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가 되어 주실래요. 책을 읽고
이 책을 쓰고 지금은 고인이 되신 이태석 신부의 아프리카 이야기를 써본다.
이태석 신부는 1962년 부산출생으로, 인제의과대학을 졸업 후 92년에 가톨릭대를 입학하고, 2001년 사제서품 후 전쟁의 상처로 고아와 가난한 아프리카 수단에서 봉사하다 2010년 대장암 말기로 선종하였다.
그는 어릴 적 ‘소년의 집’ 에서 가난한 고아들을 보살피며, 몸과 마음을 씻겨주던 신부님과 수녀님들의 헌신적인 삶의 모습속에서, 일찍이 홀로 되신 어머니가 10남매를 삵바느질 하며 평생을 눈물로 고생하시며 살아오신 모습을 보며 꿈을키웠다.
그는 의사의 직업이 있기에 화려한 생활로 풍족한 삶도 살 수 있음에 그것도 가난하고 문명도 비옥한 아프리카 수단을 택하였다.
그럼 수단은 어떤 곳인가?
그는 경비비행기를 타고 수단 톤즈에 도착해 섭씨45도를 넘나드는 뜨거운 기후와 채소 식료품들이 많이 부족한 열약한 환경과, 피부색만 다른 것이 아닌 문화와 사고방식의 차이들, 모든 것을 생각하니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했다. 지천에 깔린 환자들을 위해 열 두 칸 방이 있는 보건소 수준의 진료소를 짓고, 못 하나도 구할 수 없어 케냐의 나이로비에서 조달하며 성당을 짓고 전쟁으로 페허가 된 학교 건물에 다시 벽을 쌓고 지붕을 얹고 창문을 만들어 문을 달고 나니 비가와도 쓸 수 있는 깔끔한 교실이 되었다.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하느님께 또 다시 감사를 드렸다. 하루 종일 빈둥거리며 거리를 헤매는 젊은이들을 위해 교육사업도 시작하고 아이들에게 음악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음악은 전쟁과 가난으로 생긴 아이들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치료할 수 있는 좋은 수단이라고 생각했다. 음악을 너무 쉽게 배우고 익히며 연주하는 아이들을 보며 기타 오르간, 클라리넷, 트롬본, 튜바 등의 악기로 서른다섯 명의 브라스밴드부로 성장시켰다.
성탄절에 태어난 임마누엘 중에서
미사를 드리고 있는데 한쪽 구석에서 여자의 비명이 들리며 “쿵” 하고 넘어지는 소리가 들리면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만삭의 임신부였다. 입던 제의를 벗고 나무 밑으로 여인을 옮기고 인간 커튼을 만들고, 강론 후 세례를 주고 있는데 아기가 포대기에 싸 세례를 받기위해 나타났다. 성탄절 미사 중에 세례를 주었다.
그 아이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지었다.
별난 여아 선호 사상 중에서
결혼을 하기 위해 여자를 데리고 오려면 여자의 미모와 건강상태에 따라 적게는 30마리 많게는 200마리의 소를 건넨다고 한다. 자세한 내막을 알고 나면 남존 여비사상이 철저한 곳임을 알게 된다. 아름답게 꾸미고 치장을 하면 값은 올라가지만 서글픈 것은 결혼 후 아이를 줄줄이 낳아야하고, 죽도록 일을 하며 받은 만큼의 소 값을 치루어야 한다. 출생 후 여자는 귀하게 여겨 소중하게 다루며 키우는 것은 결혼해서 많은 소를 얻기 위함이었다.
천국의 열쇄 중에서
병원을 찾아오기 위해 하루나 이틀 걸어야 하는 환자들의 불편을 덜어 주기위해 숲속마을로 약품, 물, 비스킷, 옷, 등을 싣고 일찍 출발해 마을에 도착하여 경적을 울리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앞을 다투며 모여든다. 진료를 받고 약과 운 좋으면 주사까지 맞을 수 있는 두세 달 만에 오는 소중한 기회이다. 어느 날 나환자촌에 서 진료를 하고 다달이 주는 강냉이와 식용유를 나누어 주었다. 예일 곱살 딸아이의 반점이 문등 병은 아니냐고 엄마가 묻기에 체부백선<무좀>이라고 했다. 어머니는 서운해 하며 매우 슬퍼했다. 딸의 손을 잡고 돌아서는 그에게 강냉이와 식용유를 쥐어주었다. 딸이 병이라도 걸려 집에 남아있는 식구들의 식량을 더 얻어 입에 풀칠이라도 해보려는 생각에서이다.
