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은 가을날에 생각나는 것들"이라는 청추수제는 우리가 중딩 2학년때 국어책에서 당시 서형숙쌤한테 배웠던 수필이다.
아마 요즘 같은 시절에 딱 맞는 내용이라 늘 이맘때면 생각나는 작품이었는데 한번 읽어보래. 그때 생각이 나는가...
청추수제
이희승
벌레
낮에는 아직도 90몇 도의 더위가, 가만히 앉아 있는 사람의 숨을 턱턱 막는다. 그런데 어느 틈엔지 제일선에 나선 가을의 전령사(傳令使)가 전등빛을 따라와서, 그 서늘한 목소리로 노염(老炎)에 지친 심신(心身)을 식혀 주고 있다. 그들은 여치요 베짱이요, 그리고 귀뚜라미 들이다.
물론, 이 전령사들의 전초역을 맡아 가지고 훨씬 먼저 온 것으로 매미, 쓰르라미가 있지마는 그들은 소란한 대낮에, 우거진 녹음 속에서 폭양에 항거하면서 부르는 외침이라, 듣는 사람에게 ‘가을이다’하는 기분을 부어 주기에는 아직 부족(不足)한 무엇이 있었다. 그렇더니 이 저녁에 들리는, 정밀 속에 전진하여 오는 소리야말로, ‘이젠 확실한 가을이로구나!’ 하는 영추송(迎秋頌)을 나도 모르는 사이에 튀어나오게 한다.
달
전등을 끄고 자리에 누우니 영창이 유난히 환하다. 가느다란 벌레 소리들이 창 밖에 가득 차 흐른다. ‘아! 하는 사이에, 나는 내 그림자의 발목을 디디고, 퇴 아래 마당 가운데 섰다. 쳐다보아도 쳐다보아도 눈도 부시지 않은 수정덩이가, 도시의 무수(無數)한 전등과 네온사인에 나 보아란 듯이 달려 있다.
저 달이 생긴 뒤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그를 어루만지고 주무르고 꼬집고 하였을까? 원망인들 오죽 쌓였을라고. 그의 얼굴은 따뜻한 듯 서늘한 듯, 쌀쌀하면서도 다정(多情)도 하다.
성결한, 숭고한, 존엄한 그의 위력에 나는 다시 내 자리로 쫓겨들어왔다.
이슬
이슬은 가을 예술의 주옥편이다. 하기야 여름엔들 이슬이 없으랴? 그러나 청랑(淸朗) 그대로의 이슬은, 청랑 그대로의 가을이라야 더욱 청랑하다.
삽상한 가을 아침에 풀잎마다 꿰어진 이슬 방울들의 영롱도 표현할 말이 막히거니와, 달빛에 젖고 벌레 노래에 엮어진, 그 청신(淸新)한 진주 떨기야말로 보는 이의 눈을 부시게 할 뿐이다.
창공
옥(玉)에도 티가 있다는데, 가을 하늘에는 얼 하나 없구나! 뉘 솜씨로 물들인 깁일러냐? 남이랄까, 코발트랄까, 푸른 물이 뚝뚝 듣는 듯하구나!
내 언제부터 호수(湖水)를 사랑하고, 바다를 그리워하고, 대양(大洋)을 동경하였던가? 내 심장은 저 창공에 조그마한 조각배가 되어, 한없는 항해를 계속하여 마지않는,알뜰한 향연을 이 철마다 누리곤 한다.
독서
‘서중 자유 천종록(書中自有千鐘祿)’이란, 실리주의(實利主義)에 밝은 중국(中國) 사람에게 있을 법한 설법(說法)이렷다. 그러나 ‘속대발 광욕 대규(束帶發狂欲大叫)’란 형용(形容)이 한 푼의 에누리도 없는 삼복(三伏) 더위에, 만종록(萬鐘祿)이 당장 무릎 위에 떨어진다기로서니, 독서 삼매에 들어갈 그런 목석연(木石然)한 사람이 있을라고, 지나친 자아류(自我流)의 변설인지는 모르나, 그러기에 나는 60일 휴가 동안 제법 독서 줄이나 하였다고 장담할 뱃심을 가지지 못하였다.
먼 산이 불려 나온 듯이 다가서더니, 아침 저녁으로 제법 산들산들한 맛이 베적삼 소매 속으로 기어든다. 벌레가 달이,이슬이,창공이 유난스럽게 바빠할 때, 이 무딘 마음에도 먼지 앉은 책상 사이로 기어가는 부지런이 부풀어 오름을 글함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