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학지맥(黃鶴枝脈)
팔공지맥 가산(901.6m) 북서쪽 1.5km지점 851봉에서 서쪽으로 분기하여, 칠곡군 가산면과 동명면 경계를 따라 오계산(466m), 황학산(758m)을 지나 남진하다가 금호강이 낙동강에 합수하는 달성군 다사면 죽곡리 강정마을에서 맥을 다하는 41.1km의 산줄기다.
팔공지맥과 더불어 대구시민의 젖줄이라 할 수 있는 금호강의 북쪽 울타리가 되며, 합수점에서 강 건너편 청룡지맥의 끝점과 마주본다.
(구간거리)
가산~3.2~오계산~1.8~소야고개~3.2~백운산~1.2~황학산~3.1~버등재~1.3~소학산~1.0~요술고개~2.1~자봉산~2.6~장원봉~5.6~신동역~1.3~[4국도]~2.2~경부고속도로~2.3~용재산~1.2~용산~0.7~마천산~1.4~하빈고개~4.1~[30국도]~1.5~죽곡산~1.3~금호강.............41.1km
지형도 도엽 : 25,000 다부 인동 왜관 파산 / 50,000 군위 구미 왜관
황학지맥 1구간
산길 : 가산~황학산~요술고개
거리 : 14.8km
구간거리
황학분기봉~3.2~오계산~1.8~소야고개~3.2~백운산~1.2~황학산~3.1~버등재~1.3~소학산~1.0~요술고개.......14.8km
(접근 : 계정사~3.9~분기봉)
오랜만에 이틀 연속산행을 계획하면서, 주말을 이용해 두 구간으로 마무리 지을 생각을 하고 나섰는데 생각대로 되는 산길이 아니었다. 41km이니 산술적인 거리상으로야 충분히 가능하다 싶었는데 막상 산길에 붙고 보니 짧은 내 다리로는 무리였다. 같은 거리라도 굴곡이 얼마나 있느냐에 따라 드는 힘은 천지차이다. 솔직히 평지길이면 하루에 40km를 못가겠나.
요술고개 이후로는 끊을 곳이 마땅치 않아, 오후 두시 이전에 요술고개 도착이 되면 신동까지 가겠다는 계산이었으나, 요술고개 도착이 20분 가량 지체되었다. 쉽게 접기도, 그대로 내지를 수도 없는 참으로 애매한 시간이다. 물도 모자랄 것 같은 생각으로 갈등을 하는데, 마침 히치가 저절로 이루어지고 보니 자연스럽게 접어졌는데 다음날 진행해보니 결과적으로 잘했다는 판단이다.
자봉산과 장원봉 전후로 산길이 너무 지저분하고 불확실해 그대로 내달렸다가는 더 큰 고생을 할 뻔했고, 설사 신동까지 갔더라도 맥빠진 두 다리로 다음날 합수점까지의 20km를 어찌 갈 수 있었겠냐는 생각이 든다. 교통비 조금 아끼려고 몸을 혹사하지 말자. 그 아낀 돈 이상으로 비싼값을 치를지 모르고, 다리수명을 더 단축시킬 수 있음을 유념하자. 산에서의 만수무강을 위해서는 물팍 아끼는게 최우선이다.
계정사 (230m)
전에는 다비암이었다가 이름을 바꿨다는데 네비에 계정사를 입력하니 군소리 없이 안내를 한다. 밤 10시쯤 도착을 하고, 대여섯대는 충분한 주차장 한켠에 차를 대고 그대로 이불을 폈다. 절집은 이미 깊은 잠이 들었고 막다른 길이라 들어오는 차도 없어 고요한 밤 깊은 밤 아무 방해없이 잘 보냈다.
알람과 함께 울리는 목탁소리에 잠을 깨, 계란하나 까먹고 출발을 한다. 혹시나 새벽공기가 추울까 싶어 옷을 더 챙겨왔지만 아직은 푸근한 날씨다. 산으로 계속 올라가는 임도길을 따르다가 방향이 어긋 나는거 같아 돌아오고, 절 앞에서 우측 비탈길 위로 올라간다. [가산바위 3.5km] 이정표가 있다.
