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간에는 極樂과 淨土와 佛 國土의 구분하는 방법과 極樂世界를 만들어내신 법장비구의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오늘은 極樂世界는 어디에 위치하며 형태는 어떠하며 구제방법은 어떠한가를 살펴보는 시간을 가져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미타경(阿彌陀經)』에 보면 아미타불의 極樂은 우리가 살고 있는 世界에서 서쪽으로 10만억의 佛國土를 지나가면 있는 世界라고 합니다.
앞의 佛敎의 世界觀에서 설명하였듯이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世界를 小世界라 하였을 때 이 小世界가 천개가 모여야 1 中世界가 되고 또 1 中世界가 천개가 모여야 1 大世界가 되며 1 大世界가 3개가 더 모여야 3천대천세계가 되며
이 3천대천세계를 1佛이 衆生을 구제하시는 범위라 하여 1佛 國土라 한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10만억의 佛 國土라는 거리는 우리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거리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極樂世界는 우리가 우주선 등의 어떠한 물체를 타고서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며 오로지 아미타불에 대한 믿음으로만 갈 수 있는 곳입니다.
이렇게 생각하였을 때 極樂世界는 10만억의 佛國土를 지나야 한다는 말은 아미타불에 대한 믿음이 생긴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며 또 그 만큼 아미타불로 향하는 우리들의 마음의 문이 얼마나 굳게 닫혀져 있는가 하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西쪽이라는 방위 역시 東西南北의 방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해가 지는 곳을 상징하는 상징적인 의미인 것입니다.
즉 우리가 사는 世界는 六道輪回의 세계이니 육도윤회의 세계에 태어나는 것을 해가 동쪽에 뜨는 것처럼 東이라는 방위로써 표현한다면 한참 육도윤회를 하고 있는 상태는 위가 될 것이고 육도윤회를 마치는 것은 西가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西라는 방위는 육도윤회를 벗어나 다시는 육도윤회의 세계에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였을 때 동서남북 상하를 가리지 않고 육도윤회의 사바세계를 벗어난 곳이 바로 極樂世界인것입니다.
일반적으로 極樂의 반대말을 地獄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개념에서 생각한다면 極樂世界의 반대말은 地獄이 아니라 육도윤회를 하는 이 사바세계가 이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地獄의 반대말은 육도 즉 지옥 아귀 축생 수라 인간 천상 中의 天上이 地獄의 반대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極樂世界에서는 어떻게 하여 이제까지 지은 業은 모두 소멸시킬 수 있으며 또 앞으로 새로운 業을 짓지 않게 되는 것일까요?
이제까지 지은 業을 모두 소멸시키려면 다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極樂世界에 중생이 태어나면 연꽃 속에 태어나게 된다고 합니다.
연꽃 속에는 그 중생이 받아야 할 業에 따라 業을 받을 수 있도록 사바세계와 같은 환경이 만들어져 있다고 합니다.
다만 사바세계와 다른 점은 사바세계는 業에 의하여 만들어진 환경 속에서 業을 받아 소멸시킬 수도 또 새로 만들 수도 있지만
極樂世界의 환경은 業 을 받아 없애기 위해서만 부처님의 위신력의 방편에 의하여 만들어진 환경인 관계로 業을 새로 지을 수는 없다고 합니다. 오로지 받아 소멸시킬 뿐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업을 하다가 부도를 내고 부인과는 이혼을 하고 가족은 다 뿔뿔이 흩어져 자살을 하여야겠다고 생각하고 자살을 하면서 極樂을 發願하여 염불을 하였다고 가정하여 봅시다. 그러면 이 사람도 極樂에 태어납니다.
그러나 極樂 속에 태어난 연꽃 속에도 부도가 나고 이혼 당하여 가족이 뿔뿔이 다 흩어진 상태의 환경이 그대로 만들어져 있다고 합니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사바세계에서는 자신의 業에 의하여 만들어진 환경이지만 極樂世界는 업장을 소멸시켜 주시기 위한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만들어진 환경이라는 사실이 다를 뿐인 것입니다.
그리고 하루에 한 번씩 연못 한 가운데서 종이 울리면 연꽃이 열리고 그 밖으로 나와 연못 한가운데에 있는 누각으로 가서 법문을 듣는다고 합니다.
모든 괴로움은 부처님이 惡業을 소멸시켜 주시기 위하여 주시는 쓴 약이고 또 즐거움은 善業을 소멸시켜주시기 위한 단약이니 가리지 말고 잘 받으라고 하는 법문을 듣는 것입니다.
