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여행을 통해 무엇을 생각하게 되었는가? 자네의 마음, 자네의 심득(心得)에 성과가 있는가?"
세류가 대답했다.
"세상의 아픔을 보았네. 낮은 땅의 풀들은 너무 바람을 많이 맞는군!"
"그 말이 맞아."
"나는 잊지 않았네. 땅의 노래를 삼으옵소서 하고 노래했던 내 어린 날의 기원을 말일세."
유성은 갑작스레 이어진 세류의 야무진 대답에 속으로 깜짝 놀랐다. 세류는 계속 말했다.
"나는 자네에게 시현의 이름을 받았어. 나의 노래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게 되고, 내 입술의 고백처럼 희망을 노래하는 땅의 소리, 땅의 소리 그 자체가 되라고……. 자네는 그렇게 말을 했어. 나에게 세상의 아픔을 보여준 이유는, 나의 결심을 지키게 해 주기 위해서겠지?"
유성은 놀라지 않았다.
"그렇다네."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하네. 초심을 지킨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야. 자네 덕분에 나는 초심을 지키게 되었네."
"다행이군!"
"앞으로 천하 사람들의 마음은 바로 나의 노래가 될 것일세. 그리고 그들을 향한 나의 마음도 나의 노래가 될 것이고……. 살아볼 만한 삶, 걸어가 볼 만한 길이라고 생각하네."
유성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칭찬할 만한 선택이야. 자네의 뜻이 그렇다면 내가 도와주지."
"……?"
"자네의 길은 외롭지 않을 걸세. 나도 그 빛을 노래할 거니까."
유성은 세류의 손을 꼭 잡았다. 세류는 눈물 한 방울을 똑 떨어뜨리며 유성의 손을 마주 잡았다.
"지금 한 곡 부를까?"
"좋지!"
유성은 웃으며 말했다.
"내가 먼저 할께. 자네 뒤에 하면 너무 비교될 것 같아."
세류는 핏 웃었다. 시가(詩歌)에 관해서만은 세류에게 한 수 굽혀 주는 유성이었지만 그 역시 만만치 않은 실력자인 것이다.
유성은 잔잔한 눈으로 언덕 아래 광야를 쳐다보다가, 노래하듯 읊기 시작했다.
슬프다 갈색 대지 위에 풀마다 누웠구나
샐 줄 모르는 밤 별빛조차 없어라
하늘은 시선을 외면하시고 돌이키지 않으시니
거리마다 사망이 안개같이 깔린다
어둠의 휘장 푸른 하늘을 가리우고
날은 죄인의 받을 형벌처럼 두려운 때로다
해와 달이 가는 길에는 숨가쁜 슬픔이
새벽 별빛은 존재하지 않고
기울어 가는 달빛은 처절하게 붉다
나의 백성이여, 천하의 사람들이여
내가 그대들의 허망하여짐을 슬퍼함은
그대들이 나에게 극히 빼어남이라
기력의 시작은 크게 쇠하여지고
생기(生氣)는 말라서 태워질 풀처럼 되었구나
눈물 뿌리며 피의 열매를 찢음이여
죽음조차 안식을 줄 수 없게 되었구나
어린 눈동자에는 빛을 찾기 어렵고
장성한 발은 어둠 속을 걸어간다
수사자의 무릎이 뒤틀려 꺾이고
암사자의 부르짖음이 메아리가 되나니
이른 비와 늦은 비로 축복할 구름은
목마른 풀의 갈망을 채워주지 못하네
풍운은 구름처럼 일어나도 빗방울은 없고
맑은 강가의 백로가 솔개처럼 살이 찌네
들의 열매가 가꾼 유실수에 열리고
아들은 문을 닫아건 아버지를 뒤로한다
내가 탄식하는 소리가 쏟아지는 물 같으니
해 아래 어느 것이 평화를 기억하겠는가
태양은 힘을 잃고 구름은 비를 머금지 않았으니
오늘 피었다 내일 지는 들의 삶은 어찌하란 말인가
심중에 근심함이 조개 속 모래알처럼 괴로우니
얼마나 아름다운 검이 되려고
이토록 뜨겁고 무겁게 연단(鍊鍛)을 하시는가
얼마나 밝은 빛이 되기 위하여
이처럼 타는 불꽃을 가까이 하시는가
불쌍히 여기소서 나의 백성
이 나라 돌이켜 주소서 빈 보고를 보소서
부르짖는 음성의 절규 흘려듣지 마소서
빛을 가진 자 새 노래를 부르게 하시어
헛된 꿈을 아름다운 환상으로 만들게 하소서
유성은 기도의 몇 마디로 노래를 마쳤다. 세류가 말했다.
"진정 제왕다우신 노래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제왕도 아니요 걸사도 아닙니다. 단지 청운의 꿈을 품은 문사일 뿐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똑같이 슬픔을 노래하여도 제 마음은 당신과 다르면서 같기도 할 것입니다. 그럼……. 부르겠습니다."
세류는 눈물이 가득 고인 눈으로 언덕 아래 광야를 굽어보다가 입술을 열었다.
흔들리는 세상을 보러 나섰을 때에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큰 뜻을 품었으나
영웅은 외롭고 푸른 하늘은 흐릿하며
따스한 모닥불은 스러진 지 오랜 광야
달이 그 빛을 잃고 별들이 서로 다투니
또다시 정처 없이 행하는 이내 몸
마음은 산하의 파편처럼 무너져 내린다
황하의 물결이 요동하는 이유를 내게 고하라
지엄한 곳에 푸른 뱀이 떨어지고
옥당에 괴이한 무지개가 떠오르니
장자의 집은 그 이름이 날개 꺾인 새와 같구나
빛나는 길은 그 넓이를 스스로 좁히고
위엄의 홀은 그 영광을 빼앗겨 잃어버렸으니
별빛이 태양 되려 줄지어 일어난다
그러니 저 황하의 파도는 슬픈 울음이 아니겠느냐
장강의 흐름이 어지러운 이유를 내게 고하라
청룡의 비늘이 깔린 듯 빛나던 숲이여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하여 향기마저 잃었는가
새는 날개가 있어도 날아오를 수 없고
나무는 뿌리를 내렸으나 생명의 역동함이 없구나
가지는 무성하나 열매는 없고
산꼭대기에서 흐르는 바람은 힘을 잃었다
그러니 저 천백세에 흐르는 장강의 물결이
어지러운 연유가 애끓는 마음이 아니겠느냐
산들과 작은 산들 위에 하늘 이슬이 그침을 내게 고하라
사막에 모래바람 일듯 일어나는 무리 있어
영광의 날개를 조롱한다는 말인가
재앙은 순백의 광야에 검붉은 피를 흩뿌리니
터질 듯한 가슴은 두려움을 지켜볼 뿐
번영의 불빛이 찬란하던 길이 어디 있느냐
죽음의 날개 아래 태풍의 잔해만 남았다
그러니 저 산들과 작은 산들이 이제 더 이상
하늘 이슬의 축복이 없음이 큰 비사(悲事)가 아니겠느냐
또 너는 대지가 통곡하는 이유를 내게 고하라
천하보다 귀한 생명들이 잡초처럼 쓰러지고
광야에는 노을이 깔려 까마귀 떼가 우짖으며 취한다
강을 더럽히는 악어처럼 전쟁은 계속되니
해는 어두워지고 구름은 피에 취하였다
무고한 피가 땅속에서 슬피 울며 호소하고
잔잔함의 꿈은 이제 원망이 되었다
그러니 그 품의 꺼진 생명을 안은 대지가
어찌 통곡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보아라 그대여 본래 활기가 넘치던 저 성내를
고요한 두려움 속에 끌려간 모습들이 환상이로다
흐르는 시내는 남은 자들의 탄식하는 소리이며
대하로 흐르는 소강(小江)은 나의 눈물이라
흐르는 비는 나와 저들의 깊은 슬픔이며
작은 물들은 우리의 마음 깊은 곳 탄식이로다
풍운의 구름 아래 쓰러진 이들이 꾸는 꿈은
골짜기마다 태양을 사모하는 눈동자의 애통함
오오, 하늘이시여! 불쌍히 여기소서!