이 길이 맞나 싶기도 한 길을 5분 올라가니 우측 아래에서 올라온 수렛길 만한 길에 합류한다. 길은 넓은데 바닥은 크고 작은 돌투성이다. 도립공원 시멘트 말뚝도 보인다 [가산바위3km]
개울을 왼쪽으로 건너가니 넓은 길은 곧장 가고, 우측 비탈로 올라붙어 오름을 계속하니 우측에 작은 폭포가 있다. 지금은 바짝 말랐지만 한여름에는 제법 찾을만한 계곡이겠다. 경사는 갈수록 심해진다. 길가로 축대가 쌓인걸 보니 예전부터 학명리 사람들이 가산성에 오르던 길이었을 것이다.
가산바위 860m까지 고도 600을 넘게 올리는 작업이다. 첫 출발이니 씩씩하게 올라간다만 긴 오름이다보니 등판에 땀은 줄줄 흐른다. 돌아보면 계정사 가로등불만 반짝거리는 어둠이다. 한 시간이 더 걸려 산성에 올라선다.
06:10 가산바위
돌 축대를 올라서니 기둥에 걸려있는 간판은 [장군정]이고 뒷면은 [학명리3.8km]다. 가산바위 바로 아래다. 다시 내려와야 하지만 예까지 와서 아니 오를 수 있나. 철계단을 통해 올라간다.
넓은 가산바위에서 내려다보니 도심지 불빛이 하나둘 꺼지는 시각이고, 능선을 짚어보니 계정사에서 가산바위 바로 아래로 오르는 최단코스로 올라왔다. 동녘이 벌게지고, 서쪽 건너편으로 백운산과 황학산 능선도 조금씩 밝아지며 본래 모습을 드러낸다.
10여분 머무르다 내려간다. 산성 성벽을 따라 북으로 가면 작은 암문 형태의 서문을 지난다. 이 길은 팔공지맥하면서 걸었던 길이다. 소야고개로 내려가는 등산로는 이곳 서문을 통해서 내려가도록 되어 있지만, 그대로 지나쳐 분기봉에 오른다.
(가산바위)
(모래재 임도)
황학지맥 분기봉 (851.5m)
가산산성이 끝나는 지점. 비로소 황학지맥이 시작되는 곳이다. 뚜렷한 등로는 모래재로 곧장 가고, 분기봉은 왼쪽으로 몇발 올라서면 나무에 둘러싸인 볼품없는 봉우리. 준희님의 팻말이 걸려있다. 그대로 내려간다. 길흔적이 있는둥 마는둥 급비탈을 10분정도 미끌리며 내려오면 서문에서 내려온 일반 등산로와 만난다.
긴급구조 표지목 <팔공03-04>과 이정표 [모래재3.2 가산바위1.1km]가 연이어 나오고, 분기봉에서 20분 후 모래재로 이어지는 임도다. [모래재2.7km]. 북쪽 모래재에서 온 임도가 끝나는 부분인데 넓은 공터로 차도 올라올 듯해 보인다.
펑퍼짐한 약565봉에서 조은길은 왼쪽으로 내려가고 지맥은 정면이다. 오계산을 앞에 두고 그대로 올라갈 줄 알았더니 400정도까지 내려앉은 다음 다시 오른다. 안부에는 막걸리병 등의 쓰레기로 지저분하다.
오계산(午鷄山 △466m)
최신 2만5천 지도에는 牛鷄山(우계산)으로 표기되어 있으나 한자 표기오기로 보인다. 오래된 지도에는 午鷄山으로 나온다. 잡풀이 어수선하게 자란 가운데 받침없는 삼각점 기둥만 박혀있다. 몇걸음 지난 자리에 배낭 내리고 아침밥을 먹는다. (~08:02)
오계산부터 차소리가 요란하게 들리고, 내림길에서는 유학산과 황학산 능선이 보인다. 봉분에 잔디가 다 벗겨진 묘에서 직진하여 내려가고 395봉 지나면 소야고개의 공장건물과 그 뒤로 대구예술대학 골짜기도 보인다.
