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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요약]
■ 이집(李緝)
1434(세종 16) - 1482(성종 13)
[생원] 선조(宣祖) 6년(1573) 계유(癸酉) 식년시(式年試) [생원] 3등(三等) 44위(74/100)
1434년(세종 16)~1482년(성종 13). 조선 전기 문신. 호는 중화당(中和堂)‧둔헌(遯軒)이다. 본관은 아산(牙山)이다. 고려 시대 문신인 이주좌(李周佐)의 먼 후손이다. 부친은 이달손(李達孫)이다. 20세 때에 문과에 급제하여, 사옹부정(司饔副正)을 역임하였고, 성균관에서 유생을 가르쳤다.
단종(端宗)이 임금의 자리를 세조(世祖)에게 양위한 뒤 호려(胡戾) 이염의(李念義)와 함께 인왕산 인근에 은거하였고, 자신의 호를 ‘중화당(中和堂)’이라 지었다. 이후 단종의 승하소식을 듣고 하루 종일 통곡한 뒤 가족과 함께 황해도 봉산(鳳山)에 거처를 마련하였다. 절령산(岊嶺山: 현 황해도 자비령(慈悲嶺)) 산 중에서 다시 ‘돈헌(遯軒)’으로 호를 고쳤다.
김시습(金時習)‧남효온(南孝溫) 등과 더불어 기풍과 절개로 이름이 높았다. 슬하에 4남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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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산집 제36권 / 묘갈명(墓碣銘)
사옹원 부정 돈헌 이공 묘갈명 병서 - 기유년
(司饔院副正遯軒李公墓碣銘 幷序 - 己酉)
장릉(莊陵 단종)과 광릉(光陵 세조) 사이에 의리를 지키고 자정(自靖)한 선비들이 많았으니, 예컨대 동봉(東峰) 김시습(金時習)과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 등이시다. 또 돈헌(遯軒) 이집(李緝) 공이 있었으니, 젊은 나이에 대과(大科)에 급제해서 문종조(文宗朝)에 특별히 사옹원 부정(司饔院副正)과 태학 훈도(太學訓導)에 제수되었는데, 단종께서 양위(讓位)하시게 되자, 재종조(再從祖)인 호려공(胡戾公) 이염의(李念義)와 함께 인왕산(仁王山) 아래에 은둔하고 호를 중화당(中和堂)이라고 하여 참됨을 간직하고 광채(光彩)를 숨겨서 스스로 도를 따라 힘을 기르며 몸을 감추었다.
단종께서 승하하셨다는 말을 듣자 종일토록 통곡하고는 가솔들을 데리고 멀리 봉산(鳳山)의 절령(岊嶺 황해도 자비령(慈悲嶺)의 별칭)의 산속으로 가서 호를 ‘돈헌’으로 바꿨는데, 이것은 자신의 뜻을 나타낸 것이었다. 평소 말씀하실 적에 반드시 충효(忠孝)를 일컬었고, 혹 글자를 배우려고 찾아오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충효 두 글자를 손수 써서 차근차근 가르쳐 주었다.
봉산의 풍속이 억세고 사나워서 사유(四維)를 알지 못하였는데, 공을 보고 감동해서 백성의 풍속이 크게 변하니, 사람들은 공이 거처하던 곳을 가리켜 ‘훈도동(訓導洞)’이라 하였다. 당시 제현(諸賢) 중에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괴애(乖厓) 김수온(金守溫), 진산(晉山) 강희맹(姜希孟) 등이 공과 같은 의취(意趣)를 가지고 함께 수창(酬唱)하였는데, 공을 ‘백운동(白雲洞) 주인’이라고 불렀다.
풍류가 문아(文雅)하여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으며 걸출하고 뛰어난 시편(詩篇)은 밝은 조정의 대아(大雅 덕이 높고 큰 재주가 있는 사람)의 선발에 대비할 만하였다. 그러나 이것들은 공에게 있어서 여사(餘事)일 뿐이다. 공이 수립한 바가 출중하고 높은 풍도와 빼어난 절개를 갖췄으니, 또한 김동봉(金東峰)과 남추강(南秋江)과 동일한 유(類)의 인물일 것이다.
