그들이 신청하는 대로 유명성씨의 호적을 만들어 준것은 조선의 양반성씨들이 씨족별로 단결하는 것을 방해하고 노비를 양민화시켜 수탈의 대상을 늘이기위한 식민통치정책의 일환이였다고 하지요
그럼 여기서 (천방지축마골피)에 대하여 이 성들이 과연 천민의 성인가를 각 성별로 유명한 인물과 함께 객관적으로 짚어 보기로해요
천(千)씨 - 정유재란때 귀화한 중국계 성씨인데 우리나라 족보를 보면 70%가 자신의 시조를 중국인으로 하고 있지요 하지만 실제로 중국에서 귀화한 중국계는 그리 많지 않다 하네요 대개 명나라가 망하는 시기에 주로 많이 조선으로 들어왔는데 "충장공 천만리"는 정유재란후 조선에 귀화하여 오늘날 한국의 천(千)씨의 시조가 되신 분이지요
방(房)씨 - 고구려에 귀화한 중국인의 후손 or 고구려인의 후예(?) 시조 방준( 房俊 )이 당나라에서 고구려 말기에 귀하하였다고 전해지며 실제 시조(중시조)는 고려시대 벽상공신의 작위를 받은 "방계홍" 부터라고 하지요 또한 극소수이지만 방(龐)씨와 방(邦)씨도 있는데 이는 모두 명나라 건국기와 멸망기에 귀화한 중국계라고 하는군요 유명하신 분으로 방유령(대사헌·이조참판·경상도 관찰사)이 있지요
지(池)씨 - 천년 무인(武人) 명문세족인 이중(二重)성씨이지요 태조왕건시대에 시조 지중익이 어(魚)씨성을 하사 받아 지씨와 어씨 두 개성씨로 고려와 조선을 이어온 성씨이며 지씨와 어씨는 문관보다는 무관쪽으로 고려와 조선을 이어 천년세도를 누린 성씨이지요 특히 세조시대 만주의 호랑이로 불린 "어유소장군"이 유명하지요 지용수(고려 일등공신·충무공)는 고려 일등공신 이구요
마(馬)씨 - 고구려 동명성왕의 후손이지요 물론 동명성왕의 직계손이 아니라 동명성왕과 같이 남하한 신하 마려( 馬黎 )의 직계손이지요 마려는 후에 온조왕과 함께 서울(위례성)로 남하하여 백제를 건국하기에 이르지요 아마 고구려 백제의 실질적인 건국자이며 이 두나라의 "정도전"인 셈이지요 물론 중국 한대(漢代)의 전설적인 명장인 복파장군 마원(馬援)의 후손임을 자처하는 성씨도 소수이지만 있다고 하는군요 마천목(조선 개국공신·영의정)이란 분이 유명하지요
피(皮)씨 - 춘추시대 유명한 협객 "번중피"의 후손이지요 협객하면 무협지의 무사를 연상하는데 실제 협객의 시조는 "공자"나 손자병법의 "손자"처럼 춘추전국을 돌아다니며 사상과 지혜를 파는 국가를 초월한 전략가들이었지요 "번중피"도 당시 "손자"만큼이나 유명한 전략가였어요 그 분의 이름 맨 뒷글자를 따서 성을 만들었는데 족보에는 송나라시대때 고려에 귀화하였다고 전해지나 아마 "번중피"가 워낙 유명한 분이기에 고려의 호족(귀족)이 그분의 이름을 빌려와 성을 만들었다 하네요 피득창(조선 개국공신·병조판서·전라도 감사)이 유명하지요
그리고 축씨와 골씨는 현재 한국 성씨대사전에도 없는 걸로 알고 있어요 그런데 '축씨와 골씨'를 '추씨와 고씨'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는데 추(秋)씨는 원래 중국 성씨인데 고려 인종때 추호(湫胡)가 가솔을 이끌고 함흥 연화도(蓮花島)에 정착하여 한국 추씨의 시조가 되었지요 추씨 문중에는 고려 충선왕 2년에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오른 추적(秋適)이라는 명신이 유명하지요 추적(秋適)은 국학 경사(經史) 교수로 있을때 명심보감(明心寶鑑)을 편찬한 편찬자이기도 하지요
또한 고(高)씨는 크게 고구려계와 탐라계로 나뉘는데 고구려계는 고구려를 건국한 고주몽(高朱蒙)이 시조이고 탐라계는 탐라개국설화에 등장하는 고을나(?乙那)가 시조이지요
