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이씨(全州 李氏)에 대(對)하여
1. 전주 이씨(全州 李氏) 시조(始祖) : 이한(李翰)
2. 전주 이씨(全州 李氏) 유래(由來) :
시조(始祖) 이한(李翰)은 덕망(德望)이 높고 문장(文章)이 탁월(卓越)하여 신라(新羅) 문성왕(文聖王)때 사공(司空) 벼슬을 지냈으며 그 후(後) 대대로 신라(新羅) 시대(時代)에 벼슬을 해왔다.
18세손되는 이안사(李安社)는 대대(代代)로 전주(全州)에 살아온 호족(戶族)이었는데 새로 부임한 지주의 탐학을 규탄하자 지주가 군사를 휘둘러 보복하려하여 그를 피해 강원도 삼척으로 피했다가 다시 함경도를 거처 원나라 간동으로가 그곳에서 다루가치 벼슬을 지냈고 증손자 되는 이자춘(李子春)이 고려시대에 공을 세워 사복경(司僕卿)에 이르렀다.
이자춘의 아들, 즉 시조의 22세손 이성계(李成桂)에 이르러 어지러운 국정을 바로잡고 배극렴(裵克廉)등 52명의 추대로 왕위에 오르게 됨으로 조선왕조를 창건, 전주이씨의 종시조가 되었다.
3. 전주 이씨(全州 李氏) 가문(家門)의 번영(繁榮)
전주 이씨(全州 李氏)는 조선 500년을 이끌어온 왕가이므로 가문의 번성기를 따로 기술할 필요가 없다.
전주 이씨(全州 李氏)의 1백여 파중 으뜸가는 명가는 밀성군(密城君. 침=세종의 아들)파로써 6명의 정승과 3대 대제학(大提學)을 배출했으며,
덕천군(德泉君. 후생(厚生)=정종의 아들)파가 부자 대제학등 3명의 대제학과 영의정(領議政) 1명을 내어 밀성군파에 버금간다.
덕천군파 다음으로는 3명의 정승을 배출한 광평대군파(廣平大君派), 정승 2명을 배출한 선성군파(宣城君派), 정승 1명과 숱한 문신과 무신을 배출한 효령대군파(孝寧大君派) 등이 빼어나다.
전주 이씨(全州 李氏)는 오리정승(梧里政丞)으로 많은 일화를 남긴 인조때 영의정 이원익(李元翼), 흥선대원군(興宣大元君) 이하응,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李承晩), 철기(鐵驥) 이범석(李範奭)장군등 역사의 한획을 그었던 거목들을 배출하였다. 1585년(선조 18년) 이수광은 별시문과(別詩文科)에 급제(及第), 1627년에 이조판서가 되었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을 전후하여 여러 차례 사신으로 명나라에 왕래, 당시 명나라에 와있던 이탈리아 신부에게서 "천주실의(天主實義)" "중우론(重友論)"을 얻어와 1614년(광해군 6년) "지봉유설(芝峰類說)"을 간행하여 우리나라 최초로 천주교와 서양 문물을 소개함으로써 실학발전의 선구자가 되었고 시문에도 능했으며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다.
