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아시다시피 일본에 불교를 전해진 것은 백제를 통해서였다.
백제 성왕(聖王/聖明王, 523-554)이 불상, 경전, 스님을 일본으로 보낸 것이 공식적 일본 전래(538/혹은 552년) 기록이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들어왔을 때 이차돈의 순교에서 보듯이 토착신앙과의 갈등과 알력을 겪으며 부딪히기도 한다.
그러니까 재래신앙(8백만이나 되는 온갖 神들을 모시는) 속에서 처음에 불교는 신기신앙(神祇信仰)의 입장에서 일종의 객신(客神) 형태로 받아들여졌다.
이후 불교는, 배불(排佛)과 숭불(崇佛)의 과정을 겪으면서 기존의 토착신앙과 공존하게 된다.
그런 속에서 불교가 일본에 정착하는 데 획기적으로 공헌하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바로 쇼토쿠(聖德, 574-622)태자다.
마츠오 선생은 쇼토쿠태자에게 "일본불교의 아버지"라는 찬사를 바치고 있다.(마츠오 겐지 <<인물로 보는 일본불교사>>p.36)
전설상으로는 2세 때 "나무불(南無佛)"을 외웠다든가 45세에 <<승만경>>을 강의했다고 합니다.. 태자는 온 나라 모든 백성들의 마음의 잘못을 바로잡아주고 의지할 가르침을 주는 것이 불교라고 생각하여 관료들의 도덕심이 향상된, 대립이 없는 인륜국가 실현을 목표로 '17조헌법'을 제정했다고 합니다. (p.38) ..........중략.......... .....쇼토쿠 시대 이후 불교가 일본에 정착하게 되었고 국가와 결탁한, 이른바 국가불교로서 번영하게 되었습니다.(p.39) |
결정적으로 645년의 혁명, '타이카개신(大化の改新、たいかのかいしん)'을 계기로 천황중심 불교로 확고하게 자리잡게 된다.
* TMI: 일본의 연호는 大化改新 이후로 쓰기 시작했다.
다시말해 불교는 국가(조정/천황)의 안녕을 비는, 진호국가(鎭護國家)의 이념에 충실히 봉사하는 도구(?)가 된 것이다.
이는 고중세 시대, 일본에서 스님들은 개인적 수행이나 민중교화를 위한 설법이 허락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즉 그 시대 일본불교는 국가불교, 관제불교였던 것이다.
불교와, 승려들은 오직 국가(황실)를 위해 기도하고, 존재하고, 봉사하는 위치에 있었다.
황족 중에 누가 병에라도 걸리면 나으라고 가지기도(加持祈禱)를 올리고, 황자 출생을 위해 기도하고.... 그 영험으로 병이 낫거나 황자가 태어나기라도 하면 기도를 집전한 담당스님은 승승장구 출세길을 걷게 된다.
우리 공부방(제22호/2022년4월 발행)에 <추리소설로 읽는 선(禪)>이라는 독후감 소개된 적이 있는 <<철서의 우리(鉄鼠の檻)>>쿄고쿠 나츠히코(京極夏彦 著)에 나오는 철서(원한이 깊어 죽어서 마침내 쇠로 된 쥐가 되어 히에이잔/ 比叡山 엔랴쿠지/延暦寺의 경전을 갉아 망가뜨리는 원령이 되는 비극적 전설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지만) 온죠지(園城寺) 스님 라이고(頼豪, 1002-1084)의 사례에서 보듯이........ 고대와 중세 관승의 업무범위는 오직 황실을 위한 설법(說法, 法講)하고 기도했음을 알 수 있다. |
각 지방(国/くに)마다 관사(國分寺)를 두고, 주지 등 요직 임명과 살림살이 등을 중앙정부에서 관할했다.
스님이 되는 데도 천황의 허가가 있어야 했으며, 승려의 호적은 별도 관리되었다.
그러니까 요즘으로 치면 스님의 신분은 (지방공무원도 아니고) 국가공무원이었다고 봐야겠다.
개인적으로 출가하여 승려가 되고 싶다고 해서 아무나, 누구나 스님이 될 수 있는 시스템이 아니었다.
연분도자(年分度者制)로 한 해에(年) 도첩각 종파에서 1년에 2~3명씩, 1년에 스님이 될 수 있는 인원도 총 10~12명 정도로 제한되어 있었다.
황위를 이어받을 순위에서 밀려난 황자들이나 고관 출사(出仕)에서 밀려난 명문가의 자제(서얼 포함) 등이 출가했다.
이런 연분도자 시스템 가운데서도, 나라의 허락없이 개인적으로 출가하는 스님이 있었는데 이들을 일컬어 사도승(私度僧)이라고 했다.
이런 사도승들은 국가로부터는 승려신분으로 대접 받지 못 했다.
당나라, 송나라 등 유학 갈 때도 반드시 국가에서 발급받은 도첩이 필요했고, 정식 수계 도첩을 지참하지 않으면 입당(入唐), 입송(入宋)이 불허되었다.
일종의 여권이며 비자였다.
그러니 사도승들은 유학길에 오를 수도 없었다.
또한 승려에게 주어지는 특권인 징병, 군역, 납세, 감형(예컨대 관승의 경우, 사형이 선고된 자는 그 하위 형벌로 감면 받는 등 감형의 특혜가 주어졌다) 등에서도 제외되었다.
