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인봉 시인의 『바람은 혼자 울지 않는다』, 어떻게 읽을 것인가?
- 完讀을 위한 사전 필독 문학철학서 3권
『바람은 혼자 울지 않는다』의 평설을 어눌하게 정리했지만 솔직하게 아쉬움이 남는 이유는 무엇일까? 평론을 공부하고 있는 입장에서 이번 시집은 욕심을 내보고 싶은 명편이었기도 하였지만, 다음과 같은 두가지 독창적인 구조를 지니고 있기때문이다. 1) 성경의 성령 구원, 노장사상( 진공묘유), 빈 멘스필드의 양자역학(파장과 입자이론)및 불교의 공즉색(空卽色)의 철학적 인식을 담아낸 점 2) 국내 수많은 바람의 시학을 다루었던 작품들과는 결을 달리하여 유일하게 기독교 성령을 시정의 본바탕으로 종교철학과 시문학과의 융합을 시도하고 있는 점이다. 이러한 시집의 독창성을 감안할 때 제대로 읽어내가 위해서는 반드시 아래 소개하는 관련 문학철학적 명저들을 정독할 필요가 있다. 요점만 서평형식으로 정리하여 시집을 읽어내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悳泉>
1. 『문학과 종교』
저자: 발터 옌스 / 한스 큉
1. 개요
“모호성, 양면성, 불화스러운 일치, 상호 조명, 변증법이 하늘과 땅 사이에 뻗어 있는 터인즉, 긴장스럽고도 두려운 관계.” 문학과 종교는 비록 불편할 수도 있는 관계이지만, 서로를 알지 못한다면 공멸(共滅)할 수도 있다는 인식을 저자들은 갖고 있다. 이러한 양자의 관계는 근대 계몽주의 이후 생겨난 것으로 파악되는데, 큉은 그것이 “한때 여왕 같은 세도를 누렸던 종교가 이제 하녀, 별 권리 없는 국외자”가 됨으로써 유발된 것으로 본다. 서양의 경우 종교, 즉 기독교는 근대 이후 경홀히 취급되다가 무시되고 경멸당하고 마침내 추방되는 형세에 이른다. 그러나 세속의 무종교성 때문에 종교의 수명이 다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18세기 낭만주의에 의해 새롭게 깨어났다고 그는 이해한다. 영성이탈은 종말로 이어지지 않고 영성쇄신으로 다시 나타났다는 것이다.
근대의 개막과 함께 등장한 파스칼은 수학자이자 발명가이자 사업가로, 근대의 정신을 탁월하고도 독창적으로 대변하는 인물이었지만, 사후에 발견된 『팡세』는 “기독교의 진리성”을 옹호하는 거대한 호교론이었다. 이렇듯 중세와 근대의 파라디그마를 동시에 지니고 있었던 파스칼로부터 근대의 와해 속에서 등장해 “인간이 신 없이 살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암흑의 세계를 살아가는 것의 의미를 찾아내려 했던 카프카에 이르기까지 각 시대의 귀감적 작가들의 독백을 따라가다 보면, 근대라는 것이 얼마나 다양하게 모습을 바꾸어왔는지 깨닫게 된다. 이 책은 야누스처럼 양면적인 풍부한 대립을 안고 있는 작가들에 대한 탐구를 통해 문학이 얼마나 복잡하면서도 모순적인 가능성을 품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2. 미래의 문학
- 위대한 신학과 위대한 미학의 새로운 결합
오늘날 근대의 각각의 국면을 거쳐 온 위대한 작가들의 목소리는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가? 레싱의 에토스와 비판적 신앙심에, 횔덜린이 선포한 새로운 하느님 이해에, 노발리스의 평화의 비전에, 교회와 국가 속에 존재하는 전체주의와 대심문관에 대한 도스토옙스키의 항의에 더 귀를 기울인다면 세계는 달라질 수 있는가? 또 우리 시대의 문학과 종교의 가치는 어디에 있는가?
문학과 종교는 많은 경우 극심한 경쟁을 벌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참다운 종교, 위대한 문학은 결코 다른 자리가 아니라 같은 자리에 놓여 있음을 이 책은 논증한다. 사제 서품을 받은 신학자이지만 교회의 무류성 교리를 비판하는 등 급진적인 태도를 취하다 가톨릭 교수직을 박탈당한 복잡한 이력을 갖고 있는 한스 큉과 전후 독일의 유력한 문학그룹인 ‘47년 그룹’의 멤버였으며 이후 텔레비전 비평가로서도 활발한 활동을 펼쳤던 소설가 발터 옌스는 각각이 신학과 문학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큉이 신학에 더 비판적인 논리를 펼치기도 하고 옌스가 더 종교적인 태도를 드러내기도 한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문학과 종교가 서로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는 데 공감하며, 이 둘이 새로운 미래에 대한 희망을 주제로 삼는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고 주장한다.
