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되돌리다
2023.07.30.(성령강림후제9주일)
선한목자교회 김 명 현 목사
1/ 예수께서 그 열둘을 한 자리에 불러놓으시고, 모든 귀신을 제어하고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능을 주시고, 2/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며 병든 사람을 고쳐 주게 하시려고 그들을 내보내시며 3/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길을 떠나는 데는,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말아라. 지팡이도 자루도 빵도 은화도 가지고 가지 말고, 속옷도 두 벌씩은 가지고 가지 말아라. 4/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거기에 머물다가, 거기에서 떠나거라. 5/ 어디에서든지 사람들이 너희를 영접하지 않거든, 그 고을을 떠날 때에 너희 발에 묻은 먼지를 떨어버려서, 그들을 거스르는 증거물로 삼아라." 6/ 제자들은 나가서, 여러 마을을 두루 다니면서, 곳곳에서 복음을 전하며, 병을 고쳤다. (누가복음 9:1-6)
들어가는 말
회당장인 야이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그분의 발 앞에 엎드려서 자기 집에 가자고 간청했습니다. 야이로가 자신의 죽어가는 어린 딸을 살려달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요청에 응답하시고 그의 집을 향한 여정을 출발하십니다. 예수님에게 이 여정의 목적은 분명했습니다. 그것은 야이로의 딸을 병으로부터 고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여정은 방해를 받습니다. 첫째는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이 와서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따님이 죽었습니다. 선생님을 더 괴롭히지 마십시오.”(8:49)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하나님 나라와 세상이 충돌하는 지점입니다. 그 딸이 죽음으로써 세상에서의 사건은 종결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이미 예수님께서 시작하신 하나님 나라의 사건까지 종결시킬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도 세상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결과에 종속되면서 세상과 다름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이 아닌 하나님 나라를 의지하고 있는 회당장에게 말합니다. “믿기만 하여라. 딸이 나을 것이다.”(50) 예수님은 분명히 회당장의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딸이 ‘살아날 것’이라는 대답대신 ‘나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회당장의 믿음은 딸이 죽어간다는 데서 출발한 것이지 죽은 데서 출발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하시는 것입니다.
두 시간의 충돌
예수님이 속한 하나님 나라의 시간은 세상의 시간과 어긋난 채 시작되고 흐릅니다. 하나님 나라와 함께 예수님은 이 여정의 목적지에 이릅니다. 그런데 세상의 시간에서 이미 아이는 죽었습니다. 다시 예수님의 여정의 목적에 두 번째 방해가 등장합니다. 아이가 죽은 것을 알게 된 동네 사람들이 모두 울며 슬퍼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사람들을 향해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울지 말아라.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52) 하나님 나라의 시간에 따르고 있었던 예수님에게 아이는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시간에 속한 사람들에게 아이는 죽었으므로 그들은 예수를 비웃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방해들에 아랑곳하지 않고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 그리고 아이의 부모만을 데리고 아이가 누워 있는 곳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아이의 손을 잡으시고 말씀하십니다. “아이야, 일어나라.”(54) 아이는 죽었던 것이 아니라 자고 있었던 것입니다. 분명 세상의 시간으로 아이는 이미 죽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시간으로 아이는 아직 자고 있을 뿐입니다. 세상과 하나님 나라는 시간적으로 ‘이미’와 ‘아직’의 차이인 것입니다. 믿음이란 세상의 시간이 아니라 하늘나라의 시간에 익숙해지는 것입니다. 아이의 부모가 놀란 것은 세상의 시간과 하늘나라의 시간이 다르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시간은 믿음을 가지고서야 비로소 직접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렇게 믿음 가운데서 세상의 시간 속에 전혀 다른 시간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의 핵심인 치유는 되돌리는 것입니다. 병에 걸린 사람이 치유된다는 것은 병에 걸리기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귀신들린 사람이 치유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귀신들리기 전의 사람으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야이로의 딸처럼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것은 치유가 되돌리는 것이라는 사실을 보다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는 어떤 과거의 시간이 현재의 시간 속으로 들어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두 시간의 공존
믿음이란 하나님 나라의 시간을 마주하는 것이며, 그것을 현실 속에 가져오는 것이며, 이제부터 그 시간에 따라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회당장 야이로가 예수님 앞에 나온 순간은 하나님 나라의 시간과 마주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는 믿음이 계속 되는 한 세상이 아닌 하나님 나라의 시간 속에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가 발을 딛고 경험하는 곳이므로, 우리는 이 세상의 시간에 지배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세상 사람들에게 야이로의 딸은 죽은 것으로 이해됩니다. 이 소식을 전하러 온 사람들이나, 아이의 집에 모여 경과를 지켜보던 사람들도 세상의 시간에 지배되어 있기에 아이는 죽은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에 속한 예수님과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에 접근한 사람들에게 아이는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이제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시간이 세상의 시간에 침투해 들어옵니다. 세상의 시간 속에서 아이는 죽었지만, 하나님 나라의 시간 속에서 아이는 자고 있을 뿐입니다. 이제 두 개의 시간이 공존합니다. 예수님은 아이가 살아난 것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 뒤 아이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성경은 그것을 가려놓았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시간은 사건이 아니라 믿음 가운데서 계속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불신앙의 시간과 믿음의 시간은 교차하면서 공존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전혀 다른 시간을 가진 하나님 나라를 믿는 사람들을 통해 이 세상 속에 가지고 오셨던 것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이런 시각에서 이해해 보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마을로 보내시려는 의도가 있었습니다. 본문이 밝히고 있는 예수님의 의도는 이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며 병든 사람을 고쳐 주게 하시려’(2)는 것입니다. 앞서 보았듯이 병든 사람을 고쳐주는 것은 시간을 되돌리는 것입니다. 암에 걸린 사람이 암에서 회복되는 것은 암에 걸리기 전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말 그대로 ‘회복’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선포와 병 고침이 함께 선포되는 것은 바로 시간의 문제 때문입니다.