공은 선계(先系)가 경주에서 나왔는데 고려조에 형부 상서를 지내고 사공(司空)에 추증된 휘 주좌(周佐)가 공적을 세워 아주백(牙州伯)에 봉해지니, 자손들이 이로 인하여 아산(牙山)을 관향(貫鄕)으로 삼았다.
우리 조선조에 들어와, 전조(前朝)의 대신이었던 휘 옹(邕)은 좌의정(左議政)으로 발탁되어 조정에서 여러 번 불렀으나 나오지 않았으며 아산에 은거한 채로 목은(牧隱)과 야은(冶隱) 두 현자와 시를 읊조리고 낚시질하니, 사람들이 ‘조은(釣隱)’이라고 칭하였다, 증조 휘 절(節)은 진사이고 조고 휘 운생(雲生)은 현감이며 선고(先考) 휘 달손(達孫)은 과거에 급제하였다.
선비(先妣) 김해 김씨(金海金氏)는 군수 김렴(金濂)의 따님으로, 영릉(英陵 세종) 16년 갑인년(1434)에 공을 낳았는데, 선릉(宣陵 성종) 13년 임인년(1482) 10월 15일에 공이 별세하니 향년 49세이다. 절령(岊嶺) 임좌(壬坐)의 언덕에 장례하였다.
배위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이담(李澹)이 그 선고이신데, 공보다 4년 먼저 태어나고 공보다 34년 뒤에 별세하였다. 묘는 양주(楊州) 천보산(天寶山) 동쪽 산기슭 자좌(子坐)의 언덕에 있었는데, 국릉(國陵)의 화소(火巢)에 들어 실전(失傳)되었다.
4남을 두었으니, 장자 계영(啓英)은 적순부위(迪順副尉)이고, 다음은 계방(啓芳)과 계당(啓棠), 계욱(啓郁)이다. 계영은 4남을 두었으니, 장자 원종(元宗)은 통덕랑(通德郞)이고, 다음은 원신(元臣)과 원린(元隣)이며, 원필(元弼)은 통정대부(通政大夫)로 호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원필은 5남을 두었으니, 장자는 기(琦)이고, 련(璉)은 광흥 봉사(廣興奉事)이고, 무(珷)는 임진년(1592, 선조25)에 순절(殉節)하여 병조 참판에 추증되었고, 규(珪)는 효렴(孝廉)으로 천거되어 제릉 참봉(齊陵參奉)에 제수되었고, 진(珍)은 무과에 급제해서 선위 공신(宣威功臣)이 되었다. 무의 아들 선발(先發)이 또다시 정묘호란(丁卯胡亂)에 죽었고, 진의 아들 선인(先仁)은 무과에 급제하여 진무 공신(振武功臣)이 되었다.
공의 후손인 시채(時彩)가 불초에게 묘갈명을 청하였는데, 내가 융병(癃病 늙어서 몸이 나른해지는 병)으로 거의 죽게 되어서 붓과 벼루를 쓰지 않고 버려둔 지가 오래되었다. 나는 늘 공의 시를 읽곤 하였는데, 여기에 이르기를
나무는 곧아서 베어지나 곧게 자람을 꺼리지 않고 / 木因直伐不嫌直
난초는 향 때문에 불타나 여전히 향을 지키네 / 蘭以香燒尙守香
사람이 어려울 때라고 해서 절개를 바꾼다면 / 人有時難如改節
저 물(物)의 이치에 비함에 또 어찌 마땅하겠는가 / 比諸物理亦何當
라고 하였으니, 이는 공의 뜻을 말한 것이다.
이 뜻을 채운다면 사육신(死六臣)과 함께 같이 귀결될 수 있는데, 공은 이미 몸을 숨겨서 스스로 드러나지 않았고 사람들 또한 능히 천양(闡揚)하지 못해서 공의 아름다운 절개와 훌륭한 행적이 침체되어 드러나지 못하니, 애석하다.