4. 전주 이씨(全州 李氏) 계파(系派) 및 분파(分派) 파조(派祖)
- 궁진(宮進)
- 시중공파(侍中公派) 이단신(李端信)
- 용부(勇夫)
- 평장사공파(平章事公派) 이거(李口)
- 양무
- 주부공파(主簿公派) 이영습(李英襲)
- 목조
- 안천대군파(安川大君派) 이어선(李於仙)
- 안원대군파(安原大君派) 이진(李珍)
- 안풍대군파(安豊大君派) 이정(李精)
- 안창대군파(安昌大君派) 이매불(李梅拂)
- 안흥대군파(安興大君派) 이구수(李球壽)
- 익조
- 함녕대군파(咸寧大君派) 이안(李安)
- 함창대군파(咸昌大君派) 이장(李長)
- 함원대군파(咸原大君派) 이송(李松)
- 함천대군파(咸川大君派) 이원(李源)
- 함릉대군파(咸陵大君派) 이고태(李古泰)
- 함양대군파(咸陽大君派) 이전(李腆)
- 함성대군파(咸城大君派) 이응거(李應巨)
- 도조
- 완창대군파(完昌大君派) 이자흥(李子興)
- 완원대군파(完原大君派) 이자선(李子宣)
- 완천대군파(完川大君派) 이평(李平)
- 완성대군파(完城大君派) 이종(李宗)
- 환조
- 완풍대군파(完豊大君派) 이원계(李元桂)
- 의안대군파(義安大君派) 이화(李和)
- 태조
- 진안대군파(鎭安大君派) 이방우(李芳雨)
- 익안대군파(益安大君派) 이방의(李芳毅)
- 회안대군파(懷安大君派) 이방원(李芳遠)
- 의안대군파(宜安大君派) 이방석(李芳碩)
- 정종
- 의평군파(義平君派) 이원생(李元生)
- 순평군파(順平君派) 이군생(李群生)
- 선성군파(宣城君派) 이무생(李茂生)
- 종의군파(從義君派) 이귀생(李貴生)
- 진남군파(鎭南君派) 이종생(李終生)
- 수도군파(守道君派) 이덕생(李德生)
- 임언군파(林堰君派) 이녹생(李祿生)
- 석보군파(石保君派) 이복생(李福生)
- 덕천군파(德泉君派) 이후생(李厚生)
- 임성군파(任城君派) 이호생(李好生)
- 도평군파(桃平君派) 이말생(李末生)
- 장천군파(長川君派) 이보생(李普生)
- 정석군파(貞石君派) 이융생(李隆生)
- 무림군파(茂林君派) 이선생(李善生)
- 태종
- 양녕대군파(讓寧大君派) 이제(李禔)
- 효령대군파(孝寧大君派) 이보(李補)
- 성녕대군파(誠寧大君派) 이종(李種)
- 경녕군파(敬寧君派) 이비(李裶)
- 함녕군파(咸寧君派) 이인(李裀)
- 온녕군파(溫寧君派) 이정(李裎)
- 근녕군파(謹寧君派) 이농(李襛)
- 혜녕군파(惠寧君派) 이지(李祉)
- 희녕군파(熙寧君派) 이타(李袉)
- 후녕군파(厚寧君派) 이간(李衦)
- 익녕군파(益寧君派) 이치(李袳)
- 세종
- 임영대군파(臨瀛大君派) 이구(李璆)
- 광평대군파(廣平大君派) 이여(李璵)
- 금성대군파(錦城大君派) 이유(李瑜)
- 영응대군파(永膺大君派) 이염(李琰)
- 화의군파(和義君派) 이영(李瓔)
- 계양군파(桂陽君派) 이증(李璔)
- 의창군파(義昌君派) 이공(李玒)
- 한남군파(漢南君派) 이어(李○)
- 밀성군파(密城君派) 이침(李琛)
- 수춘군파(壽春君派) 이현(李玹)
- 익현군파(翼峴君派) 이연(李璭)
- 영풍군파(永豊君派) 이전(李瑔)
- 영해군파(寧海君派) 이당(李瑭)
- 담양군파(潭陽君派) 이거(李璖)
- 세조
- 덕원군파(德源君派) 이서(李曙)
- 창원군파(昌原君派) 이성(李晟)
- 덕종
- 월산대군파(月山大君派) 이정(李婷)
- 예종
- 인성대군파(仁城大君派) 이분(李糞)
- 제안대군파(齊安大君派) 이현(李琄)
- 성종
- 계성군파(桂城君派) 이순(李恂)
- 안양군파(安陽君派) 이항(李行)
- 완원군파(完原君派) 이수(李口)
- 회산군파(檜山君派) 이념(李恬)
- 봉안군파(鳳安君派) 이봉(李逢)
- 견성군파(甄城君派) 이돈(李惇)
- 익양군파(益陽君派) 이회(李懷)
- 이성군파(利城君派) 이관(李慣)
- 경명군파(景明君派) 이침(李忱)
- 전성군파(全城君派) 이변(李忭)
- 무산군파(茂山君派) 이종(李悰)
