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5일부터 26일까지 1박 2일 코스로 서울 역사문화 기행을 다녀왔습니다. 서울은 조선시대부터 현재까지 정치문화의 중심지인 수도로서 상징적인 의미가 매우 큰 공간입니다. 서울을 모르고서는 우리나라의 근대 역사와 문화를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매년 새움풍물학교에서는 봄이나 가을에 학생들과 함께 서울 역사문화 기행을 합니다. 주로 경복궁과 창덕궁을 비롯한 고궁이 답사의 중심이 되지만 올해는 서대문형무소역사관과 경교장 그리고 정동 일대를 포함시켰습니다. 고궁은 여러 차례 답사하여 어느 정도 익숙하여졌고 이제는 역사 인식을 좀더 확장하여야 할 때가 된 것 같아서입니다
↑ 아침 6시 58분 KTX열차를 타고 서울로 출발합니다. 아침 식사도 제대로 못한 아이들이 역사에서 열차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서울에 도착하여 지하철을 타고 맨 처음 답사지역인 서대문형무소역사관으로 출발합니다. 아이들이 직접 지하철 티켓을 자동발매기에서 구입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도 아이들에겐 아주 중요한 공부가 됩니다.
↑서대문역에서 하차하여 독립공원에 도착하기 전에 시장에서 간단하게 요기를 합니다. 아이들이 메뉴를 선택하여 주문지에 적고 있습니다.
↑서대문독립공원에서 제일 먼저 우리가 마주한 것은 웅장한 자태의 독립문입니다. 독립문은 높이가 15m나 되는 화강암으로 만든 건축 기념물입니다. 서재필 등 독립협회 회원들이 중심이 되어 과거 중국 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 자리에 세웠습니다. 영은문을 헌 것은 중국 청나라에 대하여 조선의 자주성을 선포하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독립문 앞에 보이는 큰 두 개의 돌기둥이 과거 영은문의 초석(주춧돌)입니다.
↑독립문은 프랑스의 개선문을 밑그림으로 해서 만들었습니다. 1896년 11월에 공사를 시작하여 1897년 11월에 완공되었습니다. 화강암으로 축조된 이 건축물은 홍예문 위에 독립문이라고 새겼고 그 좌우에는 태극기를 조각하였습니다. 그 아래 홍예문 중앙에는 황실을 상징하는 오얏무늬를 새겨 넣었습니다.
↑독립문을 지나면 송재 서재필의 동상이 나옵니다. 서재필은 1864년에 태어나서 1882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라 1884년 김옥균, 박영효 등과 함께 갑신정변을 주도합니다. 그러나 갑신정변이 3일천하로 끝나자 미국으로 망명합니다. 후에 귀화하여 필립 제이슨으로 이름을 바꾸고 미국에서 활동을 하였습니다.
1895년 갑신정변의 동지였던 박영효가 초청하여 국왕의 자문기관인 중추원 고문 자격으로 귀국하여 독립문 건립을 주도합니다. 그러면서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독립협회가 조직되자 여기서도 고문 역을 맡게 됩니다. 그러나 1898년 수구파들의 공격으로 5월 미국으로 강제 추방되고 그해 12월에 독립협회도 해산이 됩니다.
서재필 동상의 오른손에 쥔 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신문인 독립신문입니다.
↑독립관은 원래 중국 사신이 머무는 모화관을 개조하여 만들었습니다. 여기서 조선 독립에 대한 강연회와 토론회를 열어 독립사상을 고취하였습니다. 후에 일제에 의하여 폐쇄 철거되었는데 1997년에 고증을 거쳐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였습니다. 1층은 순국선열의 위패를 모시고 있고, 지하는 학술대회와 기념행사장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3 ·1독립선언기념탑
↑기념탑 병풍석에 적힌 기미독립선언문을 아이들이 읽고 있습니다. 실제로는 한문과 함께 표기되어 있어 읽기가 어려운데도 아이들은 열심히 읽고 있습니다.
↑이제 서대문형무소역사관으로 가는 길입니다.
↑4월의 신록과 영상홍의 붉은 꽃잎이 조화를 이루어 아주 싱그러운 생명력을 뿜어내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길을 가면서도 즐겁게 갈 수 있는 놀이를 생각해 냅니다. 이런 것을 보면 놀이야말로 모든 창의성의 원천이라는 말에 수긍이 갑니다.