그러나 공이 의리를 다하고 지조를 지킨 것은 천리(天理)에 당연한 것으로 자신이 이렇게 하지 않을 수 없어 행한 것이니, 후세의 명성과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나는 평소 남의 선행(善行)을 말하기를 좋아하였는데, 공의 공렬(功烈)이 의도한 바가 없이 행해진 것에 탄복하였다. 이에 공을 위하여 명을 짓는다.
높고 높은 절령이여 / 嵂嵂岊嶺
서쪽 지방의 진산(鎭山)이네 / 鎭玆西垠
세상을 피해 길이 은둔할 만하니 / 遯世長往
바로 그렇게 하신 분이 있었네 / 曰有其人
그분이 누구인가 / 其人維何
장릉의 충신이었네 / 莊陵忠臣
그 마음을 바꾸지 않고 / 不易乃心
스스로 몸을 깨끗이 하여 충절을 다하였네 / 靖獻其身
만일 그 지조를 채운다면 / 苟充其操
백이(伯夷)와 숙제(叔齊)의 무리가 되리라 / 夷齊之倫
의도한 바 없이 하였으니 / 無所爲爲
그 덕이 참으로 참되네 / 厥德乃眞
대화와 동류(同類)가 되어 / 大化爲徒
이름과 행적 모두 인멸(湮滅)되었네 / 名蹟俱湮
내가 묘소에 정표해서 / 我旌厥墓
천추(千秋)에 밝게 게시하노니 / 昭揭千春
충과 효를 독책하여 / 課忠責孝
사대부들을 경계하노라 / 用警衿紳
[註解]
[주01] 기유년 : 1849년(철종 즉위년)으로, 매산의 나이 74세 되던 해이다.
[주02] 자정(自靖) : 스스로 의리를 편안히 여겨 충절을 지킴을 이른다. 《서경》 〈미자(微子)〉에 “스스로 의리에 편안하여 사람마다 스스
로 선왕에게 뜻을 바칠 것이다.[自靖, 人自獻于先王.]”라고 보이는데, 채침(蔡沈)은 《집주(集註)》에서 “정(靖)은 편안함이다. 각
기 의리에 마땅히 다해야 할 바에 편안하여 스스로 그 뜻을 선왕에게 진달(陳達)하여 신명(神明)에게 부끄러움이 없게 할 뿐이다.”
라고 주하였다.
[주03] 호려공(胡戾公) 이염의(李念義) : 1409~1492. 세조의 비 정희왕후(貞熹王后)의 형부로, 호려는 그의 시호이다. 1432년(세종
13) 음직으로 부사직으로 출사하여 벼슬이 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주04] 도를 …… 감추었다 : 원문의 ‘준회(遵晦)’는 ‘준양시회(遵養時晦)’를 줄여 쓴 것으로 현재의 상황에 순응하며 역량을 축적하여 때
를 기다림을 말한다. 《시경》 〈주송(周頌) 작(酌)〉에 “아, 성대한 왕사로서 도를 따라 힘을 길러 때로 감추어 크게 밝아진 뒤에야 이
에 큰 갑옷을 쓰셨도다.[於鑠王師, 遵養時晦, 時純煕矣, 是用大介!]”라고 한 데서 유래한 말이다.
[주05] 사유(四維) : 예(禮)ㆍ의(義)ㆍ염(廉)ㆍ치(恥)의 네 가지 덕목(德目)으로, 《관자(管子)》 〈목민(牧民)〉에 “사유는 첫째로 예, 둘째
로 의, 셋째로 염, 넷째로 치를 이르는데, 사유가 펴지지 않으면 나라가 멸망한다.[四維: 一曰禮; 二曰義; 三曰廉; 四曰恥, 四維不
張, 國迺滅亡.]”라고 보인다.
[주06] 목은(牧隱)과 야은(冶隱) : 목은은 이색(李穡, 1328~1396)의 호이고, 야은은 길재(吉再, 1353~1419)의 호이다.
[주07] 화소(火巢) : 능(陵)이나 원(園), 묘(墓)의 화재를 방지하기 위하여 울타리 밖에 있는 초목들을 불살라 버린 구역을 이른다.