- 영산군파(寧山君派) 이전(李恮)
- 운천군파(雲川君派) 이인(李寅)
- 양원군파(楊原君派) 이희(李憘)
- 중종
- 복성군파(福城君派) 이미(李嵋)
- 해안군파(海安君派) 이희(李晞)
- 금원군파(錦原君派) 이영(李岭)
- 영양군파(永陽君派) 이거(李岠)
- 덕양군파(德陽君派) 이기(李岐)
- 봉성군파(鳳城君派) 이완(李岏)
- 덕흥대원군파(德興大院君派) 이초(李岹)
- 선조
- 영창대군파(永昌大君派) 이의(李口)
- 임해군파(臨海君派) 이진(李珒)
- 신성군파(信城君派) 이후(李珝)
- 순화군파(順和君派) 이보(李○)
- 인성군파(仁城君派) 이공(李珙)
- 경창군파(慶昌君派) 이영(李珘)
- 경평군파(慶平君派) 이주(李珘)
- 인흥군파(仁興君派) 이늑(李玏)
- 영성군파(寧城君派) 이계(李㻑)
- 원종
- 능원대군파(綾原大君派) 이보(李俌)
- 인조
- 소현세자파(昭顯世子派) 이왕(李○)
- 인평대군파(麟坪大君派) 이요(李㴭)
- 용성대군파(龍城大君派) 이곤(李滾)
- 숭선군파(崇善君派) 이징(李澂)
- 낙선군파(樂善君派) 이숙(李潚)
- 장조
- 은언군파(恩彦君派) 이은(李裀)
- 은신군파(恩信君派) 이진(李禛)
- 은전군파(恩全君派) 이찬(李禶)
6. 전주 이씨(全州 李氏) 효령대군(孝寧大君)에 대(對)하여
1396년(태조 5)∼1486년(성종 17). 조선(朝鮮) 초기(初期)의 종실(宗室). 본관(本貫)은 전주(全州). 이름은 보(補). 초명(初名)은 호(祜). 자는 선숙(善叔), 호(號)는 연강(蓮江).
태종(太宗)의 둘째아들이며, 어머니는 원경왕후(元敬王后) 민씨(閔氏)이다.
1407년(태종 7) 효령군(孝寧君)에 봉(封)해지고, 1412년에 효령대군(孝寧大君)으로 진봉(進封)되었다.
1430년(세종 12)에 왕명(王命)을 받아 어용(御容)과 《선원록 璿源錄》을 새로 조성한 선원전(璿源殿)에 봉안하고, 그해 윤12월에 문소전(文昭殿)의 친제(親祭)에 종헌관(終獻官)으로 참여(參與)하였다.
1432년 한강에서 7일간 수륙재(水陸齋)를 개최(開催)하였고, 1434년 1월에 친형(親兄) 양녕대군(讓寧大君)과 함께 계달문서(啓達文書)에 이름을 쓰지 않도록 조처(措處)하였다. 그해 4월 회암사(檜巖寺)의 중수를 건의(建議)하고, 1435년 회암사에서 불사를 개최(開催)하였다. 그해 5월 흥천사탑전(興天寺塔殿)의 수리를 관장하였다.
1452년(단종 즉위) 용문산 상원사(上元寺)에 종(鐘)을 주조(鑄造)하여 봉안하고, 1460년(세조 6) 4월 왕세자빈의 책봉사가 되었으며, 1464년 5월 회암사에서 원각법회(圓覺法會)를 개최(開催)하고 그해 5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원각사 조성도감도제조로 활동하였다.
1465년 《반야바라밀다심경般若波羅蜜多心經》을 언해하고, 1465년 《원각경》을 수교(讐校)하였다. 정역(鄭易)의 딸인 예성부부인(蘂城府夫人)과의 사이에 6남 1녀, 측실에서 1남 1녀를 두었다.
효성(孝誠)과 우애(友愛)가 지극(至極)하였고, 세종(世宗)·문종(文宗)·단종(端宗)·세조(世祖)·예종(睿宗)·성종(成宗)의 연고존친(年高尊親)으로서 극진(極盡)한 존경(尊敬)과 대우를 받았으며, 불교(佛敎)를 숭상(崇尙)하고 선가(禪家)에 적을 두면서 많은 불사를 주관하였기 때문에 유학자(儒學者)들로부터 비판(批判)이 많았지만, 불교(佛敎)의 보호(保護)와 진흥(振興)에 공헌(貢獻)한 바 크다.
묘소(墓所)는 경기도(京畿道) 과천(果川) 임산원(壬山原)에 있다.
1736년(영조 12) 묘하(墓下)에 청권사(淸權祠)가 건립(建立)되고, 1789년(정조 13) 사액(賜額)되었으며, 1865년(고종 2) 양녕대군(讓寧大君)과 함께 세종(世宗)묘에 추가로 배향(配享)되었다. 시호(諡號)는 정효(靖孝)이다.
