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가 여러분을 향하여 안면에 환한 미소를 가득 안고 바로 보고 있다면 어떤 마음이 들겠습니까? 그 사람이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고, 놀라운 능력과 권능 있는 사람이라면 어떠하겠습니까? 참 행복하지 않을까요? 참 좋지 않을까요?
여러분은 언제 환한 미소 띤 얼굴로 사람을 바라봅니까? 아이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대부분 얼굴에 미소를 띱니다. 그래서 아기를 愛氣(애기)로 부르기도 합니다. 사랑의 기운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미소로 누구를 바라보는 것은 그에게 사랑의 기운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 관한 성화의 종류는 참 다양합니다. 근엄한 모습의 예수님, 가시관을 쓰시고 고통스러워하시는 예수님, 인자한 모습의 예수님, 목 젓이 나올 정도로 고개를 젖히고 웃으시는 예수님, 만면에 가득한 웃음으로 웃으시는 예수님의 사진 등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모습의 예수님을 좋아합니까? 저는 그 어떤 예수님의 사진보다 만면에 가득한 웃음으로 나를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좋아합니다. 예수님이 나를 그런 모습으로 바라본다고 생각하면 힘이 납니다.
나를 가장 잘 아시고 가장 사랑하시는 분이 나를 그렇게 보고 있다면 어찌 낙망할 일이 있으며 힘들 일이 있겠습니까? 하지만 어떤 때는 쑥스럽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기대에 전혀 못 미치는 나를 보시고 웃고 계시니 미안하고 송구스럽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 사진을 볼 때마다 예수님처럼 나도 웃어야 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이 나를 보시고 웃을 때 나도 거리낌없이 웃어야겠다고 결심도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예수님이 나를 보시고 웃을 때 같이 웃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노아는 하나님께서 그의 삶을 보면서 웃으셨습니다. 8절에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공동번역 성서에 보면 "노아만은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리빙 바이불에 보면 "노아는 주님의 기쁨이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다 같은 말이 아닙니까? 은혜를 누구에게 베풀겠습니까?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지 않겠습니까? 마음에 드는 사람이 기쁨을 주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민수기 6:25절을 보면 대제사장의 축복 선언문이 나오는데 그 중에 이러한 말씀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웃으시며 너희를 귀엽게 보아주시고"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보시고 웃으시며 귀엽게 보아주신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나님을 미소짓게 하는 것이 우리 삶의 목표입니다. 노아는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당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기쁨을 위해서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기쁨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 한 사람도 찾을 수 없어 사람을 지으신 것을 후회하셨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자신을 미소짓게 만드는 한 사람을 발견하였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노아는 주님께 기쁨이었다" 우리도 그런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살아야 그런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1.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때 하나님은 미소짓는다.
노아가 이 세상에 살 때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자신을 사랑했습니다. 죄악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오직 그들에게서 나는 것은 썩은 냄새뿐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류를 만드신 것을 후회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노아는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는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성경은 "그 당시에 노아만큼 올바르고 흠 없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이었다."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가장 보고 싶어하시는 모습은 올바른 관계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놀라운 진실은 우리의 창조주가 우리와 교제하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기 위해서 만드셨고, 우리가 그 사랑을 그분에게 되돌려주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의 제사를 원하는 것이 아니고 너의 사랑을 원한다. 나는 너의 제물을 원하는 것이 아니고 네가 나를 더 알기를 원한다"(호6:6) 이 구절에서 하나님의 열정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깊이 사랑하시고 우리 또한 하나님을 사랑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을 알아가고 그분과 함께 시간을 보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 우리의 삶의 가장 큰 목적이 되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 어떤 것도 이보다 중요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가장 중요하고 큰 계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마22:37-38)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을 온전히 신뢰할 때 미소지으십니다.
노아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두 번째 이유는 그가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했습니다. 이해되지 않는 상황 속에서도 그는 하나님을 신뢰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를 들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순종해서 그의 가족을 구원한 방주를 지었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세상이 잘못되어 가고 있음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하나님과 의의 관계를 맺는 사람이 되었습니다."(히11:7)
이 장면을 상상해 보십시오. 어느날 하나님이 노아에게 오셔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인간들에게 실망했단다. 이 세상에 나를 생각하는 사람은 너 밖에 없구나. 하지만 노아야, 내가 너를 바라볼 때 나는 미소를 짓는다. 너의 삶을 기뻐하기 때문에 나는 세상에 홍수를 내릴 것이지만, 너의 가족을 중심으로 새롭게 시작하려고 한다. 나는 너의 동물을 구할 수 있는 커다란 배를 네가 만들기를 원한다."
노아가 의심할 수도 있었을 세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첫째 노아는 비를 한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홍수가 오기 전에 이 땅의 모든 물은 하나님이 지면의 샘을 터뜰서 주셨기 때문입니다.(창2:5-6) 그래서 그들은 무지개를 본 적도 없습니다.