저자들은 미래에 새로운 문학, “위대한 도약”을 감행한 문학이 탄생할 것이며, 그 문학 속에서 위대한 신학과 위대한 미학이 모범적인 방식으로 새롭게 결합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독자들에게도 이 책이 문학과 종교의 관계를 새롭게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기대한다.
2. 『문학과 철학의 향연』
저자: 양운덕 (철학자/고려대철학박사)
1. 존재 물음과 시 짓기
우리는 사고의 벽을 넘을 수 없을 때 시적 언어 또는 예술에 도움을 청하고 시짓기나 예술 속에서 새로운 길을 찾고자 한다. 휠더린은 《빵과 포도주》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내 비록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말해야 할지 모르지만 / 이 궁핍한 시대에 무엇을 위한 시인인가?” 우리 시대가 가난한 시대라면 시인은 무엇을 위해서 시 짓기를 하는 걸까?” 하이데거는 철학적 사고와 시 짓기가 같은 길 위에 있다고 생각했다. “사유하는 자는 존재存在를 진술하고 시인은 성스러운 것을 명명命名한다.” 우리는 사고 자체를 더 잘 배우기 위해서는 시 언어에 주목해야 한다. 시는 단순한 문학작품이나 예술중의 하나가 아니라 진리를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 사고하는 자가 존재를 사고하는 것처럼 시인은 시적 언어로 진리를 잉태한다(p.128)”. 하이데거는 언어 자체가 본질적인 의미에서 ‘시’라고 생각했다. 시는 언어 자체의 본질이 나타나도록 말하는 방식이다. 하이데거는 시 짓기(Dichtung)가 예술의 본질이라고 간주한다. 시의 본질은 진리를 드러내는 것이다. 휠더린은 “시인은 神들을 명명하고 그렇게 명명함으로써 모든 사물을 있는바 그대로 본질本質에 따라서 이름 부른다”라고 주장한다. 시는 존재자들의 존재를 명명하고 존재자들의 진리를 드러내는 본래적인 양식이 된다. 시인은 존재를 건설하는 자이고, 언어를 통해서 존재를 찾는 모험에 참여하는 자이다.
2. 객체를 지배하는 주체
데카르트의 코기토 논제 이래 근대 철학의 중심은 인식에 방점을 찍고 있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존재 물음이 가장 근본적이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를 통해 근대 철학 전체를 전복시킨다. 근대 철학의 사고의 틀, 곧 주체와 객체를 구분하고 주체를 우월한 것으로 보는 주체 중심주의를 극복하려고 시도한다(p.129). 근대철학은 인식하는 주체와 인식되는 대상을 구분한다. 인간은 자신을 우월한 것으로 간주하고 상대를 자신에게 “마주 선것”(Gegen-stanad), 즉 인식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선언한다. 이런 대결 구도에서 주체인 인간은 대상 세계를 인식해서 대상을 자기 목적에 맞게 이용하고 지배한다. 이때 주체는 자신의 인식 틀로 대상을 인식한다. 이 경우 대상이 “존재하는 근거”가 대상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인식하는 근거인 주체 쪽에 있게 된다. 따라서 주체의 인식능력이 세계를 틀짓게 된다. 대상은 주체가 제시한 틀(범주)에 종속된 것, 곧 주체의 인식 조건에 따라 개념적인 대상으로 환원/축소되는 비자립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대상은 더 이상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에 의해서 ‘인식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근대 철학은 인식 주체, 즉 인간을 중심에 두는 휴머니즘이다.
그렇다면 이런 주체성, 즉 인간의 주관적 능력이 세계를 온전히 드러낼 수 있을까? 하이데거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는 주체가 아니라 ‘존재’가 이런 인식을 가능하게 한다고 생각한다(p.130). 만약 존재가 인간에게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는다면, 인간은 대상을 볼 수 없다. 나무를 생각해보자. 주체 중심적 태도는 나무가 인간을 벗어나 그 자체로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무는 인간의 인식 틀에 알맞게 다듬어진 “인식된 나무”로 간주된다. 인간은 “무엇이 인간에게 유용한가”라는 관점에서 대상을 바라본다. 인간은 나무를 볼 때 인간적으로 보고, 나무에서 유용한 면을 찾아낸다. 인간은 그 자신의 관점으로 나무를 “닦달한다”. 이런 태도에는 나무의 본래 모습에는 관심이 없다. 이처럼 인간은 나무를 지배한다. 하이데거는 이런 사고방식을 거부한다. 나무를 그대로 두어야 한다. 인간에게 예속된 나무라는 착한 머슴을 해방시키려 한다(p.131). 하이데거는 주체가 주도하는 인식 틀 대신에 주체가 “존재에 내맡겨지는” 방식으로 존재를 물어보려 한다.
