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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adhi [fr. upa + dhā, cp. upadahati & BSk. upadhi Divy 50, 224, 534]
1. putting down or under, foundation, basis, ground, substratum (of rebirth)
upadhāna (adj. nt.) [fr. upa + dhā, cp. upadahati] "putting under", i. e. (1) a pillow, cushion
(2) imposing, giving, causing Dh 291 dukkh˚).
Upadahati [upa + dahati1] to put down, supply, furnish, put on; give, cause, make
pp. upadahita 떠 받(치)다. push-up 치 받아 올리다/담다. → 공급하다.
cf. Upādāna (nt.) [fr. upa + ā + dā] 떠 받아서 닿다(두다/주다/받다/쥐다/붙잡히다) → 取
Upādiyati [upa + ā + dā, see ādiyati1] to take hold of, to grasp, cling to, show attachment
upadhāya
M19. So kho ahaṃ sāriputta, susāne seyyaṃ kappemi chavaṭṭhikāni upadhāya.
사체의 뼈로 베개로 하여...
M26.
‘‘Katamā ca, bhikkhave, anariyā pariyesanā?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성스럽지 못한 구함인가?
one subject to birth searches birth.
스스로 생겨남에 묶여 있으면서 생겨남에 묶여 있는 것을 구하며,
스스로 늙음에 묶여 있으면서 늙음에 묶여 있는 것을 구하며,
스스로 병듦에 묶여 있으면서 병듦에 묶여 있는 것을 구하며,
스스로 죽음에 묶여 있으면서 죽음에 묶여 있는 것을 구하고,
스스로 슬픔에 묶여 있으면서 슬픔에 묶여 있는 것을 구하고,
스스로 오염에 묶여 있으면서 오염에 묶여 있는 것을 구한다. <성전협회 역>
Idha, bhikkhave, ekacco
attanā jātidhammo samāno jātidhammaṃyeva pariyesati,
attanā jarādhammo samāno jarādhammaṃyeva pariyesati,
attanā byādhidhammo samāno byādhidhammaṃyeva pariyesati,
attanā maraṇadhammo samāno maraṇadhammaṃyeva pariyesati,
attanā sokadhammo samāno sokadhammaṃyeva pariyesati,
attanā saṃkilesadhammo samāno saṃkilesadhammaṃyeva pariyesati.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자신이 태어나기 마련이면서 또한 태어나기 마련인 것을 구하고,
자신이 늙기 마련이면서 늙기 마련인 것을 구하고,
자신이 병들기 마련이면서 병들기 마련인 것을 구하고,
자신이 죽기 마련이면서 죽기 마련인 것을 구하고,
자신이 슬퍼하기 마련이면서 슬퍼하기 마련인 것을 구하고,
자신이 오염되기 마련이면서 오염되기 마련인 것을 구한다." <초불 역>
samāna : [adj.] equal; same; similar. sa - māna교만한 마음을 가진
[as atthi의 ppr.] adj. 존재하고 있는, 그런 상태(처지)에 있는, 그러고 있는
<*마치 기침‧감기를 달고 (살고) 있으면서도 또 다시 기침‧감기를 달려고 하듯이
자신에 의하여 生老病死-愁染을 달고(담고-dhamma) 있으면서도
똑 같이 生老病死-愁染을 달려고(담을려고) 한다.
生老病死-愁染을 달려고(담을려고) 하는 것이란?
처자식은......金銀은 담고 있으면서 또 다시/에 의하여/ 生老病死-愁染을 달려고(담을려고) 하는 것이다.>
10. 수행승들이여, 생겨남에 묶여 있는 것이란 어떠한 것일까?
처자가 생겨남에 묶여 있는 것이고, ........金銀이 묶여 있는 것이다.
‘‘Kiñca, bhikkhave, jātidhammaṃ vadetha?
6.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을 태어나기 마련인 것이라고 하는가?
Puttabhariyaṃ, bhikkhave, jātidhammaṃ, dāsidāsaṃ jātidhammaṃ, ajeḷakaṃ jātidhammaṃ,
kukkuṭasūkaraṃ jātidhammaṃ, hatthigavāssavaḷavaṃ jātidhammaṃ, jātarūparajataṃ jātidhammaṃ.
비구들이여, 아들과 아내가 태어나기 마련인 것이다. 하인과 하녀가 태어나기 마련인 것이다.
염소와 양이 태어나기 마련인 것이다. 닭과 돼지가 태어나기 마련인 것이다.
코끼리와 소와 수말과 암말이 태어나기 마련인 것이다. 금과 은이 태어나기 마련인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참으로 이러한 집착의 대상들은 생겨남에 묶여 있는 것이다.
Jātidhammā hete, bhikkhave, upadhayo.
비구들이여, 이런 재생의 근거들이 태어나기 마련인 것이다.
이러한 것에 묶여 넋을 잃고 탐착하여 스스로 생겨남에 묶여 있으면서 생겨남에 묶여 있는 것을 구한다.
Etthāyaṃ gathito [gadhīto (syā. ka.)] mucchito ajjhāpanno
attanā jātidhammo samāno jātidhammaṃyeva pariyesati.
여기에 묶이고 홀리고 집착하여
자신이 태어나기 마련이면서 또한 태어나기 마련인 것을 구한다.
<* 生老病死-愁染을 달고 있음(담음)들이 떠 받치는 것들(upadhayo)이다. [?? upadhi의 Pl.1st.Nom.]