효령대군(孝寧大君)은 효령대군(孝寧大君) 조선(朝鮮) 제3대왕(大王)인 태종(太宗)대왕(大王) 이방원(李芳遠)의 둘째아들이며 어머니는 여흥 민씨(驪興 閔氏)인 원경왕후입니다. 1396년에 태어나 1486년에 별세(別歲)하셨습니다.
전주 이씨(全州 李氏) 효령대군(孝寧大君) 설명(說明)
· 세종대왕(世宗大王)의 둘째 형으로 (진짜이름)본명(本名)은 이보(李補), 본관(本貫)은 전주이씨(全州李氏)
· 초명은 호(祜)였는데 19세에 보(補)로 고쳤다.
· 자는 선숙(善叔), 호는 연강(蓮江), 시호(諡號)는 정효(靖孝)이다.
◎ 생애(生涯)
· 12세에 해주정씨를 부인으로 맞이하였고 17세에 효령대군(孝寧大君)으로 봉(封)해졌다.
· 어릴적부터 글 읽기를 좋아하여 30세 전에 이미 학문과 덕성을 이룩하였고 붓글씨에도 능해 명필이었다고 전(傳)해진다.
· 활쏘기에 능숙(能熟)하였고 효성(孝誠)이 지극하여 부왕으로부터 사랑을 많이 받았다.
· 불교를 독실히 믿어 조정의 숭유억불 정책하에서 불교 보호의 방패 역할을 감당하였다.
· 원각사 창건 때에는 조성도감 도제조를 맡았다.
· 이 때 주조(鑄造)되어 1985년까지 보신각에 달려 있던 큰종과 탑골공원의 10층 석탑은 그 제조기법이나 예술성이 뛰어났다는 평가를 받았다.
· 10층 석탑은 국보 제2호로, 원각사지 대종은 보물 제2호로 각각 지정되어 있다.
· 《법화경》, 《금강경》, 《원각경》, 《반야심경》, 《능엄경》, 《선종영가집》 등 불경의 번역과 교정에도 힘썼고, 많은 사찰을 순회하면서 신도들을 온후하게 계도하였다.
· 그리고 향촌의 자치규약인 향헌(鄕憲) 56조를 지어 백성들의 윤리 도덕심을 함양하였으며 유불심법동일원(儒佛心法同一原)의 이념을 추구하였다.
· 1418년에 아우 충녕대군이 세자로 책봉되자, 출가를 했다.
· 좌찬성 정역(鄭易)의 딸과 혼인하여 6남 2녀를 낳았으며, 서자녀로 1남 1녀를 두었다.
· 불교를 좋아하여 승도를 모아 불경을 강의하였다.
· 1396년(태조 5, 丙子年) 9월 16일(음력)에 태어나 91세의 천수를 다하고 1486년(성종 17, 丙午年) 5월 11일(음력)에 세상을 떠났다.
· 현재의 서울특별시 서초구 방배동에 예장되었다.
· 묘소(墓所)는 1972년에 서울특별시(特別市) 유형문화재(有形文化財) 제12호로 지정되었다.
· 현 사당은 1736년(영조 12)에 왕명으로 효령대군(孝寧大君) 묘(墓) 앞에 처음 세우면서 '청권사'라고 하였다.
· 슬하에 7남을 두었으며 1460년(세조6) 정월, 여섯째 아들 원천군(原川君)을 병사한 아우 성녕대군에게 출계시켜 대를 이어 제사를 봉향할 수 있도록 하였다.
· 생전에 손자 33인, 증손자 109인으로 후손이 번성하였다.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의 파종회 중에 자손이 가장 번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서울특별시는 1984년 11월 7일 청권사 앞길을 `효령로'로 명명하였다.
◎. 가족(家族) 관계(關係)
부 : 태종(1367~1422)
모 : 원경왕후 민씨(1365~1420)
●.부인 : 해주 정씨(1394~1470)
형 : 양녕대군(1394~1462)
동생 : 충녕대군(세종)(1397~1450)
동생 : 성령대군(1405~1418)
장인 : 좌찬성 정역(?~1425)
조부 : 태조(1335~1408)
백부 : 진안대군(1354~1393)
백부 : 정종(1357~1419)
백부 : 익안대군(1360~1404
백부 : 회안대군(1364~1421)
숙부 : 덕안대군(1368~?)
