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철학자의 잠언(箴言)같은 이 말은 943년(고려 태조26년) 5월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王建·877~943년)이 남긴 유언이다. 지방 토호의 아들로 태어나 삼국통일이라는 위업을 이룬 왕건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사실 인색하다. 그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어떤 자질을 통해 삼국통일을 이뤄낼 수 있었는지 등에 관해 그다지 관심이 없다.
정적(政敵) 정몽주를 마지막까지 살려두려 했던 조선의 태조 이성계도 포용력에 관한 한 누구에게도 양보하지 않을 만큼 넉넉한 인물이지만 왕건에는 못 미친다고 할 수 있다. 이성계는 어찌 보면 이미 있던 나라의 왕위를 빼앗아 혁명을 이룬 것이지만 왕건은 궁예로부터 태봉의 왕권을 빼앗고 그것을 기반으로 견훤의 후백제와 경순왕의 신라를 스스로 복속게 함으로써 삼국을 재통일했다. 그만큼 그릇이 컸던 인물이다. 왕건의 큰 도량을 보여주는 일화는 수없이 많다. 그의 도량은 특히 때를 기다릴 줄 아는 인내심에서 크게 빛난다. 909년 왕건은 궁예 밑에서 해군대장군으로 활약하고 있었다. 전라도 나주에서 견훤의 군대와 싸우게 되었을 때 부하 장수들이 수적인 열세를 걱정하며 불안해하자 왕건은 이렇게 다독였다.
"근심하지 말라. 전쟁에서 이기고 지는 것은 군대의 의지가 통일되어 있느냐 아니냐에 있는 것이지 그 수가 많고 적은 데 있는 것이 아니다."
결국 왕건의 부대가 대승을 거뒀고 견훤은 작은 배를 타고 달아나야 했다. 그런데 일부 장수들이 자신들의 공(功)을 궁예가 몰라준다고 투덜거리자 왕건은 이렇게 말한다.
"해이해지지 마라. 지금 임금이 포학하여 사람을 많이 죽이고 아첨하는 자들이 득세하여 서로 음해를 일삼고 있다. 그래서 중앙에 있는 자들은 자기신변을 보전하지 못하는 형편이다. 우리처럼 차라리 정벌에 종사함으로써 자기 몸을 보전하는 것이 더 낫다."
그 무렵 궁예는 사람의 마음을 알아보는 '미륵관심법(彌勒觀心法)'을 터득했다며 멀쩡한 사람에게 반역죄를 씌워 죽이는가 하면 부녀자가 음심(陰心)을 품었다며 잔혹하게 살해했다. 고려사는 "3척이나 되는 쇠 방망이를 불에 달구어 여자의 음부에 찔러 넣고 입과 코로 연기가 나오게 하여 죽였다"고 적고 있다. 나주에서 중앙으로 복귀해 있던 왕건에게도 위기가 닥쳤다.
갑자기 궁예는 왕건을 화난 눈으로 쳐다보다가 "그대가 어젯밤에 사람들을 모아서 반란을 일으키려고 음모한 것은 어쩐 일인가?" 왕건도 처음에는 놀라 "그런 적이 없다"고 답했다. 그러나 궁예는 자신을 속이지 말라며 "나는 관심(觀心)을 하기 때문에 알고 있다"고 했다.
생사(生死)가 한순간에 달렸다. 다행히 옆에 있던 최응이라는 신하가 무조건 인정하라고 조언했고 왕건은 뭔가를 깨닫고 "사실은 제가 모반하였으니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거짓자백을 했다. 그때서야 궁예는 껄껄 웃으며 "그대는 정직한 사람"이라고 칭찬하고 상을 내려주었다. 918년 궁예를 내몰고 왕위에 올라 국호를 태봉에서 고려로 바꿨다. 그러나 여전히 신라는 잔존해 있었고 후백제는 막강했다. 926년 신라는 사절을 보내 견훤을 공격해줄 것을 청했다. 이에 대한 왕건의 답이다.
"내가 견훤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의 죄악이 가득 차서 스스로 넘어질 것을 기다릴 뿐이다."
왕건의 기다림은 10년을 넘기지 않았다. 935년 3월 견훤의 아들 신검이 아버지를 금산사에 감금하고 아우 금강은 죽여 버리면서 내분이 일어났고 그해 6월 견훤은 고려에 투항해왔다. 왕건은 견훤에게 국왕 다음가는 품계를 내리고 지금의 서울에 해당하는 양주(楊州)를 식읍으로 주었다. 포용(包容)은 이런 것이다.
같은 해 10월에는 신라왕이 자발적으로 고려를 신하의 예로 모시겠다며 투항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왕건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두 달간의 실랑이 끝에 마침내 왕건은 신라왕의 배례를 받고 신라왕을 정승으로 임명했다. 신라가 스스로 망하는 순간이었다.
스스로 그러하도록(自然) 내버려 둘 줄 아는 데서 나오는 태조 왕건의 여유와 포용력은 고려 말 충선왕으로 하여금 다음과 같은 평가를 내리도록 했다. 충선왕은 원나라 황실에서 공부를 했기 때문에 중국 역사에 해박했던 왕이다. "우리 태조(왕건)의 포부와 도량으로 만일 중국에 태어났다면 송나라 태조보다 못하지 않았을 것이다." 포용을 모르는 시대라서 우리는 왕건에 주목하지 않는 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