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 오늘은 바쁜 날이다. 잠깐이지만 환경도 주제로 끼는 날이다. 과연 하늘은 쾌청하다. 아침 먹고 방으로 오르는데 호텔 종업원이 은근히 접근한다. 시가를 사라는 거다. 오늘 시가 가게로 갈 텐데, 거기보다 값이 싼지, 질이 어떤지 알 수 없어 마다했다. 전환페소를 모으려는 몸짓이 애처롭다. 8시 조금 넘어 생태공원부터 향했다. 생태공원으로 접어드는 길에 링컨 흉상이 보인다. 노예 해방의 상징인물이라 그랬나. 링컨은 단지 표를 위해 노예해방을 역설했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을 텐데. 라틴아메리카 최대의 공동묘지 이름이 하필 콜럼버스란다. 동물원도 있는데 원숭이 몇 마리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동물원도 제국주의의 표상이라는 걸 반영한 걸까.
20분 만에 생태공원에 도착했다. 인구 220만 아바나 시의 중앙을 관통하는 메트로폴리탄 생태공원으로, 공원을 가르는 알멘다레스 강은 말레콘 해협으로 이어진다. 과거 해안에서 산으로 이어졌던 공업지대는 악취가 진동했는데 그곳에 나무를 심어 생태적으로 복원했다고 안내자는 설명한다. 210만 평에 달하는 생태공원은 특별한 시설물이 없이 자연 그대로 복원되고 있었는데, 나뭇가지에서 커튼처럼 바닥까지 늘어진 덩굴식물이 햇빛을 받아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나무를 위해 제거하자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그 식물도 자연의 일부이므로 보전한다고 공원의 담당자는 이야기한다. 높은 나무 위에서 날개를 펴고 깃털을 말리던 독수리가 이방인의 카메라에 응해주었다. 1940년에 개설돼 1995년부터 본격 복원한 생태공원은 40명의 직원으로 관리된다. 배정된 시간 내에 생태공원에 설명을 모두 들을 수 없는 일. 일행 중 생태공원에 관심이 많은 이는 드물다. 시간이 부족해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공원 담당자는 한국과 지속적인 교류를 희망하는데, 약속을 할 수 없어 또한 아쉬웠다. 여기를 찾을 기회가 있을까. 우리는 생태공원의 극히 일부만 보았다. 나머지는 어떤 모습일까. 아쉬움을 접고 시민들이 운영하는 유기농산물 시장으로 갔다.
수십 명의 농부가 가격표를 붙이고 자신이 가꾼 과일과 채소를 소박하게 판매하는 유기농산물 교환시장은 시민들로 북적인다. 얼리지 않은 돼지고기도 보인다. 한 평도 안 되는 매장의 농부들은 뿌듯한 얼굴이다. 이제 혁명기념관으로. 인디오 학살부터 혁명 승리의 환희까지 사진과 유물이 전시돼 있는 공간이다. 한홍구 교수의 관심사가 진작되는 순간이 연속된다. 현재 쿠바에 원주민은 남아 있지 않다. 모두 학살되었다. 타이노 원주민은 상륙한 백인들을 호의적으로 대했건만 노예보다 더한 착취와 재미삼은 살육으로 멸종된 것이다. 당시 원주민의 무기도 전시돼 있다. 끝이 뾰족한 나무 막대기일 따름이다. 그보다 긴 칼 앞에 무참히 도륙된 원주민들은 백인이 퍼뜨린 질병으로 속절없이 죽어나갔다. 혁명기념관은 피델 카스트로의 장정과 무용담, 바티스타 정권 당시의 악랄했던 사회상을 보여주었고, 마지막으로 로널드 레이건과 아버지 조지 부시를 조롱한다.
혁명기념관 밖에 최초의 혁명 전사들이 탔던 자그마한 보트 그란마와 총탄 흔적이 남은 차량 몇 대가 전시돼 있다. 이제 시가 상점으로. 앨 모르 요새 뒤편에 자리잡은 시가 상점으로 갔다. 각양각종의 시가와 쿠바 커피와 쿠바의 명주, 럼을 파는 곳이다. 럼은 저녁 무렵 들릴 아바나 최대의 슈퍼마켓에서 구입하면 될 테고, 일단 커피와 시가를 몇 개를 신용카드로 구입했다. 이어 유기협동농장으로 갔다. 거기에서 농장에서 생산된 농산물이 상에 올라오는 점심도 먹을 참이다.
