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싶은 친구야
- 백 경 현 -
내 어린 학창시절로 돌아가 나의 곁에 가까이 지냈던 가슴에서 떠나지 않는 친구가 한 명 있다. 기문이는 2학년 때도 나와 한 반이었고 3학년 때도 한 반이었는데 내 자리 앞줄에 앉았었다. 말이 없고 순하여 어쩌면 그렇게 순한 암소같이 얌전했던지 공부는 잘 하지 못했지만 나는 그 친구가 그리도 마음에 끌렸다. 그의 고향은 우리 동네에서 약 2Km쯤 떨어진 덕봉이란 동네였다.
나보다 체격이 조금 컸지만 하도 순해서 그는 싸움도 할 줄 몰랐고 이기고 지는 서열에 있어서는 나도 반에서 중간은 되었고 기문이도 이기는 것으로 알았다. 어느 날 내가 먼저 그에게 시비를 걸었다. 다리를 흔들었는지 그가 앉은 의자가 떨리니까 자연적으로 내 책상이 떨려서 책상으로 그가 앉은 의자를 탁탁 쳤다. 처음에는 말없이 앞으로 당기더니만 내가 그에게 그러지 말라 하고 주먹으로 어깨를 쳤다. 그러더니 그 얌전한 기문이가 내게 하는 말이 “수업 마치고 한 판 붙자”는 거였다. “좋아, 교재원에서 이따 보자”고 해 놓고 오후 두 시간의 수업이 더 지나갔다. ‘덩치가 나보다 조금 더 큰 저 놈을 내가 이길 수 있을까?’ 혹시 지는 날에는 졸업할 때까지 저놈한테 주눅이 들어 살아야 하고 소문이 나면 쪽을 까는 것이었다.
6교시 수업을 파하고 모두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 우리 둘은 인적이 끊긴 교재원으로 갔다. 가방을 내려놓고 거북이 동상 옆에 있는 평평한 곳으로 결투의 자리를 잡았다.
두어 발짝 떨어져서 주먹다짐을 하며 기문이를 노려보았다. 평소에 멍청하던 그의 눈도 독사같이 그때만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먼저 주먹을 날렸다. 거리가 너무 멀어서 그는 쉽게 피해갔다. 다시 내가 거리를 좁혀 들어가는 순간 오른손 주먹을 그에게 날렸다. 그의 눈에 적중했다. 통쾌했지만 한 편으로는 때려놓고도 미안함이 반반 엇갈리는 것은 그가 착한 줄로만 알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반격의 기회를 노리다가 눈이 아픈 모양이었다. 금새 그의 오른 눈이 벌겋게 부어올라 감기고 있는 것이 내 눈에 들어왔다. 다시 내가 여기서 결판을 내려고 주먹을 날리려고 하는 순간 그는 주먹을 내렸다. “ 내가 졌다. 이제 그만하자” 그렇게 백기를 드는데도 나는 혹시나 복수의 주먹이 날아오지 않나 하는 불안감에 경계를 늦추지 않으면서 그의 청을 들어주었다. 그렇게 해서 우리의 결투는 끝이 났다.
교재원 계단을 내려오면서 주먹의 접근거리가 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바짝 붙어서 내려왔다. 넓은 운동장엔 아이들도 보이지 않았다. 운동장 끄트머리 자전거 보관소에 우리 둘의 자전거만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발걸음을 옮기면서 우리는 “내가 미안하다” “아니야, 내가 정말 미안해” 하면서 싸운 것을 서로가 미안해했다. 나는 평생에 그에게 한 방도 맞지 않았다. 서로 악수를 하면서 우리 앞으로는 친하게 지내자고 약속을 했다. 아무도 없는 운동장에 우리 둘만의 눈빛, 그 위로 비둘기 한 마리가 교재원의 소나무를 향하여 우리들의 머리 위로 휙 지나갔다. 평화의 상징이었나? 그 이후로 기문이와 나는 단 한 번도 다툰 일이 없었다. 기문이는 정말로 착했다. 자전거 짐칸에 책가방을 싣고 그제야 우리는 하굣길로 내려갔다. 그는 순순이 승복했고 나의 마음은 그의 눈이 부어 아파할 것에 미안한 마음으로 온통 자전거를 타고 집에 오는 그때까지도, 아니 그날 밤 잠이 들 때까지도 잊혀지지가 않았다. 맞은 것만도 억울할 텐데 맞고 왔다고 아버지께 혼나기라도 하면 어쩌나 하는 마음에 너무도 미안했다.
기문이도 힘은 셌지만 단지 내가 선방으로 때렸다는 것뿐 힘이 결코 더 센 것은 아니었기에 그날 이후로 나는 늘 그에게 힘의 우위를 점유하고 있었다.
