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잡아야 할 역사(http://cafe.daum.net/realhistory/)
게 시 판 : 近/現代史【1863年 後】
번 호 : 95
제 목 : [10대 의혹사건/김구암살]
글 쓴 이 : 펌객
조 회 수 : 58
날 짜 : 2003/07/02 22:29:41
내 용 :
* 독립운동가들에서 펌 *
[10대 의혹사건/김구암살]
49년 6월 벌어진 백범 김구 암살사건에서 가장 큰 쟁점은 이승만 초대대통령과 미국이
이 사건에 관련됐는지 여부다. 먼저 `이승만 배후설'은
△당시 육군소위로서 암살 하수인이었던 안 두희
△사건 당시 서울지검장으로 기소를 맡았던 최대교
△구국청년단 대표 고정훈, 헌병사령관 전봉덕 및 백범 아들 김신의 증언 등이 뒷받침하고 있다.
특히 이승만이 사건 당시 우익단체인 서북청년단 부단장으로 암살과 밀접한 관계에 있던
김성주(54년 헌병사령관 원용덕 집에 서 살해됨)를 사형에 처하도록 한 영문 메모를 보낸게
중요한 단서다.
또 암살 20일 전 친일세력의 영향 아래 있던 경찰에 의해 반민특위가 습격당하고 49년 8월말
마침내 공식해체되면서 이승만의 권력기반이 확고해지는 점도 시사하는 바 크다.
그러나 이승만의 정치고문이었던 로버트 올리버 같은 이는 관련성을 부인하고 있다.
여러 정황과 증언으로 볼 때 이승만은 자신이 직접 명령을 내리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차리도록 부하들에게 암시해 암살을 부추겼을 가능성은 매우 높은 것으로 보인다.
다음으로 미국의 개입여부다. 안두희는 92년 4월12일 사건의 진상을 끈질기게 추적해온
권중희에게 암살배후를 토로하면서
△경무부장 조병옥과 수도청장 장택상 등의 소개로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전신인 전략사무국
(OSS)의 한국 책임자 (중령) 등을 알게 됐으며
△오에스에스 한국담당 장교와 안두희의 서북청 년단이 긴밀히 정보교환을 했다고 진술했다.
안은 이어
△미군 장교는 백범을 제거해야 할 `블랙 타이거'라고 부르며 넌지시 암살의 필요성을
흘렸다고 덧붙였다. 미국은 특히 사건 바로 뒤 존무초 대사의 보고를 통해 장례식까지의 정국과
사건의 추이를 정확히 예견하고 있었다. 이는 미국이 암살사건의 내막을 미리 알고 있었거나
이승만 정부로부터 보고를 받았음을 추정케 한다. 그러나 이 역시 미국이 암살에 직접 개입한
증거로 보기에 는 무리가 따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미국이 백범의 남북협상노선에 강한
거부감을 갖 고 있었던 점으로 미루어 적어도 암살을 예상했거나 희망하고 있었다고 할 것이다.
그러면 왜 반세기가 흐른 지금까지 진상이 밝혀지지 않고 있을까? 우선 암살의 주류 및 배후를
이루는 집단이 권력핵심에 똬리를 틀고 진상 규명작업을 막아왔기 때문이다.
김영삼 정부 들어 국회에 진상조 사위원회(위원장 강신옥)가 구성돼 95년 12월 조사결과를
발표했으나 이전의 수준을 크게 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런 데는 또다른 이유가 있다.
그동안 진상 규명작업이 안두희의 입 에 너무 의존해왔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는 자신의 증언을 수시로 뒤집 어 정작 실체적 진실을 추구하려는 사람들에게 혼란을
가져다 준 측면 도 많다.
[10대의혹사건/김구암살]
90년부터 백범연구 주력도진순교수 "백범 암살사건은 50년 전이나 지금이나 북한과 미국을
어떻게 이해 하느냐 여부가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난 90년 이후 백범 연구에 주력해온 도진순(40) 교수(창원대 사학 과)는 "백범 암살사건이
최근 새삼 주목을 받는 것은 남북 및 한-미 관계가 새로이 진전되고 있다는 반증"이라고 말했다.
그는 과거에 파묻힌 사건으로서가 아니라 현재와 미래의 맥락에서 조 명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백범을 연구하게 된 계기는? 사실 백범이 좋아서라기보다는 `분단과 통일'을 주제로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하다가 그의 만년에 주목해 빠져들게 됐다. 백범은 해방정국 역사구조의 전형성을
보여준다. 따라서 그를 통하지 않고는 분단과 통일을 말할 수 없다. 백범연구가 어떤 방향으로
이뤄져야 하나? 세 가지를 말할 수 있겠다.