숙부 : 무안대군(1381~1388)
숙부 : 의안대군(1382~1398)
고모부 : 이애(1363~1414)
자손(子孫)
1남 의성군(誼城君) 1411년(태종11년) ~ 1493년(성종24년) 8월 13일(생몰연수:83세)
2남 서원군(瑞原君) 1413년(태종13년) ~ 1475년(성종6년) 10월 2일 (생몰연수:63세)
3남 보성군(寶城君) 1416년(태종16년) ~ 1499년(연산5년) 9월 1일 (생몰연수:84세)
4남 낙안군(樂安君) 1417년(태종17년) ~ 1474년(성종5년) 5월 28일 (생몰연수:58세)
5남 영천군(永川君) 1422년(세종4년) ~ ? (76세인 1497년(연산3년)까지 생존)
6남 원천군(原川君) 1423년(세종6년) ~ 1476년(성종7) 5월 25일 (생몰연수:54세)
7남 안강도정(安康都正) 1430년(세종12년) ~ ? (60세인 1489년(성종20) 정3품 명선대부(明善大夫)에 오름)
7. 효령대군(孝寧大君)의 자(子) 상세(詳細) 설명(說明)
의성군(誼城君)
의성군(誼城君)은 1411년(태종11) 효령대군(孝寧大君)과 예성부부인(蘂城府夫人)해주정씨(海州鄭氏)의 장남으로 태어나셨으며, 휘는 심(), 자는 자홍(子弘)이시다. 세종(世宗)대왕께서는 어려서부터 학문(學文)을 좋아하는 의성군(誼城君)을 가상히 여겨 내장(內藏)의 서책(書冊)을 내려주시고, 사랑함이 날마다 돈독하여 항상 궁중에 입시(入侍)하면서 여러 아들과 다름이 없었다. 초휘 는 용이었으나, 심()으로 세조(世祖)왕이 고쳐주었다. 배위 는 회인군부인(懷仁郡夫人) 성주 이씨(星州 李氏)로 직장(直長) 차궁(次弓)의 따님이시다.
1424년(세종2) 의성군(誼城君)으로 봉(封)해지셨고 종2품 가정대부(嘉靖 大夫), 1431년(세종13) 정2품 정헌대부(正憲大夫), 1434년(세 종16) 종1품 숭록대부(崇祿大夫) 이때에 봉안어용사(奉安御 容使), 1444년(세종26) 종1품 소덕대부(昭德大夫), 1450년(세 종32) 대전관(代奠官), 1450년(문종1) 정1품 흥록대부(興祿大夫), 특별(特別)히 1489년(성종20) 종친(宗親)의 최고품계인 정1품 현록대부(顯祿大夫)에 오르셨다.
1493년(성종24) 8월13일 83세를 일기로 별세(別世)하셨으며, 시호(諡號)는 호민(胡敏)이시다. 호민(胡敏)의 뜻은 「彌年壽考曰胡 好古不怠 曰敏」 오래 수(壽)한 것이 호(胡)이고, 옛것을 좋아하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이 민(敏)이다. 슬하에는 7男(무송군, 잠성정, 운 림도정, 서림도정, 봉성군, 영신군, 총곡수)과 6女를 두셨다. 묘소(墓所)는 경기도(京畿道) 포천군 내촌면 엄현리(현 음현리)에 있으며, 재실은 모민재(慕敏齋)이다.
서원군(瑞原君)
서원군(瑞原君)은 1413년(태종13) 효령대군(孝寧大君)과 예성부부인(蘂城府夫人) 해주 정씨(海州 鄭氏)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셨으며, 휘는 친(), 자는 사인(士仁)이시다. 배위는 의령군부인(宜寧郡夫人) 경주 이씨(慶州 李氏)이신 관찰사 희 의 따님과 원주 변씨(原州 邊氏)이신 판관 상근의 따님이시다. 1427년(세종9) 정3품 통정대부(通政大夫)원윤, 1429년(세종 11) 종2품 가정대부(嘉靖大夫) 서원군 이때에 사은정사(謝恩 正使), 1435년(세종17) 정2품 정헌대부(正憲大夫), 1459년(세 조5) 종1품 가덕대부(嘉德大夫)에 오르셨으며, 병조판서를 지내셨다.