송전철탑과 원형 시멘트구조물이 있는 참호를 지나 곧게 가는 능선에서, 소야고개 내려서는 분기점은 지나치기 쉽게 언뜻 식별이 안되는 곳이다. 가산면과 동명면의 면계를 따라 왼쪽으로 꺾어야 된다.
(오계산)
(소야고개)
내림길에서 T자 갈림길 나오면 왼편으로 내려가야 해주최씨 문중묘터를 지나 도로에 내려서게 되는데, 우측으로 눈에 보이는 삼거리를 보고, 우측으로 돌아 내려가니 국도변의 높은 철망 울타리가 가로 막는다. 낮은 울타리와 이어지는 부분에서 억지로 타넘어 내려오니 소야고개 횡단보도 신호등 앞이다. 어차피 왼쪽으로 해서 해주최씨 묘터로 내려가도 도로의 교통량이 많아 무단횡단이 어려워 이쪽 횡단보도로 올 수밖에 없으니 질러온 결과이긴 하다만, 울타리 타넘는 일이 쉽지 않다.
08:33 소야고개 (다부고개 230m)
왕복 4차선의 5번국도로, 우리나라 전체 산줄기에서 황학지맥이야 보잘 것 없는 지맥일지 모르나, 이 고개만큼은 그냥 지나칠 수 없을 만큼 의미가 큰 곳이다. 고개 북쪽 아랫마을이 그렇다. 경북 칠곡군 가산면 다부리.
삼국시대부터 왕건과 견훤이 대권의 길목에서 혈투를 벌인 요충지였고, 병자호란 임진왜란 6.25를 거치며 매 고비마다 치열한 전투를 겪은 곳이다. 또한 이 고개는 조선시대 영남지방에서 한양으로 가던 옛길 영남대로 길목이다. 많은 역과 관원 행상들이 묵어가는 주막촌이 형성되고 돈 많은 거상들이 몰려들면서 부자가 많은 곳이라 하여 다부원(多富院)이란 이름이 생겼단다. 산경표(蘇耶峙)와 대동여지도에도 지명이 표기된 곳이다.
지도에는 대부분 소야고개로 표기되어 있다만 택시기사는 다부고개라 해야 알아들었다. 유래도 거창하고 교통량도 많지만, 정작 우리에게 유용한 주막이나 마트는 없다.
횡단보도를 건너가면 이전해 간 백선엽장군 호국구민비터가 남아있다. 최근 친일인명부에 등재가 되기도 했지만 6.25를 치르면서, 특히 이곳 다부동 전투에서의 공헌은 높이 받들어야 함에 분명하다.
고개 정점으로 돌아가다가 콘크리트 방벽으로 올라가니 골짜기를 통해 마루금에 복귀가 되고, 과수원에 농가 한 채 있다. 급하면 물은 보충이 되겠다. 200m 가량되는 실봉산 오름이 만만찮다. 길도 불확실할뿐더러 벌목으로 어수선한 비탈이다.
09:03 실봉산 (×458m)
20분간 숨이 차는 급비탈을 꾸준히 밟아대며 올라선 정상부에는 아무런 표시물도 없다. 우측 길이 더 뚜렷하나 지맥은 왼쪽이다. 넓게 퍼진 벌목지대인데 그 사이로 길 흔적을 찾으며 내려간다.
공원묘지관리사무소를 향해 내려가니 우측으로 녹쓴 철조망이 이어지다가, 철망이 정면을 막아 그대로 타넘었다. (왼쪽으로 돌아야 했다. 공원묘지 안쪽으로 떨어진다)
농장(과수원) 안쪽이고, 수돗물이 있어 빈병에 보충도 했는데 농장 밖으로 나갈 길이 없다. 철조망 울타리가 삥 둘러쳐 있고 넘어갈만한 울타리가 아니라, 농장 진입로를 따라 내려가니 우측으로 자꾸 벌어진다. 급기야 농장 정문도 자물통이 채워져 있어, 농장 안에 꼼짝없이 갇힌 꼴이다. 다시 한번 월담한다. 누가 보기라도 한다면 보통 망신이 아니다. 정문에는 [신창농원] 간판이 걸려있다.