[주08] 적순부위(迪順副尉) : 조선 시대 정7품의 무관 품계이다.
[주09] 의도한 …… 것 : 이 내용은 남송의 학자 장식(張栻, 1133~1180)의 말로, 《근사록(近思錄)》 권7 〈출처(出處)11〉에 “위한 바가
없이 하는 것은 의리이고 위한 바가 있어 하는 것은 이이다.[無所爲而爲者義也, 有所爲而爲者利也.]”라고 보인다.
‘위한 바가 있다’는 것은 이익이나 명예를 얻기 위함을 이른다. 주자는 이 구절이야말로 이(利)와 의(義)의 구분을 가장 잘 표현한
말이라고 칭찬하고 자주 인용하였다.
[주10] 대화(大化) : 여러 가지 의미가 있는데, 여기서는 대자연의 조화를 가리킨 것으로 보인다. <끝>
ⓒ 성신여자대학교 고전연구소ㆍ(사)해동경사연구소 | 김창효 (역) |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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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司饔院副正遯軒李公墓謁銘 幷序 - 己酉
莊光之際。多秉義自靖之士。如金東峯,南秋江是已。又有遯軒李公諱緝。妙年大闡。文宗朝特拜司饔院副正太學訓導。逮端廟遜位。與其再從祖胡戾公念義偕隱仁王山下。號中和堂。含眞葆彩。用自遵晦。及聞端廟昇遐。痛哭終日。挈家眷遐擧于鳳山岊嶺山中。改號曰遯軒。此其志也。雅言必稱忠孝。或有問字者。必手寫忠孝二字。循循敎誨。鳳俗勁悍。不知四維。觀感于公。民風丕變。指所居曰訓導洞。幷時諸賢金佔畢,金乖厓,姜晉山。同調偕唱。號公以白雲洞主人。風流儒雅。至今流傳。傑句偉篇。可備煕朝大雅之選。然在公爲餘事。公所樹立卓異。高風峻節。是亦金南之流亞也。公系出慶州。麗朝刑部尙書贈司空諱周佐。以勳績封牙州伯。子孫仍貫于牙山。入我朝有諱邕。以前朝大臣。甄拔爲左議政。累徵不就。屛居牙山。與牧冶兩賢。嘯咏漁釣。人稱以釣隱。曾祖諱節進士。祖諱雲生縣監。考諱達孫及第。妣金海金氏。郡守濂女。擧公于英陵甲寅。卒于宣陵十三年壬寅十月十五日。享年四十九。墓于岊嶺壬坐。配全州李氏。澹其考也。生先公四年。歾後公三十四年。墓在楊州天寶山東麓子坐。以國陵火巢失傳。有四男。啓英迪順副尉,啓芳,啓棠,啓郁。啓英四男。元宗通德郞,元臣,元隣,元弼通政贈戶參。元弼五男。曰琦。曰璉廣興奉事。曰珷壬辰死於節贈兵曹參判。曰珪以孝薦除齊陵參奉。曰珍武科宣威功臣。珷男先發又死於丁卯胡亂。珍男先仁武科振威功臣。公後孫時彩。謁銘于不佞。癃病垂死。倚閣筆硯久矣。每誦公詩有云木因直伐不嫌直。蘭以香燒尙守香。人有時難如改節。比諸物理亦何當。是爲言志也。充其志。可與六臣同歸。而公旣沉淪而自晦。人亦莫克闡揚。姱節懿蹟。閼而不章。惜哉。然公之畢義守身。天理當然。吾不得不然者。何有於後世之名哉。余平生樂道人之善。而服公之烈。無所爲而爲。爲之銘曰。
嵂嵂岊嶺。鎭玆西垠。遯世長往。曰有其人。其人維何。莊陵忠臣。不易乃心。靖獻其身。苟充其操。夷齊之倫。無所爲爲。
厥德乃眞。大化爲徒。名蹟俱湮。我旌厥墓。昭揭千春。課忠責孝。用警衿紳。<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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