1475년(성종6) 10월 2일 63세를 일기로 별세하셨으며, 시호(諡號) 는 이안(夷安)이시다. 이안(夷安)의 뜻은 「安心好靜曰夷 寬 裕和平曰安」 마음을 편안히 하여 고요함을 좋아함이 이(夷) 요, 너그럽고 화평함이 안(安)이다. 슬하에는 6男(회의도정 덕은도정, 제천군, 예천군, 고림군, 청거수)과 5女를 두셨다. 묘소(墓所)는 초장(初葬)이 금천 삼성산 금불암리(현 관악구 상도동) 간 좌였으나, 서울특별시 확장계획으로 경기도(京畿道) 성남시 정자동 천마봉 갑좌에 옮기고, 분당 신도시개발로 1990년 12월 경기도 포천군 소홀읍 이곡리 오좌로 옮겼다. 재실은 효안재(孝安齋)이다.
보성군(寶城君)
보성군(寶城君)은 1416년(태종16) 효령대군(孝寧大君)과 예성부부인(蘂城府夫人)해주 정씨(海州 鄭氏)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셨으며, 휘는 갑()이시다. 배위(配位)는 청풍군부인(淸風郡夫人) 합천 이씨(陜川 李氏)로 광록시(光祿寺) 소경(少卿) 무창(茂昌)의 따님이시다.
1441년(세종23) 보성군으로 봉(封)해지셨고 종2품 가정대부(嘉 靖大夫), 1444년(세종26) 정2품 숭헌대부(崇憲大夫), 1489년 (성종 20) 정1품 흥록대부(興綠大夫), 특별히 1479년(연산3) 종친의 최고품계인 정1품 현록대부(顯綠大夫)에 오르셨다. 특히, 세조(世祖)대왕시에 도진무(都鎭撫),해청위(海靑衛), 선전관(宣傳官),좌상대장(左廂大將) 등으로 공헌하셨다. 1499년(연산5) 9월 1일 84세를 일기로 별세하셨으며, 특히 임종시 ‘시호와 예장을 받지 않겠다’라는 유언을 남기셨다.
특명으로 묘비는「조선국 왕손 현록대부 보성군 지묘」라고 새겨있다. 슬하에는 7男(신풍도정, 율원군, 춘양군, 평성군, 물거군, 원산군, 동양정)과 6女를 두셨다. 묘소는 초장(初葬)이 금천 박달골 오좌였으나, 1941년 6월 11일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 광전리 미좌로 옮겼다. 재실은 보청재(寶淸齋)이다.
낙안군(樂安君)
낙안군(樂安君)은 1417년(태종17) 효령대군(孝寧大君)과 예성부부인(蘂城府夫人)해주정씨(海州鄭氏)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셨으며, 휘는 녕(), 자는 사안(士安)이시다. 배위는 양산군부인(梁山郡夫人) 언양 김씨(彦陽 金氏)로 주부(主簿)중행(仲行)의 따님이시다.
1433년(세종15) 낙안군으로 봉해지셨고 종2품 가정대부(嘉 靖大夫), 1459년(세조5) 정2품 숭헌대부(崇憲大夫), 1460년 (세조6) 종1품 가덕대부(嘉德大夫)에 오르셨다. 성품이 관후 (寬厚)하시어 남을 거스르는 일이 없었다.
1474년(성종5) 5월 28일 58세를 일기로 별세하셨으며 시호(諡號)는 이안(夷安)이시다. 이안(夷安)의 뜻은 「安心好靜曰夷 好和 不爭曰安」 마음을 편안히 하여 고요함을 좋아함이 이(夷)요, 화목을 좋아하며 다투지 않음이 안(安)이다. 슬하에는 1男 (淸原正)과 1女를 두셨다.
묘소(墓所)는 초장(初葬)이 경기도(京畿道) 시흥군 신동면 서초 명달리(明達里) 건좌(乾坐)였으나, 서울특별시 확장 계획으로 1968년 2월 23일 경기도(京畿道) 광주군 오포면 능평리로 옮겼다. 재실은 이안재(夷安齋)이다.