(실봉산)
(현대공원묘지)
공원묘지 진입로를 따라 올라가 ‘재단법인 현대공원 제2묘원’ 정문으로 들어간다 ‘현대공원’ 대형간판이 있는데. 이 간판은 고속도로에서도 보이는 그 간판이다. 간판아래에 서면 고속도로가 잘 보인다. 발 아래로 중앙고속도로 다부터널이 지나간다.
‘현대공원’ 간판에서 산길을 찾는데 도무지 흔적이 없다. 이리저리 헛돌다가 대충 밀고 올라가니 여기도 벌목으로 어지럽다. 벌목잔해를 우측으로 피해 돌며 겨우 길 흔적을 찾아냈다. 다시 한번 까꼬막에 힘을 빼며, 한발한발 숨차게 올라간다.
첫봉은 470쯤 되니 실봉산보다 더 높다. 그대로 이어졌으면 좋으련만 또 떨어진다. 대구예술대학에서 운동회를 하는지 경쾌한 음악소리와 구령소리가 들린다. 암봉으로 이루어진 다음봉에 오르면 우측으로 한번씩 고속도로가 조망된다.
그 높이에 겁을 먹었지만 막상 백운산은 완만하게 지루할 만큼 길게 오른다. 편편한 지능선이 여러가닥 뻗어내려 내려올 때는 능선잡기가 쉽지 않겠다. 능선에 올라서면 정상부는 남쪽으로 조금 벗어나 있어 갔다가 되돌아와야 된다.
10:48 백운산 (△713m)
억새풀이 둘러싼 시멘트바닥의 헬기장이다. 정상석 대신 문패같은 표지판이 걸려있고, 지도에 표기된 삼각점을 이리저리 찾아보았으나 보이지 않는다. 정면(남)으로 매봉산(628m)으로 가는길도 뚜렷하고 리본도 달려있다.
여기까지 가산면과 동면면계를 따라 왔고, 능선너머는 지천면이니 백운산은 삼면봉이 된다. 다시 왔던길을 되돌아 북으로 향한다. 묵은 헬기장을 하나 지나고는 다시 아래로 곤두박질친다.
왼쪽 건너편으로 뾰족한 소학산이, 그 너머로 멀리 금오산이 아스라하다. 정면 황학산에는 산불감시초소가 있다. 150m 가량을 떨어지고 우측으로 대구예술대학에서 올라온 임도가 스쳐 지나는 안부에 떨어진다. 임도는 황학산 허리를 돌아가는 그림이라 그대로 정면 비탈로 붙는다.
다시 코를 박는 까꼬막인데 오늘 초장부터 마칠 때까지 오르면 내리고, 내리면 다시 무섭게 올라치는 요동치는 산길이다. 황학산 비탈길은 차마 한번에 다 못오르고 정상 직전에 퍼져 앉아 길게 쉬었다 올라간다. 암릉으로 이루어진 전위봉은 두손 두발 다 뻗어야 오를 수 있다.
(백운산정상부)
(소학산)
(가산)
(유학산)
11:56 황학산 (黃鶴山 ×758m)
정상부 주위를 말끔히 벌목을 해놓고, 타워형 산불감시초소가 있다. 그 기둥에 [칠곡 황학산] 나무팻말이 달려 있을 뿐 정상석도 삼각점도 없다.
조망은 빼어난다. 서쪽 건너편에 마치 피라미드처럼 뾰족한 소학산, 멀리 금오산이 희미하고 버등재 우측 유학산, 동으로는 가산과 아침에 올랐던 가산바위가 보인다. 그 뒤로 팔공산 윤곽도 알아볼만 하다. 가을 냄새는 물씬 풍긴다만 단풍은 아직 멀었다. 이파리가 작은 싸리나무와 개옻나무만 노랗고 빨갛게 물들었다.
황학산. 지맥 최고봉이다. 현 25지형도에는 산이름 표기없이 ×758로 되어 있으나, 구5만 지형도에는 黃鶴山으로 표기가 되어 있다.
