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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산 온천에서 몸을 씻고, 수덕사에서 마음을 씻은 다음,
서울에 올라와서 다시 싸운다.”
구 본 황
7박8일의 여름방학 답사여행을 계획하고
2010년 7월 15일(목) 역삼동 롯데백화점 뒤 창포만두집에서 우리산악회 단골 멤버들(임경유<송파공고>․ 기우현<서초고> 선생님과 나)이 저녁 식사시간에 맞추어 오붓하게 모였다.
처음으로 7박8일 동안이나 방학 중 도보여행을 하기로 한 달 전부터 논의가 되었었는데, 바로 내일부터 방학이 시작되기 때문에 이것을 확정하기 위해서이었다.
전골 그릇에서 모락모락 새어나오는 김을 바라보며 상의한 결과, 승용차를 가져가되 도보여행 위주로 하되, 기 선생님의 고향인 전주에서부터 남행하면서 등산도 하고, 문화체험도 하기로 합의하였다.
7월 19일(월) 아침 7시 선릉역에서 만나, 7박8일 동안 다녀오기로 하였는데, 결국 다른 우리산악회원들이나 지인들이 참여하지 못하여 <창포만두집 멤버> 셋이서만 출발하게 되었고, 5박6일 동안 값진 땀을 흘리며 고생 속에서 보람을 캐고 돌아왔다.
아침 식사할 테니 차 태워달라는, <대단한> 큰 아들
7월 17일(토)은 남서울은혜교회 탁구모임 총무로서 광진구 중곡동까지 가서 한국중앙교회와 탁구대회를 마무리하고 나서, 부랴부랴 영등포구 신길동에 있는 마포회관으로 달려가 초등학교 동기모임(남육회)에 참석하였다.
교회 탁구모임은 2004년 봄부터 이어지고 있는데, 일반 탁구장 모임과는 달리, 신입회원들까지 포근히 감싸 안는 <정>이 살아 있고, 건강에도 좋은 모임이라, 서로들 끈끈한 유대관계를 유지해오고 있다.
남육회 모임은 교회 탁구모임보다 10년 일찍, 1994년부터 이어져 오고 있다.
모두들 시골 출신이어서 고향냄새가 그리운지라, 남녀 20명가량이 지속적으로 모임을 갖고 아름다운 우정을 나누고 있다.
7월 18일(일) 교회에서 한여름에 탁구모임을 갖다보니, 땀으로 목욕할 수밖에 없었는데, 밤 9시 넘어 집에 도착하여 배낭을 꾸리고 속옷은 따로 탁구가방에 넣어가기로 하였다.
재수생 병모는 아빠를 위해 <지리산 둘레길 자료>를 정리해주어 대견하기만 하였으나, 아내는 방학이 시작되자마자 혼자 여행 떠나는 남편이 얄미운 듯, 아예 외면해버려서 씁쓸하였다.
7월 19일(월) 새벽 4시 30분 휴대폰 알람이 울리자마자 기상하였다. 텅 빈 거실에서 혼자 식사하고, 살금살금 아파를 빠져나왔다.
일찍 서두른 덕분에 7시 5분경 선릉역 4번 출구에서 기 선생님, 기 사모님과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평소에도 늦게 일어나 아침 식사를 거르는 통에 사모님의 걱정을 듣곤 했던 기 선생님은, 여행길 떠나는 아침에도 <식사할 테니 차를 태워주어라>라고 사모님을 협박(?)하였다고 한다.
응석이 대단한 <큰 아들>이 하는 행동이라고 할 수밖에 없어서, 터져 나오는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풍운아> 김옥균 생가를 둘러보다.
7시 15분, 대장님(임경유 선생님)의 적토마에 올라타고, 힘차게 전에 합의한 행선지 전주를 향하여 출발하였다.
그런데 9시쯤 천안-논산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우연히 대장님과 충청남도 공주에 있는 마곡사에 대하여 이야기를 주고받게 되었다.
