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영천 은해사 산행
舞鶴 登高會
* 대상지 : 은해사 7암자
* 기 간 : 2024년 3월16일 토요일
1. 등반 개요
1) 대상지 : 영천 은해사
2) 기 간 : 2024년 3월16일 토요일 , 맑음
3) 참가자 : 신상철.김종섭
4) 산행코스 : 은해사주차장-은해사-운부능선-운부암-백흥암-중암암-묘봉암-기기암-안흥폭포-서운암-
은해사 주차장 (원점회귀)
2. 개념도 참조
3.운동정보
4.사진
영천 은해사(銀海寺)
영천 은해사(銀海寺)는 신라 헌덕왕 1년(809년)에 혜철국사(惠哲國師)가 창건한 사찰로 전국 31본산(本山)의 하나이자
대한불교조계종 제10교구 본사이다.
헌덕왕은 조카인 40대 애장왕을 폐위시키고 즉위했다.
당시 정쟁의 피바람 속에서 숨진 원혼을 달래며 왕의 참회를 돕고,
나아가 나라와 백성의 안녕을 위해서 창건한 사찰이 은해사의 시초가 되는 해안사(海眼寺)다.
해안사로 불린 은해사는 그후 1264년 고려 원종 때 홍진국사가 중창·확장했다.
1545년 조선 인종 때 소실되어 1546년에 천교(天敎)가 지금의 자리로 옮겨 지었으며,
법당과 비석을 세워 인종의 태실(胎室)을 봉하고 은해사라고 칭했다.
1943년까지 은해사는 건물이 35동 245칸에 이르러 대사찰의 위용을 자랑했지만,
현재 은해사 본사 내에는 19개 건물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산내 암자로는 운부암·거조암·기기암·백흥암·묘봉암·중암암·백련암·서운암 등이 있다.
주요 문화재로는 국보 제14호인 거조암 영산전, 보물 제486호인 백흥암 극락전 수미단, 보물 제514호인 운부암 청동보살좌상,
보물 제790호인 백흥암 극락전 등이 있다. 이 밖에도 60여 점의 문화재가 있다.
국보인 거조암 영산전은 정면 7칸, 측면 3칸의 주심포식(柱心包式) 맞배지붕 건물로, 고려 말기에 건립됐다.
이 불전 안에 석가 삼존을 중앙에 모시고 사방 벽과 기둥으로 단을 만들어 총 526기의 석조 나한상을 봉안하고 있다.
또한 은해사의 편액인 '은해사' '대웅전' '보화루' '불광' '일로향각' 등
다섯 점의 추사 글씨는 은해사의 자랑이자 소중한 문화재이다.
추사는 경상감사로 부임한 생부 김노경 공을 따라 경상도 일원의 명승지를 여행하면서 은해사 일대도 들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은해사는 본사와 말사 및 암자의 성보문화재를 수집해 도난과 훼손을 방지하고 보존·관리·전시하기 위해 성보박물관을
2004년 5월 개관했다.
운부암(雲浮庵)
조계종 은해사의 산내 암자인 운부암은 711년(신라 성덕왕 10)에 의상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절을 지을 때 상서러운 구름이 일어났다 하여 운부암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몇 차례의 화재로 인해 전소와 중건을 거듭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마당에 들어서자 이미 '문자'를 떠난 지 오래인 편액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운부난야(雲浮蘭若)', 문자로는 읽어낼 수 없는 공간이다. 운부암 선방의 당호다.
난야는 아란야(阿蘭若)의 준말로 적정처(寂靜處), 무쟁처(無諍處)를 뜻하며, 수행하기 적합한 곳을 말한다.
그래서일까 이곳 운부암은 많은 선지식이 거쳐 갔다.
경허, 만공 스님으로부터 용산, 운봉, 경봉, 향곡, 한암, 팔봉, 청담, 성철 스님 등 많은 선지식들이 정진했다.
특히 성철(性徹;1912~1993) 스님과 향곡(香谷;1912~1978) 스님은 이곳에서 만나 평생 도반이 됐다.
보화루(寶華樓)
금은 보화를 품고 있는듯한 이름이지만 색바랜 옛모습 뿐이다. 화려한 단청은 사라지고 처마엔 세월이 들러붙어 있다.
어느 사찰에서나 처럼 누각이 부처님의 터를 호위무사처럼 가로막고 있다.
누각인 보화루는 1862년 원통전과 함께 중건되었다는 기록이 '운부암중건기'와 <조선사찰사료>에 나와 있는데 현존하는
건물은 1900년에 중건된 것이다.
보화루라는 이름은 화엄학(華嚴學) 또는 화엄경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여겨지는데
은해사와 말사 암자인 백흥암과 군위지보사에도 보화루라는 누각이 있다.
백흥암
사기(史記)에 의하면 이 절은 혜철(惠徹)국사께서 861년(경문왕 1년)에 착공하여 873년에 완공하였으며,
절 주위에 잣나무가 많아서 송지사(松旨寺)라 하였다고 한다.
그 뒤 1546년(명종 1)에 백흥암으로 개칭하였고, 1651년(효종 2)에 중건하였으며, 1677년(숙종 3)에 중수하였다.