행정구역 |
경상북도 칠곡군 지천면 황학리 | ||
지명종류 |
산 |
고시일자 |
1961-04-22 |
고시지명 |
황학산 |
한자 |
|
유래 |
누런 학이 있었다 하여 황학산이라 함. |
산경표와 대동여지도에도 황학산 이름이 나오는데, 여기서는 주맥(主脈)을 모두 북쪽 유학산(산경표 표기는 유악산), 천생산으로 잇고 있다.
황학산 내림길은 거칠지도 않으면서 푹신하게 내려앉는다. 도중에 도토리를 줍는 아줌마부대를 만나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길가에 물병을 여기저기 갖다놨다. ×699봉 직전 안부에는 황학산 오르기 전에 만났던 임도가 올라온다. 임도는 앞의 ×699봉을 왼쪽으로 돌아 버등재로 내려간다.
×699봉을 지나니 뚜렷한 길은 우측 다부동쪽으로 내려가고, 지맥은 정면인데 길이라고는 없다. 철쭉 밀림을 헤집으며 방향만 맞춰 내려가니 능선이 잡히고 아래로 철탑이 보인다. 철탑을 지나면 직전 임도가 돌아내려오고 길은 자연스레 임도에 합류한다.
한동안 (약 500m) 임도가 마루금이고, [지천황학~가산다부] 임도시설공사 표석이 땅바닥에 누워있는 곳에서 마루금은 정면 산으로 올라간다마는, 나는 그대로 임도행이다. 필경 버등재에서 만나게 되리라 짐작하면서.
MTB를 타고 사람 셋이 올라오는데, 그네들에게는 오르막이다보니 패달은 죽어라고 돌려대는데 자전차는 도무지 나아가지 않는다. 아주 고단 기어를 넣었나 보다. 임도에서 보는 소학산은 하늘을 찌를 듯이 뾰족하게 솟아있다.
12:50 버등재 (420m)
임도는 버등재 정상에서 정확하게 마루금과 다시 만난다. 기가 차게 맞아떨어졌다고 할까. 2차선 아스팔트가 넘어가는 923번 도로다. 고갯마루 양쪽은 높은 절개지에 철조망 울타리가 쳐져있어 철조망을 피해 남쪽으로 내려가 방벽을 뛰어 올랐다. 다닌 흔적이라고는 없다.
도로를 따라 좀 더 남쪽으로 내려가면 작은버등재로 올라가는 수렛길(소학산 일반등산로)이 있는데 진작에 알았더라면 그리 갔을 것이다만 미리 알 수가 있나.
작은버등재
×452봉을 올랐다 내려가니 묵은 고갯길이고 절개지가 내려갈 수 없을 만큼 높다. 왼쪽으로 피해 내려가니 버등재 도로에서 바로 올라온 널찍한 등산로가 나온다. 버등재 도로에서 소학산 정상까지 계단까지 내놓고, 등로가 널찍하게 확보되어 있다. 오히려 황학산보다 더 많이 찾는 산인 모양이다.
다시 소학산 오름길이 시작된다. 정말로 오늘은 한 봉우리도 쉬이 내주지 않을 모양이다. 그나마 항학산에서 보던 만큼 그리 급경사는 아니다만, 다리씸이 딸릴 시간인지라 그 힘듦은 마찬가지다. 우측 마을로 내려간 뚜렷한 고갯길이 있는 안부를 지나 올라서니 공터가 있고, 한켠에 큰 바위하나 눈길을 끌며 그 가운데 돌 틈을 뚫고 나온 굵은 소나무 하나가 용해 보인다.
(버등재)
(소학산)
13:48 소학산 (巢鶴山 ×622m)
버등재에서 거진 한 시간 땀을 빼고서야 겨우 올라섰다. 바위 위에 세워놓은 정상표시봉과 팔각정이 있다. 정상표시 말뚝에는 [소학봉 629m]로 적혀있다만 만사가 귀찮은 지라 팔각정 의자에 퍼져 앉았다.