이런한 것(=떠 받치는 것 = 生老病死-愁染을 달고 있음(담음)들)>에 묶여 넋을 잃고 탐착하는/면
그러한 그 자신에 의하여 生老病死-愁染를 달려고(담을려고) 하는 것이다.
**生老와 染에서만 金銀이 나타나고 病死-愁에서는 나타나지 않으나 나타나도 무방한 듯.
經에서 앞에 나타난 예가 중간에 사라지는 경우는 잘 없는 듯?
***자신에 의하여 生老病死-愁染을 달고(담고-dhamma) 있으면서
生老病死-愁染의 患을 확연히 알고나서
not- 生老病死-愁染 하는 위없는 안온인 열반을 구한다.>
16. 수행승들이여, 고귀하게 구하는 것은 어떠한 것인가? 세상에 어떤 사람이
1) 스스로 생겨남에 묶여 있지만, 생겨남에 묶여 있는 것의 위험을 알고
생겨남에 묶여 있지 않은 위없는 안온인 열반을 구한다.
.............
6) 스스로 오염에 묶여 있지만, 오염에 묶여 있는 것의 위험을 알고
오염에 묶여 있지 않은 위없는 안온인 열반을 구한다.
275. ‘‘Katamā ca, bhikkhave, ariyā pariyesanā?
12.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성스러운 구함인가?
Idha, bhikkhave, ekacco
attanā jātidhammo samāno jātidhamme ādīnavaṃ viditvā
ajātaṃ anuttaraṃ yogakkhemaṃ nibbānaṃ pariyesati,
attanā jarādhammo samāno jarādhamme ādīnavaṃ viditvā
ajaraṃ anuttaraṃ yogakkhemaṃ nibbānaṃ pariyesati,
attanā byādhidhammo samāno byādhidhamme ādīnavaṃ viditvā
abyādhiṃ anuttaraṃ yogakkhemaṃ nibbānaṃ pariyesati,
attanā maraṇadhammo samāno maraṇadhamme ādīnavaṃ viditvā
amataṃ anuttaraṃ yogakkhemaṃ nibbānaṃ pariyesati,
attanā sokadhammo samāno sokadhamme ādīnavaṃ viditvā
asokaṃ anuttaraṃ yogakkhemaṃ nibbānaṃ pariyesati,
attanā saṃkilesadhammo samāno saṃkilesadhamme ādīnavaṃ viditvā
asaṃkiliṭṭhaṃ anuttaraṃ yogakkhemaṃ nibbānaṃ pariyesati.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자신이 태어나기 마련이지만 태어나기 마련인 것에서 재난을 알아
태어남이 없는 위없는 유가안은인 열반을 구하고,
자신이 병들기 마련이지만 병들기 마련인 것에서 재난을 알아 위없는 유가안은인 열반을 구하고,
자신이 죽기 마련이지만 주기 마련인 것에서 재난을 알아 죽음이 없는 위없는 유가안은인 열반을 구하고,
자신이 슬퍼하기 마련이지만 슬퍼하기 마련인 것에서 재난을 알아
슬픔이 없는 위없는 유가안은인 열반을 구하고,
자신이 오염되기 마련이지만 오염되기 마련인 것에서 재난을 알아
오염이 없는 위없는 유가안은인 열반을 구한다."
Ayaṃ, bhikkhave, ariyā pariyesanā.
수행승들이여, 이것이 고귀한 구함이다.
M140
367. ‘‘Tasseva kho pana pubbe aviddasuno upadhī honti samattā samādinnā.
Tyāssa pahīnā honti ucchinnamūlā tālāvatthukatā anabhāvaṃkatā āyatiṃ anuppādadhammā.
Tasmā evaṃ samannāgato bhikkhu iminā paramena cāgādhiṭṭhānena samannāgato hoti.
Eso hi, bhikkhu, paramo ariyo cāgo yadidaṃ – sabbūpadhipaṭinissaggo.
27. "전에 그가 어리석었을 때 그에게는 재생의 근거가 있었고 거기에 빠졌다.
이제 그것을 제거하고 그 뿌리를 자르고 그것을 야자수 줄기처럼 만들고 멸절시켜
미래에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끔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버림을] 구족한 비구는 이런 최상의 *➅-2 버림의 토대를 구족한다.
비구여, 이것이 최상의 성스러운 버림이니 바로 모든 집착을 놓아버림이다."
기뻐함 경(S1:12) Nandati1suttaṃ.
12. Sāvatthiyaṃ- Ekamantaṃ ṭhitā kho sā devatā bhagavato santike imaṃ gāthaṃ abhāsi:
2. 한 곁에 선 그 천신은 세존의 면전에서 이 게송을 읊었다.
Nandati puttehi puttimā gomiko2 gohi tatheva nandati,
Upadhī hi narassa nandanā na hi so nandati yo nirūpadhīti3
“아들을 가진 자는 아들 때문에 기뻐하고
소치는 목자는 소떼 때문에 기뻐하네.
재생의 근거(소유물)는 인간의 기쁨이니
재생의 근거 없는 자 기뻐할 것도 없습니다.”
(Bhagavā:)
Socati puttehi puttimā gomiko gohi tatheva socati,
Upadhī hi narassa socanā na hi so socati yo nirūpadhīti.
3. [세존]
“아들을 가진 자는 아들 때문에 슬퍼하고
소치는 목자는 소떼 때문에 슬퍼하네.
재생의 근거(소유물)는 인간의 슬픔이니
재생의 근거 없는 자 슬퍼할 것도 없다.”
Netti. 경전이해의 길[PTS35]
c) Tattha katamaṃ nidānaṃ?