가슴을 치며 눈물을 흘리는 이유는
새벽 별이 광채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또한 하늘의 광명이 빛을 잃었기 때문이며
하늘과 땅이 뒤집히려 하기 때문이로다
또 보아라 광야의 삶이 허망하여지고
큰 뜻을 품은 자들 모래 속으로 숨어든다
어린 눈동자에도 희망의 빛이 떠났으니
다섯 산과 일곱 하늘 아래서 함께 울리라
그럼에도 죽음의 손길을 소리쳐 부르지 않고
슬퍼하면서도 이생에 살아 있음은
눈물 속에서 지켜보는 한 빛이 있음에라
그 빛은 환한 빛, 아침의 작은 한 부분
약속한 아침을 가지고 올 때에
그 빛은 꿈꾸는 목소리로 말하리라
바람아 별들아 고이 잠들어라
내 백성의 안식을 방해하지 말라고
또한 그 빛은 밝은 빛, 잃어버렸던 평화의 시대
약속한 안식이 도달했을 때에
그 빛은 기쁨의 노래를 창화하며
곱게 우리들을 감싸주리라
차가운 밤이 지나고 온 햇빛은 따스하겠지
그 아래 편히 누워 마음 쉴 우리 보금자리
언제나 찾으려나,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가
아직은 모르지만 눈물 속에서
바라볼 수 있는 한 빛이 있기 때문이라
세류는 거기서 노래를 끝맺었다. 유성이 미소지으며 말했다.
"과연 시무현(詩武賢)……. 제목은 애곡지희(哀曲之噫;슬픈 노래의 탄식)이라고 하게."
세류는 가만히 끄덕였다. 아직까지도 시흥이 가시지 않은 듯했다. 유성은 핏 웃으며 그런 세류를 잠시 동안 보고 섰다가 문득 말머리를 돌렸다.
"자아, 이제 헤어지세. 수경 선생님을 만나뵈러 갈 예정이야."
"으음……."
"아버님께 안부 전해주게. 자네 동생들에게도."
"그러지……. 잘 가게. 벗이여."
유성은 말을 돌렸다. 몇 발짝 가던 그는 갑자기 휙 말을 돌리며 세류를 향해 말했다.
"친구여!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될 것일세. 곧 자네가 원하는 것을 찾게 해 주겠네!"
"……그리 되기를 바랍니다. 제왕이 되실 분이여."
세류는 비로소 살짝 미소지으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유성은 그 말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곧 말을 돌려 힘차게 달려갔다. 세류는 깊은 한숨을 토해내며 말의 목에 쓰러지듯 기댔다.
"그대를 언제 다시 만날까……. 나의 사랑하는 분, 당분간……. 볼 수 없겠지……?"
내가 알지 못하는 곳을 보고 있는
사랑하는 나의 아름다운 친구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헤어지는 시간은 예정을 어기지 않았다
잠시라도 떨어져 있기 어려울 만큼
사랑하는 나의 아름다운 친구
그대가 나의 곁에 없는 동안에는
내가 누구와 천지를 논할 수 있을지
일찍이 내 마음 저 강물에 띄웠더니
물보다 앞서 아쉬움이 먼저 흘러가네
하늘이 언제 흐릿해졌는지 모르지만
내 손은 그대를 잡을 수 없는 것
헤어짐과는 달리 재회는 기약이 없어
그대와 나는 하나이기에 꿈을 꿀 뿐
우정은 푸른 대와 같아 이울어지지 않고
믿음은 타는 태양이니 스러지지 않는다
사랑하는 나의 아름다운 친구
나에게 약속한 것은 아름다운 맹세
지금 내 곁에 그대 보이지 않아도
우리가 같은 것을 보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한 가지를 사모하기에
곧 눈물을 씻고 그대 다시 볼 것을 생각하네
나의 친구 나의 사랑하는 아름다운 사람
영원히 한결같은 내 벗이여…….
세류는 노랫말의 끝을 여운처럼 끝내고 말았다. 사과빛 뺨에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떨어져 있고 싶지 않아……. 그와 함께 하는 동안, 행복했는데……. 정말 행복했는데."
그러나 유성의 모습은 이미 보이지 않고 있었다.
"어서 오시옵소서. 주군. 관례를 치르심과 여행을 마치심을 감축드리옵니다."
"고맙네. 모두들."
이제 엄연히 관례를 치르고 성인이 된 유성은 이전처럼 편하게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하운은 오히려 그 쪽이 더 편했다. 유성은 무림의 제왕으로 나서면서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상호존대를 했었는데, 그들의 당연한 생각으로는 - 인간이었을 때의 의식 - 그들은 엄연히 '신하'이므로 상호존대란 당치도 않은 일이었다.
하운이 한숨처럼 말했다.
"수경선생 사마휘와 친분을 맺으셨으니, 이제는 정말 세상으로 나가셔야 하겠군요."
"물론. 그렇게 할 걸세."
유성의 목소리에는 당연하다는 것이 배어 있을 뿐 - 순간 하운은 서운한 느낌이 들었다.
"진정……. 무림의 제왕으로, 저희들의 주군으로 남아 계시지는 않으시겠다는 것입니까?"
그를 힐끗 본 유성은 빙긋 웃었다.
"자네는 내 보좌관이야. 몰라서 물어보는 것은 아니겠지?"
그러자 비단 그뿐만이 아니라 형제들 모두가 움찔했다. 보좌관 - 그 단어가 그들에게 가지는 의미는 지대한 것이었다. 하운이 맏형으로서 대답했다.
"잘 알고 있습니다. 이번 생(生)의 의미……. 신(臣)들, 사무치게 알고 있사옵니다."
"흠, 그럼 그 물음의 뜻은 무엇인가? 무림의 제왕은 역사에 나설 수 없다는 건가? 물론 암묵적으로 그런 분위기가 있긴 했지만, 자네들 말대로 난 제왕일세."