3. “있음은 무엇인가?”라는 이상할 질문
하이데거는 자기 철학을 “존재 물음”(Seinfrage)라고 부른다. 그는 지금까지 존재 물음이 제대로 제기된 적이 없다고 주장한다. 형이상학은 존재론을 다루는데 왜 그는 서양철학이 존재에 대해서 다룬 적이 없다고 주장할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존재(das Sein)와 존재자(das Seiende), 즉 ‘있음’과 ‘있는 것’을 구별해야 한다. 다시 말해 존재 물음은 존재자에 대한 물음이 아니라 존재, 즉 존재자를 존재자이게 하는 존재에 대한 물음이다(p.131) ‘있음’은 무엇일까? ‘있음’은 ‘있는 것들’중의 하나가 아니다. ‘있는 것들’을 있도록 하는 x 이다. 아름다움자체가 뭐냐고 물으면 장미 또는 소녀(아름다움의 사례)라고 답하면 안된다. 있는 것들 가운데 하나를 골라서 “있음은 이것이다”라고 말할 수 없다. 지금 하이데거가 제기한 존재물음은 전통 형이상학에서 물었던 존재자에 대한 물음, 또는 존재자 가운데 어떤 우월한 하나를 찾는 물음이 아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물음이다. 문제는 “존재가 무엇인가”가 아니라 “존재 질문을 어떻게 할 것인가”이다. 새로운 질문이 새로운 시각과 새로운 사고의 길을 마련한다. 하이데거는 답보다 문제를 제대로 제기하는데 관심이 있다. 이 문제가 안내하는 과정을 추적하지만 최종적인 답은 발견할 수 없다. 존재물음은 어떻게 보면 답이 없는 질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기존의 존재자 질문의 불완전성을 보여주는 질문을 하이데거는 던지고 있다. 서양 철학사 전체를 뒤집는 질문에 주목해야 한다. 철학자는 답을 찾는 사람이 아니라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다(p.133). 문학도 예술도 사건과 인물을 보여주는 것이 목표가 아니다. 그것들은 독자에게 그리고 감상자에게 물음표를 던진다. 작가나 예술가가 어떤 질문을 던지는가를 보면 작품을 새롭게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돈 키호테』는 “신이 없는 시대에 인간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을 던진다. 하이데거는 있음과 있는 것을 엄격하고 구별한다. 있음과 있는 것의 차이, 즉 존재와 존재자의 다름을 존재론적 차이라고 부른다. 전통형이상학은 이런 차이를 무시하고 존재자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는 것을 존재로 간주했다. 이때문에 정작 존재는 시야에서 사라지게 되었고 존재는 은폐될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존재자에 매달리다 보면 존재 자체를 망각하게 된다. 존재와 존재자의 차이(존재론적 차이)는 은폐되거나 지워진다(p.134).
3. 『불과 글』
저자: 조르조 아감벤
양립 불가능한 것들의 양립 가능성을 응시하는 조르조 아감벤은 시는 철학을, 철학은 시를 추구해야 한다는 생각을 오랫동안 펼쳐왔습니다. 저자의 그러한 신념이 반영돼 있는 책이 바로 『불과 글』입니다.
조르조 아감벤은 문학이란 잃어버린 신비를 회상하는 장르라고 말합니다. 물론 현실만을 전제로 고립된 현상의 분석에 집착하는 철학과 유희에 집착하는 문학이 존재하지만, 아감벤은 모든 정통한 철학과 문학은 본질적으로 ‘회상’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삶은 소멸─회상의 메커니즘을 벗어날 수 없고, 그러한 인간의 삶을 벗어난 철학과 문학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회상의 순간이야말로 삶을 하나의 신비로 기억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아울러 삶을 신비로 기억할 수 있을 때만 진정한 의미의 회상, 즉 철학과 문학이 가능해집니다.
<책속에서>
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은 할 수 있는 힘의 무위(無爲) 라는 도식에서 해제로부터 비롯된 결과다. 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은 할 수 있는 힘의 내부에 존재하는 저항력이다. 이것이 창작행위의 진정한 능력이며 우리 스스로가 스스로의 무능력을 거머쥘 수 있는 잠재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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