Yathā so Dhaniyo gopālako Bhagavantaṃ āha (S. N. I, 2):
c) 그 [네 가지 정리를 통한 전달] 중에서 ‘근거’란 무엇인가?
소 키우는 다니야가 세존께 말씀 드렸던 경우와 같다.
Nandati puttehi puttimā
gpiko gohi tatheva nandati
upadhī hi narassa nandanā
nahi so nandati yo nirūpadhī ti (v. 16, v. 33),
아들이 있는 사람은 아들 때문에 기뻐한다.
마찬가지로 소를 가진 사람은 소 때문에 기뻐한다.
집착의 대상을 지니는 것은 사람에게 기쁨이 된다.
집착의 대상을 지니지 않은 자는 기뻐하지 않는다.
Bhagavā āha: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Socati puttehi puttimā
piko gohi tatheva socati
upadhī hi narassa socanā
na hi socati yo nirūpadī ti (v. 17; v. 34).
아들이 있는 사람은 아들 때문에 슬퍼한다.
마찬가지로 소를 가진 사람은 소 때문에 슬퍼한다.
집착의 대상을 지니는 것은 사람에게 슬픔이 된다.
집착의 대상을 지니지 않은 자는 슬퍼하지 않는다.
Iminā vatthunā iminā nidānena evaṃ ñāyati:
idha Bhagavā bāhiraṃ pariggahaṃ upadhiṃ āhā ti.
이 [게송을] 바탕으로 이 [게송을] 근거로 이와 같이 알게 된다.
이 경우 세존께서는 외부 소유물로서의 집착의 대상에 대해 말씀하셨다고 [알게 된다.]
S4:6
“빈집에 머물면서 자기 제어하는 자
그는 뛰어난 자이며 진정한 성자로다.
모든 것을 버린 뒤에 거기 머물러야 하나니
그러한 사람에게 그것이 어울리기 때문이라.
살아 움직이는 것과 두려운 것이 많고
파리와 파충류도 거기에는 많지만
이러한 빈집에서 머무는 대성자는
머리털 하나조차 미동하지 않도다.
하늘이 쪼개지고 땅까지 흔들려
모든 생명들이 두려워서 떨고 있고
가슴에는 창이 날아와 꽂힌다 할지라도
부처님들은 재생의 근거를 피난처로 삼지 않도다.”
[PTS35]
Yathā ca Māro pāpimā Gijjhakūṭā pabbatā puthusilaṃ pātesi, Bhagavā āha;
마찬가지로 마라 빠삐만이 영취산에서 커다란 바위를 떨어뜨린 것에 대해,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Sace pi kevalaṃ sabbaṃ gijjhakūtaṃ calessasi
n’eva sammāvimuttānaṃ buddhānaṃ atthi iñjitaṃ
영취산 전체를 온통 흔들더라도
실로 바르게 해탈한 이, 붓다들에게는 동요가 없다.
Nabhaṃ phaleyya paṭhaviṃ caleyya
sabbe’va pāṇā uda santaseyyuṃ
sallaṃ pi ce urasi kampayeyyuṃ
upadhīsu tāṇaṃ na karonti buddhā ti
하늘을 가를 수 있고 땅을 흔들 수 있고,
모든 생명을 떨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설령 가슴에 [꽂힌] 화살을 흔들더라도
붓다들은 집착의 대상에 숨을 곳을 만들지 않는다.
Iminā vatthunā iminā nidānena evaṃ ñāyati;
idha Bhagavā kāyaṃ upadhiṃ āhāti.
이 [게송을] 바탕으로 이 [게송을] 근거로 이와 같이 알게 된다.
이 경우 세존께서는 몸으로서의 집착의 대상에 대해 말씀하셨다고 [알게 된다.]
Netti. 경전이해의 길[PTS29]
Upadhiparipākalakkhaṇā jarā. Taṃ maraṇaṃ padaṭṭhānaṃ.
노쇠는 집착의 대상의 쇠퇴를 특징으로 한다. 그 [노쇠는] 죽음(死)의 근접요인이다.
[* Ud. 7-10 전재성님 역
“비록 가능한 세계이지만, 세계는 미혹에 묶여 있다.
집착의 대상에 속박되어 어둠에 둘러싸여 있는 어리석은 자에게
Sassatoriva [sassati viya (ka. sī.)] khāyati,
그것은 영원한 것처럼 보이지만,
보는 자에게는 어떠한 것도 없다.”]
Mohasambandhano loko bhabbarūpo va dissati
upadhibandhano bālo tamasā parivārito
assirī viya khāyati passato n’atthi kiñcanan ti.
어리석음으로 묶인 세간은 그럴듯한 물질현상으로 보인다.
집착의 대상(upadhi)에 묶인 어리석은 자는 어둠으로 둘러싸인 불행한 자이다.
[이것을] 보는 자에게는 아무것도 [가질 것이] 없다. Netti. 경전이해의 길[PTS62]
<우빠디에 대한 ‘두 겹’의 수관> http://cafe.daum.net/pali-study/9akK/50
비구들이여, “다른 방법으로도 <올바른 ‘두 겹의 특성’을 지닌 수관>이 있을 수 있는가?”라고
만약 묻는 자가 있다면 “있을 수 있다”라고 대답해야 한다. 어떠한 것인가?
(2) ‘‘‘Siyā aññenapi pariyāyena sammā dvayatānupassanā’ti, iti ce, bhikkhave, pucchitāro assu;
‘siyā’tissu vacanīyā. Kathañca siyā?