영혼의 전문가 중에서.
악성 말라리아로 혼수상태에 빠져 죽어가던 치콤과 그의 가족들, 남산만큼 부른 배에서 결핵성 고름이 몇 년씩이나 흘러나와, 가족들마저 거의 포기했던 꼬마 아이꼰과 그 부모는 뇌막염으로 고혈과 혼수상태에 빠져 실려 온 아얀, 자연 유산으로 하열을 해 백인처럼 하얀 얼굴로 병원에 실려 왔던 아순타, 그리고 콜레라가 창궐할 때 탈수로 인해 기진맥진 한 채 살려달라고 고함치던 많은 사람들, 병원에는 성모상도 십자고상도 없고 예수 믿으라고 권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예수님을 알고 모두가 열심히 따라주었다.
무관심은 직무 유기 중에서
아프리카에선 물가가 싼 것으로 알지만 두 배 세배 가격이고 그중 하나는 계란이다. 일 년에 몇 번밖에 알을 낳지 않으니 사정이 이렇다보니 생일이나 되어야 계란 후라이 하나를 먹을 정도다. 한번은 말라리아에 걸려 먹지도 못하는 나에게 수녀님이 그 귀한 계란두개를 구해서 프라이를 해오셨다. 한국에선 흔한 콜라도 이삼 년전부터 간간이 눈에 띄곤 한다. 전화도, 텔레비전도, 인터넷도 없는 지리적으로 문화적으로 경제적으로도 오지중의 오지였다.
마음의 신분증 중에서
생년월일을 신고 할 기관이 없다. 가족들도 기록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생일도 모르고 나이도 모른다. 나이를 물으면 태어날 때 역사적 사건을 새 년의 기준으로삼는다. 태어날 때 농사짓기 시작할 때였는지 추수 할 때였는지 건기였는지 환자들의 나이를 병역지에 기록하기 위해 물으니 사십대 중반을 보이는 아저씨가 일곱 살이라고 한다. 얼굴의 주름이나 피부의 탄력들을 보고 추측하여 적는 것이 훨씬정확하고 마음이 편하다. 딩카족은 아이들이 어느 정도 자라면 성년식이라고 이마에 서너 줄을 숫돌로 잘 간 날카로운 단도로 긴 줄의 상처를 낸다. 눈물도
보여선 안된다. 멀쩡한 이도 여섯개에서 여덞개를
봅아야 멋진 성년이 된다
유식이도 유죄 중에서
아침 식사 후 총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전쟁이 끝나긴 했지만 장난이든 아니든 마을에서 연발총소리가 들린다. 소를 훔치기 위해 습격해왔다. 병원 건물에서 나와 총소리 나는 담장 쪽을 향했다. 교복을 입은 수백 명의 학생들이 뭐라고 외쳐대며 무리를 지어 뛰어간다. 톤즈에는 두 개의 초. 중학교가 있는데 하나는 천사백 명 다른 하나는 천오백 명, 선생들의 월급은 칠팔만 원하며 월급도 서너 달 만에 나와 입에 풀 칠만 하는 정도다.
울지마 톤즈
하얀 이를 드러내 보이며 활짝 웃으시던 신부님, 마흔여덟에 길지 않은 삶속에서 의대에 진학했을 때의 기쁨, 사제가 되겠다는 가족과 아들과의 갈등, 아프리카로 선교를 떠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의 놀라움, 딸 하나와 아들 둘을 하느님께 바친 어머니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하루에도 이삼백 명의 환자를 돌보며 10년을 봉사하며 자신의 몸과 마음을 송두리째 태워버린 그는 대장암3기로 선종하신 이 태석 신부님, 톤즈에서 보여준 사랑은 특별한 사랑이 아니고 자식을 키우는 부모의 지극한 사랑 그것이었다. 수단 아프리카 그들의 미래를 위해서는 헌신적으로 자신을 던진 사랑이었다. 신부님은 어린 시절부터 다짐했던 것을 행동으로 실천했다. 그분은 떠났지만 남긴 사랑은 우리들의 몫이다. 신부님이 살아있는 우리에게 남기고 싶은 마지막 말이 아닌가 싶다.
35명의 브라스밴드가 서울을 방문하여 Tv에 나오던 날, 나라가 다르고 인종은 다르지만 그들의 가슴속에서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이태석 신부님의 사랑은 가슴에 남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