창 밖으로는 백여 명에 가까운 인원이 사방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지존령의 발행을 들고 중원 천하에 널리 퍼져 있는 그의 사람들에게 달려가는 것이었다.
"저 소리를 듣고, 저 광경을 보게. 내가 선택한 길을 알리고 있어. 천하를 향해, 천하에 나의 이름을 아는 모든 사람들을 향해 말일세."
"……."
"나는 감행할 것일세. 자네들이 날 따르리라는 기대를 해도 되겠나?"
대답은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되었다.
"심려 마소서, 저희들은 주군을 따를 것이옵니다."
"고맙네. 어차피 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니, 기왕이면 함께 가는 거야. 다들 알겠지?"
"예. 주군."
싱긋 웃으며 끄덕여 준 유성은 문득 맑은 하늘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절대적인 강함, 통치자의 위엄, 거대한 권력……. 또 사람을 끄는 인화력과 지도력도, 성품(性品)까지도……. 미스바의 아이네스 황제 시절보다 뛰어난 능력을 모두 갖추었다.
그런데도 그의 일이 이토록 마음에 걸리고 있다니……. 천하를 먼저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한 사람의 부재가 이토록 가슴이 아프다니……?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 난 자각하기 전까지 18년을 인간 여자로 살았던 것을…….
그래서 이들이 천족으로 변화되는 과정 중에도 인간의 마음을 지니는 것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지만, 정말이지 견디기 힘든 고통이다. 하운은 내가 왜 하늘의 마음을 가져야 하느냐고 했지만, 나는 그것보다 이 가슴속의 아픔이 더 괴롭고 슬픈 잔인 것을……! 아아, 미즈모르!'
유성의 눈에 깊은 우수가 서렸다. 그 아름다운 얼굴에 슬픔이 깃든 것은 정말이지 순간, 어린 주군의 얼굴을 우러르던 청년들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군……?"
'천하행을 다니면서, 나는 내 기운을 10스다디온(1스다디온Stadia = 약 180m)이상 퍼뜨리고 다녔어. 그런데도 당신은 느껴지지 않았어……. 정말, 정말 이 세상에 없는 건가? 차원의 틈새에 떨어지고 만 거야?'
"주군……! 괜찮으십니까?"
유성은 하운의 큰 목소리에 퍼뜩 제정신을 차렸다.
"음? 아……, 날 불렀나?"
"예, 몇 번이고……. 갑자기 무슨 생각을 그리……?"
"아아, 아무것도……. 그래, 난 괜찮네. 가세."
유성은 벽에 걸려 있던 백색 겉옷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소리도 없이 공중을 날아온 겉옷을 휙 걸치면서, 그는 다시금 하늘을 향해 힐끗 시선을 돌렸다 거두었다.
'찾을 거야! 반드시!'
"가자……. 우선은 그들을 만나러 가 보아야지. 가볍게 알아보고, 사냥을 구경해야겠지."
"……?"
'사냥?'
……잠시 뒤, 장원의 문을 나서는 여덟 필의 말이 있었다.
한편, 여덟 필의 말이 큰 소리를 지르며 달려나갔던 울타리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 대지의 냄새가 섞인 땀흘리는 사람들의 노랫소리가 바람과 함께 머물다 가는 한 집 앞에는 학창의(鶴 衣)의 미청년이 서 있었다.
그 곁에는 네 명의 백면서생(白面書生)들이 함께 해 있었다. 그들은 가만히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푸른 하늘은 둥그런 덮개 같고
땅은 바둑판 비슷하구나.
사람들은 검은 돌 흰 돌을 갈라
바쁘게 오가며 영욕을 다투네.
영화로움은 스스로 평안함에 머묾이요
욕됨도 정히 하찮은 것이로구나.
남양 땅에 숨어서 삶이여
드높은 잠 누워서도 오히려 모자라네.
한 사람이 입을 열었다.
"원직(元直)! 자네는 '그'의 행보를 어찌 보는가?"
원직이라 불린 서생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다른 말 할 것이 무엇 있겠는가? 그를 위해 세상으로 난 문은 수십(數十)! 그 중 하나를 선택하고자 갔겠지!"
그리고 그는 시종일관 노랫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고 있는 학창의를 입은 청년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어쨌든 공명(孔明) 자네가 시가장(柴家莊)과 연관이 있어 '그'의 행보나마 알아낼 수 있었던 덕일세! 우리 호기심이 해결된 것은 말일세!"
공명이라 불린 그는 빙그레 웃었다.
"글쎄……. 아직 완전히 알아낸 것은 아니야. 단지 '그들' 을 만나러 간다고 했고, <가볍게 알아보고 사냥을 구경할 것이다>고 했네! '그' 가 만나려고 하는 '그들'이 누구인가가 문제야! 아마도 그들은 '문'의 절반 정도는 이룰 것일세!"
네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맞네. 허나 '그'가 만나려고 하는 사람들의 범위는 이제 상당히 좁혀졌어. 어쩌면 생각해 낼 수도 있을 걸세.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그의 '문'을 절반이라도 알아낼 수 있다는 의미가 되네! 생각들 해 보세!"
"맞아! 우선 허도에는 천자를 등에 업은 조조가 버티고 있고, 황하 이북과 회남에는 사세오공(四世五公)의 명문가 출신인 원소와 원술이 있네."
"서쪽에는 익주의 유장, 서량(西凉)땅의 마등, 한중(漢中)땅의 장로 또한 일단은 반열에 올릴 만 하지!"
"또 북쪽의 요동 땅에서는 공손찬이, 강동에는 손책이 욱일승천의 기세로 세력을 기르고 있네. 그리고 이 형주 땅의 유표 또한 '문'이 될 수 있겠지!"
"……!"
'문'……! 그 말이 벌써 몇 번째 나온다.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사람들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의 앞에, 이미 천하의 영웅들은 하나의 '문'일 뿐인 것이다.
그러한 그는 과연 어떤 사람일까. 소문에는 자애로 아랫사람을 다스리는 명군(明君)의 기질을 타고났다 하지만, 그 마음에 있는 것이 선(善)함인지 악(惡)함인지 어찌 안단 말인가.
그 때 - 한 청년이 입을 열었다.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으며, 무언가를 알기라도 한 듯이.
"어쩌면……."
"……?"
"지금 하비성에 포위되어 있는 여포가 사용될지도……."
"!"
네 사람은 불에 데인 듯 놀라 펄쩍 뛰었다. 공명(孔明)이 말했다.
"그가 사냥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 그랬지. 그런데 그게 무슨……?"
"사냥이라고 한다면 옛부터 황실과 귀족들이 즐겨오던 좋은 오락거리가 아니었던가? 포획된 짐승을 활을 쏘거나 창을 던져 잡는 것 말일세."
"그 짐승이 여포란 말인가?"
"음, 그렇지만 화살을 날릴 사람은 그가 아닐 걸세. '그'는 곁에서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할걸. 또 그렇게 하겠다고 했고."