9. [세존] “수행승들이여, ‘또 다른 방법에 의해서도
두 가지 원리의 관찰이 있을 수가 있는가?’라고 묻는 자들이 있거든, ‘있을 수 있다.’고 대답해도 좋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생겨난 고는 무엇이든 모두 <집착의 대상(우빠디, upadhi)을 조건으로 한 것>이다”라는
이것이 하나의 수관이고,
“그러나 <집착의 대상(우빠디, upadhi)들에 대한 남김 없는 이탐과 멸로부터> 고의 생겨남은 없다”라는
것이 두 번째 수관이다.
Yaṃ kiñci dukkhaṃ sambhoti sabbaṃ upadhipaccayāti, ayamekānupassanā.
Upadhīnaṃ tveva asesavirāganirodhā natthi dukkhassa sambhavoti, ayaṃ dutiyānupassanā.
어떤 괴로움이 생겨나더라도 모두 집착을 조건으로 한다는 것이 관찰의 한 원리이고,
그러나 집착을 남김없이 사라지게 하여 소멸시켜 버린다면,
괴로움이 발생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 관찰의 두 번째 원리이다.
Evaṃ sammā…pe… athāparaṃ etadavoca satthā –
수행승들이여, 이렇게 두 가지 관찰의 원리에 올바로 방일하지 않고 정진하는 수행승에게는
두 가지 과보 중에서 어느 하나를 기대할 수 있다.
즉, 현세에서의 최상의 지혜를 증득하든가,
집착이 남아 있더라도 하느님 세계에서 열반에 들어 다시 돌아오지 않는 님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세상에서 존귀한 님께서는 말씀하시고, 바른 길로 잘 가신 님께서는 또한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세간에 다양한 형태를 지닌 모든 苦는 우빠디를 원인으로 발생한다.
우빠디를 만드는 무지한 자, 어리석은 자는 계속 고를 겪는다.
그래서 <고의 생성과 발생을 수관하여> 잘 알게 된 자는 우빠디를 만들지 않을 것이다.
733.
‘‘Upadhinidānā pabhavanti dukkhā, ye keci lokasmimanekarūpā;
Yo ve avidvā upadhiṃ karoti, punappunaṃ dukkhamupeti mando;
Tasmā pajānaṃ upadhiṃ na kayirā, dukkhassa jātippabhavānupassī’’ti.
10. [세존] “세상에서 갖가지 형태를 지닌 어떠한 괴로움이라도 집착을 원인으로 생겨난다.
참으로 알지 못하고 집착을 만들어 내는 어리석은 자는 되풀이해서 괴로움을 받는다.
그러므로 괴로움의 생성과 발생을 관찰하여 분명히 알아 집착을 만들지 말아야 한다.”
S12:66 http://cafe.daum.net/pali-study/9akK/51 http://cafe.daum.net/pali-study/9akK/110
‘‘Idha, bhikkhave, bhikkhu sammasamāno sammasati antaraṃ sammasaṃ [sammasanaṃ (sī.)] –
‘yaṃ kho idaṃ anekavidhaṃ nānappakārakaṃ dukkhaṃ loke uppajjati jarāmaraṇaṃ.
Idaṃ kho dukkhaṃ kiṃnidānaṃ kiṃsamudayaṃ kiṃjātikaṃ kiṃpabhavaṃ,
kismiṃ sati jarāmaraṇaṃ hoti, kismiṃ asati jarāmaraṇaṃ na hotī’ti?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 안으로 명상을 한다.
'이 세상에는 하나가 아닌 여러 가지 형태를 가진 늙음‧죽음이라는 괴로움이 생겨난다.
그러면 이 괴로움은 무엇이 그 근원이며, 무엇으로부터 일어나고, 무엇으로부터 생기며,
무엇으로부터 발생하는가?
무엇이 있을 때 늙음‧죽음이 있고 무엇이 없을 때 늙음‧죽음이 없는가?'라고.
So sammasamāno evaṃ jānāti –
‘yaṃ kho idaṃ anekavidhaṃ nānappakārakaṃ dukkhaṃ loke uppajjati jarāmaraṇaṃ.
Idaṃ kho dukkhaṃ upadhinidānaṃ upadhisamudayaṃ upadhijātikaṃ upadhipabhavaṃ,
upadhismiṃ sati jarāmaraṇaṃ hoti, upadhismiṃ asati jarāmaraṇaṃ na hotī’ti.
그는 <*...> 명상하면서 이와 같이 안다.
'이 세상에는 하나가 아닌 여러 가지 형태를 가진 늙음‧죽음이라는 괴로움이 생겨난다.
이 괴로움은 재생의 근거가 그 근원이며, 재생의 근거로부터 일어나고,
재생의 근거로부터 생기며, 재생의 근거로부터 발생한다.
재생의 근거가 있을 때 늙음‧죽음이 있고 재생의 근거가 없을 때 늙음‧죽음이 없다.'라고.
..........
Ye taṇhaṃ vaḍḍhissanti te upadhiṃ vaḍḍhissanti.
Ye upadhiṃ vaḍḍhissanti te dukkhaṃ vaḍḍhissanti.
Ye dukkhaṃ vaḍḍhissanti te na parimuccissanti jātiyā jarāya maraṇena
sokehi paridevehi dukkhehi domanassehi upāyāsehi, na parimuccissanti dukkhasmāti vadāmi.