소학산에서 내려갈 때는, 지도 확인없이 아무생각 없으면 무조건 직진하겠다. 서쪽으로 이어지는 능선길로 가는게 아니라 팔각정에서 바로 남쪽으로 떨어져야 된다. 갈림길 흔적도 없다. 아주 급비탈을 줄줄 미끌리며 한참 내려가니 다소 완만해지고 소나무 숲길을 이리저리 미로찾기 한다. 망주석을 세운 안동권공을 지나면 차소리가 한번씩 들린다.
14:20 요술고개 (330m)
여기까지 21.5km 찍혔다. GPS(Triton)의 Odometer가 지맘대로 리셋되더니 오늘은 어쩐일인지 제대로 작동을 하는거 같다. [요술의고개, 魔幻之路(마환지로), Hill of Magic] 3개 국어로 간판이 걸려있다. ‘한골재’라고도 한다는데, 안내문을 읽어보고 도로를 보면, 어떻게 보면 그렇기도 하겠다 싶으나, 택시기사님 말씀마따나 별것도 아닌거 가지고 광고만 요란하게 호들갑을 떠는 그런 꼴이다. 실제로 잠시 앉아있는 동안 차가 두어대 멈추더니, 안내문대로 따라 해보고는 실망하고 돌아서는 표정이 역력하다.
요술고개
경상북도 칠곡군 석적읍 망정리와 지천면 백운리를 잇는 칠곡군 군도(郡道) 5호선은 1999년에 개설된 도로이다. 이 도로 구간 중 두 면(面)의 경계지점인 한골재 정상 부근의 180m 구간을 요술의 고개 또는 요술고개라 한다. 이곳에서는 실제 경사도가 낮은 곳이 경사도가 높은 곳보다 시각적으로 높게 보이는 현상이 일어난다. 다시 말해 육안으로 보기에 내리막길인 곳이 실제로는 오르막길인 것인데, 이런 착시현상은 주변 지형과 지물로 인해 생기는 것이다.
도로의 내리막이라 생각되는 곳에 승용차를 세우고 기어를 중립에 둔 후 시동을 끄면 차가 서서히 오르막인 뒤로 올라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요술의 고개 경사도는 2.388%이다. 산 중턱 고갯길에 있어 경치가 뛰어나며, 차량소통도 뜸한 편이다. 제주를 비롯해 전국 곳곳에도 도깨비도로 또는 신비의 도로라 불리는 착시현상을 일으키는 도로들이 있다.
(요술고개)
(내리막처럼 보이는 오르막)
짐작한대로 2시 이전에 도착했어야 시간상으로도 가능했지만, 이 구간에서의 가산 실봉산 백운산 황학산에 이어 소학산까지 어느 봉우리 하나 쉽게 내주는 법이 없어 기력이 완전소진된 상태다. 연약한 내 다리로는 여기까지가 한계다. 이 상태로 용을 쓰며 신동까지 갔다가는 내일 산행이 온전할리 없다.
가나마나 갈까말까 갈등을 하고 앉았는데, 아가들 데리고 요술고개 체험하러온 대구의 젊은아빠와 대화를 나누다가 자연스레 그 차에 얹혀 다부IC까지 택배가 된다. 다부IC 바로 옆에 있는 다부동전적기념관을 둘러보고 택시 불러 계정사로 차 가지러 갔다.(8,000원)
6-25 다부동 전투
낙동강전투에서 대구를 사수하기위한 마지막 방어선으로, 한달여 동안 뺏고 뺏기며 피아 수만명이 산화한 곳이다. 다부동이 적의 수중에 넘어가게 되면 대구 전역이 지상포의 사정권 내에 들게 되므로 전쟁의 승패를 가름지을 만큼 다부동은 중요한 곳이었다. 유학산에는 최근까지 당시 전투의 흔적인 파편들과 유해가 발굴된단다.
동명읍에는 목욕탕도 있다. 목욕탕에서 벌거벗은 채 프로야구 프레이오프 SK와 두산전을 다 보고 나왔다. SK가 2연패 후 1승을 올리는 장면이다. 돼지국밥 한 그릇 사먹고도 시간이 남아, 옛날식 시골다방에 두어시간 죽친 다음에 지천으로 넘어간다.