둘째로 노아는 가장 가까운 바다에서부터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가 배를 만드는 법을 배운다 하더라도 그 배를 어떻게 물가로 옮길 수 있겠습니까? 세 번째 모든 동물을 모으고 돌봐야 했습니다.
하지만 노아는 불평하거나 핑계를 대지 않았습니다. 대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했는데,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삶에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아신다는 믿음을 갖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약속을 지키시고, 문제에 부딪혔을 때 도와주시며, 불가능한 일을 해결해주시기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드을 기뻐하시는도다"(시147:11)
노아가 방주를 다 짓는데 120년이 걸렸습니다. 그는 분명히 힘든 날들을 보냈습니다. 해가 거듭되어도 비가 올 기미는 보이지 않았고, 그는 '하나님이 자기에게 말을 한다고 믿는 미친 사람'이라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노아 뿐 아니라 자녀들도 모양이 갖추어지는 배 때문에 창피했습니다. 하지만 노아는 계속 하나님을 신뢰했습니다.
우리의 삶의 영역 가운데 어떤 부분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까? 신뢰는 예배의 모습입니다. 자녀들이 부모의 사랄과 지혜를 신뢰할 때 부모가 기뻐하듯, 하나님도 우리의 믿음에 기뻐하십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히11:6)
하나님은 우리가 마음을 다해 순종할 때 미소지으십니다.
전 세계를 뒤덮은 홍수에서 동물을 구해내는 것은 운송 방법과 그 외의 구체적인 사안들에 많은 신경을 써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이 처방해주시는 대로 이루어져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노아야, 네가 원하는 대로 아무 배나 지어라"고 하지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방주에 실을 동물 각각의 수뿐 아니라 방주의 크기, 모양 그리고 재료까지 세세하게 지시하셨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노아의 반응은 이러합니다. "노아가 그와 같이 하되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창6:22) 노아는 하나의 지시 사항도 어기지 않고 모든 것을 정확하게 순종했습니다. 이것은 온 마음을 다한 것입니다. 어찌 하나님이 노아를 기뻐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노아를 기뻐한 것은 당연합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에게 큰 배를 지으라고 명하셨다면, 우리는 그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반대를 하며 조건을 달지 않았겠습니까? 노아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진심으로 하나님께 순종했습니다.
진심어린 순종이란 하나님이 명하신 것에 조건을 달지 않고 지체 없이 무엇이든 행하는 것입니다. 미루지 않아야 합니다. "기도해보겠습니다"라고 말하지도 않아야 합니다. 망설임 없이 바로 행해야 합니다. 자녀가 나중에 하겠다는 말이 사실은 하지 않겠다는 뜻임을 모든 부모는 압니다.
하나님은 우리엑 설명을 하시거나 명하신 것에 대한 이유를 말해줄 필요가 없으십니다. 이해는 나중에 하더라도 우선 순종해야 합니다. 즉각적인 순종은 평생 성경에 대해 토론하고 공부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가르쳐줍니다. 사실 먼저 순종하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는 명령도 있습니다. 순종은 이해의 열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께 부분적인 순종을 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순종하기 좋은 명령들을 취사 선택하고 싶어합니다. 좋아하는 명령만으로 목록을 만들어 그것들만 순종하고, 부당하고, 어려우며, 비용이 많이 들고, 혹은 사람에게 인기를 끌 수 없는 명령들은 건너 뜁니다.
교회는 가겠지만 십일조는 내지 않겠다. 성경을 읽긴 하겠지만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은 용서하지 않겠다. 하지만 이러한 부분적인 순종은 불순종입니다. 진심으로 하는 순종은 기쁨마음으로 열심을 가지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기쁜 마음으로 순종하라"(시100:2). 이것이 다윗의 자세였습니다. "주님 제게 무엇을 해야 할지 말씀해 주십시오. 그대로 하겠습니다. 제가 사는 동안 진심으로 당신께 순종하겠습니다."(시119:33)
하나님은 우리가 계속해서 당신을 찬양하고 감사 드릴 때 미소지으십니다.
마음에 우러나오는 찬양을 받고 감사의 인사를 받는 것만큼 기분 좋은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도 이를 좋아하십니다. 우리가 경의와 감사를 표할 때 그분은 미소지으십니다. 노아는 찬양과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습니다.
세상의 그 누구도 예배하지 않을 때 노아는 하나님께 예배드렸고, 홍수에서 살아남은 이후 그가 가장 먼저 한 행동 또한 산 제물로 하나님께 감사드린 것이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노아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 중에서와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취하여 번제로 단에 드렸더니"(창8:20)
예수님의 희생으로 우리는 더 이상 노아처럼 동물로 제사를 드리지 않습니다. 대신 하나님께 '찬미의 제사'(히13:5)와 '감사의 제사'(시116:17)를 드리라고 성경은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예배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찬양하고, 그분이 우리를 위해 하신 일들에 대해 감합니다. 다윗은 찬양했습니다. "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광대하시다 하리니 이것이 소 곧 뿔과 굽이 있는 황소를 드림보다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함이 될 것이라"(시69:30-31)
우리가 하나님께 찬양과 감사를 드릴 때 놀라운 일들이 벌어집니다.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면 우리 마음도 기쁨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어머니의 커다란 기쁨 가운데 하나는 자녀들이 자신이 준비한 음식을 먹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어머니는 자녀들이 만든 음식을 먹는 것을 즐거워하면 할수록 더 기뻐합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도 음식을 먹으며 즐거움을 표현하면 더 맛있어집니다. 이렇게 하면 음식을 만든 분이나 먹는 사람 모두가 다 기뻐하게 됩니다.