갈애를 기를 자들은 재생의 근거를 기를 것이고, 재생의 근거를 기를 자들은 괴로움을 기를 것이며,
괴로움을 기를 자들은 태어남과 늙음‧죽음으로부터 해탈하지 못할 것이고,
근심‧탄식‧육체적 고통‧정신적 고통‧절망으로부터 해탈하지 못할 것이고,
괴로움으로부터 해탈하지 못할 것이라고 나는 말한다.
각묵스님 역 상윳따 니까야 2권 320쪽 하단 주>
377) " '재생의 근거가 그 근원(upadhi-nidāna)'이라는 것은
무더기(온)라는 재생의 근거가 그 근원(khandha-upadhi-nidāna))이라는 말이다.
여기서는 오온(khandha-pañcaka)을 두고 재생의 근거라고 했기 때문이다."(SA.ii.119)
재생의 근거(upadhi)에 대해서는 본서 제1권 [기뻐함 경](S1:12) §2의 주해를 참조할 것.
"네 가지 재생의 근거가 있다.
감각적 욕망이라는 재생의 근거(kāma-upadhi), 무더기라는 재생의 근거(khandha-upadhi),
오염원이라는 재생의 근거(kilesa-upadhi), 업형성이라는 재생의 근거(abhisaṇkhāra-upadhi)이다."(AAT.ii.3)
* ? 4 떠 받침/받음- 慾, 蘊, 污染, 復舊/反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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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法에 대한 해석과 번역은 좀 유보하시라는 아위자님의 충고를 어기고
감히 시도해 봅니다.
본 경은 法을 번역하지 않으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어떤 식이든지 해석되어야 할 듯 해서 감히 시도해 봅니다.
어감은 정확하지 않으나...
<A가 B에 묶여있다>거나, <A와 B는 C로 결박되어 있다>라는 표현을 부처님께서 하실때는
묶여있는 대상이나 결박되는 대상을 반드시 <法(dhamma)>으로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禪(자나)상태>때문입니다.[=어렵습니다]
말이 되고 안 되고를 따지지 마시고, 부처님의 표현을 존중하신다면,
<禪>이라는 상태를 이해하시는데 도움이 되실 것으로 저는 알고 있습니다.
설명을 하려면 너무 복잡하고 어려운 부분입니다만, 경전을 조사해 보시면 <반드시 그러함>을
아실 수 있으십니다. 전문가들 조차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보통 혼동되는 것이 아닙니다>만
그래도 알아두시면~~~~~~~~~~~~~
@아위자 아마도..... 위빠사나가 <法(dhamma)>에 대한 위빠사나... 이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禪(자나)상태>에서 '대상'만 <法(dhamma)>으로 지칭되는되요.... 이 때 주의하실 점은
<사실은 우리가 주관이라고 여기는 것도> <法(dhamma)>라는 점입니다. 그렇지만 경전에는
'대상'만 <法(dhamma)>라고 표현됩니다. 이상하시지요?
@아위자 예를 들어 보면요........ 대표적으로 <탐진치>가 그러합니다.
<탐진치>가 <탐法, 진法, 치法>으로 표현되는 경우가 동일한 경문에서 그렇게 등장하는데요.........
바로 이 상황이 <法을 보는 방법>의 '두 가지 경우' 중 하나를 설명하는 장면입니다.[=하나는 '연기'를 보는 것임] ..............<탐진치>를 <탐法, 진法, 치法>으로 보는 것이 바로 <'위빠사나'의 최종단계>라고 저는 봅니다. 그 직전의 단계가 <쌍요자나에 대한 智集滅道>이고요, <욕탐에서 '탐'을 대상으로 하는 것>인데요.... 이탐의 원리가 <탐을 '탐法'으로 보아서 위빠사나>하는 것이거든요......... 어렵지요?
위빠사나는 반드시 대상이 <法>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수행.
@아위자 대상으로 <法(=경계, =위사야)>으로 전환시키는 것이 바로 <禪(자나)의 기능>이라고 저는 봅니다.
<기억>과 관련하여 인터넷기사에
http://economy.hankooki.com/lpage/entv/201501/e2015012010175194230.htm
이 실렸네요......... 흥미롭습니다.
어제부로 주변의 번잡한(=잡다한) 일을 마치고서 오늘부로 또 본격적으로 카페일을 시작합니다. ㅋ.
[=어느 정도 집중할 상태가 다시 되었다는 말]
하던 말을 계속 해 보면요.................
우리가 흔히 "빠알리가 한국어와 많이 닮았다."라고 합니다. 특히, <복합어의 배열>에서 <뒤에 언급되는 것이 핵심>이라는 점이 그러합니다. 예를 들어 보면요...........
<붕어빵>은 <~빵>이 '핵심'용어입니다. 그와 같이 dhamma(法)이라는 용어가요.........
<복합어에서 '앞'에 위치하는 경우>와 <복합어에서 '뒤'에 위치하는 경우>를 구분하여야 하는데요........
예를 들면,
@아위자 (1) <dhamma~>로 표현되는 복합어의 경우, 즉 <복합어에서 dhamma(法)가'앞'에 위치하는 경우>에는요...
A니미따, B니미따, C니미따, 法니미따 ... 의 경우에는, 전부 <니미따>가 핵심용어 입니다.
그러할 때, 그 모든 <니미따>는 <法니미따>에 섭수되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오근이 경험한 것을 意는 모두 경험한다>라는 '이치'가 성립하는 이유입니다. 그러하기에 <意가 法을 이끄는 '법구경'>이 성립하는 것입니다.