마루금이 불확실한 신동초등학교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보고, 바로 옆 농협 뒷마당에 차를 댔다.
(다부동 전적기념관)
팔공기맥 방어선에서는 8월 초부터 9월 중순 사이 50여 일 간에 걸쳐 시체로 호를 쌓는 사투가 벌어졌다. 때로는 아군이 그 선 북방에 방어선을 친 적도 있고, 때로는 적이 기맥 훨씬 이남으로 진출한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아군은 팔공기맥선을 지키려 애썼으며, 그것은 한 달여 뒤인 9월15일 있을 미군의 인천상륙에 맞춰 공세로 전환하겠다는 작전계획에 따른 것이었다.
반면 북한군은 8월15일까지 부산 점령을 마치겠다는 목표 아래, 한발 앞서 '8월 공세'를 시작했다. 그때 먼저 뚫린 것은 동부전선. 8월5일의 일이었다. 적12사단이 아군 방어선을 와해시키고 팔공기맥의 꼭두방재 구간을 지나 청송에서 31번 국도를 따라 남진한 뒤 포항 기계까지 진출했다. 뿐만도 아니어서 그 동쪽 구간을 맡았던 적5사단은 7번 국도를 따라 영덕까지 내려왔다. 그리고 11일엔 드디어 포항이 실함됐다. 영덕에서 싸우다 퇴로까지 상실한 국군3사단은 바다를 건너 구룡포로 철수해야 했다. '흥남 철수'가 영덕에서 먼저 선보인 셈.
그럴 때 서부전선에서는 왜관이 위협받고, 328고지·숲데미·유학산 등의 여러 봉우리에서는 사람으로 방패 겸 공격 무기를 삼는 처절한 공방전이 계속됐다. 적군의 목표는 대구 점령, 핵심은 소야재였다. 그것은 상주에서 오는 국도25호선과 의성-군위에서 오는 국도5호선이 대구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꼭 거쳐야 하는 관문. 그래서 탱크나 중무기들을 앞세워 남쪽으로 진격하려던 북한군은 8월 공세 때 전투병력의 절반 이상을 그 돌파 작전에 투입했다. 이곳의 위기가 최고조에 이른 것은 8월15일부터 며칠 간이었다. 이때 유학산은 완전히 탈취 당했고 오계산도 위기를 맞았으며, 적은 급기야 다부리 남쪽 봉우리까지 진격했다. 다급해진 아군은 미군 2개 연대와 국군 3개 연대를 추가 투입해 불을 꺼야 했다.
그렇게 해서 소야재는 방어됐지만, 적은 아군의 방어가 느슨한 '위천지맥' 쪽으로 병력을 투입해 가산을 뚫고 말았다. 8월17일을 전후해서 적 1개 연대가 방어 병력 없이 비어 있던 가산을 점령한 것. 18일 새벽에는 그 분견대가 대구 노곡동 금호강 기슭까지 내려 가 대구역에 82mm 박격포 7발을 발사, 역무원 1명이 숨지고 시민 7명이 부상했다. 마침 정부가 부산으로 이동하던 그 날, 포격으로 피난령까지 내려지자 대구는 대혼란에 빠졌다. 그럴 때 "경찰이라도 남아 대구를 사수하겠다"며 피난령을 철회하고 길거리 시민들을 설득해 대구를 안정시킨 사람이 조병옥 내무장관이었다.
아군은 그 후 가산 일대에 부대를 속속 투입하고 폭탄 40톤을 쏟아 부어 사태를 일단 마무리지었다. 북사면 가산리 쪽으로 후퇴하던 적군 2개 대대는 마침 그 퇴로에 고립돼 있던 국군 1개 대대와 죽기 아니면 살기 식 전투를 벌여 양측 모두 궤멸 상태에 빠졌다. 가산이 회복된 것은 8월27일. 그에 앞선 23일에는 유학산의 모든 고지가 처음으로 아군에게 확보되기도 했다. 전체적으로 적의 8월 공세는 8월20일을 고비로 한풀 꺾였던 것으로 정리돼 있다. (대구매일신문 박종봉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