예배도 역시 이와 같은 상호 작용을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해 주신 것들에 기뻐하고 우리는 그 즐거움을 하나님께 표현할 때 하나님 또한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이는 우리에게 더 큰 기쁨을 줍니다. 시편을 이렇게 말합니다.
"의인은 기뻐하여 하나님 앞에서 뛰놀며 기뻐하고 즐거워할지어다"(시68:3)
하나님은 우리가 능력을 사용할 때 미소지으신다.
홍수 이후에 하나님은 노아에게 다음과 같이 간단한 지시를 내리셨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무릇 산 동물은 너의 식물이 될 것이라 채소같이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주노라"(창9:1-3)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네가 평상시와 같이 살 때가 되었다. 그러니 이제부터 내가 인간에게 부여한 일들을 수행하여라. 배우자와 사랑을 나누어라. 아이를 낳아라. 가정을 꾸려라, 곡식을 심고 그것을 먹어라. 인간의 방식으로 살아라. 나는 너희들을 이렇게 만들었다. "
우리가 성경을 읽고, 교회에 가며, 기도하고, 믿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같은 '영적인' 활동을 할 때에만 하나님이 우리를 바라보며 기뻐하실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 삶의 다른 부분들에 대하여는 관심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사실 하나님은 우리가 일을 하든, 놀든 쉬든, 혹은 먹든 우리의 삶의 모든 구체적인 부분을 바라보며 기뻐하십니다. 우리의 움직임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십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께서 사람의 갈 길을 정하시고 삶의 모든 부분에 대해 기뻐하신다"(시37:23)
죄를 제외하고서, 사람이 하는 모든 활동이 찬양의 자세를 가지고 행해질 때 하나님께 기쁨을 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농사를 짓고 직장에 나가고 가정을 꾸미고 가사 일을 해야 합니다.
자식을 자랑스러워하는 부모처럼 하나님도 당신이 주신 재능과 능력을 발휘하는 우리의 모습에 특히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일부러 우리 각자의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농사를 짓는 일이건 그것이 사람을 가르치는 일이건 그것이 물건을 만드는 일이건 다 하나님이 기
뻐 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능력을 숨기거나 다른 사람처럼 되기 위해 노력할 때는 하나님께 영광이나 기쁨을 드릴 수 없습니다. 우리의 모습으로 있을 때만 하나님께 기쁨을 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모습의 어떤 부분을 거부할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 지혜와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주권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보시는 것은 우리 마음의 태도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우리의 가장 큰 욕구입니까? 이것이 바울의 삶의 목표였습니다.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고후5:9)
우리가 영생의 빛 가운데 살기 시작할 때 과거에 "어떻게 하면 좀더 나 자신을 위해 재미있게 살 수 있을까?"라고 질문하던 것이 이제는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더 많은 기쁨을 드릴 수 있을 것인가?"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노아와 같이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살 의지가 있는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예배하는 삶만이 현명하고 양식 있는 삶의 방식입니다. 다른 모든 삶의 방식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은 누가 현명하고 누가 하나님을 기쁘게 하길 원하는지 보시기 위해 항상 하늘에서 모든 인류를 내려다보고 계신다"(시142:2)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삶을 것입니까? 이 목표에 온전히 열중해 있는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이 해주시지 않은 것은 없습니다. 믿습니까? 믿으십시오.
경배와 찬양 144장을 함께 부르기를 원합니다.
1.나 주님의 기쁨되기 원하네
내 마음을 새롭게 하소서
새부대가 되게 하여주사
주님의 빛 비추게 하소서
2.겸손히 내 마음을 드립니다.
나의 모든 것 받으소서
나의 맘 깨끗케 씻어주사
주의 길로 행하게 하소서
후렴:
내가 원하는 한가지
주님의 기쁨이되는 것
내가 원하는 한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첫댓글 목사님께선 "만면에 가득한 웃음으로 나를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좋아합니다"고 했지요. 저는 노동자 예수께서 땀흘린 일 後에 양과 더불어 쉬는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나는 왜 나태하지요?
오늘 말씀 감동 이였습니다.나의 배고픈 마음이 사라져 버렸습니다....이젠 어떻게하면 하나님께 기쁨이 될 수 있을까로 살아가겠습니다.....새부대가 되게 하여주사 주님의 빛 비추게 하소서...다시금 열정적으로 모든것을 사랑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