아파트 근처 쓰레기장에서 아무 기술도 상식도 없는 서너 명의 시민이 1997년부터 시작된 협동농장의 이름은 알라마르. 지금은 3만 6천 평의 넓이에 120명의 조합원이 25가지 채소와 300여 품종의 과일과 화훼를 재배한다. 땅은 국가가 제공하고 생산에 종사하는 조합원은 급료를 받는다고 한다. 우선 밥부터 먹었다. 농장 조합원들은 밥에 팥죽을 부어 간단히 해결하던데, 우리 상은 휘어질 지경이다. 싱싱하기 그지없는 유기농산물 식단은 하나같이 새롭고 이채로우며 맛이 기막히다. 온갖 채소, 밥, 팥죽, 양파, 당근, 바나나, 오렌지, 파타야, 토마토, 그리고 돼지고기까지. 허용할 수 있는 한 배불리 먹고 일어나면서 자꾸 되돌아보게 된다. 남긴 음식이 농부들 보기에 미안한 노릇인데, 두고 가는 마음이 참 아쉽다. 언제 다시 저 음식들과 마주할꼬. 조합원의 투표로 선출된 총지배인의 안내로 농장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기름진 농토에서 자라는 농작물은 건강해 보인다. 가축분뇨를 이용한 퇴비 생산 현장을 보았다. 전혀 냄새가 없다. 인분은 왜 사용치 않을까. 협동농장에 배정된 시간도 짧다.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못해 아쉽기 짝이 없다. 궁금한 점이 많지만 서둘러 나가야 했다. 쿠바가 자랑하는 의과대학을 방문할 순서가 기다린다.
아바나 시 외곽 해군기지를 개조한 ‘라틴아메리카 의과대학’은 시골 병원에 근무할 다국적 의사를 배양하는 곳이다. 경제 여건이 충분하지 않았지만 피델 카스트로의 제안으로 쿠바가 역할을 맡았다. 1998년 지독한 허리케인의 피해를 복구하면서 대도시 이외 인민들의 고통을 감싸안을 의사가 필요하다는 걸 통감했기 때문이란다. 우리를 맞은 의과대학 관계자는 방문하는 한국인이 많았다며 인사를 한다. 국가의 완전한 지원으로 운영되는 라틴아메리카 의과대학은 30개국의 가난한 젊은이가 만 명 가까이 모였다. 500명의 교수와 1000명의 직원이 해마다 1500명 정도를 선발한다. 그 중 미국인 학생도 있다고 한다. 6년 과정을 마치고 자격시험을 통과하면 자국의 시골로 배치되는데 현재까지 5000명 이상의 의사를 배출했다. 자국이나 쿠바에서 전문의 과정을 더 공부할 수도 있다.
질문이 이어졌다. 조용수 관장의 주장이기도 한데, 베네수엘라에 2만 명의 의사가 파견돼 발생한 쿠바의 의료 공백으로 인민들의 불만이 고조되는 현상에 대해 물었다. 대답은 간단했다. 쿠바에 남은 의사로 충분하다는 거다. 나는 질문과 대답에서 이데올로기를 느꼈다. 의사의 부족과 그로 인한 인민의 불만은 통계나 의견을 수렴해 얻은 실체가 아니다. 조용수 관장 주변 쿠바인의 생각일 가능성이 짙다. 무역과 관련된 일을 하는 쿠바인이라면 생활에 여유가 있고 도시인일 터. 그는 시골의 의료사정에 민감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 질문을 받은 의과대학 담당자도 쿠바의 의료 수요를 제시하지 않았다. 의료 공백에 푸념하는 이는 아마 전환페소를 쥔 부자일 것이다. 그들은 인민에 비해 많은 세금을 낼 테고 자신이 낸 세금이 제 나라로 돌아갈 외국인에게 들어간다는 데에 불만을 터뜨렸을 것이다. 쿠바 정부와 대학 측은 그들의 불만을 확 무시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미국의 무역봉쇄 조치로 의약품이 부족한 건 사실이지만 자체 개발하거나 자연 의약품을 연구해 극복한다는 담당자는 관심을 보여준 우리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라틴아메리카 의과대학의 일정 역시 갈증을 느낄 정도로 짧았다. 이제 체 게바라의 딸 알레이다를 만나러 가야 한다.
