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펄과 산지를 소득의 터전으로
충남 당진군 대호지면 적서리
지도자 송 세 동 (49세)
고양이바위 전설의 마을
충청남도의 최 서북단으로 군청 소재지와 당진읍에서 서쪽으로 약 28km떨어진 서해안에 위치한 오지 갯마을로 170여 가구에 800여명의 주민이 살고 있는 이 마을은 약 300여 년 전 여산 송씨, 연안 차 씨들이 처음으로 이주하여 마을을 형성하였으며 1957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서산군에서 당진군으로 편입되었다.
한편 이 마을이 적서마을이라고 불러 온 것은 마을 어귀에 있는 고양이 바위가 버티고 서 있어 산에 있는 쥐가 내려오지 못하고 먹을 것이 없어 죽었다는 전설에 연유되어 옛날부터 적서리 또는 붉쥐 마을이라 불려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마을이름 그대로 7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읍내에 나가는 길은 논둑과 밭둑의 오솔길이었고 호당 0.6ha의 적은 경지는 하늘에 의존하는 천수답 뿐으로서 해마다 농사의 실패가 빈번하여 부녀자들이 연안 바다에 나가 채취하는 해초, 조개 등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형편이었다.
고양이 바위 깨어 굴 양식장 조성
이렇듯 송 씨 종가의 어려운 가정 환경 속에서 자라온 송 세동 씨는 서산 농고를 졸업하고 가문을 이어가기 위하여 고향에 정확하게 되었다. 먼저 송 지도자는 마을 앞에 버려져 있는 넓은 개펄을 개발하면 부자마을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71년 가을 새마을지도자로 선출되자 젊은 청년들을 규합하여 본격적인 갯벌 개발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먼저 송 지도자는 고양이 바위를 깨어 그 돌로 굴 양식장을 만들면 주민소득도 높아지고 마을도 부자마을 될 수 있다고 주민 총회를 열어 역설하였으나 그 바위를 깨면 신령님이 노하여 마을에 큰 재앙이 닥치고 마을 주민들이 죽게 된다는 절대적인 반대에 부딪혔다. 그러나 마을 발전을 위해서는 고양이 바위를 부숴 주님이 미신만을 믿는 진취성 없는 생활 습성을 타파시키는 일 밖에 없다고 확신하는 뜻이 맞는 마을 청년들과 친척 몇 명과 함께 지렛대와 망치만을 가지고 고양이 바위를 부수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반대하는 주민들과의 충돌을 예상하여 야간을 이용 바위를 부수기도 했으나 송지도자의 끈질긴 집념과 용기에 감동하여 하나 둘씩 사업장으로 나오기 시작하더니 한 달이 지나자 마을 전 주민은 팽이와 지게 삽을 들고 고양이 바위 부수는 사업장으로 몰려들어 시작한지 1년 만에 19ha의 굴 양식장을 조성할 수 있었다.
74년도까지 2년 동안 연 인원 1만 7천 5백여 명이 참여하여 무려 35만여 개의 돌덩이로 20ha의 굴 양식장을 조성하고 그곳에 종패를 살포한 결과 76년도에 처음으로 10톤의 굴을 생산 5천만 원의 소득을 올리게 되었다. 이렇게 첫 번째의 바다개발에 성공한 송지도자는 주민들의 단합된 열기를 다음 사업으로 연결시켜 77년도에는 얕은 개펄에 바지락 종패 8톤을 살포 채취된 바지락을 서울, 인천 등지의 소비처와 계약을 맺고 출하함으로써 81년도에는 1억 2천만 원의 소득을 올렸다. 한편 갯지렁이를 일본에서 낚시미끼로 수입한다는 신문보도를 보고 수협중앙회 등을 수차례 방문하여 수출물량을 확보하고 78년 봄부터 마을 주민들을 동원하여 연간 2만 kg의 갯지렁이를 잡아 당진 수협을 통하여 일본에 수출함으로써 연간 1억 3천만 원의 소득을 올리고 있다. 특히 갯지렁이는 마을의 노약자나 어린이까지도 잡을 수 있어 가구당 2사람이 참여하면 하루 평균 2만원의 수입을 올릴 수 있어 주민들은 이 수입으로 자녀 학비와 생활에 큰 보탬이 되었다. 그리고 주민들은 마을 앞에 버려져 있는 개펄을 농토로 조성하기 위하여 71년도부터 공동으로 방조제 500m를 축조하여 8ha의 새로운 농경지를 조성하고 이 농지를 가난한 15세대의 영세 농가에 분배 경작토록 하여 연간 30톤의 미곡을 증산하는 성과도 올리고 있다.
