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교회이야기 식구 여러분! 잘 지내고 계시지요?
안부를 묻는 것조차 어려운 시절이 되었습니다. 답답하고 여행이 그리운 때입니다. 어딘가 배낭하나 짊어지고 갈 데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루에도 열두번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동 자체가 어려운 시기이지요.
사람들이 여행가고 싶어하는 마음을 이용하여(?) 비행기 타고 갔다가 내리지 않고 돌아오는 여행 상품이 생겼더군요. 인천공항에서 비행기타고 우리나라를 두시간 동안 제주도까지 비잉 한바퀴 돌아서 다시 인천공항에 내리는 것인데요, 비행기 안에서 기내식도 먹고, 여행 기분 내는 것이지요.
저도 나름대로 여행하는 방법을 찾았습니다. 그동안 여행했던 곳을 다시 기억해 돌아보는 것으로 여행을 대신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작년 이맘 때 저는 혼자 패키지여행 팀에 끼어서 발칸을 여행했습니다. 일행 중 제가 제일 나이 많은 참가자였고, 게다가 여행에 혼자 참가한 것이 이상하게 보였는지 여러 사람들이 저를 궁금하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자기 소개하는 시간도 없었고, 저 또한 처음으로 혼자 관광여행에 참석했기에 개인적인 시간을 갖는 것이 좋았습니다. 크로아티아를 지나 슬로베니아의 블레드를 방문하였을 때, 블레드 호수 안에 있는 블레드 섬을 구경하게 되었습니다. 마리아 승천 성당 하나만 있는 블레드 섬에 많은 이들이 찾아가는 이유는 섬이 아름답기도 하지만, 성당에 있는 종을 울리러 가는 것입니다. ‘성당 안에 있는 종 줄을 당겨 세 번 종을 치는 동안 비는 소원은 꼭 이루어진다’는 전설 때문에 종을 치려고 하는 이들이 배에서 내리는 곳부터 줄을 서서 올라가는 곳입니다. 물론 저도 줄을 섰지요. 성당 입구에 들어 서기 전에 일행 중 한사람이 제게 물었습니다. “선생님은 어떤 소원을 비실 것입니까?” 제가 빠르게 대답했지요, “Well dying”
“그럼 어떻게 죽기를 원하는가?” 묻는 그에게 “well dying는 어떻게 죽는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으로 죽는가에 관계가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는 고개를 갸웃했지요.
저는 잘 사는, well being이 중요하지만 잘 죽는 well dying도 중요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이 생각은 더 깊어졌습니다. 잘 죽는 것은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죽은 뒤 ‘어떤 사람으로 기억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곧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기도 하지요. 근자에 제 은사이신 이이효재 교수님이 돌아가셨고, 어제는 박순경 교수님이 돌아가셨습니다. 두 분의 즉음을 저는 well dying라고 여깁니다. 두 부 다 장수 하셔서가 아닙니다.
이이효재 교수님은 이 땅의 여성들을 위하여 한 평생을 사셨고, 박순경 교수님은 이 땅의 평화 통일을 위해 한 평생 같은 길을 걸어오셨습니다. 두 분 다 자신이 이렇게 살았다고 입으로 자기의 공로를 말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남은 우리가 그분들을 기억할 때 정말 열심히 잘 사셨다는 것을 말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잘 죽는 것은 잘 살아 온 것과 관계가 있습니다. 한 끈에 꿰어진 구슬입니다.
제가 well dying을 소원이라고 말한 것은 이제부터라도 ‘내가 어떤 사람으로 기억될 것인가’를 염두에 두고 살아야겠다는 것에서 출발했습니다. 한편으로 이것은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원하는가“에서 새롭게 출발 할 수도 있습니다. 이이효재 교수님이나 박순경 교수님 같은 큰 사람으로 기억되지는 않더라도, 아주 작은 것에서라도 내 삶을 기억해 줄 수 있는 존재로 살아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8장 5-13절에 로마 백부장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 가셨을 때, 백부장이 다가와서, 자신의 종이 중풍으로 아파하고 있는데 예수께서 고쳐 주시도록 간청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백부장의 간청을 듣고 “내가 가서 고쳐주마”고 하십니다. 그러나 백부장은 “주님, 저는 주님을 내 집에 모셔 들일 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내 종이 나을 것입니다.” 합니다. 예수께서는 이 말을 들으시고 “나는 지금까지 이스라엘 사람 가운데서는 아무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백부장에게 “가거라. 네가 믿은 대로 일이 될 것이다”고 말씀하셨고, 바로 그 시각에 그 종의 병이 나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 말씀 속에서 예수님의 마음을 읽습니다.
자신의 종이 아파 괴로워 하니 종의 병을 고쳐달라는 백부장의 마음을 보신 예수님이 보입니다. 당시 종은 사람대접을 받지 못하는 존재였습니다. 종은 사람이 아닌 재산, 재물입니다. 그런 종이 중풍으로 괴로워 하는 것을 보고, 그의 아픔을 고쳐달라는 백부장에게서 사람다운 사람을 보신 것입니다. 그랬기에 예수님이 직접 그 종을 고쳐 주러 가겠다고 나서신 것입니다.
그런 예수님을 어서 가시자고 조르는 것이 당연하다고 보아지는 상황에서 백부장은 예수님이 직접 환자에게 가지 않고도 병을 치료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가시지 않고도 “그저 말씀만 하셔도 병이 나을 것”이라고 합니다. 군대의 체계를 들어 설명하면서 자신이 부하들에게, 종에게 시키는 대로 모든 일이 이루어지는 것에 빗대어 예수께서 말씀만 하셔도 병이 낳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백부장의 믿음을 지금까지 이스라엘에서 보지 못한 믿음이라 칭찬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미 택함을 받은 이스라엘 자손,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일컬어지는 이들이, 그런 믿음이 없어서 어두운 데로 쫓겨나 울며 이를 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눈 여겨 보아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백부장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로마인 백부장을 이스라엘 사람 가운데서 보지 못한 믿음을 가진 사람으로 보셨습니다,
에수님을 믿는다고 쫓아다니면서도 기회만 있으면 그의 권위가 어디서 오는가 묻는 이들, 어디서 배워서 저렇게 가르치는가 수군거리는 이들, 누가 그에게 병고치는 권세를 주었는가 의심하는 사람들.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백성이라는 자부심으로 가득찼으나 예수님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가지지 못하는 그들을 보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심히 아프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억 속에 가장 믿음이 좋은 사람, 이스라엘 사람에게서는 발견하지 못한 믿음을 가진 그에게 “가거라, 네가 믿은대로 일이 될 것이다”라고 하며 병을 고쳐주신 것으로 이야기는 종결 됩니다.
여러분은 예수님께 어떤 사람으로 기억될까요? 아니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원하십니까?
백부장처럼 믿음이 좋은 사람? 아니면 백부장의 믿음에 미치지 못하는 이스라엘 사람?
아마도 well dying도 이 질문과 맞닿아 있을 것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사람으로 기억될까? 혹은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었으면 좋겠는가? 지금이 이 질문을 하기에 가장 적합한 때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가 모두 백부장의 믿음을 가져 예수님께서 믿음의 사람으로 우리를 기억해 주시기를 간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