위와같은 사실로 미루어 "천방지축마골피"혹은 "천방지추마고피"가 천민 이라는것은 근거없는 유언비어이지요 이들 성씨 중 일부(축씨와 골씨)는 실제 존재하지 않거나 중국에서 귀화한 성씨일수도 있으나 나머지 성들은 조선시대 명문가로서 다수가 관직에 임용되었기 때문에 천민의 성씨라는 것은 근거없는 낭설에 불과 하지요
이 성씨들은 인구는 적지만 천만리(임진왜란때 전공을 세운 명나라 장수·조선 귀화) 방유령(대사헌·이조참판·경상도 관찰사) 지용수(고려 일등공신·충무공) 마천목(조선 개국공신·영의정) 피득창(조선 개국공신·병조판서·전라도 감사)등은 유명한 분들이지요
이처럼 천민이라 일컷는 위와같은 성씨들은 높은 관직에 오른 인물들이 많았고 인구 대비 과거 급제자도 많았다 하네요
다시말해 조선시대때에 성씨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양반 명문가 집안이었음을 뜻하는 것이지요 천민은 기본적으로 성씨가 없었으며 이에 대한 기록 또한 전무 하지요 천민이 성씨를 가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였기 때문에 특정 성씨를 가리켜(천방지축마골피) 천민이라는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 하는군요
이러한 낭설은 신분제가 폐지되고 1909년 민적법이 시행됨에 따라 "김이박최정" 등 흔한 성씨로 위장할수 있게된 노비와 천민들이 '천방지축'(天方地軸·허둥지둥 함부로 날뜀)으로 날뜀에 착안하여 입지보전책으로 퍼트린 유언비어 였다는것이 정설이라 하는군요
아무튼 해방이후 문란해진 족보의 정통성을 찾기위해 각 문중마다 일제시대 이전의 족보를 따져 순수족보를 가리려고 본보(本譜)와 별보(別譜)로 구분하였는데 갑오경장 이전 족보에서 가계가 확인 불가능한 것을 별보라 칭하여 천시 여겼으며 별보의 분량이 본보의 몇십배가 넘었다고 하지요
그후 6.25동란으로 인해 모든 족보가 불에 타거나 유명무실해 짐에 따라 1955년부터 60년사이에 각성의 족보가 대량으로 다시 만들어졌는데 이과정에서 본보와 별보의 구분이 없어지고 지금의 족보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하지요
다시한번 더듬어 보면 조선시대 중기때만해도 성씨가 있는 양반은 10%도 안되었지요 그런데 90%가 넘던 그 많은 양민과 천민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요? 우리나라는 어느날 부터인가 양민과 천민은 없고 모두가 양반만 있는 나라가 되어 버렸어요 그래서 우리나라 성씨의 90%는 가짜라는 말이 나오고 있는 것이지요
조선후기 족보를 위조하거나 1909년 일제가 민적법 시행시 성씨가 없던 상,천민들에게 원하는 성씨의 호적을 다 만들어 주었고 그 때 가장 인기 있던 성씨가 흔하면서도 유명한 "김이박 등등"이었다 하는데 그래서 김이박이란 성씨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성씨가 되었다고 하지요 이는 김이박이란 성을 가진 사람들이 아무리 자식을 많이 낳는다 해도 생리적으로나 유전법상 도저히 일어날수 없는 일이라 하지요
하루아침에 전 백성의 90%가 넘던 양인과 천민이 사라진 나라!! 모두가 하나같이 양반만 있는 나라!! 이것이 우리가 살고있는 이나라의 현실이지요
아무튼 지금은 세계 어느나라나 천년을 이어온 왕권이 무너지고 화성을 탐사하는 우주시대 일진데 하찮은 양반 쌍놈을 가려 무엇하겠냐마는 그래도 허위와 진실은 알아야 하겠기에 긴글 올렸사오니 두루 살피시고 혜량하여 주시기 바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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