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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5 - 힉소스 이후 이집트 제19 왕조와 람세스 2세의 카데시 전투!
아브라함은 메소포타미아 수메르인들의 도시 우르 출신으로 우르 제3왕조 시대인 BC 1760년경에
가족들과 함께 북상해 하란을 거쳐 가나안으로 들어와 아들 이사악을 거쳐 손자 야곱의 시대에
야곱의 아들 요셉은 편애를 시기한 형들에 의해 이집트로 팔려갔지만....... 감옥에서 파라오의
꿈을 해몽해준 덕분에 이집트 총리가 되고 아버지 야곱과 형제들도 이집트 고센으로 이주시킵니다.
이집트는 기원전 3100년 메네스가 제1 왕조를 창시해 상이집트와 하이집트를 통일하니 고왕국
시대로... 도시국가 출현으로 보자면 두 지역이 비슷하지만 통일왕조로 본다면 메소포타미아
보다도 5백년 정도 빠르며 수도는 멤피스였는데..... 기원전 2180년 6왕조 시기에 나라가
혼란에 빠지니 제1 중간기로 이후 제11 왕조 멘투호테프 2세가 통일을 이루니 중왕국 입니다.
중왕국의 수도는 나일강 상류인 룩소르(테베)로 옮겼으며 누비아나 시리아, 리비아등에 대한 군사
원정이 이루어졌고 아몬라신앙을 바탕으로 사제들의 힘이 강해졌는데, 기원전 17세기경
복합궁 활과 전차를 가진 힉소스인들에게 이집트가 정복되었으니 이 시기를 제2 중간기라고
부르는데 힉소스인의 수장은 파라오를 자칭하였으니 100여년 정도 존속한 15왕조로 인정됩니다.
힉소스인의 15왕조는 주로 하이집트를 지배했으니 상이집트인 룩소르(테베) 에는 이집트인들의
16왕조와 17왕조가 속국 형태로 존속했는데, 테베 17왕조의 마지막 파라오 카모세의 동생인
아흐모세 1세가 힉소스인을 이집트에서 몰아내고 18왕조를 개창해 신왕국을 건설하는데....
힉소스(Hyksos)인들은 서부 셈어를 쓰는 종족으로 기원전 17세기에 이집트의 북동쪽 가나안
으로 부터 나일강 델타 지역의 동부를 침략하여, 하이집트와 중이집트를 108년간 통치 했습니다.
기원후 3~ 6세기 이래 연대기 작가들은 테베에서 일어난 이집트 제18 왕조가 이방인 힉소스를 쫓아
냈다는 이집트의 기록과 이스라엘인이 이집트에 억류되었다 탈출했다는 성서의 전승, 다나오스가
아르고스에 도착했다는 그리스 전설 사이에 관련성이 있다고 보았는데....... 다나오스는 이집트왕
벨로스 와 하신(河神) 나일로스의 딸 안키노에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니 아이깁토스와 형제지간으로,
아르고스에서 암소로 변해 이집트로 건너온 이오의 후손이므로 아르고스는 다나오스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이집트 신화에서 세트는 외부 세계의 신이자 사막의 신이며, 그곳에 사는 야생적이고 예측할
수 없는 자들의 신이었으며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바다의 신이었습니다. 힉소스의
정복이 성서에 나오는 이집트 체류와 동일시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힉소스의 세트가 곧
황야와 화산, 사나운 바다의 신 이스라엘의 야훼였다고 여길만한 충분한 근거가 있는 듯 합니다.
기원전 300년 무렵의 언젠가 스파르타의 왕 아레이오스 Areios 가 예루살렘으로 보낸 편지는.....
바로 이 기록 (그리고 스파르타 왕의 선조가 힉소스 식민자 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헤로도토스의 믿음) 에 기초한 것으로 보입니다. “대사제 오니아스 Onias 께 문안드립니다.