대장님은 한 번도 안 가본 이 절이 궁금한지, 이번 여행은 목적지를 정해놓지 않은 자유여행이니, 마곡사부터 찾아가자고 하시는 것이었다.
정안IC에서 지방도로로 빠져나와 오른 쪽으로 마곡사 방향으로 길을 재촉하려 하다가, 갑자기 대장님이 <김옥균 생가>표지가 보인다고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그런데 막상 마을길로 들어서니, 어럽쇼, 복원되어 있어야 할 문화유적이 눈에 들어오지 않아서 뱅글뱅글 헤맬 수밖에 없었다.
할 수 없이 대장님이 미리 준비해온 <내비>를 부착하고, 내비조작에 보다 능숙한 기 선생님으로 보조기사가 교체되었고, 아울러 이번 여행총무(회계)감투도 신속(?)하게 인수인계하였다.
공주시는 김옥균 뿐 아니라, 김종서 같은 충신을 배출한 역사의 향기가 높은 고장인데, 다른 고장처럼 번듯하게 유적을 복원하여 놓지 않아서 아쉬웠다.
지금 남아있는 것은 생가 터인데, 건물이 없는 풀밭이고, 비석과 안내판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비문에 의하면, 어린 시절인 7세 때 세도가 김병기의 양자로 들어가 상경하였고, 개항이후 급진개화파로서 갑신정변을 주도하였다가 실패한 후 일본으로 망명하였으며, 냉대하는 일본 정부에 실망하여 청나라에 건너갔다가, 1894년 <최초의 프랑스 유학생>인 홍종우에 의해 상하이에서 피살된 내력이 기록되어 있었다.
약육강식의 살벌한 제국주의 시대 환경조건에서, 부국강병을 목표로 험난한 개화의 길을 모색하다가, 아이러니하게도 같은 개화파 인물에게 그 꿈이 좌절되었으니, 역시 인간은 당대의 역사 환경을 벗어날 수 없는 <역사적 동물>인 것이 느껴졌다.
선친의 체취를 찾아 마곡사로
마곡사는 대전, 충남 지역 70여개 사찰을 거느린 조계종 6교구의 중심 사찰일 뿐더러, 역사적으로도 보아도, 김정희가 불경을 기증할 정도로 추사의 자취가 깊이 새겨져 있고, 근대에는 백범 김구가 을미사변 후 피신 생활을 하며, 독립의 의지를 갈고 닦았던 유서 깊은 곳이다.
그러나 내 마음에는 선친의 체취가 느껴지는 절로서 각인되어 있다.
초등학교 시절, 시골 친구들과 산으로 강으로 어울려 다니며 놀고 있을 때, 아버지는 허약한 몸으로, 고향 지방의 숙원사업인 수제공사를 성사시키기 위하여, 서울로 지방으로 뛰어다니셨고, 마침내 고장 어르신들과 땀을 흘리시며 강물에 의한 농토 침탈을 막는 둑을 완성시킨 다음, 이 마곡사에 어르신들과 오셔서 <고향의 흙>을 지켜낸 기쁨을 함께 하였었다.
이번 여행 경비로 먼저 20만원 씩 총무인 기 선생님께 드린 다음, 10시 경 공주시 북쪽 태화산 기슭에 위치한 마곡사를 찾아갔다.
이 절은 태화천을 사이에 두고 절 건물과 승방으로 나뉜 독특한 구조를 하고 있었다.
다양한 건물이 눈길을 사로잡는 마곡사
다리를 건너면서 시내를 내려다보니, 갈대가 우거지고 잉어와 자라가 뛰놀고 있어서, 친숙함이 느껴졌다.
비로자나불을 모신 대광보전(보물 802호)과 석가불을 모신 대웅보전(보물 801호, 2층 목탑 형태의 층단지붕이 독특)을 아래, 위로 배치한 것이 눈길을 끄는데, 건물 중에는 경복궁 향원정 같이 다각지붕을 한 것도 있었다.