@아위자 나아가 'Sati'가 意(마노)를 의지처로 하여야 하는 이유도 'Sati'는 <法에 대한 Sati>가 핵심이기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념처의 구조가 <身(까야)에 대한 Sati---法에 대한 Sati>, <受(느낌)에 대한 Sati---法에 대한 Sati>, <心(마음)에 대한 Sati---法에 대한 Sati>, <법(담마)에 대한 Sati---法에 대한 Sati>인 것입니다.
@아위자 말하자면, '身受心법'은 <네 곳의 대상일 뿐>이고 그 곳에 대한 <Sati의 확립(=세워둠, 지킴, 기억함)>이 '핵심'이라는 말. 나아가 <法에 대한 Sati>가 <결론에 해당하는 것>이라는 지적입니다. 어렵나요?
이 맥락이 어려우시다면 그 다음의 흐름이나 맥락은 '상상을 불허 할 만큼' 난해해집니다.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시더라도 '이 맥락'을 이해하셔야만 하십니다. 남아 있는 부분이 '엄청난 분량'이기 때문입니다.
<윗 글 '(1)'의 경우>, 즉 <복합어에서 dhamma(法)가'앞'에 위치하는 경우>를 세밀하게 구분하면요........
(a)외입처계열만 언급되는 <복합어에서 dhamma(法)가'앞'에 위치하는 경우>와
(b)내외입처가 모두 언급되는 <복합어에서 dhamma(法)가'앞'에 위치하는 경우>와
(c)오직 내입처계열만 언급되는 <복합어에서 dhamma(法)가'앞'에 위치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a)외입처계열만 언급되는 경우는
相(니미따), 想(산냐), 思(제따나), 愛(땅하) 등이 그러하고요..........
(b)내외입처가 모두 언급되는 경우는
觸과 受가 그러합니다.[=이 경우는 '두 갈래'라는 표현이 등장함]
(c)오직 내입처계열만 언급되는 경우는
識의 경우 뿐인데요,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이라는 六識이 그러합니다.
이 경우에는 <오직 내입처계열의 識 뿐!>이라는 점을 경전이 강조하는데요..... 경전에서 부처님께서 특별히 강조하시는 바가 있는 부분은 <어려운 부분>입니다. 우리가 조심스럽게 취급하여야 할 부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六識이 모두 <내입처계열 뿐>이라는 점을 모두들 이해하시지 못하거나 그 의미를 납득하시지 못하시는 분들이 태반이십니다. 보통 어려운교설과 관련되는 교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가 한 번은 많은 분들 앞에서 설명해 보았는데[=약 1시간 정도 소요 됨] ........ 결과는 '꽝~~~'
아무도 심각하게 받아 들이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 무슨 이야기인지 자체를 못 알아 들으시더라구요. ㅋ.
........... "왜 識의 한계가 名色인 것인가?"가 바로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이라는 내입처계열의 六識 뿐!>이라는 점 때문이거든요........... [=잘 생각해 보시길 바라면서 자세한 설명은 생략함]
나아가 ....... <육촉입처의 구조>에서 그러한 점이 또 다시 강조 됩니다.[=아예 '육촉입처의 구조'에 대하여 모르시니 더 이상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만] 간단하게 언급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아위자
(1)안과 色들과 眼識, 眼識에 의해 분별될 法들.
(2)이와 聲들과 耳識, 耳識에 의해 분별될 法들,
(3)비와 香들과 鼻識, 鼻識에 의해 분별될 法들
(4)설과 味들과 舌識, 舌識에 의해 분별될 法들
(5)신과 觸들과 身識, 身識에 의해 분별될 法들
(6)意와 法들과 意識, 意識에 의해 분별될 法들.
위와 같은 <육근, 육경, 육식> and <육식에 의해 분별될 法들>이라는 구조가
육촉입처의구조입니다.
@아위자 위에서 <육근, 육경, 육식>의 다른 이름이 <명색>이고요,
<육식이 분별하는 것>은 <法들>입니다.
@아위자 일단 여기에서요......... <육근, 육경, 육식>에서 <육경과 육식>은 연기된 것입니다. 생겨난 것들이라는 지적입니다. 그렇다면 결론은? <육근>이 <명색>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識의 한계>는 바로 그 <육근(=명색)까지>라는 말씀을 부처님께서는 하시는 것입니다. 識은요.... <육근(=명색)>을 넘어서 더 나아가지 못합니다.[=心과 意도 역부여시]
@아위자 그런데? 어떻게 해서 육근의 경험을 모두 경험하는 것일까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사실은[=實相은...ㅎㅎㅎ...] 니미따(相)들을 분별하는 것입니다......ㅋㅋㅋㅋ....
@아위자 <육근(=명색)>이 제공하는 <색성향미촉법-니미따(相)>를 분별하는 것입니다. ㅎㅎㅎㅎㅎㅎㅎㅎㅎ
ㅋㅋㅋㅋㅋ 결국은 <法-니미따(相)>를 분별하는 것이라는 결론입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위자 여기까지가 육촉입처에 대한 <초보자용 '기초'>이고요......... 이어서 <중급자용 '기초'>는.......
無見無對인 <法>을 보는 것입니다. 보지는 못하더라도 <이론적>으로나마 이해하는 것입니다.