스파르타인과 유대인이 아브라함의 혈통을 이어받은 친족임을 보여주는 한 문서가 나타났습니다. ”
힉소스가 이집트를 통치하던 시기에 관해 직접적으로 아는 바가 없지만... 제18
왕조에서 이집트 민족주의와 문화가 부흥했음에도 불구하고 외국 지배를
받던 시기에 주요한 문화적 변화가 일어났다는 점은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스터빙스는 힉소스를 전사 계급으로 이해했는데 힉소스는 셈족 문화를 이집트에 전달
하고 ‘미노아’ 와 이집트 문명을 그리스에 전달하는 등 다른 문명을 전달했다고
여겨지니, 이집트와 달리 문명의 전통이 얕았던 그리스는 훨씬 더 변화하기
쉬웠으므로 따라서 힉소스가 에게해에 미친 영향은 훨씬 컸을 것으로 보입니다.
요셉과 그 가족이 이집트에 눌러 살게 된 사정은 힉소스의 외세 지배와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힉소스는 기원전 1750년경 아시아에서 시나이 반도를 거쳐 이집트
에 침입해 기원전 1580년까지 130여년간 이집트를 지배했으니 ‘외래 지배자’ 란 뜻
의 힉소스는 아시아 대륙 유목민족으로 그 정확한 유래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고 습니다.
이집트의 역사가 마네토가 기원전 275년에 밝힌 바로는 무력이나 전쟁으로 이집트가
힉소스의 수하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아마 오랫동안에 걸쳐 내부적으로 붕괴
과정을 밟았던 것 같은데.... 왜냐하면 이집트 문화가 두번째 꽃을 피운 중기 왕국
에서 엄청난 활력을 보인 이후..... 모든 분야가 쇠락하고 죽음을 맞이했기 때문입니다.
유목민족 왕의 새로운 이름인 살리티스, 아포피스, 치안 등은 어느 정도 셈족의
이름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만...... 그러한 지배자 중 하나는 야콥- 헤르,
또는 야콥- 엘로 불렸는데 아시아 유목민의 쇄도에 따라 히브리인들이 나일강
으로 진출할 수 있었던 것 같고 요셉의 부상도 이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이 이집트의 궁전에서 막강한 권력을 잡을 수 있었던 사실은 힉소스의 지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인데, 힉소스 사람들이 이스라엘 민족의 이집트 이주를 내버려
두었던 것은 힉소스가 그들이 새로운 수도로 건설한 아바리스(나중에 타니스) 와
같은 지역인 고셴 지방과 나일 강 삼각주 지대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정착한 탓이었습니다.
이집트 학자 올브라이트는 고센 지방의 수코트, 발제폰, 마그달, 질로 같은 지명이 가나안식
이름이라고 지적하는데, 서기 100년경 유대 역사학자인 요세푸스는 힉소스 사람
들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 예루살렘을 건설했다는 이집트 사람 마네토의 기록을 인용
하고 있으니...... 마네토는 가나안으로 간 힉소스 사람이 240,000명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에서 노예가 아닌 무력으로 이집트를 점령했다는건 신약시대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의 작품에서 처음으로 나타나는데, 이집트 항구도시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공동체는 번성했으니 이집트인 아피온은 `유대인들에 대항함’글에서 출애굽 유대인들이
문둥병자라 쫓겨났으며 예루살렘 성전 지성소에 금으로 만든 당나귀를 만들어 숭배했다고 말합니다.
치욕적인 비난에 대해 요세푸스는 `아피온 반박문’ 에서 기원전 3세기 이집트 역사가 마네토
를 인용해 유대인들이 한때 이집트를 통치했음을 밝혔는데...유대인을 옹호하거나
반박하는 편 모두가 인용했던 마네토는 기원전 3세기 헬리오폴리스의 제사장으로서
이집트의 역사를 그리스시대 까지 30왕조로 나누어 저술한 이집트 최초의 역사가 입니다.