"그건 또 무슨 말인가?"
"사냥을 구경하는 것을 택한다면, 그 사냥은 자신의 '문'으로 삼을 수 있을 만한 사냥이라는 것 아니겠나."
"그렇군. 그래서?"
"지금 여포를 공격하고 있는 사람은 황족의 한 사람인 유예주와 황제를 모시고 있는 조조야. 그런 그들과 함께 여포의 죽음에 관여한다면 충분히 세상에 나설 수 있지 않겠나? 즉 그것도 하나의 '문'이란 말일세."
서원직이 손바닥을 딱 쳤다.
"그……! 그렇군! 허면, 그는 하비성으로 갔다는 말인가!"
"그래. 하지만 아무리 상황이 그렇게 돌아가도 그는 무림의 제왕일세. 잠시 동안 그 이름을 베일 속에 감추어진 등불로 삼을 것인지, 아니면 공공연히 드러내고 세상을 활보할 것인지! 둘 중 하나를 택하게 되겠지."
수염이 짧은 한 사람이 머뭇거리다 물었다.
"만약 전자를 택한다면?"
"요순(堯舜)의 치세(治世)를 꿈꾸는 것도 허망하지만은 않을지도!"
"후자라면?"
"천하는 철저하게 파괴되고 다시 새로운 천하의 창조를 기다려야 하겠지!"
"!"
사람들은 입을 다물었다. 무서운 공포가 그들 사이를 휩쓸고 지나갔다. 그 때 공명이 다시 말했다.
"그러나 후자의 일이 일어나지는 않을 것일세! 그의 마음 속에 있다고 하는 자애(慈愛)가 진정한 것이라면 말일세!"
서원직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수경 선생님께서는 분명 그를 노자가 말한 가믈한 덕의 사람으로 보고 계시네. 또한 쉬쉬하고는 있지만, ……묵자(墨子)가 말한 박애(博愛)를 이룰 사람으로 보고 계심에도 틀림없어!"
"!"
사람들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 말은 막중한 무게의 것이었다. 제자백가 중 묵가는 그 세력이 처음에는 결코 미약하지 않았건만 언제부터인지 깊은 어둠과 심연 속에 잠겨 침묵 속에 그 맥을 이어가고 있었다. 분명 그들은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수림 속에 묻혀 사는 갈건의 선비들은 그들과 잦은 접촉을 할 수밖에 없었다. 비밀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인연을 만드는 법이기에.
그래서 그들에 대해 안다면 - 서원직의 그 말은 결코,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공명이 조용히 대답했다.
"그렇지."
서서가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그의 행보를 어찌한다는 말인가? 우리들로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을 터인데?"
"일단은 지켜보아야 하겠지!"
"지켜본다……?"
"허나, 자네들은 먼저 자네들의 마음이 행하는 대로 하게! 맹건 자네는 얼마 전부터 무림에 등장한 군사대(軍師隊)에 들어가고 싶어했고, 석도, 최주평 자네들도 그랬지. 세상으로 나가고 싶지 않아서 무림 속에서 자네들의 뜻을 펼쳐보고 싶은 것이 아닌가?"
세 사람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공명이 다시 말했다.
"군사대의 적(籍)에 이름을 올려두게! 허면 언제고 '그'는 자네들을 사용할 것이야. 천하를 위해서 말일세!"
"……!"
"그리고 이번 그의 행보가 나타내는 결과(結果)를 보고, 모든 것을 결정하도록 하세! '그들'의 말대로 - 모사재인(謀事在人) 성사재천(成事在天)! 비만병위전(備萬兵爲戰) 승리재천(勝利在天)!"
일은 사람이 꾸미나 성사는 하늘이 가려준다……! 전쟁을 위하여 만병을 준비해도 승리는 하늘에 달려있다……!
과연 그리 되기를……!
난세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꿈은 별다른 것이 아니다.
사흘이 지났다.
하비성에는 여포가 주둔하고 있었다. 이미 성은 조조와 유비 연합군에게 포위되었고 식량과 군세도 충분하지 못했으나, 여포 한 사람이 만 명의 역할을 하고 있었기에 쉽사리 공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연합군도 그리 우세하지는 않았지만, 고립된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었다.
여포는 원술과 사돈을 맺어 숙적인 조조를 함께 상대하려고 했지만, 지난날 이미 그는 원술의 청혼을 거절한 적이 있었기에 원술이 받아줄까는 문제였다. 결국 원술은 여포의 딸을 먼저 보내오면 원군을 보내주겠다고 했고 살기를 도모한 여포는 직접 딸을 등에 업고 한밤중에 성문을 나가 원술의 아들에게 딸을 보내기로 했다.
유성이 도착한 것은 그런 상황에서, 성문이 열리기 바로 2각 전(30분)이었다. 그의 뒤로는 그의 그림자이자 손안의 북두칠성, 무림명으로 백의칠령(白衣七令)이라 불리는 자들이 따랐다.
"흠……. 삼엄하군."
"그러하옵니다. 조심하시옵소서."
그들이 속삭인 목소리는 벌레가 기어가는 소리만큼이나 작았지만, 누군가 그 소리를 들은 듯 우렁찬 호령소리가 들렸다.
"거기 누구냐!"
유성 일행은 급히 모습을 감췄다. 물론 마법으로 - 백운이 재빨리 보니, 탐스러운 삼각수 수염에 봉의 눈을 한 장수가 말 위에 높이 앉아 있었다. 그는 곧 그 이름을 알 수 있었다. 그의 이름을 모를 사람은 지금 세상에 별로 없었다.
"주군. 관우입니다."
"관우? 호오 - 저 사람이 말인가?"
유성은 흥미가 인다는 얼굴로 갑자기 사라져버린 자신들을 찾느라 수색에 정신이 없는 그들을 훑어보았다. 무인들의 수장이라는 이름을 받는 그였다. 무용과 충의, 기개를 갖춘 이 시대 최고의 명장으로 추앙받는 관우가 유성에게 한 점이라도 좋지 않게 보일 리는 만무했다. 유성은 오히려 뛰어난 무인을 만났다는 생각에 흥분하고 있었다.
"어디로 갔는지 샅샅이 수색해라. 십중팔구 첩자일 것이다."
"예. 장군."
유성들은 재빨리 투명화 마법을 유지한 채 공중으로 떠올랐다. 어두운 밤중에서도 군사들 사이에서 눈에 확 띄는 관우를 눈여겨보고 있던 유성은 이란이 조용히 속삭이는 소리에 찬찬히 고개를 돌렸다.
"주군. 성문이 열리고 있사옵니다."
유성은 재빨리 자신의 기운을 퍼뜨렸다. 물 흐르듯 고요히 흘러나간 기운에 사람들의 파장이 부딪혀 돌아왔다.
잠시 그 방법으로 어둠을 뚫고 나오고 있는 여포를 살피던 유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스륵 하고 사라졌다.
