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 유구중학교로 첫발령을 받고 근무하게 되었을 때, 학교 근처에서 하숙을 했었다. 토요일 오전 수업을 한 후에 시외버스를 타고 대전시 가양동에 있는 집에 갔다가 일요일 오후에 하숙집으로 돌아오곤 했었다.
그런데 어느날 학교에서 집에 왔을 때, 그 날도 물론 토요일이었다. 대문 앞에 사람들이 나래비를 서있었다. 약간의 과장을 섞으면 100m 정도 줄을 서서 우리 집에 들어가려고 남녀 성인들이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깜짝놀라서 집에 들어가서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어보니 교회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 때 아버지께서 중풍으로 쓰러진 후에 상태가 좋지 않아서 여러군데 병원을 전전했지만 완쾌가 안된 상태였다. 아버지께서는 상태는 안좋았지만 혼자서 걸을 수는 있었다. 현관 앞에 있는 의자에 혼자 걸어가서 앉아 계시다가 안으로 들어오시곤 했었다.
우리집 근처에 있던 작은 아버지 집의 사촌누나가 "집 근처 교회에서 어떤 목사가 안수기도로 불치병에 걸린 사람들을 잘 고친다고 하니 큰아버지도 한번 가보자"고 해서 아버지를 모시고 가서 그 교회 목사의 안수기도를 받았다는 것이다. 안수기도 후에 목사는 아버지께 한번 걸어보라고 했고, 걸을 수 있었던 아버지는 당연히 교회신자들이 보는 앞에서 걸었던 것인데 목사는 감격에 찬 목소리로 이렇게 외쳤다. "중풍으로 앉은뱅이가 된 환자가 하나님의 은혜로 걸을 수 있게되었다." 아마도 교회신자들은 "할렐루야"를 외쳤을 것이다. 그 후에 '기적이 일어나 앉은뱅이가 걷게되었다'는 소문이 나서 그 기적을 확인하려고 기독교 신자들이 우리집에 몰려왔던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은혜로운 안수기도의 정체를 알게된 것 같았다. 이게 혹세무민이 아니면 뭐가 혹세무민일 것인가. 밖에 나가서 그만 돌아가시라고. 우리 이버지는 원래 걸을 수 있었던 분이라고 이야기 했지만 그들은 내말을 별로 믿지 않는 듯 했다.
아버지의 중풍은 점점 상태가 안좋아졌지만 병원치료는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청주에 사는 누나가 청주근처에 신통한 '옥녀'가 불치병을 치료하고 있으니 아버지를 모시고 가보자고 계속 이야기를 하니 어떻게 안갈 수가 없었다. 셋째형과 넷째형과 내가 아버지를 모시고 그 옥녀를 찾아가니 누나도 거기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옥녀는 '옥황상제의 딸'이어서 '옥녀'라고 한다고 했다. 옥녀에게서 치료를 받으려는 사람들이 길게 줄서 있었다. 한시간 넘게 기다려서야 마당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옥녀는 대청마루에서 앉은뱅이를 치료하고 있었다. 그 치료라고 하는 것이 그 사람의 무릎을 사정없이 밟는 것 뿐이었다. 한참 무릎을 밟으니 그 사람이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그러자 옥녀는 마당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림들에게 "이거 보시라. 앉은뱅이가 일어났어"라고 말했다. 사람들은 와~하는 감탄사를 연발했다.
드디어 아버지 차례가 되어 아버지를 부축해서 들어가니, 옥녀는 뒷마당 부엌같은 곳으로 데리고 가더니 아버지 웃옷을 벗으라고 해서 아버지 윗도리를 벗겨드렸더니 옥녀는 바가지에 물을 떠서 사정없이 어버지의 옷 벗은 몸에 끼얹었다. 몇번의 바가지질에 아버지는 물론이고 부축하고 있던 우리들도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고 먈았다. 그 때 가을이었는데 지금 가을 처럼 따뜻한 날씨가 아니라 꽤 선선한 날씨였다. 사정없는 물세례에 아버지는 물론이고 우리 형제들도 모두 감기에 걸리고 말았다. 치료를 받은 후에 수십만원의 치성비를 주고 집에 돌아왔지만 역시나 아버지는 아무런 차도가 없었고 감기로 한달 넘게 고생했을 뿐이다.
그 후에 우리 형제들이 성묘길에 옥녀가 있는 동네를 지나가게 될 때 마다 옥녀이야기를 한다. 옥녀는 사후 서비스도 철저해서 한참동안 많이 이용해달라는 엽서가 왔었다. 우리들은 어처구니 없어서 옥녀욕을 히곤 했다. "그런데 그 앉은뱅이는 어떻게 벌떡 일어난거지?" "그거야 그렇게 무지막지 하게 밟아대니 아픈 것을 참다못해 일어났을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