역사책 원본이 남아있지 않고 요세푸스에 의해 부분적으로 인용됐을 뿐이지만,힉소스라
불리는 이방민족이 이스라엘 민족이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언급했는데.... 힉소스 민족
은 북쪽에서 쳐들어와 많은 도시들을 불사르고 신전을 파괴했으며 이집트민족을
학살했으니 멤피스를 점령해 수도로 삼았다가 아바리스를 건설했고,이집트에서
쫓겨날 때는....... 재산을 모두 가지고 나가 유다지방에 예루살렘을 건설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도망간 힉소스는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 불가사의하게도 힉소스라는 민족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갔는지, 어디에도 기록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이집트
역사에는 물론이요, 팔레스티나 역사에도 시리아 역사에도 일체 기록이 없으니
이른바 ‘수수께끼의 민족 힉소스’ 라고 하여 세계사의 커다란 테마가 된 문제 입니다.
힉소스란 도대체 어떤 민족인가를 둘러싸고 언어와 종교 등 다양한 측면에서
당시 이집트 주변에 있었던 여러 민족과 비교하여 갖가지 설이 나왔지만
모두 추정일 뿐인데....... 최근에는 힉소스란 원래 단일 민족이 아니라
잡다한 민족이 모인 집단이 아닐까 라는 학설이 새롭게 부상하고 있습니다.
이집트의 비옥한 대지에 끌려 이곳 저곳에서 조금씩 침범해 들어온 사람들 중 가장
힘이 센 자가 이민족 왕조를 세우고 이집트를 지배하게 되었으며, 이 왕조
의 마지막 세습자가 아포피스라는 얘기이니 이집트에서 추방된 이민족들은
통솔자를 잃고 뿔뿔이 흩어져 다시 주변 여러 부족들로 흡수된 것이 아닐까 합니다.
오스트리아의 연구자들은 동쪽의 나일강 삼각주에서도 가나안인과 크레타인이 서로 교류한
흔적을 찾아냈으니....... 기원전 17세기에 지금까지 베일에 가려있는 어떤 민족이
하(下)이집트의 지배권을 잡았으니 힉소스인들로 100년간 수도 아바리스에서 파라오제국을
통치했다는데 파라오에 의해 나일 강 삼각주로 이주하여 훗날 권력을 잡았던 가나안인 입니다?
이집트의 중 왕국의 발달과 함께 가나안에서도 새로운 도시국가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으니
역사시대 전체를 통하여 가나안의 문명이 최고로 발달한 시대였는데, 물질문명의
척도인 토기 제작에서도 고속 물레를 이용한 고품질의 얇은 토기들이 이집트까지 수출
되었고 파이안스(faience) 와 알라바스터(alabaster) 용기들도 자기 기술로 생산되었습니다.
이집트의 제15 왕조인 힉소스의 추방의 여파로 중기 청동기 도시국가들이 대부분 파괴
되면서 약 100여년의 과도기를 맞이하게 되는데.... 이집트 신왕국의 제18왕조의
출범과 함께 이집트는 시리아 지방으로 진출하면서 가나안은 이집트의 식민지로 전락
하게 되니, 테라(산토리니) 화산의 폭발과 「출애굽기」를 연계시키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집트 제18 왕조가 힉소스인을 쫓아낸데 반해 제19 왕조의 친아시아적인 태도는 의문이니
람세스 1세는 아바리스에 세습된 재산이 있었고, 세티 1세는 힉소스가 섬긴 세트신을 의미하는
왕호를 사용했으며 세트신전 건립 400주년을 기념하는 석비를 세웠고 람세스 2세는 아버지
세티 1세에 경의를 표하며 세트 숭배 400주년 기념일을 축하 했는데.... 아마도 저 힉소스인들
의 후손 중에 일부가 이집트에 남아 있었으니 그들을 포용하려고 한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람세스 2세의 딸들 중의 한명의 이름으로 셈어를 사용 (Bintanath 는“아나트의 딸 the daughter
of the goddess Anath” 이라는 의미) 했고, 전차 말 몇마리를 아나트 여신에 헌정했으며 수도
를 다시 아바리스로 옮겨 이름을 피 람세스 Pi Rameses 라 하였고 행정에서 아시아적인 것을
지배적인 위치로 장려했으며 18왕조에서 있었던 반 힉소스의 비난들이 19왕조에서는 사라졌습니다.