어느 시간을 받아들일 것인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한다는 것은 곧 시간의 되돌림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궁극적으로 완전했던 태초의 창조의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병든 사람들을 고쳐주심으로써 이들의 시점은 되돌려지는 것이며 하나님 나라에 이르는 것입니다. 이들은 세상이 알던 시간과 다른 시간에서 살아갈 것입니다. 이제 믿음을 가진 이들은 세상의 시간에 매몰되지 않은 채 하나님 나라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목적을 가지고 제자들을 파송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그 목적에 정확하게 부합하는 결과를 이루어냅니다. “제자들을 나가서, 여러 마을을 두루 다니면서, 곳곳에서 복음을 전하며, 병을 고쳤다.”(6)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했고, 귀신들리고 병든 사람들의 시간을 되돌려 놓음으로써 하나님 나라를 구체적으로 구현해 냈습니다. 무심한 듯 흘러가는 세상의 시간 속에 하나님 나라의 시간이 침투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과정이 필요합니다. 하나는 목적을 이루게 하는 준비 조건이며 다른 하나는 목적을 이루는 방법입니다. 먼저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송하시기 전에 열두 제자들을 다 한 자리에 불러놓고 그들에게 주신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모든 귀신을 제어하고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능’(1)이었습니다. 그들이 받은 능력과 권능의 속성은 한 마디로 시간을 되돌리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미래적인 것으로 기대합니다. 그 결과 하늘에 구현되는 하나님의 나라가 온갖 보석으로 치장되어 있는 것으로 상상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기대하는 시간의 앞당김으로 이해하게 되면 결론은 부자가 되게 해달라는 소원에 이르게 됩니다. 요즘 같은 세상에서 주식 시장의 앞날을 미리 볼 수만 있다면 누구라도 워렌 버핏 이상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시간을 되돌리는 것이며 그 시간이 현실의 시간 속에서 공존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제자들은 마치 과거로부터 온 시간여행자들과도 같습니다. 이들이 능력과 권능으로 가져오는 것은 과거의 시간입니다.
나가는 말
우리가 하는 일들을 잘 살펴보면 과거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청개구리의 청소년들에게는 잃어버린 과거를 돌려주는 것이며, 두루와 마루는 부족한 사랑을 채우고 돌려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거로부터 온 시간여행자들입니다. 우리의 소명은 이미 존재했지만 잃어버린, 병들었고 죽었고 귀신들렸다고 표현되는 것들을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지금의 세상과 타협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병과 죽음을 지속시키는 것이며 귀신에 여전히 휘둘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지팡이도 자루도 빵도 은화도 가지고 가지 말고, 속옷도 두 벌씩은 가지고 가지 말아”(3)야 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마을에 이르렀을 때, 그들은 어느 집이든 들어가서 머물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마을을 떠나면서 그 집에서 떠날 것입니다. 누가복음은 여행하는 제자들이 거할 집에 어떤 조건도 달지 않습니다. 이 시간여행자들은 여행에 필요한 아무 것도 가져가지 않으므로, 이 집에 전적으로 모든 것을 의지할 것입니다. 예수님과 제자에게는 오직 하나님 나라와 그 침투만이 중요할 뿐입니다. 제자들을 받아들이는 곳에서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시간이 흐르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곳에서는 하나님 나라의 시간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시간여행자답게 우리의 소명에 충실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