하운 등이 미처 잡거나 말릴 새도 없었다. 유성은 가까이 있던 군마 하나를 잡아타고 군관인 양 여포에게로 달려가고 있었다. 금빛나는 머리카락은 투구 속에 깊이 감춘 채로.
희미한 달빛을 받은 그의 애검 파르레시아는 눈부시게 빛났다. 아무리 투구를 눌러쓰고 백의 위에 낡은 군복을 걸쳐도 이쯤되면 눈에 띄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네 이놈! 필시 범상한 군관이 아니렷다! 누구냐?! 내 길을 막겠다면 죽이고 내 길을 돕겠다면 너를 장수로 기용할 것이다!"
여포가 귓전을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그러나 유성은 그 우렁찬 목소리 속에 깊이 숨겨진 한 가지 감정을 곧 읽어냈다.
'당황했다……!?'
그 '읽음'은, 곧장 행동으로 이어졌다.
챙!
한차례 맑은 검명이 울렸다. 유성이 말을 타고서도 얼마나 빠르게 움직이는지, 여포는 정신을 차리지 못할 지경이었다.
그 때, 조금 전 여포의 음성 못지않게 웅후한 음성이 빠르게 공간을 메우기 시작했다. 그들이 있는 곳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거리였다.
"포위해라! 도망치지 못하게 하라! 빠져나가게 해서는 안 된다!"
그러자 여포의 얼굴에 확실한 당황의 기색이 떠올랐다.
"이런, 관우……. 일이 어렵게 되었구나."
그는 그 와중에도 어깨 하나 흔들리지 않고 검을 겨누고 있는 유성을 쳐다보았다.
알 수 없었다. 유비, 관우, 장비 세 형제와 손속을 겨루었을 때도 이와 같은 어려움은 느끼지 못했는데. 검 한 자루만을 든 필마단기의 사내에게 이토록 고전해야 한단 말인가 - 그는 울컥 치밀어오르는 분노에 소리를 쳤다.
"네놈은 대체 누구냐? 현덕의 졸개인가? 조조놈의 졸개인가?"
그 말에 유성은 핏 하고 웃어 버렸다. 그제서야 유성의 얼굴을 조금이나마 볼 수 있었던 여포는 밤의 어둠과 투구의 그림자에 가려져 있던 하얀 피부와 붉은 입술을 보았다.
이윽고 구슬이 구르는 듯 낭랑하고 아름다운 목소리가 그 입술에서 흘러나왔다. 입술 사이로 살짝살짝 비치는 치아는 상아처럼 희고 공교히 깎은 듯 고왔다.
"그대는 나와 검속을 나누고서도 나를 졸개로 보는가?"
"이, 이놈! 건방지다! 얼굴을 드러내라!"
"그보다는 피하는 것이 그대에게 좋을 것이다. 어쨌든 나는 그대의 무(武)를 일견식(一見識) 하였으니, 그것으로 되었네."
"뭐라?! 이런 건방진 놈을 보았나! 내, 네 놈의 얼굴에 칼자국을 내어 주기 전에는 아니 갈 것이니라!"
여포는 격노하며 달려들었다. 유성은 여유가 넘치는 태도로 그의 방천화극을 가볍게 받아넘기며 응수했다. 잠시 멈춰졌던 싸움은 다시 전개되었고 때마침 관우가 군사들을 이끌고 급히 달려왔을 때는 이미 격전(激戰)이 되어 있었다.
"헉! 저럴 수가!"
관우는 놀랐다. 아주 많이 놀랐다. 출사한 이후로 한 번도 놓친 적이 없었던 그의 애병(愛兵) 청룡언월도(靑龍偃月刀)를 놓칠 뻔할 만큼 말이다.
그는 이 순간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천하에 그 무예를 당할 자가 없다는 여포를, 너무나 가볍게 상대하고 있는 군관 복장의 한 청년이 있다는 것을, 그는 믿고 싶지 않을 만큼 놀라웠다.
무인(武人)인 관우, 무예가 신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칭송을 듣는 몸인 관우였다. 그런 그였으나, 그 광경 앞에서 그는 전의(戰意)가 아닌 경외(敬畏)의 마음이 피어오르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자신들 세 의형제들이 한꺼번에 상대해야 겨우 한 수 굽혀 주는 여포를, 그 젊은 군관은 너무나 가볍게 - 한 수 이상 놓고 상대하고 있다는 점에서 관우는 경악하고 경탄했다.
"허! 보아하니 단신의 몸인데, 어찌 저리도 대담하단 말인가? 군복을 보아하니 우리 군관인 듯한데……. 갑옷 밑의 백의가 유난히 희구먼. 게다가 저런 명검은……. 으음, 보았다면 잊지 못할 것인데……."
그 때 그들의 움직임이 잠깐 느려졌다. 서로의 다음 한 수를 탐색하기 위한, 순간의 눈싸움이었다. 그 순간 관우는 투구 그림자 아래 숨겨진 청년의 얼굴을 반쯤이나마 똑똑히 보았다.
"앗! 저, 저 사람은……?! 설마!?"
관우가 아는 사람이어서가 아니었다. 그 얼굴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콧날과 입술, 턱과 목덜미만을 조금 보았을 뿐이지만 그것만으로도 반할 만큼 아름다웠던 것이다.
그가 아는 한, 그가 들은 한, 여포를 한 수 놓고 상대할 만큼의 무예와 한눈에 반하고도 남을 뛰어난 미모를 지닌 자로 눈부실 정도로 흰 백의를 입은 사람은 단 하나 뿐. 그는 이 시대 무인들의 수장이었고 천하가 주목하는 사내였으며 소리 없이 세상을 바꿔 나가고 있는 청년이었다.
"설마! '그'란 말인가!?"
관우의 전신은 경직되었다. 어떤 전쟁터에서도 떨리지 않았던 그의 무릎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음에도 그는 제어하지 못했다.
"설마, 설마……. 천웅성 천성검황 유성 님이……?"
그는 자기 자신에게도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이름은 함부로 부를 수조차 없을 정도로, 황제의 이름만큼이나 사람들에게 경외의 대상, 존경의 대상이 되어지고 있는 이름이었다.
암흑 가운데 빛을 주는 별과 같은 사람! 하늘의 사자처럼 백성들의 마음을 채워 주는 사람! 하늘의 빛을 보여주는 자! 빛으로 사람을 이끄는 자! 이 시대 무인들과 협객들의 제왕!
그 이름으로 불리는 거대한 한 사람이 내 앞에 있다 - 관우도 무인이었다. 흠모하던 무(武)의 수장을 보며 떨리지 않을 수 없었다. 갑자기 긴장감이 그의 전신을 휩쌌다.
한편, 지켜보는 이들과는 별도로, 여포는 오래 싸울 수 없었다. 등에 업은 딸의 떨림이 자신의 몸에까지 전해져 오고 있었다. 관우와 장비 외에 그가 이렇게 싸워 보기는 처음이었다(당연하지, 아무리 장난에 가까운 수준이라지만 미사엘의 검을 그만큼 받아낸 것도 장하다).