가장 빠른 길이 <부처님의 지적을 염두에 두는 것>입니다. 위에 나와 있지요! 모든 것이 <육식에 의해 분별되는 法들>이라고요............. 여기에서 <막가>라는 가르침을 알아채시면 <전문가용 '기초'>에 드시는 것입니다. 육촉입처는 그러한 <갈림길>입니다. 말머리에 매달아 논 당근처럼, <선법이라는 당근을 따라가느냐? 불선법이라는 당근을 따라가느냐?>에 따른 <갈림길이라는 '두 막가'(=팔사도와 팔정도)!>
@아위자 대충 위와 같은 <(c)오직 내입처계열로만 언급되는 경우인 '六識'>이 개입하여
<(b)내외입처가 모두 언급되는 경우인 '觸(=삼사화합)과 受(=촉을 조건으로하고 촉에서 생겨난 受)>가 성립합니다. 복잡해지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이 경우에는 識이 이미 <육근이라는 이름의 '名色'>에 파고들어서 <'六識'이 되어버린 상황>이기에(=엄밀한 의미에서는 여기서부터가 '알음알이'라고 부르는 것] '육촉입처'라는 <새로운 '아야따나(=處)'>가[=일종의 識의 증장을 위한 생태계]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아위자 <觸受想思> 四無色蘊에서, (ㄱ)산냐(想)를 문제로 삼아 수행하시게 되면 넓게 수행하셔도 구차제멸(=구차제정)이고요 그 수행을 통하여 상수멸을 성취하신다고 하더라도 아라한이 될 가능성은 50%임. (ㄴ)좁게 수행하시면 無色界 禪定인 사무색을 수행하시게 되시는데요 '망하신 것'입니다. 적어도 '해탈'이라는 관점에서는 그렇다는 것입니다. 물론 <엄청난 희열과 초능력>이 생겨난다고 합니다만 '망한 것'임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올바른 삼매(=正定)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올바른 삼매(=正定)는 <니미따(相)라는 것을 파악하여 들어가는 삼매>여야 합니다. 識때문에 그러하는 것입니다. 識은 니미따(相)를 따라다니고, 니미따(相)를 쫓아
@아위자 밖으로 흩어지는 것이며, 니미따(相)에 머물러[=住] 증장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하기에 <모든 불선법들은 니미따(相) 때문에, 니미따(相)를 조건으로 생겨나는 것>이라고 경전은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무슨 말씀이냐? .... 하면요 <識이란 놈을 주의하라!>는 말씀이거든요. <觸受想思> 四無色蘊을 쌓아가는 놈은 識이라는 것이고요, 識이 아니면 성립조차 하지 못하는 놈들이 <觸受想思> 四無色蘊들이라는 말씀이십니다. 소위 <오로지 識(=唯識)>이라는 것인데요, 엄청 어렵습니다. 만만치 않은 이야기입니다.
@아위자 이쪽방향으로 이야기를 전개하게 되면요 ......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져서 <본 맥락을 잃어버리게>될 가능성이 높습니다만! 그래도 한 말씀은 드려야 합니다. 간단하게 생각하시라는 것입니다. 불교는 오직 '한 놈'만 두들겨 패는 것인데요.... 바로 識이라는 놈입니다. 어떤 분들께서는 <무명>이 아니냐? ...라고 하시는데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여기에서 조심를 하셔야 합니다.
무조건 두들겨 패고 배제하는 것은 '六識'입니다. '識'은 그대로 놓아두는 것입니다. 이 태크닉이 참으로 어렵습니다. '六識'만 버리면 거기가 <禪(자나)>입니다. 제가 '길따라'님에게 제시하는 <禪(자나)의 공식>이 <까마-六識=禪>인데요
@아위자 설명을 듣지 않으시면 그 공식이 의미하는 바가 이해가 오지 않습니다만, 까마(kaama)라는 것이 무엇인가? ...라는 아비담마를 올바르게 하신 분들은 '아하!!!!'라고 탄성을 지르실 것입니다. 까마(kaama)는 識이 法들을 분별하면서 즐기는 것인데요..... 현실적으로는 '니미따(相)들'을 분별하면서 <영화를 재미있어 하듯이 즐기는 것>입니다. 이 맛과 재미 때문에 識은 '니미따(相)들'에 머물면서 증장하는 것이고요 그 결과로 <觸受想思> 四無色蘊들이 쌓여가는 것입니다. 어렵지요? 어렵습니다. 쉽다고 이야기 할 수는 없습니다.
@아위자 보다 더 어려운 이야기는 <法들(=담마들)이 출구라는 점>입니다. 無見無對인 <法들>이 '출구'라는 이야기는 <거기를 통하여 들어온(='입구') 것>이라는 말씀이십니다. 들어 온 곳으로 나가야 합니다. 그것이 육촉입처라는 교설이 하시는 말씀의 핵심입니다. 나가는 비상출입구를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봄봄'님! ...... '아위자'가 정신병자는 아닙니다. '아위자'가 "제발 dhamma(法)'라는 용어 하나만 '그냥 놓아 두시라!"라고 간곡하게 말씀드리는 것은 다 이유가 있어서 입니다. '아위자'가 아는체 하고 싶어서가 아닌 것입니다. 도리어 <모르는 것이 약이다>라는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dhamma(法)'은 우리가 아직은 알 수도 없구요 對할
@아위자 수도 없는 대상입니다. 흔히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에서 <이것과 저것>이 <dhamma(法)>이라고 설명하십니다만, .............. 에효~~~~~~~~~ 미칩니다. 미쳐요. 맞기는 맞습니다. 이 法界에 <dhamma(法) 아닌 것>이 어디 있습니까? 물 속에 사는 물고기에게는 주위 사방이 다 '물'인데요, 무엇이 '물' 아닌 것이 있겠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온통 '물'이다>라고 해서는 이야기가 되지 않는 것 아닙니까?