분단을 극복하기 위해 몸을 던진 만년의 백범 연구가 그 첫번째요,
현재 및 차세대 젊은이들에게 그의 진면 목을 이해시킬 수 있는 `청년백범연구'가 두번째다.
또 하나는 애국심 충성심 등 전기적 연구수준을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는 시시비 비를 가려 그의 오류까지 공개적으로 논의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백범 및 그의 암살사건을 연구하면서 어떤 한계를 느끼지는 않았나? 백범 암살의 배후연구는
그것이 아무리 성층권에 가려있다 해도 뻔히 보이는 주제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학문적 논의의
장과 현실인물에 대한 명예가 분간 안되는게 우리의 풍토여서 아쉽다.
여기에다 정부의 적극적인 진상규명 의지 역시 부족하지 않았나 싶다. 이젠 역사적 사건으로
간주해 공정하고 냉철하게 되짚어 봐야 할 때라고 본다.
[10대 의혹사건/김구암살]
사건 개요는 1949년 6월26일 정오 조금 시각. 초여름 햇살이 눈부시던 일요일 서울 서대문
경교장 2층 거실에서 네발의 총성이 들렸다.
육군소위 안두희(당시 32살)가 쏜 총탄에 백범 김구는 머리를 책상위에 얹고 손은 테이블
한 모서리를 쥔 채 쓰러졌다. 사건 뒤 체포된 안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가 곧 15년형으로
감형되고 50년 7월 소위로 복귀했다. 그는 권력의 비호를 받으며 대령까지 진 급했으나 이승만
정권 몰락 뒤 뜻있는 이들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암행을 계속했다.
특히 김용희, 곽태영, 권중희 등은 은신중인 안을 집요하게 찾아내 역사적인 증언을 이끌어
내는데 혼신의 힘을 쏟았다. 애초 단독범행이라던 안은 일부 배후를 털어놓기는 했지만 계속
말을 뒤집어 진상규명작 업을 혼란에 빠트리다가, 96년 10월23일 버스기사 인 박기서의 습격을
받아 숨졌다. "선생님이 안두희 총탄에 쓰러진 것과 거의 동시에 서대문서 경비주 임이
경교장으로 뛰어들어왔어요. 그리고 잠시 뒤 군복차림의 정체불명 청년 4~5명이 들이닥쳐
안을 지프에 태워 어디론가 데리고 갔습니다." 암살사건 당시 백범의 수행비서로 현장에 있던
선우진(77)씨는 31일 범행 상황을 설명하면서 “이는 경찰과 군 등 당국이 이미 선생의 암살
작업을 주도면밀하게 준비하고 있었다는 증거”라고 말했다. 45년 말부터 백범이 암살되기까지
가장 가까이서 모신 측근중의 한 사람인 그는 49년 봄 남북협상 때 백범을 수행해 북한을
다녀오기도 했 다. 그래서 선생의 죽음을 막지 못한 것에 대해 여지껏 회한과 죄스러움을 느끼고
있으며, 지금도 사건 관련 의문점들을 떨칠 수 없다고 한다.
그의 생애는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그렇게 미워했던 백범의 측근이었다는 이유로 역시 순탄치
못했다. 특히 자유당 시절엔 친구들도 맘대로 만나지 못했으며, 신분을 감추고 지낼 수밖에
없었다.한국전쟁 때는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통역일을 하다가 전후 상경해 서는 모래내의
`재민농원'에서 해외귀국 동포들의 재활을 위한 활동을 하기도 했다.
60년 4·19 학생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붕괴되자 그는 다시 바빠졌다. 11년 만에 치러진 백범
추모식과 진상조사위원회 활동 을 병행하며 사건 배후 추적에 몰두했기 때문이다. 그는 백범이
세상을 떠난 이후에도 줄곧 백범주변을 지켜왔다. 장례식 직후 설립된 백범 김구 선생 기념사업
협회에서 일을 해왔으며, 현재 는 이 협회 상임이사직을 맡고 있다.
그는 " 진상규명이 확실히 돼야 역사를 바로 세울 수 있을 텐데 자꾸 만 기억력이 흐려져 걱정 "
이라고 말했다.
[10대 의혹사건/김구암살]
정부 수립 50돌, 기쁨과 축하만으로 맞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즐거워 야 할 날에 우리는 썰렁한
가슴으로 맞을 수밖에 없다. 단지 오늘의 경 제위기 때문만은 아니다. 반세기의 긴세월 동안에도
잊혀지지 않는 많은 슬픔과 고통이 그 속에 있다. 조금만 주위를 둘러보면 자신의 가족과 이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