제19 왕조말 혼란기에 엘레판티네 비석과 해리스 파피루스에 제20 왕조 파라오들이 북쪽의
아시아계 거주인들에 대해 원주민의 부흥을 강화하는 반 힉소스 입장을 되살리자는
내용이 있으니, 세트나크트(Setnakht) 때 세운 비석에 의하면 투스레트(Twoset) 임기 말과
20왕조 초기 혼돈 사이에 이집트를 침입한 아시아인의 세력을 물리쳤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제19 왕조의 “람세스 2세” 가 치른 “카데시 전투” 는 BC 1274년 5월 12일 시리아의 카데시
Qadesh 에서 “히타이트의 무와탈리스 2세”와 싸운 전투로 이집트에는 룩소르(테베)
의 카르낙 신전과 룩소르 신전의 부조와 라메세움 장제전 및 아스완의 아부심벨 신전
입구의 홀 벽에 새겨진 부조에 전투장면이 등장하니.... “이집트의 승리” 로 알려져 왔습니다.
“시리아” 를 차지하기 위한 전투는 “BC 1274년에 벌어졌으니 최초의 세계대전” 인데 이집트
군이 2만 5천이고 히타이트군은 4만 5천으로“합계 7만명의 대군”이 동원되었으며
터키에는 전투 후에 평화협정을 담은 점토판 문서가 있으니 “세계 최초로 철제 무기”
를 사용한 "히타이트제국" 은 1834년에 “핫튜사” (앙카라 동부 보아즈칼레) 가 발견됩니다.
흔히 우리는 그리스의 시인 호머가 쓴 일리어드와 오딧세이가 하도 유명한지라 트로이전쟁을
최초의 세계대전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미케네등 그리스 도시 연합군이
“트로이” 를 공격한 것은 그 80년 후인 “BC 1194년” 이고 병력도 양측 모두 1만 내외로
“합계 2만” 정도로 추측되니...... 그럼 “카데시 전투는 최초의 세계대전” 으로 불릴만 합니다!
더욱이 이집트의 기록에서 보면 이집트는 “히타이트가 동맹국의 군대를 총동원” 했지만
자기들이 격파했다면서.... 적군은 3만에 가까운 히타이트 보병과 3,700여 대의 전차
에 11,000명의 용병이라고 했으니.... 저 11,000명의 용병 중에는“트로이의 이름인
윌루사”와 호메로스가 트로이의 동맹국으로 언급한 “다르다니아” 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보아즈칼레(Hattusa 핫투샤)” 에서 발견된 문서에는 “히타이트가 승리 ”한 것으로 나오는데.....
이집트 신왕국시대에 “가나안과 시리아” 는 “이집트군의 세력” 범위이자 분쟁지역으로,
“투트모세” 는 수도를 테베에서 멤피스로 옮긴후 메기도 전투에서 카데시를 복종시켜 가나안과
시리아를 장악했지만 투탕카멘의 치세를 거치면서 영역은 줄어드니 “호렘헤브는 원정” 을 합니다.
이후 신왕국 제19 왕조의 “세티 1세는 카데시를 다시 점령하고.... 아무루(아모리)를 복속”
시키는데 성공하니 아들인 람세스 2세도 참가했다는데, 다시“카데시는 히타이트의
점령지”가 되고 히타이트의 동맹국 아무루가 다시“이집트와 동맹”을 맺는 사건이
벌어지자 “히타이트의 무와탈리 2세”는“아무루를 정벌”하기 위한 군사행동을 준비합니다.