"대단한 놈이구나. 졸개로 치부했던 것을 사과하마. 너는 장수다. 대단한 장수를 만났구나."
"……."
"에잇! 자, 오늘은 이만 돌아가야겠다. 딸아일 업고 더 싸울 수가 없구나."
여포는 한차례 거센 공격을 한 다음 그대로 말머리를 돌렸다. 유성은 가만히 그를 보내주며 짧게 물었다.
"……도망치는 건가. 내가 누군지 정녕 모르겠는가?"
그에 대한 여포의 대답소리는 잘 들려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빠르게 서로간의 거리가 멀어지고 있는 지금 어떻게 유성의 목소리가 바로 곁에 있는 듯 가깝게 들렸는지 모르는 듯 - 아니, 자각하지 못한 듯 했다. 유성은 한숨을 쉬며 검을 거두고 말에서 내렸다.
"아깝군……. 저런 무인이……. 짐작은 하고 온 일이지만, 정말 아깝군."
그 때까지 넋을 놓고 있던 관우는 그 말을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말에서 내려 그를 향해 다가갔다.
"실례합니다. 대인……."
막 천을 둘러쓰던 유성은 얼굴을 거의 다 가린 채 관우 쪽을 돌아보았다.
"무슨 일입니까?"
"한 가지만 여쭙겠습니다. 천웅성……, 이십니까?"
그 순간 관우는 뒤로 서너 발짝을 물러나야 했다. 안개처럼 스르륵 나타나며 유성을 둘러싼 일곱 명의 사람들 때문이었다.
그리고 - 그는 그 사람들 중 두 사람을 알아볼 수 있었다.
"채운무현(彩雲武賢) 하운 공, 비상고천검(飛上敲天劍) 백송 공……?"
하운이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저희들을 아시는군요. 헌데, 저희 주인께 무슨 일이신지……?"
관우는 한 발 더 물러서며 포권의 예를 했다.
"과연, 일곱 분께서는 천성검황을 주인으로 모시셨군요. 몰라뵈어 죄송합니다. 저는 관우라 하며 자는 운장입니다. 천하 무인들의 수장과 지상 의협(義俠)의 북두칠성들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 때 유성이 빙긋 웃으며 하운들에게 말했다.
"다들 물러나게. 장군과 말할 것이야."
"예, 주군."
일곱 사람은 소리도 없이 유성의 뒤편으로 물러섰다. 기척조차 느끼기 힘든, 놀라운 움직임이었다. 관우는 속으로 다시 한 번 경탄했다. 그 때 유성이 그 낭랑한 미성(美聲)으로 말했다.
"관우 장군. 오늘 내가 이곳에 온 이유가 그대가 아닌 것을 알았을 텐데 어찌 나에게 묻고자 하시는 것이오?"
"!"
관우는 홀릴 듯한 그 목소리에 하마터면 정신이 흩어질 뻔했다. 그는 가까스로 마음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소장은……. 천웅성의 이름을 우레처럼 들어 왔사옵니다. 꼭 한 번 뵙고 싶었사온데 이렇게 만나뵙게 되어 실로 기쁘옵니다."
"나의 이름을 들으셨고 나를 보고 싶어했다니 반갑군요. 그러나 나는 장군이 나의 이름뿐 아니라 나의 달려갈 길에 대해서도 들었기를 바랍니다."
관우는 애써 정신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소장이 듣기로는……. 제국의 회생과 전무후무한 발전을 당신의 길로 선택하셨다고 알고 있사옵니다."
유성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고였다.
"당신이 알고 있다면 - 우리는 가까운 미래에 다시 한 번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원하는 대로 검속을 겨루어 볼 날도 올 것입니다."
"!"
"자, 그럼 이만 - 다들 가세."
"예! 주군!"
여덟 사람의 그림자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유비에게 돌아온 관우는 놀라움과 감탄에 젖은 모습이었다. 유비는 그런 관우의 모습을 보는 것이 심히 오랜만이었다.
"허허, 운장? 여포가 성문을 빠져나왔다가 들어갔다고 하더니, 무슨 일이 있었는가?"
"아, 아니옵니다. 형님. 여포가 원술에게 딸을 보내기 위해 직접 업고 나왔었지만, 그를 성 안으로 돌려보낸 것은 제가 아니었을 뿐이옵니다."
유비의 눈동자가 커졌다.
"자네가 아니라……? 그럼 누군가? 여포를 자네만큼 상대할 사람이 어디 있다고?"
"……저도 믿기 어렵습니다.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
"무슨 말인가? 대체 누구인가?"
"형님, 작금에 그만한 무예를 지닌 분은 단 한 분 뿐입니다."
"!"
유비는 입을 딱 벌렸다. 곁에 있던 장비가 물었다.
"형님이 그 분이라고 칭하는 사람이 누군지 나도 심히 궁금하오. 그분이 대체 누구요?"
"장비, 그렇게 쉽게 말할 분이 아니시다. 그분은, 천웅성……. 천성검황……. 유성 님이셨다."
"!"
"왜 갑자기 나타나신 것인지……. 알 수 없는 말씀만 하고 안개처럼 그냥 사라지셨는데……."
세 사람은 '그'의 출현이라는 말에, 여포가 원술과 손을 잡으려 한다는 것을 조조에게 이야기하러 가는 것도 잊어버린 채 넋이 반쯤 나가 버렸다.
현재 유성의 행보는 충분히 그럴 만한 일이었다.
밤이 깊어갈수록 그들의 고민 아닌 고민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여포의 움직임을 조조에게 이야기하지 않은 것을 문제삼을 만큼 조조도 한가하지 않았다. 그는 사방으로 귀를 열고 있는 사람이었다. 여포의 동향은 물론 관우가 누구와 마주쳤었는지도 첩자를 통해 들은 것이다.
그는 벌써 몇 차례씩 묻고 있었다.
"틀림없이 그분이었는가? 분명히?"
"예, 승상. 뿐만 아니라 채운무현 하운 공을 비롯한 백의칠령이 따르고 계셨습니다."
"백의칠령들께서도……? 그럴 수가?! 은자 중의 은자, 무도만을 추구하는 이들의 제왕, 함부로 이름조차 부를 수 없는 천하인들의 존경의 대상, 빛을 밝히는 등불과 같은 존재인 그분이, 수많은 '문'을 놔두고 이곳에 나타나셨다?"
조조는 머리를 싸맸다.
"어째서 이곳에……. 어째서? 여포라는 거대한 적을 맞아 싸우는 지금, 왜 이곳에 나타나셨단 말일까?"
아무도 그것은 예측할 수 없는 일이었다. 조조 휘하에 수많은 재사들이 있어도 감히 그의 행보, 그의 이유만은 예측하려 들지도 않았다. 너무나 신비로웠고, 말로 하지 않아도 감히 그 사람의 일은 가볍게 입에 담을 수 없다는 묵계가 있었기에.