바다소득 잃은 주민들의 실망과 대책
그러나 이와 같은 주민들의 불타는 의욕은 79년에 농수산부와 농업진흥공사가 주관하여 OECD차관 사업으로 당진군 석문면 고도리와 서산군 대산면 삼길포리간 8km를 잇는 대단위 농업종합개발 사업을 80년부터 7개년 계획으로 추진한다는 확정 발표가 있게 되자 주민들은 끼니를 굶어가며 이룩해 놓은 소득원이 없어지게 되었다고 아우성치면서 우리의 헛수고를 지도자가 책임져야 한다고 욕설을 하는가 하면 심지어 일부 주민들은 정부에 진정 건의서를 제출 하여서라도 이 방조제 공사를 못하도록 해야 한다는 등 마을 내 인심은 각박해 지기 시작 하였다. 그러나 송 지도자는 이 간척사업이 완공되면 넓은 간척 답이 우리 것이 된다고 주민들을 설득하고 잃어버리는 바다 소득에 대처하기 위한 새로운 소득원을 육지에서 개발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주민들의 반응은 냉담하였으나 주민총회를 개최하여 협의를 거듭한 끝에 이제 새로운 소득원 개발을 위해서는 마을 내 야산을 개발하여 나가기로 뜻을 모으고 지도자를 비롯한 개발위원들이 마을 안팎의 산지를 답사하여 초지 이용이 가능한 동부 지역에는 한우와 젖소 비육우를 입식시키고, 경사가 심하여 개간이 어려운 북쪽지역에는 밤나무등 유실수 재배단지로 조성하는 한편 평범한 구릉지대로 토질이 좋은 지역은 콩, 마늘, 인삼 등 작물재배 단지로 개발하는 야산 개발종합 계획을 수립하고 마을 개발위원회를 야산개발추진위원회로 개칭하여 업무를 전담케 하는 한편 관계 기관과의 협조를 얻어 추진하기 시작했다. 먼저 경사가 심한 복부 50ha중 10ha에 4천주의 밤나무를 심어 유실수단지를 조성 하였다.
79년도에는 고지대 80ha에 초지를 조성하여 군으로부터의 지원받은 5백만 원의 융자금과 자체자금 5백만 원으로 40두의 한우를 공동으로 구입하여 입식 시켰다. 그 결과 지난 81년도부터 밤나무 단지에서 10톤의 밤을 생산 6백만 원의 수익을 올렸고 40두의 한우도 100여두로 증식되었다.
송 지도자와 주민들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개간이 가능한 저구릉 지대 20ha를 개간 콩 단지를 조성하는 한편 마늘, 고추, 쪽파를 실험재배 한 결과 작황이 좋아 매년 식재면적을 늘려 나갈 계획이다. 그리고 토질이 비옥한 서부지역 10ha에는 단위당 소득이 높은 인삼을 재배하기로 하고 전매청의 기술 지도를 받아 우선 3,000명의 인삼포를 조성하고, 1,700칸을 재배한 결과 생육이 좋아 83년도에는 약 5천만 원의 소득이 예상되고 있어 인삼 주산단지를 만들 계획으로 확대해 나가고 있다.