절 마당에 있는 5층 석탑(보물 제799호)도 이채로웠다.
고려 후기, 원(라마교)의 영향을 받아서, 몸돌에는 부처, 보살을 조각해놓았고, 지붕돌에는 풍경이 달려 있었다.
마곡사를 나오니, 충남 지방 문화유적을 더 답사하고 싶은 생각이 절실해지는 것이었다.
우리 일행은 대장님이 아직 가보지 못하신 수덕사를 찾아가기로 하였다.
과수원 길을 지나 추사를 찾아가다
차령고개를 넘어서 12시 경 예산읍을 통과하였다.
45번 국도를 따라 서쪽으로 내닫는데 시골 초등학교를 지나다 보니, 어럽쇼, 추사고택 표지판이 보이는 것이 아닌가!
대장님이 재빨리 동북쪽으로 기수를 돌려 오솔길을 달려가는데, 좌우로 끊임없이 사과 과수원이 펼쳐져 있어서, 금세라도 동요를 부르며 아이들이 쏟아져 내려올 것만 같았다.
추사 김정희는 19세기를 대표하는 <실사구시>학파의 대표적인 학자인데, 북학파를 대표하는 박제가의 수제자일뿐더러, 중국의 옹방강, 완원에게도 사사하여, 금석학 뿐 아니라 그림과 서예에서도 독특한 경지를 확립하였다.
그림으로는, 제주도 유배시절, 사제 간의 의리를 잊지 않고 북경에서 두 번이나 귀한 책을 구해 보내준 역관 이상적의 인품을 칭송하며 답례로 그려준, <세한도>(국보 제180호, 고고한 절개가 돋보인다고 함)가 대표적 작품이고, 글씨로는 <송곳으로 철판을 뚫는 것 같은 힘찬 기상이 쏟아져 나온다는>평가를 받는, 임종하기 사흘 전에 썼다는, 서울 봉은사 판전(서울시 유형문화재 제83호)의 현판 글씨가 유명하다.
추사는 자신의 서예 수련에 대하여, <벼루 3개를 구멍 내고, 붓 1000개를 몽당붓으로 만들었다.>라고 하였으니, 노력이 천재를 만들어내는 것임을 깨달을 수 있다.
추사의 집안을 살펴보면, 고조는 영의정을 지냈고, 증조는 부마(사도세자의 라이벌인 화완옹주의 동생인 화순옹주의 남편, 영조 사위), 조부는 형조판서를 역임하였고, 추사 본인도 병조참판․대사성을 지낸 대단한 권반 가문인 것을 알 수 있는데, 말년에는 오랜 동안 힘겨운 귀양살이에 시달렸으니, 세상의 부귀영화와 고난고초는 종이의 앞뒷면처럼 동행하는 것일까?
어렸을 적 할아버지의 글 읽는 소리가 솟아나오는 추사고택
추사고택(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43호)은 예산군 북동쪽 신암면에 위치하고 있는데, 추사가 태어나서 7살까지 자라났던 생가이다.
왕의 부마였던 증조가 축조하였는데, 중부지방의 전통적 건축양식을 보여주는 중요 문화재라고 한다.
집은 안채와 사랑채로 나누어져 있었다.
동쪽에 사랑채를, 서쪽에 안채를 배치하였는데, 안채는 대청과 안방, 건넌방을 갖춘 ㅁ자형의 구조인데 비해, 사랑채는 ㄱ자형 구조의 별당 형태라, 어렸을 적 할아버지께서 새벽에 사랑방에 나와 한문책을 암송하시던 기억이 저절로 솟아나오는 것이었다.