그 법문이 끝나면 다시 연꽃 속으로 들어가 業을 받으며 소멸시키는 生을 사는것입니다. 그 업이 다 소멸할 때까지 말입니다.
지금의 환경이 괴로운 것인가? 고통스러운 것인가? 그런데 생각해 보면 지금 여기가 極樂의 연꽃 속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生을 마치고 죽는 순간이 極樂의 한나절 이어서 연꽃이 피고 법문을 들으러 연못 한가운데로 나갈지 모르는 일 아닙니까?
그래서 마음먹기에 따라서 예토도 極樂이될 수 있다는 말이 예로부터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까지 지은 業은 그렇게 소멸시킨다 하더라도 새로운 業은 어떻게 안 지을 수 있게 하여 주는 것인가 하는 것이 궁금할 것입니다.
業이란 우리 행위 그 자체가 業이기 때문에 우리 생활 그 자체가 業을 짓는 행위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極樂에서는 음식을 먹는 것도 생각으로 먹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옷을 입는 것도 생각으로 입는다고 합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먹고 싶은 음식을 생각만 하여도 그 음식을 실컷 먹는 것이 되며 그리고 입고 싶은 옷을 생각만 하여도 몸에 입혀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새로운 業을 지을 리가 없는 것이지요.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에 의하면 이러한 極樂世界에는 오역의 죄를 지은이라 하더라도 임종 시에 “나무아미타불”의 염불만 한다면 갈 수 있다고 하고 있습니다.
또 수행력이 높은 큰스님이라 하더라도 육신을 버릴 때까지 숨도 쉬었을 것이고 생각도 하였을 것이고 음식도 먹었을 터이니 업장을 완벽하게 다 소멸시켰다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極樂世界에 가서 조금 남은 業이라도 다 소멸시켜야 완벽한 成佛을 이룰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極樂世界에 태어나는 중생들 중에는 오역의 죄를 지은이와 같이 소멸시켜야 할 업장이 많은 이와 수행력이 높은 큰스님과 같이 소멸시켜야 할 업장이 아주 적은 이가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이들을 모두 같은 곳에 수용시킨다는 것은 유치원생과 대학원생을 한 교실에서 가르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極樂世界는 9품으로 나누어 중생들을 接引(접인) 하는 것입니다.
9品이란 業이 가장 가벼운 상품상생에서 시작하여 상품중생 상품하생 중품상생 중품중생 중품하생 하품상생 하품중생 하품하생의 아홉 가지의 世界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품하생에 태어나는 이는 無間地獄에 갈 오역죄(五逆罪)를 지은이가 마지막 임종 시 모든 것을 참회하고 선지식을 만나 “나무아미타불” 을 염하면서 귀의하려는 마음을 일으키기만 하여도 갈 수 있는 세계이며
최 상승의 상품상생은 수행력이 높은 큰스님과 같은 분들이 가서 업장을 소멸시키는 세계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품하생이 極樂世界의 1학년이라면 상품상생은 졸업반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9품의 세계에는 각각의 연못이 있어서 그 안에 연꽃이 피어 있는데 極樂世界에 태어나는 중생들은 이 연꽃 속에서 업장을 소멸시키는 생활을 하게 되는 곳으로서 연꽃 속에는 그 중생이 업장을 소멸시킬 수 있도록 그 중생에게 맞는 환경이 만들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연꽃이 각양각색의 색깔을 가지고 있는 것은 極樂世界에 태어나는 중생들의 業이 각양각색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極樂世界에 태어날 중생들이 임종을 하게 되면 연꽃 속에 태어나게 되는데 이 연꽃 속에는 지금 자신이 살고 있는 모든 세계와 똑같은 환경이 구비되어져 있는 것입니다.
만약 빚쟁이에 쫓기어 죽은 사람이 極樂世界에 태어나면 자신이 태어난 연꽃 속에도 그 빚쟁이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같은 곤경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빚쟁이에게 쫓겨야 하는 業을 지었기에 그러한 곤경에 빠지게 된 것이어서 그 業을 받지 않으면 業은 소멸될 수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極樂世界의 자신의 연꽃 세계 속에는 그러한 業을 받게 하기 위한 방편으로서 빚쟁이들이 있는 것입니다.