사도승들이 아무리 부처님 경전을 읽고 수행하고, 중생교화하더라도 국가로부터 스님으로 대우받지는 못 하는 신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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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쪽 교토 북구(北區)는 변두리 지역은 말도 못 했어. 말 그대로 목불인견이었지. 학교 바로 길건너 동쪽, 이마미야 신사(今宮神社)가 있는 무라사키들판(紫野) 있지? 거기는 기근이나 역병이 덮친 시절에는 시신이 산더미처럼 널부러져 있었어. 저 아래 남쪽 도심으로 내려가면 가와라마치(河原町)와 맞닿는 카모가와(鴨川) 강변에도 마찬가지였고... 특히 오닌의 난(応仁の乱, 1467-1477) 당시에는 형편무인지경이었다지? 그 전란에 쌓여가는 시신을 처리하자니 화장이 최선이었겠지. 그 일을 해낸 스님들이 참 대단한 거지..." |
국립대학에서 정년을 하시고 사립대로 출강하고 계시던 고문법 담당 타마키(玉木)교수님이 들려주신 옛날 이야기였다.
무슨 얘기 끝엔가 그런 참혹한 이야기를 하셨는데, 당시에는 관련 지식도 관심도 없었기에 흘려들었는데, 나중에 마츠오 선생의 <<인물로 보는 일본불교사>>를 읽으면서 교수님 말씀이 새롭게 해석되었다.
재구성해보면
동아시아 각국이 그렇듯 옛날에는 일본에서도 매장(土葬)을 했다.
죽은 사람이 되살아나거나 짐승들의 훼손 등이 두려워서였던지... 굴장(屈葬, 시신을 태중의 어린아이처럼 구부려)이라고 하여 끈이나 천 등으로 꽁꽁 묶어 장사지낸 시기도 있고, 그 후 척추를 쫙 펴서 장사지냈고, 황가나 유력자들은 엄청난 규모의 전방후원형 고분(古墳) 등 형태로 호화스런 무덤을 만들었던 시대도 있었다.
둔세교단의 선구자 교키(行基, 668-749)스님의 스승인 도쇼(道昭, 629-700)스님의 장례는 화장을 했다.
기록상의 다비(茶毘)의 효시라고 한다(700년).
그 후로 매장과 불교식 장례인 화장이 공존했다.
사가(嵯峨、786-842)천황이 자신의 장례는 12명 이내의 극소수 인원으로 간소하게 치르라는 유언을 한 후, 황가의 장례가 검소, 소박해지기는(薄葬)했으나 여전히 황가나 귀족, 유력한 가문의 호화사치스런 장의가 없어진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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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4년 ~ 1869년까지 1080년간, 헤이안(平安京/京都) 천도 이후 에도(江戶/東京) 천도까지 수도였던 교토에서,
그 좁은 교토땅에서, 도심 매장은 금지된 상태, 골목마다 거리마다 있는 크고 작은 신사(神社)의 신관(神官)들은 더욱 외면하고... 힘없고 돈도 없는 서민들이 장례를 치르는 것은 정말 일대사가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변두리 땅(무라사키 들판)이나 교토를 끼고 흐르는 만만한 강가(加茂川 / 鴨川)에 떠내려 보내는 것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을까?
신도는 질색하며 경원시하고, 스님들(정식 스님인 관승들)은 민중들의 장례따위는 안중에도, 염두에도 없고...
이런 속에서 둔세승들이 나서서 들판이나 야산기슭, 강가에 버려진 시신을 거두고 수습하여 장례지냈다.
애초에 가마쿠라 둔세승(遁世僧, 일단 관승신분으로 정식 도첩을 받고 출가했으나 관승에서 이탈하여 중생구제를 위해 민중 속으로 들어가 교화에 나선 스님들을 특히 일컫는다)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모두 외면하고, (더러운 기운/死穢)이라고, 부정탄다고... 질색하며 피하던 일을 등에 짊어지고 시신을 나르고, 왕생극락을 기도하며 장례를 지내준 스님들...
"장례불교"는 그렇게 탄생했던 것이다.
거두어 장례 치러줄 사람 없이 쓸쓸히 죽어간, 또는 버려진 아웃카스트의 시신을 등에 짊어지고 갠지스 화장터로 나르던《깊은 강(深い河)》의 오츠(大津)나, 더 거슬러 오라가 한센병 환자들을 보듬어 한냐지(般若寺) 언덕에 모시고 피고름을 받아내며 간병했다는 닌쇼(忍性)보살이나, 버려진 시신을 수습해 장례 치르는 일을 기꺼이 했던 가마쿠라 둔세승들의 마음이 어찌 다르겠는가?
* 이 글을 위해 여기저기 찾아 공부해보고 알게 된 것... 절에서(혹은 절이 아닌 곳에서도), 스님이 주관하여, 화장하여, 절에 딸린 묘지에 납골하는 장례가 보편화된 오늘날까지 천황가는 매장(土葬)한다는 것, 너무 고귀한 신분은이라 다비(화장)을 않았던 것이 전통적 습속이었는데 현재 천황은 자신도 일반 국민들(처럼 화장하여 납골하는) 장례를 따르겠노라고 일찍이 선언했다는 뉴스도 뒤늦게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