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11월 3일을 기억한다. 50년 전, 꿈에도 그리워하던 독일행 비행기를 타던 날이었다. SAS 라고 적힌
프로펠라 비행기 트랩을 오를 때 나는 멀리서 “청~자~야~” 목이 터져라고 내 이름을 부르시던 나의 아버지 목소리를 들었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이 독일행 비행기를 타려고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던가? 그리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아픔을 주면서 도망치듯 이 나라를 떠나고 있는가? 그러나 나는 꼭 독일을 가야만했다.
그곳에서 나는 나의 꿈, 진정한 나의 꿈을 펼치면서 살아갈 것이라는 희망과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독일 신부님의 초청으로 한국에서 독일로 함께 떠난 친구들은 모두 10명이었다. 모두가 나처럼 큰 기대를
갖고 간호원, 유치원 보모 또는 정원사를 지원해서 가는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아가씨들이었다.
나처럼 가정형편이 어려워서 한국에서 대학을 못간 사람도 있었고
개중에는 부유한 집안의 딸로서 외국 유학을 가는 기분으로 따라나선 사람들도 있었다.
스칸디나비아 항공인 프로펠라 비행기는 방콕과 인도를 거쳐서 북유럽에서 종착지는 독일의 쾰른 이었다.
쾰른 어떤 수도원에서 하룻밤을 자고 우리는 기차로 목적지인 아욱스부르그에 3일 후인 11월 6일에 도착했다. 기차에서 내렸지만 자동차가 없어서 우리는 큰여행가방을 들고 역에서 30분정도를 걸어 수녀님들이 경영하시는 기숙사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나는 외국여행을 한다고 투피스와 하이힐을 맞춰 신고 왔었는데,
600년이나 된 아욱스부르그의 돌로 만들어진 길이 얼마나 걷기 힘들었는지, 지금도 그 때 생각을 하면 발이
아프다.기숙사에 도착하니 수녀님들이 친절하게 우리들을 방으로 안내해주셨다. 간단하게 저녁을 먹고 친구들은 깊은 잠에 빠져버렸다. 아니 3일동안이나 여행을 했으니 사경을 헤메었다는 말이 더 어울리는 듯했다.
그러나 나는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내가 독일에 온 것이 너무도 기쁘고 감격스러워서 몹시 흥분해 있었다.
아침이 됬을 때, 나는 잠자는 친구들을 깨울까봐 조용히 문을 열고 문밖으로 나왔다. 멀리 복도 끝에서
수녀님 한분을 만났다. 나는 주저하지않고 “ 구텐모르겐”이라고 독일어로 인사를 했더니 수녀님이 깜짝 놀라셨다. 어제 저녁에 도착한 아가씨가 독일어를 하는것이 신기하셨던 모양이다. 그 후 나는 이 구텐모르겐 한마디 때문에 수녀님들께 인정을 받아서 친구들 통역을 하게 되었다. 한국에서 가정교사로 들어가 벌은 돈으로 영어와 독어 학원을 다닌 것이 독일에서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그 무엇을 얻기 위해서
철저히 준비하는 습관이 있었는데, 그것은 지금까지 내 삶에서 많은 열매를 맺게 하는 비결이 되고 있다.
기숙사에서 우리들을 위한 환영파티가 열렸는데, 나는 피아노를 치면서 노래를 불러 모든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간호원이 되려고 온 학생이 음악에 재능이 있는 것을 보신 수녀님들이 내게 물으셨다.
나는 이 때가 챤스다 싶어 수녀님들께
“사실 나는 음악을 공부하고 싶어서 독일에 왔어요. 저를 도와주세요.” 라고 간청했다.
수녀님들이 우리들과 계약을 맺고 데려오신 신부님께 여쭈어봤더니 단호히 No! 라고 거절하셨다.
그러나 나는 실망하지 않고 또 다른 기회를 기다리기로 했다.
함께 온 친구들은 이제 각각 다른 도시로 떠나보내졌다. 수녀님들은 나만을 보내지 않으시고 기숙사 근처에 있는 병원에 보조 간호사로 취직시켜주셨다. 다행히 일등실에서 근무를 하게 되어 나는 부잣집 사모님들을
보살피게 되었는데, 내 앞치마 주머니에는 늘 영어와 독어 사전을 넣고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금방 찾아서
표현을 하곤 했다. 나하고 어느 정도 대화가 되는 사모님이 퇴원 후 나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해주면서 딸도
피아노를 찬다고 함께 놀다가라고 했다. 나는 한복으로 차려입고 초대에 응했다.그 집딸보다 피아노를 더
잘치는 나에게 렛슨비를 주시면서 다음주에 교수님께 오디션을 보도록 주선해 주겠다고했다.