추사고택 부근에는 추사의 묘, 부마인 증조부묘, 화순옹주와 관련된 정려문, 추사가 씨를 심어 자라났다는 백송(천연기념물 106호), 추사가 태어날 때 말랐던 물이 솟아났다는 설화가 있는 우물, 추사가 어린 시절 공부했다는 화암사 등이 있고, 추사기념관이 현대식 건물로 지어져 있어서 추사의 생애와 학문세계를 체험해볼 수 있었다.
윤봉길의사 기념관에 들러 <살신성인>의 정신을 배우고
추사고택을 나오니 벌써 1시가 지나가고 있었다.
우리 일행은 예산군 북서쪽 덕산면에 위치한 수덕사를 찾아가기 위해 뜨거운 한낮에 적토마를 몰아 45번 국도를 내달렸다.
그런데 관광객이 많이 찾는 덕산온천 지구에 들어오니, 윤봉길의사 기념관 안내 표지판이 우리 일행을 반기고 있었다.
전에 친척과 함께 이곳에 왔을 때에는, 수덕사 가는 길의 왼쪽에 의사가 살던 집과 기념관이 있었는데, 이제는 오른쪽에 보다 더 세련된 구조로 새 기념관이 자리 잡고 있었다.
안중근 의사를 가장 존경하는 대장님은, 기념관에 있는 윤의사가 거사 직전, 젖먹이 두 어린 아들에게 쓴 편지를 가리키며, <살신성인> 정신에 감탄사를 연발하는 것이었다.
죽음을 앞둔 25세의 청년 아버지가 젖먹이 두 아들에게 피눈물로 쓴 편지는 다음과 같다.
강보에 싸인 두 병정(兵丁)에게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하여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잔 술을 부어 놓으라.
고향에서 농촌계몽운동을 전개하던 의사는,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큰일>을 도모하기 위해 만주로 건너가면서, 장부출가 생불환(丈夫出家 生不還), 즉 <장부가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서 돌아오지 않겠다>는 비장한 문구를 남긴 바 있는데, 일반인은 감히 실천할 수 없는, 지사(志士)의 정신이자 삶이라고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덕산온천에서 몸 씻고, 수덕사에서 마음 씻고, 서울에 올라와서 다시 싸운다
기념관을 나온 다음, 우리는 의사가 성장기에 사시던 집인 저한당(한국을 구한 집이란 뜻)을 둘러보고, 다리를 건너서 도중도(시내 가운데에 있는 섬 같은 지역)에 위치한 광현당이란 생가, 고향에 있을 때 민중을 상대로 계몽운동을 전개하셨던 부흥원을 감회에 젖어 살펴보았다.
2시 쯤 수덕사 가는 길목의 산 어귀에 들어섰는데, 이구동성으로 <뱃속의 민생고>를 먼저 해결하여야 한다는 여론에 따라, 적토마에서 내려 아담한 시골 식당, <산채이야기>에 들어가 산채비빔밥을 시켰다.
7000원씩을 주고 맛보는 우렁 된장이, 오전 여행의 보람 때문인지 더할 수 없이 맛깔스러웠다.
널찍한 주차장에 적토마를 쉬게 하고, 산길을 오르는데, 많은 상가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서해안 고속도로가 뚫리고, 인근에 온천 관광단지가 조성된 때문인지,기록적인 더위가 넘실대는 날씨인데도, 관광객이 몰려오는 것을 본 대장님은,
“덕산 온천에서 몸을 씻고, 수덕사에서 마음을 씻은 다음, 서울에 올라와서 다시 싸 운다.”
라고 말하여, 일행은 한바탕 웃음보를 터뜨렸다.
( 2011년 6월 8일 적음 )
※ 이 글에 실린 몇몇 사진은 네이버 블로거님 것을 사용하였습니다.
네이버 블로거님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첫댓글 지금 생각하면 참 보람있는 여행이었습니다. 계속 이 여행기 써서 올려 주세요.
그렇습니다^^* 어려운 기후 조건을 이기고, 값진 보람을 찾아나간 여행이었습니다. 부족한 솜씨지만, 속편을 기다려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