3학년이 된 어느 날이었다. 2학년 때도 2반이었는데 3학년이 되어서도 2반에 함께 배정이 되어 같은 반에서 공부하게 되었다. 오전 수업을 마치고 즐거운 점심시간, 우리들은 고픈 배 채우려고 얼른 도시락을 꺼내어 책상 위에 놓았다. 이제 막 먹으려고 하는 순간 반에서는 노는 시간만 되면 꼭 심하게 장난을 치는 못된 놈들이 한 두 놈 있었다. ‘와장창 쨍거렁!’ 아뿔싸, 그만 기문이의 책상을 치고 그 맛있는 꽁당보리밥이 발가벗겨진 게 아닌가? 어쩌면 좋아. 뒤에서 현장을 생생하게 목격한 나는 안타까움에 그가 불쌍해서 어쩔 수가 없었다. 하지만 걱정도 잠시 기문이는 튕겨나간 도시락을 얼른 집어와서는 흩어지지 않은 직사각형의 네모진 밥을 얼른 덮더니만 젓가락을 밑둥에 받쳐 다시 담아 올렸다. 그놈들이 미웠다. 쥐새끼 콩만한 놈들이 장난을 쳐 놓고는 미안하단 말도 없이 멀뚱하니 바라보다가 복도 쪽으로 사라져 버렸다. 기문이는 그 밥을 그대로 먹었다. 그때 그 시절 우리들의 주머니는 늘 비어 있어서 동전 한 푼 넣어가지고 다닐 형편도 안 되었을 뿐더러 빵 한 개 사먹으려 해도 거금 이십 원이 투자되어야 했다.
지금으로부터 꼭 33년 전의 일이었다. 어쩌다가 할머니한테 돈 10원을 받아서 하굣길에 나서는 정문 앞 가게에서 구워 파는 국화문양의 풀빵 열 개를 사가면 할머니께서는 얼마나 맛있게 나눠먹었는지 모른다. 눈물겹도록 맛있던 국화빵, 그 풀빵이 지금도 생각난다.
기문이는 나만큼 공부를 그렇게 썩 잘하지는 못해도 그만큼 온순하고 착한 친구는 이 세상에서 만나보질 못했다. 나는 그래도 늘 10등 안에는 들었고 문제은행 모의고사 때는 360명 중의 내노라 하는 반에서 1-2등 하는 친구들 제치고 전교 3등까지 종종 하곤 했다. 교실 바닥의 먼지 묻은 그 밥을 지금 만약에 그렇게 통째로 쏟아진다고 했을 때 누가 다시 엎어진 밥을 주워 담아 먹겠는가? 대한민국 우리나라는 참 먹을 것이 많다. 2006년 가을, 유럽연수를 다녀왔을 때에도 난 느꼈다. 우리보다 훨씬 잘사는 나라들도 먹을 福은 우리나라만큼 못하다는 것을 느꼈다. 엎질러져 눈물 젖은 꽁당 보리밥을 먹으면서 기문이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우리 같으면 이를 갈면서 도시락을 엎지른 그 놈들을 골려주겠노라 복수의 칼을 갈았을 만도 하지만 그에게서 그렇게 온순해도 결과적으로는 살아가는데 남부끄럽지 않다는 사실이다. 재 대구 중학교 동창회 때 딱 한 번 그가 식구들을 데리고 내려왔었다. 순진함은 그대로였다. 그래도 오늘밤 그 친구가 보고 싶다.
33년이 지난 요즈음도 언젠가는 그 친구한테 찾아가서 그 시절 얘기를 나누면서 맛있는 거라도 친구한테 사주고 싶다. 아니 꼭 사주고야 말 것이다. 기문아, 이 밤 네가 보고 싶다.
형편이 좀 나아졌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구릿빛 그 얼굴이 요즈음은 좀 나아졌는지, 또 그 투실투실한 두 손은 어떤지 다시 한번 잡아보고 싶다.
많이, 아주 많이도......
- 멀리서 너를 보고 싶은 친구 경현이가 -
첫댓글 학창시절 한만이였던 친구를 그리며 쓰신글 잘 읽었습니다. 친구분 꼭 만나셨어 그동안 쌓아논 회포를 다 푸시길 바라면서 옛 추억 을 떠 올리시며 긴글 쓰시느라 수고 많이 하셨구요 가족과 함께 즐거운 추석명절과 희망찬 10월 되세요.^*^
긴 글 읽어줘서 고맙습니다. 명절때는 친구들도 만나세요.
중학시절에 있었던 한 단편을 감동깊게 썼네요. 그 때 그 친구를 생각하는 마음이 읽는이들로 하여금 또다른 생각을 불러일으킵니다. 온순하고 착하기만 했던 그 친구는 분명 어디선가 행복하게 살고 있을겝니다. 함께 만나 지난이야기 나누며 소주라도 한잔 하면 참 좋은 시간이 될 것 같습니다. 백경현님. 아래 사진은 소록도 여행사진입니까? 참 멋지십니다.
작년에 소록도 봉사활동 가서 찍은 사진인데요, 소록도교회엔 한센병 장로님 집사님 성도들만 계셨습니다. 대구서 다섯시간.
학창시절 한반이었던 친구를 못잊어 쓰신 글이군요. 눈앞에 그 시절이 선히 떠오르듯 잘쓰셨군요. 저도 이글을 읽고 학창시절의 친구를 떠올렸습니다.
생각 해보면 철모르고 껄렁대던 그 시절이 나름 우리의 인생에서 제일 순수했던것 같네요.. 그 순수하던 마음과 그 좋은 친구들 지금은 다 어디로 갔는지~~
싸움하던 그 친구가 그래도 제일 보고싶은 것 같네요. 좋은 추억 만들어 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