@아위자 無見無對인 <法들>을 두고서 <이것과 저것들>을 말씀하시는 것이다.......라고 한정지으면 <니미따(相)을 두고서는 무엇이라고 부르실 것입니까?> ........ 보이거나 對할 수 있는 것들은 .... 그것들이 法이 아닌 것은 이니지만 <그렇게 좁게 용어를 정의 하시면> 후회하시게 되신다는 것입니다.
@아위자 특히 <禪(자나)>라는 것은 <이해 불가능한 것>이 되어 버립니다.
경전을 번역하는 기본 태도에 있어서는 '각묵스님과 대림스님'이 그래도 '스님들'이십니다.
남들이 불친절하다고 불평하든 말든, 그 무엇이라고 아는 체 하든 말든 .... <dhamma(法)>라는 용어는 건들지 않고 그냥 놓아두는 태도가 그러하다는 지적입니다. 하기는 '각묵스님과 대림스님 조차도' 더 이상 참지 못하시고 <번역>을 시도하신 경우가 있으십니다만, '봄봄'님께서는 그러한 경우라도 <나 '봄봄'은 모르는 것이 자랑이다!>라고 여기시어 '그 부분' 조차도 그냥 法이라는 용어 하나로 그냥 넘어가신다면......... '각묵스님이나 대림스님께서는 상상도 하시지 못하시는 놀라운 점'을 발견하시게 되신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부분'이
부처님 가르침의 하일라이트이고 깜짝 놀랄 부분이며 <24시간을 禪(자나)>에 드셔 있으신 분의 <표현>이신 것입니다. 삼계는 法界!
'아위자'는 욕을 밥먹듯이 하는 놈이고, 개차반 같은 놈이며, 싸움꾼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불교학자입니다.
<이론적>으로는 그래도 어느 정도는 인정 받는 놈입니다. <불교학>으로 법 얻어먹지 않고 살아왔다는 것이지, 나름대로는 전문가의 길을 걸어 온 놈입니다. 죽기 아니면 살기로 그 길을 평생 걸어 온 것입니다. 이제는 '회향'을 할 나이도 되었지만 <'회향'은 커녕> ..... '절망' 앞에 두 무릅을 ................ 그래서 제 '후회'를 인터넷에 남기는 것 뿐입니다.
후회막급입니다. 戒라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인 줄 몰랐던 것입니다. 그냥 단순하게 '니미따(相)'라는 것만 재대로 파악하면 될 줄 알았던 바보가 '아위자'입니다.
<'니미따(相)'라는 것만 재대로 파악하면> 저절로 '六識'이 제거될 줄로 착각했던 것입니다. ㅋㅋㅋㅋ ......... 놀고 있었던 것입니다. <'현실'이라는 이 法界>가 제공하는 '니미따(相)'는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니더라구요.
더군다나 <禪(자나, =올바른 삼매, =正定)>은 <'현실'이 제공하는 '니미따(相)'를 파악하여야만 되는> 그러한 곳이더라구요. 아차~~~차~~!!!!!!!!!!! 하였을 때는 이미 늦은 시기 였습니다. 미칩니다, 미쳐요.
어쩐지 <팔정도>에 <정어, 정업, 정명>이라는 것이 들어 있더라구요......... 미치는 것입니다. <전문가용 '팔정도'>를 경전에서 보면요....... <정어, 정업, 정명>이 빠져 있는대요.. 이 경우에는 그 앞에
<있는 그대로>라는 표현이 빠져 있는 경우였습니다. 그리고 "이미 戒를 닦았으므로"라고 하시더라구요.
닦기는 뭘 닦았습니까. 저는 戒를 닦은적 없거든요. ㅎㅎㅎㅎㅎㅎㅎㅎㅎ 늦은 것입니다. 이미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지니지 못한 것입니다. 망한 것입니다.
<부끄러움과 창피함>! 쉬운 것 같으시지요? 어떤 사람에게는[=戒를 닦은 적 없는 분들에게는] 거의 불가사의한 것이 바로 이 <부끄러움과 창피함>입니다. 그것이 바로 <전문가용 '팔정도'에 입장하는 입장권>이었던 것입니다. 아~~ 씨바~~~ 어쩐지~~ 순서가 <계--정--혜> 삼학의 순서더니~~~ 미치는 것입니다. 어디가서 <입장권>을 구하나요?
@아위자 스스로 생겨남이라는 法에 묶여 있으면서 생겨남에 묶여 있는 것을 구하며,
스스로 늙음이라는 法에 묶여 있으면서 늙음에 묶여 있는 것을 구하며,
스스로 병듦이라는 法 묶여 있으면서 병듦에 묶여 있는 것을 구하며,
스스로 죽음이라는 法에 묶여 있으면서 죽음에 묶여 있는 것을 구하고,
스스로 슬픔이라는 法에 묶여 있으면서 슬픔에 묶여 있는 것을 구하고,
스스로 오염이라는 法에 묶여 있으면서 오염에 묶여 있는 것을 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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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얼마나 '엄청난 <있는 그대로>의 말씀'이십니까?
그런데도 들리지 않고 이해되지 않고 말이 안 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에게는.
@아위자 <입장권>이 없이 공짜로[=무단으로] 들어와 보았자
<들리지 않고 이해되지 않고 말이 안 되는 것처럼 보이기> 마련입니다.
無見無對인 <法들>을 볼 수 있는 <입장권>은 <부끄러움과 창피함>입니다. 끝.
공부하고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