1730년(영조 6)에는 보화루(寶華樓)를 중건하였고, 1858년(철종 9)에는 청봉이 영산전(靈山殿)을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절은 한때 수백 명이 수도하였다고 하며, 규모도 암자로서는 매우 큰 편이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극락전(極樂殿)을 중심으로 영산전·명부전(冥府殿)·문루(門樓)·산신각(山神閣)·선실(禪室)·원주실(院主室)·
요사 등이 있다. 백흥암에는 보물 제790호 극락전(極樂殿)과 보물 제486호 극락전 수미단(須彌壇)이 있다.
고려시대 탑으로서 경북 유형문화재로 지정이 되어 있습니다.
중암암(中巖庵)
산사를 찾다 보면 정말 기상천외한 곳에 자리한 산사에 입이 벌어지게 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대구의 진산인 팔공산에 있는, 일명 돌구멍 절로 알려진 중암암(中巖庵)이 그런 산사 중의 하나다.
돌구멍을 통하여 절을 드나들게 되어있고, 우리 나라에서는 제일 깊다는 해우소(화장실)와 보일러실도 돌구멍 속에 있다.
뿐만 아니라 돌구멍 구멍들이 이런 저런 용도로 활용되고 있으니 제격에 딱 어울리는 절 이름이다. 이런 절,
보는 것만으로도 입을 벌리게 하는 절들은 그 규모가 어찌 되었건 찾아가 보는 것만으로도 산사 찾는 맛을 더해 준다.
중암암은 은해사 산내 말사다.
은해사 일주문을 통하여 4Km쯤 들어가야 갈 수 있는 중암암은 은해사의 산내암자로서 신라시대 화쟁국사 원효(元曉)스님 (617~686)께서 토굴을 짓고 정진한 곳으로 널리 전해진 곳에 신라 광덕왕 (光德王) 9년 (서기 834년) 심지왕사(心地王師)가
창건하였다. '중암암'이라는 이름보다는 한문을 풀어 말하는, 일명 돌구멍절로 더 알려진 조그만 암자다.
우리나라 3대 기암(奇庵) 중의 하나인 곳이죠.
참고로 3대 기암은
관악산 연주대, 금오산 약사암, 팔공산 중암암입니다.
묘봉암(妙峰庵)
묘봉암은 833년(흥덕왕 8)에 심지(心地)왕사께서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그 뒤 오랫동안 관음기도처와 수행처로 전승되어 오다가 1485년(성종 16)에 죽청(竹淸)과 의찬(義贊)이 중창하였고
1780년(정조 4)에 다시 중창하였으며, 최근에 6·25사변 당시 폐사된 것을 법운(法雲)스님께서 중수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관음기도와 신신기도처로 유명하고 과거에는 나라에 큰일이 있거나 큰 절에 행사가 있을 때에는 은해사 대중스님들이 모두 올라오셔서 산신기도를 올렸다고 전해지며, 산령각 옆 석간수는 불치의 병도 낳게한다는 신비의 약수로 유명하다.
원통전은 과거 석굴에서 기도를 해왔던 곳으로 석굴 위에 건물을 지은 것이다.
높이가 매우 높아 정사각형의 모양에 가까운데 이는 내부에 큰 돌이 뻗어 있어 그 아래에 관세음보살상을 안치하고,
왼쪽 위에 2층을 만들어 석가모니불을 봉안하였기 때문이다. 은해사의 산내 암자 중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절이기도 하다.
기기암(寄寄庵)
은해사골의 가장 남쪽에 위치한 이 암자는 팔공산에 많은 절이 창건되고 마애불상이 집중되어 불교 성지로 변하는 시기인
9세기에 조성된 절 가운데 창건 연대가 가장 빠르고 실제 기록도 남아있는 사찰이다.
이 사찰은 애장왕때 국사로 봉안된 정수(正秀)스님이 816년(헌덕왕 8)에 국왕의 평안을 기원하기 위해 창건하면서
안덕사(안덕사) 또는 안흥사(安興寺)라고 하였으나,
고려 명종 16년(1186년) 기성(기성)대사가 머물면서 사찰 이름을 '기기암'으로 바꿔 불렀다고 하는데
당시 이 사찰에는 60여 명의 승려가 살았다고 합니다.
1546년에는 쾌선스님이 중건하였고 다시 1823년에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당우로는 요사와 법당을 겸한 건물 1동이 있으며 선방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규모에 팔작지붕 건물로 근래에 조성되었습니다.
이 암자는 '신기사바 심기극락(身寄娑婆 心寄極樂)'이라하여 '몸은 비록 사바세계에 있으나 마음은 극락에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편안한 수행처인데 현재 선방에는 비구스님들이 참선 정진 중입니다.
서운암(瑞雲庵)
서운암은 경상북도 영천시 청통면 치일리에 있는 사찰로 대한불교 조계종 10교구 본사인 은해사의 말사이다.
전해지는 사찰 기록이 전혀 없다. 폐사로 남아 있었으나 6.25이후 중건하여 한 분의 스님이 거처하고 있었다.
산령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자그마한 전각으로 겹처마 맞배지붕의 목조건물이다.
창호는 빗살문살로 짜여져 있으며 안에는 산신상(山神像)만을 봉안하고 있다.
산신은 민간신앙으로 호랑이의 변화신인 산신(山神)을 숭배하던 것을 불교에서 흡수한 경우이다.
산신각은 보통 산의 악귀를 누르기 위하여 가람의 가장 위쪽에 위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