복잡한 아바나 구시가지 골목을 요리조리 걸어 찾아간 곳은 체 게바라 연구센터. 차별과 갈등이 만연한 세계에서 체 게바라의 혁명사상이 아직 유효하다고 믿고 1990년에 시작한 연구센터다. 센터장은 체 게바라의 두 번째 부인의 첫딸로, 중년에 접어든 그는 아버지를 빼닮았다. 첫 부인과 그 부인이 낳은 딸은 사망했으며 자신은 쿠바인이라고 말하는 알레이다는 현직 소아과 의사다. 알레이다는 다양성과 개성을 존중하고 서로 의존하는 사회를 꿈꾸며 센터를 운영하는 듯하다. 체 게바라의 사상보다 아이콘이 상업적으로 유통되는 현상에 대해 물었더니 자본주의 상업성에 대처하기 어려움을 실토하고 출판으로 체 게바라의 사상을 전파하려 노력한다면서 몇 권의 책을 우리에게 전달했다. 궁극적 평화를 위해 자급자족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알레이다는 사회의 기초가 되는 보건과 교육과 경제가 건강하기 위해 사회에 환원하는 교육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어려서 헤어진 아버지의 기억은 희미하지만 어머니로부터 아버지의 사상을 배웠고, 연구하면서 벅찬 감동을 받는다며 아버지에 대한 무한 존경과 자부심을 표출한다. 이어 “아버지는 자식의 가슴 속에 언제나 살아 있다”고 알레이다는 덧붙였다. 일행 중 한국의 군사 독재정권과 싸웠던 투사가 있다는 점을 알려준 우리는 감사 인사 나누고, 기념촬영 후 헤어졌다. 아바나 최대 쇼핑센터를 구경할 시간이다.
‘카를로스 플라자’라는 이름의 쇼핑센터는 우리 기준으로 규모가 작다. 우리 백화점에 비교할 바가 못 된다. 전환페소만 받는 까닭에 대부분의 쿠바인에게 문턱이 높을 텐데 찾은 손님이 적지 않다. 상품은 수입품이 대부분으로, 유명상표의 신발과 의류가 근사하게 진열돼 있고 한국 가전제품이 판매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볼 수 없는 옛 모델인데 값은 우리보다 오히려 높다. 지하 식품매장에서 쿠바의 럼주, ‘아바나 클럽’ 7년산 두병을 구입했다. 11.5전환페소로 우리 돈으로 만 원이 조금 넘을 정도다. 오래될수록 갈색이 진하고 맛이 깊어진다.
악단이 없는 식당에서 저녁을 조용히 먹고 호텔로 돌아가 남은 술 조금 마신 후 잠을 청했다. 오늘이 쿠바 마지막 밤이다. 바쁘게 돌아다닌 오늘은 일정마다 아쉬움을 남겼다. 알도 카마쵸에게 인사동에서 구입한 선물과 사용하지 않은 일회용반창고와 약품들, 필기도구를 선물해야겠다. 물자가 부족한 쿠바에 남은 물건을 전해주는 것도 인민에게 요긴하다고 멕시코 칸쿤에서 만난 가이드가 귀띔하기도 했는데, 격세지감이 든다.
첫댓글 제가 이번 여행에서 가장 관심이 많았던 일정입니다. 한데 하루 만에 모든 일정을 소화해야 했습니다. 그야말로 주마간산이었습니다. 그래서 더욱 아쉬웠던 여행. 다음에 다시 기회가 있을지요. 다음에 마지막 일정을 올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