極樂世界는 일곱 가지 보물로 이루어진 나무와 일곱 가지의 그물과 일곱 가지의 계단이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한가운데는 연못이 있으며 이곳에는 중생들이 각자의 業을 받아 소멸시키게 하기 위해서 중생들의 業이 변화하여 생긴 각양각색의 연꽃들이 피어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는 누각이 있고 그 누각에는 종이 매달려 있습니다. 하루에 한 번씩 문수보살(文殊菩薩)님이 종을 치면 연꽃 속에서 衆生들이 나오기 시작하는데 그 모양이나 복식은 9품 연화의 세계가 각각 다르지만 같은 품의 세계에서의 복식은 같다고 합니다.
이들은 누각에 모여서 문수보살님의 법문을 듣고 환희 심을 낸다고 합니다.
그러면 하늘에서는 만다라 꽃비가 내리기 시작하고 衆生들은 그 꽃을 주워서 다른 佛國土를 다니며 부처님들께 공양을 올리고 산책을 즐기면서 아름다운 소리로 우는 새소리와 볼을 스치는 기분 좋은 바람소리 그리고 누각의 처마 끝에 매달린 풍경소리들을 즐긴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소리들은 모두가 부처님의 법문으로서 衆生들에게 항상 커다란 깨달음을 주게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난 후 衆生들은 다시 연꽃 속에 들어가 業을 받는데 사바세계에서는 善業을 받으면 행복하고 즐거워 희희낙락하고 惡業을 받으면 불행하여 고통스러워하면서 헤어날 줄을 몰라 다시 業을 지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하루에 한 번씩 법문을 듣는 까닭에 善業을 받아 행복이 찾아오면 부처님이 善業을 소멸시켜 주시기 위하여 주신 단약으로 알아 즐거움에 빠지지 않고 惡業을 받아 불행이 찾아오면 부처님이 惡業을 소멸시켜 주시기 위하여 주신 쓴 약으로 알아 고통에 빠지지 않으며 업장을 소멸시켜 나가는 것입니다.
極樂世界에 태어나기 위하여 가장 필요한 것은 아미타 부처님의 구원력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믿는 믿음인 것입니다.
이 믿음은 地獄 가는 것이 두려워서 極樂世界에 태어나고 싶다고 하는 나약한 믿음이 아니라 地獄을 갈 業이라면 地獄을 가서라도 자신의 업장을 다 소멸시키겠다는 참회에서 비롯된 강인한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極樂世界에서 태어나고 싶다고 하는 강한 욕망인 것입니다.
이 욕망은 地獄이나 六道輪回가 두려워서 極樂世界에 태어나야겠다고 하는 이기주의적 책임 회피적 욕망이 아니라 六道輪回의 世界는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이 아니기에
반드시 그곳에서 나와 極樂世界에 가서 자신이 지은 업장을 다 소멸시키겠다고 하는 강인한 의지에서 비롯되는 욕망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기뻐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이 기뻐하는 마음은 아미타부처님이 極樂世界를 만들어서 나를 접인 하지 않으시면 나의 六道輪回의 여행은 끝이 없었을 것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나를 대신하여 수고를 하여 주셨고 내가 成佛할 때까지 도와주시고 계시는 아미타 부처님에 대한 감사에서 비롯된 기쁨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을 집중하여 “나무아미타불”을 염하면 누구나 다 極樂世界에 탄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무량수경』에서는 이러한 마음으로 나무아미타불을 10번 염하라 하였습니다.
또『아미타경』에는 7일을 하라 했으며 『관무량수경』의 하품하생에서는 5역의 죄를 지은이라 하더라도 임종 시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려고만 하여도 極樂에 태어난다고 하였으니 경전이 말하는 바가 다 다르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나무아미타불”을 얼마만 큼 불렀느냐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마음으로 불렀는가 하는 아미타불을 믿는 信心이 더 중요함을 단적으로 말하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
그렇기에 “나무아미타불”을 염하더라도 믿음이 없이 그냥 입으로만 하였으면 極樂世界에는 태어나지 못하고 極樂世界의 변방에 태어나 견고한 믿음을 갖춘 후라야 極樂으로 간다고『무량수경』에서는 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늘 염불하는 마음으로 “나무아미타불”을 마음속으로 염하면서 살아간다면 임종 시에 진심으로 “나무아미타불”을 열 번 염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을 사는 사람은 평시에 항상 善業을 쌓게 되니 비록 임종 시에 “나무아미타불”을 열 번 염하지 못한다 하여도 極樂에 태어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다함께 “나무아미타불”을 염하는 자세로 살아가도록 합시다. 그리하여 여러분 모두가 極樂世界에 태어나서 업장을 모두 소멸하고 성불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