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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의 눈] 열사 호칭이 그를 ‘먼곳’ 사람으로
‘건설 노동자’로 불러야 그의 노동자성이 드러나
2023년에는 1987년과 다른 언어로 대중 설득해야
소녀시대 노래 부르는 개딸의 방식에서 건강성 봐야
고 양회동 씨의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조문객들이 남긴 추모의 메시지. 양 씨의 노제는 21일 오전 열렸다. 2020.6.21. 연합뉴스.
그가 빗속에 떠났다. 안경 쓴 웃는 얼굴로 수십 개의 만장을 뒤에 세웠다. ‘열사의 뜻을 이어 가겠습니다’라는 플래카드가 뒤따랐다. 나는 그를 열사라고 부르기가 싫다. 표면적으로는 그가 나보다 몇 살 어리다는 게 이유다. 내가 아는 열사들은 범접할 수 없을 것 같았다. 1987년 이한열, 박종철 열사가 그랬다. 1991년 강경대, 김귀정 열사가 있었다. 이에 비해 그는 동생 같은데, 온 세상 다 짊어진 열사가 가혹해 보인다.
그는 평범한 가장이었다. 떠나기 전날 두 아이와 부인에게 소고기를 먹이고 싶은 소시민이었다. 공사장의 철근팀장이었던 그는 형틀팀장 형님과 당구를 즐기는 동호인이었다. 그는 노동자이기도 했다. ‘갑 중의 갑’인 건설사와 상대하는 건설노조의 간부였다. 부당 노동행위에 항의하고, 조합원의 일자리를 위해 협상하는 건설노조 강원지부 3지대장이었다. 내가 그의 장례식장을 찾았을 때도 빈소를 지킨 이들은 동료이자 노조원이었다. 열사 대신 건설 노동자로 부르고 싶다. 다른 이유도 있다. 열사라고 부르면 그를 고립된 섬에 가두는 것 같다. 그가 죽음을 선택한 이유를 알리고 싶다. 그가 ‘건폭’이라는 이데올로기 공격에 시달렸다는 사실을 알리는 데, 열사라는 호칭은 그를 대중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나와는 다른 사람이라고 느끼게 한다. 열사는 1987년이나 1991년에 어울리는 용어다. 지금이 그때 같은 폭압 통치와 권위주의 정권 체제인 것은 맞다. 하지만 그가 겪은 일을 알리려면 2023년의 언어로 대중에게 말을 걸어야 한다.
집회 현장의 신선함을 느낀 적이 있다. 지난해 ‘개딸’(개혁의 딸들)이 주도한 민주당 개혁 촉구 집회에서다. 소녀시대의 노래 ‘다시 만난 세계’를 따라 불렀다. ‘임을 위한 행진곡’ ‘철의 노동자’ ‘광야에서’ 같은 운동 가요를 대신했다. 개딸의 ‘다시 만난 세계’는 푸딩처럼 물렁했다. 하지만 수십 년 묵은 민주당의 병폐를 갈아엎으라는 메시지는 바위처럼 단호했다. 표현 방식은 솜사탕 같지만 정치 의식은 냉철하다. 1987년의 ‘무거운 민주주의’를 모르는 젊은 층도 동시대인의 설명 방식이면 이해가 쉽지 않을까.
약자들은 바꾸고 싶다. 하지만 기득권에 비해 싸울 수단이 없다. 대변해 줄 거대 언론이나 경찰 같은 공권력이 없어 약자의 싸움은 때로 과격하다. 촌스럽고 지나치게 진지할 수도 있다. 그의 죽음 이후 보수 언론은 민주노총이 집회를 벌이는 이유 같은 본질보다 흠집 내기에 몰두했다. ‘지린내 진동’ ‘술판과 방뇨의 흔적이 낭자했다’가 그들이 쓴 말초적 표현이다. “무식한 노동자들”이라고 욕할 자격이 없다.
몇 년 새 우리 사회는 극과 극으로 갈라졌다. 자기 쪽 얘기만 듣는 세태를 표현한 ‘확증 편향’이라는 용어가 생겼다. 서로 얘기가 통하지도,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다고 모두 걱정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 극과 극의 싸움에서도 결국 승자는 중립론자들을 설득하는 쪽이다. 가운데 있는 사람들일수록 합리적인 설득에 끌린다고 한다. 내 쪽의 일방적인 논리보다 모두가 공감할 설득에 끌린다. 부드러운 표현 방식도 이들이 선호한다. 열사보다는 건설 노동자가 이들에게 다가설 수 있는 용어라고 본다.
프랑스는 노조의 파업과 집회에 호의적인 나라다. 오랫동안 역사로 축적되고, 복잡한 사회적 맥락 속에 이런 분위기가 가능하다. 좀 거칠게 그 이유를 분석하자면, ‘파업하는 누군가처럼 나도 노동자’라는 정체성이 프랑스인에게 파업을 포용하고 지지하게 만든 이유라고 본다. ‘호모 라보란스(Homo laborans·노동하는 인간)’를 거론하지 않아도 모든 인간은 노동자다. 노동자로서의 정체성, 시민이란 자각이 프랑스인에게 파업의 불편과 짜증을 이기게 한다.
우리는 아직 노동자, 시민의 자각이 생기기에 부족한 구조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낮은 노조 조직률이라고 본다. 2021년 노조 조직률은 14.2%에 불과하다. 민간보단 공공부문이, 소형 사업장보단 대형 사업장 노동자들이 그들을 대변해 줄 노조가 있다. 30명 미만 사업장의 노조 조직률은 0.2%에 그친다. 선진국 노조 조직률은 한국보다 높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 국가 중 덴마크 67.0%, 이탈리아 32.5%, 캐나다 26.1%, 영국 23.5%, 일본 16.8% 등이다. 이러다 보니 노조 집회 같은 행위를 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노조에 대해 학교에서 교육받은 적도 별로 없다.
“먹고 살려고 노동조합에 가입했고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가 유서에 쓴 내용이다. 그도 건설 현장의 광폭함을 견디기 위해 노조를 찾았다. 그의 노동자 정체성을 지켜주고 싶어 열사 대신 다시 불러본다. 건설 노동자 양회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