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녀 프란치스카 로마나(Francisca Romana, 또는 프란체스카)는 이탈리아의 부유한 귀족인 부소(Busso) 가문의 파올로(Paolo)와 자코벨라(Giacobella)의 딸로서 이탈리아 로마의 중심부인 트라스테베레(Trastevere)에서 출생하였다. 그녀는 13세 때에 인근의 부유한 영주인 폰치아노(Ponziano)의 라우렌티우스(Laurentius)와 결혼하여 40여 년 동안 이상적인 결혼생활의 모범처럼 살았다. 그들은 자녀 일곱을 두었으나 둘은 어린 나이에 사망하였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금욕적인 기질이 강하였고,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 대하여 깊은 애정을 표현하곤 하였다. 그래서 흑사병과 내란으로 인하여 사회가 혼란할 때, 그녀는 자선활동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을 증거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그녀는 시누이인 반노차(Vannozza)와 함께 로마의 걸인들을 위하여 조직적인 봉사활동을 전개하여 높은 성덕을 쌓아 나갔다. 그녀는 성 알렉시우스(Alexius)의 환시를 본 뒤로 앓고 있던 중병에서 회복되었고, 1400년 그녀의 아들인 요한 바티스타(Giovanni Battista)가 태어날 때까지 산토 스피리투(Sancto Spiritu) 병원에서 환자들을 돌보는 일에 헌신하였다. 또 다시 흑사병과 기근이 로마에 들이닥쳤을 때, 그녀는 이 재앙의 희생자들을 보다 효과적으로 돕기 위하여 자신의 보석까지 팔았다.
그러나 그녀의 집안에 재앙이 닥쳐왔다. 1408년에 대립교황의 편이었던 나폴리(Napoli)의 왕 라디슬라오(Ladislao)가 로마를 점령했을 때, 여자들은 남아 있었으나 교황의 편에 서 있던 남편 라우렌티우스는 피신해야만 했다. 게다가 폰치아니(Ponziani) 성이 약탈당하고 캄파니아(Campania)의 집도 불에 타버렸다. 그리고 1413년의 또 다른 흑사병 때문에 아들 에반젤리스타(Evangelista)가 희생되자 그녀는 자기 집을 아예 병원으로 개조하였다. 불행은 계속 이어져 2년 후에는 그녀의 딸 아녜스(Agnes)마저 사망하였다.
1414년경에 비로소 평화가 찾아왔고, 남편의 추방령도 해제되어 돌아오고 재산도 되찾았지만 남편의 건강은 아주 나빴다. 성녀 프란치스카는 남편을 간호하는 한편 그녀의 모범을 따르는 귀족 부인 등과 함께 자선활동을 계속하면서 봉쇄생활을 하지 않고 세상 안에서 자선을 실천하는 새로운 형태의 수도 공동체를 이루어 살기로 결정하였다. 1433년 3월 25일, 처음에는 마리아의 오블라티회(Oblate di S. Maria)로 알려졌지만 후에 캄피돌리오(Campidoglio) 근처에 있는 '스페키의 탑'(Tor de Specchi) 근처에 있다고 하여 토르 데 스페키의 오블라티회로 알려졌고, 다시 현재의 성 프란치스카 로마나의 오블라티회로 명칭이 바뀌었다. 1436년에 남편이 죽자 그녀는 수녀원에 입회하였다.
성녀 프란치스카는 수녀원에 입회한 후 원장이 되어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남은 4년 동안 엄격한 생활과 더불어 자선 사업에 전념하였다. 또한 그녀는 수차례나 환시를 보았고, 탈혼에 빠졌으며, 치유의 기적을 행하였고, 예언의 은혜도 받았다. 그녀는 대이교의 종말을 예언하였다. 그녀는 1608년 5월 9일 교황 바오로 5세(Paulus V)에 의해 시성되었고, 교황 비오 11세(Pius XI)는 성녀가 밤낮으로 어려운 이웃을 보살피는데 수호천사의 특별한 보호를 받았으며, 칠흑 같은 로마의 밤거리를 다니는 동안 수호천사가 동행하며 등불로 길을 비춰주었다는 전설에 근거해 1925년에 그녀를 자동차 운전자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였다. 그녀는 또한 이탈리아 가정주부와 미망인의 모범으로서 큰 공경을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