영천군(永川君)
영천군(永川君)은 1422년(세종4) 효령대군(孝寧大君)과 예성부부인(蘂城府夫人)해주정씨(海州鄭氏)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 나셨으며, 휘는 정(定), 자는 안지(安之)이시다. 배위는 군부인(郡夫人) 예천 권씨(醴泉 權氏)로 직장(直長) 광(光)의 따님이시다. 1440년(세종22) 영천군으로 봉해지셨고 종2품 정의대 부, 1444년(세종26) 종2품 중의대부, 1460년(세조6) 정2품 숭 헌대부(崇憲大夫), 1484년(성종15) 종1품 소덕대부(昭德大 夫), 1489년(성종20) 정1품 흥록대부(興祿大夫)에 오르셨다. 천성(天性)이 호탕하시고 구애됨이 없으며 성품이 또한 순진 하고 근엄하여 무슨 일이든지 곧게 행하셨다. 별세하신 연도 는 미상이다. 하지만, 76세인 1497년(연산3)까지 생존(生存)하셨다 는 왕조실록(王朝實錄)의 기록(記錄)이 있다. 시호(諡號)는 호안(胡安)이시다. 호안(胡安)의 뜻은 「彌年壽考曰胡 好和不爭曰安」: 오래 수(壽)한 것이 호(胡)요, 화목을 좋아하여 다투지 않음이 안(安)이다. 슬하에는 2男 (泰康守, 良浦守)과 3女를 두셨다. 묘소(墓所)는 초장 (初葬)이 경기도(京畿道) 과천(果川) 상초리(霜草里) 선산국내(先山局內) 미좌(未坐)였으나, 서울특별시 확장계획으로 1970년 3월 5일 전북(全北) 정읍시 칠보면 신흥리 왕림동 축좌(丑坐)로 옮겼다. 재실은 영암재(永巖齋)이다.
원천군(原川君)
원천군(原川君)은 1423(세종6) 효령대군(孝寧大君)과 예성부부인(蘂城府夫人)해주 정씨(海州 鄭氏)의 여섯째 아들로 태어나셨으며, 휘는 의(宜)이시다. 배위는 초취(初娶)군부인(郡夫人) 백천 조씨(白川 趙氏)로 참판(參判)서강(瑞康)의 따님이시며, 재취(再娶)군부인(郡夫人) 한양 조씨(漢陽 趙氏)는 목사(牧使) 지 당(之唐)의 따님이시다. 효령대군(孝寧大君)의 아우 성녕대군(誠寧大君)을 입사(立嗣)한 안평대군(安平大君)이 단묘계유정난(端 廟癸酉靖難)으로 입사할 수 없게되자, 1460년(세조6) 정월 종부시(宗簿寺)에서 원천군으로 하여 금 성녕대군(誠寧大君)을 입사하게 하므로 승명입계(承命入繼)하였다. 처음에는 종2품 중의대 부(中義大夫) 원천윤(原川尹), 1459년(세조5) 정2품 승헌대 부(承憲大夫), 1460년(세조6) 종1품 가덕대부(嘉德大夫) 원천 경(原川卿), 1466년(세조12) 원천군으로 다시 제수(除授)되었다. 1476년(성종7)5월 25일 춘추 54세에 별세하셨고 시호(諡號)는 안도(安悼)이시다. 안도(安悼)의 뜻은 「好和不爭曰安 年中早 夭曰悼」 화합(和合)을 좋아하여 다투지 않음이 안(安)이요, 중년(中年)에 요절(夭折)함이 도(悼)이다. 슬하(膝下)에는 3男(列山都正, 岐城 守, 加恩君)을 두셨다. 묘소는 초장(初葬)은 서울시 중랑구 신내동(망우리 내동)신좌에 군부인 백천 조씨와 합폄, 군부인 한양 조씨는 동원에 있었다. 1991년 서울특별시 확장계획으로 경기도 고양군 대자동 성녕대군 묘역 아래로 옮겼다.
대군의 일곱째 아들로 안강도정(安康都正) 휘는 량()이시며, 배위(配位)는 신부인(愼夫人) 진주 류씨(晋州 柳氏)와 함양 이씨(咸陽 李氏)이시다. 1444년(세종26) 창선대부(彰善大夫) 안강도정(安康都正)에 제수 되신 후, 1489년(성종20) 정3품 명선대부(明善大夫)에 오르셨다. 별세한 연도는 미상이다. 슬하에 7男(영평부정, 습계군, 회양부정, 개산부수, 천령군, 자인부수, 양양정)과 2女를 두셨다. 묘는 실전(失傳)되어, 1981년 경기도(京畿道) 평택시 현덕면 덕목 리 광덕산 을좌에 설단 하였다가, 1988년 경기도(京畿道) 양주군 백석면 방성안강도정(安康都正)은 1430년(세종12년) 효령대군(孝寧大君)과 평해 손씨(平海 孫氏)의 아들로 태어나셨다. 안강도정(安康都 正)의 생모(生母)이신 평해 손씨(平海 孫氏)는 낭장(郎將) 증 병조판서(兵曹判書) 유례(有禮)의 증손녀(曾孫女)이시고, 군수 증찬성(郡守贈贊成) 밀(密)의 손녀(孫女)이시며, 인효(仁孝)의 따님이시다.리 산 192번지 을좌(乙坐)에 천단(遷壇)하였다. 재실(齋室)은 해강재(海康齋)이다.