↑서대문형무소 바깥 벽과 망루가 보입니다. 서대문형무소는 1908년 10월 21일 일제에 의해 '경성감옥'이라는 이름으로 개소되어 1945년 해방까지 한국의 국권을 되찾기 위해 싸운 의병, 계몽운동가 및 독립운동가들이 수감되었고, 해방 이후에도 1987년까지 서울구치소로 이용되면서 민주화 운동 관련 인사들이 수감되는 등 한국 근현대사의 굴곡을 안고 있는 상징적인 장소이다.'라고 안내문은 말합니다.'
1987년 서울구치소가 경기도 의왕시로 이전하면서 1998년 서대문형무소역사관으로 개관하였습니다. 연간 50만명의 시민들이 다녀가는 역사교육의 명소가 되었습니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출입구에서 매표를 합니다. 초등학생들은 1,000원입니다.
↑잠시 매표하는 동안에도 아이들은 놀이를 즐깁니다. 여기가 어떤 곳인지도 모르고. 옛날 같으면 오금이 저려 얼어붙었을 터인데.
↑서대문형무소역사전시관 1층에는 '서대문형무소 역사실'이 있고, 2층에는 '민족저항실'이, 그리고 지하에는 '지하고문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여기는 1층 역사실입니다. 입구에 서대문형무소의 변천 과정이 년표와 사진으로 제시되어 있습니다. 이어 서대문형무소 모형도를 전시하고 있습니다.
↑최근 발굴된 재소자 신발
↑곽한일 의병장의 칼과 기타 유물. 지팡이 손잡이 끝에 숨겨진 비수가 눈길을 끕니다.
↑ 2층 민족저항실Ⅰ. 당시 수감자들의 시야를 가리기 위하여 사용한 용수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수감자들이 노역시에 도망을 가지 못하게 허리에 채웠던 형구인 '요'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재소자의 양쪽 발목에 채우던 족쇄입니다.
↑ 민족저항실Ⅱ 추모공간. 당시의 수감된 독립열사들의 사진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이 형무소에서 고통을 당하였습니다. 그 중에서 이곳 서대문형무소 사형장에서 다시 돌아올 길 없는 곳으로 떠난 열사들도 400여 분이 넘는다 합니다.
↑지하 고문실. 일제가 취조하는 장면입니다. 당시 일제는 악랄한 고문으로 많은 애국지사들의 몸을 망가뜨렸습니다. 이곳에서 일제의 모진 고문으로 불귀의 객이 된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식민지 지배가 조선에 유익하였다고 하면서 사과하지 않고 버티고 있습니다.
↑일명 먹방으로 불리는 독방. 빛도 들지 않는 좁은 공간에 수감자를 넣어서 심리적으로 불안과 공포를 조성하는 일종의 징벌방입니다.
↑벽관 고문실. 사람이 겨우 서 있을 정도의 공간에 집어 넣어 앉을 수도 누울 수도 없게 한 고문실.
↑경협이가 벽관 속에 갇혀서 실제로 공포를 체험하고 있습니다.
↑지하고문실을 돌아 나오면 옥사전시관입니다. 옥사전시관 입구의 관리실입니다. 당시의 중앙옥사를 전시하여 옥중 생활을 생생하게 볼 수 있게 하였습니다.
↑백범 김구선생과 몽양 여운형선생의 옥중 기록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재소자의 복장
↑이병희 애국지사의 옥중체험이 화면을 통하여 증언되고 있었습니다.
↑중앙옥사의 감시 구조. 2층에 서면 모든 옥사를 감시할 수 있게끔 설계되어 있습니다.
↑해방 이후에 서대문형무소는 서울구치소로 바뀌면서 많은 민주인사들이 투옥된 곳이기도 합니다. 특히 유신체제하에서 긴급조치 위반과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시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이 많이 수감되었습니다.
↑한때 검사였던 한승헌 변호사도 이 구치소에 수감되었습니다.
↑한국 언론의 산 증인인 이영희선생도 반공법 위반으로 이곳에서 몇 년을 보내야 했습니다.