가난 벗은 소득의 힘 새마을사업에
71년 당시 17만 4천원의 호당 소득으로 군내에서 가장 못 살던 마을이 81년 말 현재 무려 26배가 넘었고 85년 말에는 750만원의 소득이 예상되어 군내에서 가장 잘 사는 마을이 될 것으로 주민들은 확신하고 있다. 또한 이 마을의 소득 구조를 보면 주곡소득 37%, 수산소득 45%, 축산 농의 소득 18%로 각종 소득원이 고루 분포되어 있어 현재로서는 한두 가지 소득원이 다소 부진하거나 가격 파동 등이 있을지라도 별 영향 없이 고정 소득이 유지될 전망이다. 한편 많은 소득 사업을 추진하는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75년도에는 마을발전의 가장 큰 저해 요인이 되었던 진입로 8km를 연인원 3천여 명이 참여, 2년만의 협동작업 끝에 순수 주민자력 사업으로 새로이 개설하여 장기노선 버스를 개통시켰다. 그리고 주민들은 정부로부터 시멘트 500대를 지원받아 비만 오면 진창이 되는 고갯길 300m를 깨끗이 포장하여 주민들의 통행과 농수산물의 운반을 원활하게 하였다. 이어 송지도자와 주민들은 50평 규모의 새마을회관을 건립하여 사무실, 이발관, 목욕탕, 경로당 등으로 활용하여 주민의 위생 생활과 노인들의 휴식처를 만들어 주기도 하였다. 또한 부녀회에서는 마을회관에 구판장을 개설하여 서울등지에서 공장도 가격으로 싼값에 구입 공급하는 한편 그 동안 당진 시장을 이용하면 불편을 덜어 주고 있으며 78년도에는 수산소득과 구판장에서 얻은 마을기금 264만원으로 소규모 제분공장을 시설하여 부녀자들의 일손을 덜어 주고 연간 150만원으로 수익을 올려 새마을사업 기금으로 적립해 나가고 있다.
그리고 청소년 회에서는 어린이 유아원을 개설하여 농번기 일손의 생산화와 자라나는 농촌 어린이들의 정서 함양과 지적 발달에 크게 도움을 주고 있다.
그리고 79년부터 생활이 안정되고 여유가 생긴 주민들은 농촌주택 개량사업을 시작하여 지금까지 25동의 주택을 개량하는 한편 변소, 축사, 부속사 시설도 아울러 개량해 나가고 있으며 86년도까지는 연차적으로 전 주택을 자력 개량해 나갈 계획이다. 그리고 송 지도자와 주민들은 77년도에 이 마을에 침투한 간첩 사건과 해안의 취약지인 지역적 특수성을 고려, 마을 청소년들과 새마을 자위경비대를 조직하여 자체 방위에 힘쓰고 있으며, 매일 국기 하기식을 실시하여 전 주민에게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심어 주는 등 새마을정신 강화에도 게을리 하지 않고 있다.
복지농촌 건설을 위한 푸른 꿈
이렇게 마을 개발과 높은 소득증대의 성공사례를 82년 5월 20일 월례경제동향 보고서 보고되어 송 지도자는 새마을훈장 협동장을 받는 한편 마을에도 사업비 5백만 원을 지원받는 영광을 얻게 되었다.
송 지도자와 주민들은 버려진 개펄을 소득원으로 개발한 값진 교훈을 체험삼아 현재의 성과에 만족하지 않고 앞으로 미개발 야산 139ha를 완전 개발하여 500두의 한우를 증식시키고 대호지 지구 간척지 개발로 늘어나는 농경지에 대비하여 영농 기계화를 추진하는 등 식량증산에 힘쓰면서 1천만 원의 장학 기금을 조성하여 복지 농어촌을 앞당겨 이룩할 푸른 꿈에 가득치 있다.
자료출처 : 새마을운동 1982 내무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