차녀 : 전진형(全晉亨)에게 출가
백부 : 진안대군(1354년 ~ 1393년)
백부 : 영안대군(1357년 ~ 1419년)
백부 : 익안대군(1360년 ~ 1404년)
백부 : 회안대군(1364년 ~ 1421년)
숙부 : 덕안대군(1368년 ~ ?)
고모 : 경신공주(? ~ 1426년)
고모 : 경선공주(? ~ ?)
처조카 : 영양위 정종 - 종손녀인 경혜공주의 남편
처조카딸 : 춘성부부인(영응대군의 처) - 영응대군은 조카이면서, 처조카사위도 된다. 춘성부부인은 질부이면서, 처 조카딸이다.
손녀사위 : 임사홍
◎. 전(傳)해 오는 이야기
- 경기도 과천시 중앙동 관악산 연주봉 남쪽 기슭에는 연주암(戀主庵)이라는 사찰이 있는데 관악산의 최고봉인 연주봉(629m) 절벽 위에 연주대(戀主帶:경기도 기념물 제20호)가 자리하고 있다.
- 그곳에서 남쪽 과천쪽으로 약 300m 떨어진 곳에 연주암이 있다.
- 대한불교 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龍珠寺)의 말사로 나한도량(羅漢道場)의 하나로 알려져 있는 사찰이다.
- 나한은 6신통(神通)과 8해탈을 모두 갖추어 인간과 천인들의 소원을 성취시켜 주는 복전(福田)이기 때문에 통일신라시대부터 신앙의 대상이 되어 있다.
- 연주대는 이성계(李成桂)가 무학대사의 권유로 의상대 자리에 석축을 쌓고 30㎡ 정도의 대를 구축하여 그 위에다 암자를 지은 것이라 한다.
- 이곳에 특이하게도 효령각을 만들어서 효령대군(孝寧大君)의 영정(경기도 문화재 제81호)을 봉안하고 있다.
- 찾는 등산객의 점심을 무료(無料)로 제공하는 것으로 소문이 나있는 곳이기도 하다.
- 1411년(태종 11), 동생인 충녕(세종)에게 보위를 양보하고 전국(全國)을 떠돌던 양녕과 효령이 이곳에 머무르면서 관악사를 현 위치로 옮기고 연주대의 이름을 따서 연주암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 위치를 바꾼 이유는 관악사의 원래 위치에서는 왕궁이 바로 내려다보였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24세/1세 : 보,
25세/2세 : 채,
26세/3세 : 전,
27세/4세 : 임,
28세/5세 : 승원,
29세/6세 : 창인,
30세/7세 : 숙,
31세/8세 : 사건,
32세/9세 : 응길,
33세/10세 : 성민,
34세/11세 : 혜,
35세/12세 : 세형,
36세/13세 : 우(遇)○,
37세/14세 : ○범(凡),
38세/15세 : 회(會)○,
39세/16세 : ○우(宇),
40세/17세 : 의(儀)○,
41세/18세 : ○기(起),
42세/19세 : 강(康)○,
43세/20세 : ○재(宰),
44세/21세 : 수(秀)○, 정(廷)○,
45세/22세 : ○규(揆),
46세/23세 : ○존(存), ○학(學),
47세/24세 : 병(秉)○, 용(庸)○,
48세/25세 : 연(演)○,
49세/26세 : ○경(卿),
50세/27세 : 진(振)○,
51세/28세 : ○범(範),
52세/29세 : ○년(年),
53세/30세 : ○래(來),
54세/31세 : 중(重)○.
55세/32세 : 유(楢)○,
56세/33세 : ○성(成),
57세/34세 : ○원(遠),
58세/35세 : ○만(萬),
59세/36세 : ○욱(旭),
아래는 효령대군파 종친회에서 제공된 항렬표임.
2015.08.21. 12: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