↑중앙옥사를 돌아 나오면 공작사로 안내됩니다. 공작사는 일제강점기에 각 형무소에서 재소자들의 노동력을 동원하여 형무소, 군부대, 관공서 등지에 필요한 물품을 만들어 공급하던 공장을 말합니다. 이곳에서 재소자들은 혹독한 강제노역과 인권유린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일제는 이곳에서 대동아전쟁과 태평양전쟁의 군수물품을 만들어 공급하기도 하였습니다.
위의 사진은 공작사에서 출토된 재소자들의 밥그릇입니다.
↑공작사에서 제조한 벽돌을 아이들이 바라보고 있습니다.
↑사진공작소. 옥사를 배경으로 한 사진찍기 체험을 하고 있습니다.
↑사진을 출력하면 저 파란 배경이 사라지고 대신 감방의 철문이 그 자리를 채웁니다.
↑공작사를 나서서 계단으로 오르면 한센병사가 나옵니다. 1923년 한센씨병에 걸린 수감자들을 위하여 따로 만든 옥사입니다.
↑사형장 가는 길에서 본 옥사. 옥사 양 벽에 대형 태극기가 걸려 있습니다.
↑사형장으로 가는 길목에 추모비가 서 있습니다. 아이들이 추모비 앞에서 큰 절을 하고 있습니다.
↑추모비 앞에서 묵념을 하는 희주
↑사형장 옆의 '통곡의 미루나무'. 사형장 옆에는 1923년 사형장 건립 당시 심어진 미루나무가 있습니다. 사형수들이 마지막 사형장에 들어가기 전에 이 나무를 붙잡고 통곡을 하였다고 합니다. 사형수들이 울지 않으면 나중에 그 가족들이 와서라고 이 나무를 붙잡고 울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통곡의 미루나무'라고 합니다.
90년을 넘게 살면서 이곳 사형장에서 생을 마감한 모든 사람들의 마직막 모습을 빠짐없이 지켜 본 나무입니다. 미루나무의 수명은 100년 정도라고 합니다. 이제 이 나무도 살 날이 얼마 남지않았습니다. 나무인들 자신을 붙잡고 통곡하는 사람들을 마주 대하는 것이 무어 그리 즐거운 일이겠습니까? 더 이상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지 않아 편안하게 삶을 마감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사형 집행대
↑사형 집행시 맞은편에 배석하는 사람들이 앉는 의자입니다.
↑시구문. 사형장 건너편에 있습니다. 일제는 사형을 집행을 하고도 알리지 않고 이곳으로 시신으로 몰래 내 버렸다고 합니다.
↑격벽장. 수감자들이 운동을 하던곳으로 서로 대화를 하지 못하도록 벽을 중간에 세웠습니다.
↑운동을 하는 재소자들을 감시하는 곳
↑유관순 지하감옥 거울방. 거울방 안에 전시된 사진은 이곳에 수감된 여자 재소자들입니다.
↑발굴작업 중에 나온 여성 재소자들의 신발과 버선
↑여옥사에 수감되었던 여성재소자들의 사진입니다.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에 직접 가담하였거나 혹은 옆에서 도왔던 많은 여성들이 여기서 모진 고초를 당하였습니다. 또한 여성노동자들이 늘면서 노동운동에 앞장선 분들도 많이 투옥되었습니다.
↑일제는 1916년 여사(女舍) 지하에 독방을 만들어 비중 있는 여성 애국지사들을 수용하여 가혹한 신문(訊問)과 고문을 하는 장소로
사용했습니다. 그 뒤 1934년경 옥사를 고쳐 지으면서 지하감옥을 매립하였으나 학계와 독립운동 단체들의 건의로 1992년에 독립공원을 조성할 때
발굴·복원하였습니다.
복원된 지하감옥의 전체 면적은 190㎡이며, 사방 1m도 안되는 독감방 4개가 있습니다. 특히 이곳은 유관순 열사가 일제의
모진 고문 끝에 순국하신 곳으로 일명 ‘유관순굴’이라고도 합니다.
↑아이들이 지하감옥의 감방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나오는 길. 형무소 망루가 흉물스럽게 인왕산 봉우리 전경을 가리고 있습니다. 역사관을 나서면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일제강점기가 끝이 났는가? 애국지사들을 고문하던 친일파는 여전히 현실에서 득세하고 있고, 일본은 아직도 식민지지배에 대하여 정식으로 사과하고 있지 않습니다.
↑다음 답사지인 서울역사박물관으로 가기 위하여 버스를 기다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