한 줄기 바람은 이미 거대한 폭풍으로 변할 핵을 가슴에 품고 있었다.
"주군. 도대체 무슨 뜻으로 여포와 싸우신 것입니까?"
"그는 강하다. 강함이 과연 얼마나 세상을 평정할 수 있을지 궁금했다. 또 무인으로서의 그의 재질도 알아보고 싶었지."
유성은 한가로운 태도로 대답하며 은빛 잔을 살짝 기울였다. 붉은 포도주 한 방울이 잔을 타고 흘러내려 윤기 나는 자단목(紫檀木) 상에 떨어졌다. 무인답지 않을 정도로 하얀 손가락이 그 위로 빠르게 움직여 성(成)자를 썼다.
"이루는 것은 순간이다. 하지만 지키는 것은 오래지. 힘든 일이기도 하고."
"……."
"간웅이 내 앞을 막으면 나는 그를 나의 능신으로 만들며, 영웅이 내 앞을 막으면 나는 그를 내 벗으로 만들 것이다. 백성이 곧 제국인 나라, 그러면서도 빛의 영광이 가득한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반드시 이 땅에 실현시켜 보일 것이야. 그대들은 나의 뜻을 잘 이해해 주기 바라네."
"예. 주군!"
유성은 나직하게 하늘을 바라보았다. 은빛 나뭇잎이 흔들렸다. 조용히 그의 입술이 열렸다.
"바람이야……! 이 땅에 바람이 불어오고 있다. 내가 부르는 바람이!"
하늘에는 별이 빛나고 있었다. 이윽고 자리를 떨치고 일어난 유성은 발걸음을 융중으로 향했다. 한밤중이었지만, 그들에게는 그런 것이 아무 상관도 없는 것이었다. 도착한 곳은 솔숲과 대숲에 둘러싸인 조그만 집. 언덕 와룡강(臥龍岡)을 등진 곳이었다. 일곱 사람은 상당히, 아니 정말로 당황해했다.
"주군……. 설마 이곳을?"
"으음. 이 정도면 충분해."
"……이건 너무 초라하지 않으십니까? 최소한, 시……."
유성은 재빨리 말을 막았다.
'시가장 정도라도 되어야 한다는 것이겠지. 역시 아직은 인간의 생각을 가지고 있다. 언제 날을 잡아서 하늘의 존재다운 생각을 가지도록 해 주어야겠어. 낮은 곳으로 내리는 빛, 그 진리를 가르쳐야만 해. 이들은 내 신하이지만, 내 제자이기도 하니까.'
"지금은 사람들의 마음을 생각하는 것이 필요하네. 이만한 집도 마련 못 하고 사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아. 이만하면 족하네. 필요하다면 나중에 만들면 되지."
"하오나……."
"명색이 농가이니 땅도 사야겠지. 소작을 주도록 하고……. 이 곳 근방의 우리 대원들에게 맡기는 것이 무난할 거야."
"잘 알겠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을 풀어. 하비성의 동태를 알아보게. 북쪽의 소식도……. 원소와 공손찬의 대치 상황은 어디까지 갔는지 말일세."
"예. 주군."
"요동 쪽 상황도 알아보고……. 후훗, 지금쯤 머리 싸매고 있는 사람들이 꽤 되겠군."
그랬다.
"유공. 소식 들으셨소?"
"무슨 소식 말씀입니까?"
"여포가 딸을 데리고 회남으로 가려던 날 밤에 말이오. 듣자하니 그 날 '그'가 나타났었다고 하오."
유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들었습니다. 그 일로 운장이 적잖이 흥분해 있었지요."
"관운장의 일은 나도 들었소이다. 그 분을 만났다면 그럴 만 하지요."
"예, 소문대로 아름답고 기품이 있었다고 합니다. 목소리 또한 천상의 음악소리에 어딘지 모르게 희망의 빛이 느껴지는 분위기……. 게다가 그 무예는 여포를 한 수 이상 놓고 사용했다고 합니다."
"여포를 한 수 놓고! 과연……. 헌데, 그 분이 왜 여기 나타나셨을까요?"
"글쎄 말입니다. 아직까지 그 이유를 모르겠어요. 헌데, 그 분이 황족이시라는 소문이 있더군요."
"그렇습니다. 소문이 폐하의 귀에까지 들어가 황실의 족보를 살펴보니, 지금의 폐하와는 사촌 형제 뻘로 광무제 폐하의 숙부이신 유량님의 후손이 된다고 하더군요."
"대단하군요."
"……."
무엇이 대단하다는 것일까? 그런 부분까지 알아낸 조조가? 아니면 '그'가? 어떤 때에는 오히려 단순한 것이 더욱 복잡해 보인다.
"주군. 하비성이 물에 잠겼다고 합니다."
유성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다. 반면 소식을 전하는 적영의 목소리는 놀람 가득한 목소리였다.
"장수들은 어떤가."
"예?"
"여포 휘하의 장수 중 후성이란 자가 잃었던 말을 다시 찾자 금주령도 잊고 축하연을 벌였다던데……."
"금주령이야 내려진 지 두 주가 넘었습니다만, 그런 정보는……."
"아, 아직 아닌가? 하하, 이런……."
그러나 이틀 후, 청색 봉인을 지닌 비둘기가 날아들었을 때 융중 유성의 거처 에서는 일곱 명이나 되는 사람들의 혼이 잠시 유체이탈 현상을 겪었다.
"……."
"아, 하하하……. 그, 그냥 해 본 소리야. 내가 예지력이 있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언령(言靈)의 작용이라고. 언령. 자네들도 능력이 상승하면 할 수 있네."
이란이 벙찐 얼굴로 물었다.
"저희……. 들도요?"
"음. 얼마든지 가능하지. 그러니 놀라지 말게. 이럴 때마다 놀라면 어떻게 하나?"
"송구스럽습니다."
"하하. 아니야. 자 - 어쨌든 하비성에 그런 일이 났다면 사냥이 끝날 때가 되었다는 의미일세. 하비성으로 가세. 묶인 호랑이를 빨리 보고 싶군."
"존명(尊命)."
유성은 빙긋 웃으며 밖으로 나가 말에 올랐다. 하운들이 재빨리 따랐다.
'으음, 여포라……. 그가 드디어 붙들리는군. 간웅 앞에 무릎 꿇은 천하의 용장이라……. 충언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지. 진궁이 아깝군……. 과연 그 모습은 어떨까?'
그들이 하비성에 들어섰을 때는 - 당연히 숨어들어갔다 - 이미 밤이었다. 유성은 성벽을 넘으며 붉은 말 한 마리가 작은 성문을 빠져나가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당연히 말등에는 사람이 있었다).
행인으로 변장을 하고 작은 객관을 찾아 들어간 유성은 일곱 보좌관을 불러모았다.
"그간의 자율 수련 시간은 어떻게 보냈는가?"
"아직 많이 부족하옵니다."
"흠……. 하긴 그렇겠지. 나도 금방 된 건 아니거든. 내가 이야기해 주었던가? 내가 수련할 때 말일세."