오디션 결과 나를 가르치고 싶다고 교수님께서 허락해주셨다. 또 다른 사모님은 내가 노래를 잘하는 것을
듣고 성악과 교수님에게 오디션을 보게 하주셨는데, 여기서도 합격이었다. 이제 나는 교수님들과 후원자들을 다 만나게 되었으니 신부님께 다시 한 번 더 여쭤 봐달라고 수녀님께 간청하니 드디어 신부님으로부터
아그네스만은 예외로 허락하신다는 통보를 받았다. 독일에 온지 5개월만의 일이었다. 나는 감사와 기쁨으로 밤을 지새웠다. 이렇게 나의 꿈은 하느님의 계획 안에서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나는 아욱스부르그 모자르트 음대 성악과와 피아노과를 졸업하고 독일 후원자들의 도움으로 나의 큰
소망이었던 오스트리아 빈 국립음대에서 3년간 더 공부해서 석사과정을 마쳤다.
그후 1970년에는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유럽무대에서 오페라 가수로 데뷔하는 영광을 갖게 되었다.
1964년에 입학하여 7년만에 이루어낸 나의 성공 스토리다. 그 당시 한국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내가 그 어느 외교관보다 더 한국을 알렸다고 국위선양에 관한 상장이 한국으로부터 날아왔다. 그
후 나는 10년만에 한국으로 돌아가 모든 사람들의 사랑과 인기를 누리면서 한국음악계 정상에
오르게 되었다.
내가 이렇게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의 은총이었고 많은 사람들의 도움과 희생이 있었음을 나는
잊은 적이 없다. 내가 받은 축복에 대해 늘 감사하면서 이것을 되돌려 드리는 삶을 나는 지금 말라위에서
살고 있다. 내가 아프리카로 떠나 올때 나의 화두는 “감사”였다
감사는 마음에만 품고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 감사는 표현되어야하며 행동으로 이어질 때,
그감사는 진정한 감사가 되기 때문이다. 나는 이 “감사의 축제”를 최근에 아욱스부르그에서 열었다.
50년이 되는 해에 내가 시작한 곳을 다시 찾아가서 살아계신 은인들과 그들의 자녀들, 또 함께 지내던
옛 친구들을 모두 초대해서 함께 점심식사를 하고 싶었다. 그리고 돌아가신 은인들의 무덤을 찾아가
이 감사의 마음을 전하면서 내가 그들에게 받은 사랑과 도움을 지금 말라위 젊은이들에게 주고 있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다.
18명의 손님들이 모였다. 손님들은 모두 눈시울을 붉히면서 옛날이야기를 나누었다.
50년 후에 다시 찾아준 나를 끌어안으며 감격해했다. 연세가 많으신 수녀님들은 오시지 못했지만
다음날 내가 살았던 수녀원 기숙사로 그분들을 찾아뵙고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600년이 된 아욱스부르그 도시는 변함이 없었지만, 우리는 모두 변해 있었다. 많은 분들이 세상을 떠났고
또 남아있는 사람들 중에 아픈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휠체어에 앉아있는 사람, 뇌출혈로 말을 못하는 사람, 백혈병을 앓는사람, 우울증에 걸린 사람등... 자신들의 아픔을 갖고 나와준 사람들이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이제 헤어지면 우리가 언제 다시 만나게 될지 알지는 그 아무도 알 수가 없다.
아마도 마지막 만남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자 나는 그들을 더욱 힘있게 안아주면서 작별인사를 했다. 우리들의 몸이 이 세상을 떠날지라도 우리가 사랑한 만큼 우리는 기억될 것이기에, 더 많이 사랑해야한다.
그리고 그 받은 사랑에 감사해야 한다. 감사하는 마음이 우리를 더욱 큰 축복으로 이끌어가기 때문이다.
첫댓글 인간 승리의 드라마입니다. 지금이라도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야하는 이유를 발견합니다. 고맙습니다. 건강하십시오.
아기사슴님, 감사합니다. 그래요. 희망을 잃지않고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하느님께서 기뻐하십니다.
" 감사는 마음에만 품고 있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 감사는 표현되어야 하며 행동으로 이어질때
그 감사는 진정한 감사가 되기 때문이다,,,," 아멘
글을 읽어 내려가면서 "열 처녀의 비유" 복음말씀과, " 겸손 "이란
순명과 겸손으로 진정 최선을 다하시는 준비된 주님의 도구이십니다. 존경과 사랑을 드립니다.
슈니님, 감사해요. 내가 바로 살고 싶은 성서구절이 바로 이것입니다. 나는 거저 받았으니 이제 거저주는 삶을 살아가려합니다.
얼마나 행복한 삶인지요!
마음을 움직에게 하는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교수님 건강하십시오
rosa님, 고마워요. 자매님의 마음을 움직이게 했다니 기쁘군요. 마음을 움직이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요!
아마도 좋은 마음의 텃밭을 갖고계시나 봅니다. 건강을 주시니 감사하며 잘 지키려합니다.
꿈 모닝입니다.
비전과 꿈을 향해 언제나 열정적인 자매님의 꿈사랑에 힘찬 박수를 보냅니다.
신원도예 라면 서초동에 살 때 이웃이었던 분들이시지요? 지금 용인 민속촌에 계신다고 기억하는데요.
정말 반갑습니다. 우리카페를 방문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어떻게 지내고 계시나요?
본명이 안드레아가 아니셨던가요? 자매님께도 인사전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