히타이트군은 3만에 가까운 보병과 3,700여 대의 전차에 11,000명의 용병이고 이집트군은
1만 6천명의 보병과 2,000여대의 전차에 5천명의 용병으로 이루어졌으니......
“히타이트 군이 2배” 가량의 전력을 동원한건데.... 람세스 2세의 이집트군은 “아문, 라,
세트, 프타” 의 4개 부대로 진격하다가 히타이트군이 도주한다는 거짓 정보에 속게됩니다.
람세스는 히타이트 군을 추격하기 위해 급히 진격했고 그 뒤를 아문 부대와 라 부대, 세트
부대, 프타 부대가 간격이 크게 벌어진 채로 따라오 니“부대 사이 간격이 너무 벌어져
서로의 상황” 을 알수 없을 정도였으니 “세트 부대와 프타 부대” 는 전투가 끝날 때
까지도 도착하지 못했으며.... 히타이트군은 카데시 성채의 북쪽에 군대를 매복시켰습니다.
람세스를 선두로 아문 부대는 오론테스강을 건너 카데시 요새를 향하고 있었고 두번째
라 부대는 오론테스강을 막 건너고 있었으며, 세트 부대와 프타 부대는 남쪽 멀리
에 떨어져 있었는데...... “오론테스강을 건너는 라 부대”앞에 히타이트의 전차
부대가 급습하니 라 부대는 방심한 상태라 히타이트군의 공격에 “궤멸” 되었습니다.
이후 히타이트군이 “아문 부대 후미를 공격” 하자 예상치 못한 공격을 받고 도주했으며
일부 히타이트군은 람세스 2세를 잡기 위해 달려들었으니, 람세스 2세는 “신(神 ?)”
이라도 된 양 혼자만의 힘으로 당나귀 턱뼈를 집어들고 “히타이트 군을
대학살하고 승리”한후 유유히 이집트 군에 돌아왔다고 합니다? 소위 믿거나 말거나.....
이집트의 기록이 이것으로 끝이면 “람세스는 혼자 간신히 달아났으며 히타이트의 승리” 로 끝났다
라고 결론을 내릴수 있겠지만 이집트의 부조에서도 분명히 람세스는 혼자 맹열히 싸우지만,
부조 한쪽 구석에는 “정체를 알수 없는 이집트측의 부대” 하나가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데..... 설명에는 람세스 혼자 이긴 것으로 나오니 이 부대의 “정체에 대한 단서” 가 없습니다?
그래서 후대의 학자들은 파라오의 근위대(메자이)라고 추정하기도 하고 “가나안인 용병대”
라고 하기도 하며 아무루의 원군이라고 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 정체불명의 부대가
전투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도 알수 없지만 이 부대는 뭔가 “생략할 수 없을 정도
로”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이니... 다만 그 “역할” 이란게 대체 무엇인가 궁금합니다.
이집트가 승리했다고 보는 쪽은 이 정체불명의 부대가 “적절한 시점에 히타이트 군에 공격” 을
가했기 때문이라는데, 히타이트군은 이미 승리했다고 생각해 군기가 느슨해져 이집트군이
남기고 간 “물자를 약탈” 하기 시작했으며 이때 그 정체불명의 이집트군 부대가 나타나서
되돌아온 “아문 부대 및 람세스와 함께 히타이트군을 기습” 해서 격파했다고 보는 것 입니다?
반면에 히타이트의 승리라고 생각하는 측은 “이집트군은 그냥 패배” 했으며 이 정체불명의 부대
는 단순히 “람세스나 람세스의 아들 등을 구출해서 호위” 했을 뿐이라고 해석하며...... 람세스
의 홀로 싸운 용감무쌍한 전투는 단순히 “달아나기 위해 혈로를 뚫은 것” 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