"말씀하시지 않으셨사옵니다."
"그래……. 나도 원래는 인간으로 살고 있었다네."
"예?!"
"정말이야. 내 영혼은 천사장의 것이었지만, 인간의 육신 속에 잠든 채 18년을 살아왔지. 18세가 되던 해 두 형제가 찾아왔어. 천족의 형제였지. 인간으로 사는 동안에는 외동딸이었거든."
"따, 딸이요?"
"하핫, 그래. 믿어지지 않지?"
그들은 일제히 고개를 다다닥 끄덕였다. 유성은 핏 웃었다.
"내 미모 정도라면 여자였다는 게 믿어질 텐데……. 이상하군."
"……그, 그건……. 하긴……."
"하하하. 자네들 그런 얼굴은 처음이야. 어쨌든 난 여자아이로서 18년을 살았었어. 그리고 찾아온 두 형제 - 하운 자네가 지난번에 본 두 존재들 말야 - 를 따라 천계로 올라갔지. 거기서 스승님을 만나 무예를 전수받고, 다시 천사들을 교육시키는 기관에서 차원에 대한 공부를 했어.
인간으로 살아온 내게 갑자기 천족으로서 태어나야 한다는 것은 상당히 의외였고 어려운 일이기도 했지. 게다가 나는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빛뿐 아니라 암흑의 깊은 지식까지도 알아야 했어. 그건 4대 대천사장 외에는 모르는 일이었는데 8번째 천사장인 나에게 그 배움이 허락되었던 거야. 상당히 놀랐지…….
어쨌든 익혔네. 인간 세상의 시간으로는 상상도 못할 시간이 흘러갔지만 천계에는 낮과 밤의 구분이 없이 항상 빛이 머무르고 있었어. 그래서 내가 다시 인간계로 돌아왔을 때는 단 하루의 시간도 지나지 않아서였지."
"!!"
"인간계로 돌아오자, 나는 그 때까지 나와 함께 살아왔던 용족의 왕자와 결혼을 약속하고 내가 태어났던 나라로 돌아가 왕위를 회복했지. 그러기까지는 무수한 싸움을 거쳐야 했고 그 전쟁, 성마대전(聖魔大戰)이 끝난 이후 그 왕자, 미로(美露)와의 사이에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낳고 살다가……. 이 차원계로 오라는 명령을 받고 이동해 온 거야.
이번 생(生)에서는 남자로 살아가려고 의도한 건 아닌데, 보호자인 부군 없이 살려니까 남자가 편하겠더라고……. 그리고 그렇게 선택을 했더니 형이 하는 말이, 잘 선택했다는 거야. 뭐, 이번 생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남자인 게 낫다나?"
"……."
"게다가 이번 생에서부터는 함께 일할 존재들이 선택된다고……. 남자로 있는 게 좋다더군. 그러면서 그러더라, 단단히 훈련시키지 않으면 짐만 늘릴 테니 공부 잘 시키라고……. 후훗."
"……?"
"간단한 치료마법과 디바인 파워(Divine Power), '힘'을 이용하는 간단한 몇 가지 체술과 보법 외에는 익힌 게 없으니까……. 그리고 지식도 주어져 있지만 활용하는 것이 부족하지. 그 점 단단히 교육시켜 주겠네."
'허걱……!'
"각오들 단단히 하고……. 무예와 신력, 기타 실용마법과 공격, 방어마법도 익히는 게 좋을 거야. 우리야 상관없지만, 마계의 존재들을 상대하려면 알아두는 게 유리하거든. 정령들과도 계약을 맺어야 할 것이고, 영수(靈獸)를 부릴 줄도 알아야지."
"예……."
"하하. 겁먹을 필요 없네. 자네들 심정 잘 알아. 나도 그랬으니까 - 하지만 자네들도 익숙해져야 할 걸세. 하지만 지금은 아냐. 일단 벌여 놓은 일부터 처리하면서 자네들의 배움과 병행하도록 하지."
"……?"
"하운은 가서 두 장수를 데려오게. 최대한 은밀히……. 송헌과 위속이라는 장수일세. 지금 즉시!"
"존명(尊命)!"
잠시 후 유성은 방에 휘장을 쳐놓고 두 장수를 맞았다. 그들은 부복(俯伏)의 예로 유성을 뵈었다.
"천웅성을 뵈옵니다."
"일어들 나시오. 반갑습니다."
유성의 미성(美聲)을 견뎌내기에, 그들의 정신은 상당히 약했다. 잔뜩 긴장하고 있는 그들을 쿡쿡 웃으며 쳐다보던 유성이 말했다.
"너무 긴장하지 마시오. 자, 한 잔씩 드시지요."
그러나 유성은 다분히 그들의 긴장감을 유발시키고 있었다. 놓인 탁자를 가볍게 한 번 치는 것으로 붉은 술이 가득 담긴 은잔을 그들을 향해 '날려' 버린 것이다. 눈앞에 둥둥 떠있는 술잔을 받아 떨리는 손으로 들고 빠르게 비우다가 기침을 하는 그들을 유성은 재미있다는 듯 보았다.
"내일이면 호랑이가 한 마리 잡힐 테지요?"
"예. 그, 그럴 것이옵니다."
"나는 사냥을 구경하고 싶어서 왔습니다. 내일 아침 성루에 백기가 오르고 성문이 열리거든 나의 행동을 허락해 주시오. 백의칠령이 도울 것이니 백문루에 미리 자리를 마련해 두었다가 조조와 유비 두 사람이 입성을 하거든 그들을 그곳으로 모시게 하오. 허나 여포를 잡기 위해서는 적토마뿐 아니라 방천화극도 숨겨두는 것이 좋을 것이오."
"잘 알겠사옵니다. 그대로 하겠사옵니다."
"그 때까지 나에 대한 이야기 또한 누구에게도 해서는 아니 되오."
"예. 명심하겠사옵니다."
"그럼……. 적영, 백운. 두 사람은 군관의 옷으로 갈아입고 있다가 위장군을 도와 여포를 포박하게. '힘'을 쓰지는 말고. 그리고 이란, 백송. 두 사람은 성문을 열고 그들을 백문루로 안내해 오게. 그들이 백문루에 올라 나와 만나고 맹호의 마지막을 볼 것이야. 하운, 주현, 백학 세 사람은 나를 시립하라."
"예. 주군!"
"이제 두 분을 돌려보내 드리게."
"존명……!"
그 때, 송헌이 주뼛거리며 질문을 꺼냈다.
"저어……. 천웅성이시여, 한 가지만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뭡니까?"
"어째서……. 이렇게 저희들을 도와주시는지요?"
"잘못 알았소. 당신들을 돕는 것이 아니오. 내가 사냥에, 이 역사의 한 장면 속으로 끼여드는 것이지. 그리고 한 사람의 무인이 - 천하의 용장이라 불린 이가 마지막을 맞는 일이오. 무인들의 수장이라 불리는 내가 참관하지 않는다면 말이 안 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