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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법사님 무문관 제창>
제09칙 대통지승 第九則 大通智勝
興陽讓和尙, 因僧問, “大通智勝佛, 十劫坐道場. 佛法不現前, 不得成佛道時如何.” 讓曰, “其問甚諦當.” 僧云, “旣是坐道場, 爲甚麽不得成佛道.” 讓曰, “爲伊不成佛.”
無門曰, 只許老胡知, 不許老胡會. 凡夫若知, 卽是聖人. 聖人若會, 卽是凡夫.
頌曰, 了身何似了心休, 了得心兮身不愁, 若也身心俱了了, 神仙何必更封侯.
I. 본칙
흥양 청양1 화상에게 한 스님이 물었다. “대통지승불은 10겁이라는 긴 시간을 도량2에서 좌선했는데도, 불법이 앞에 나타나지 않아(現前), 불도를 성취할 수 없었다는데, 그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그 질문이 그럴 듯하구나! 정곡을 찔렀다.” “도량에서 그렇게 좌선하고도 왜 불도를 이루지 못했을까요?” “그것은 그가 (스스로) 성불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문 화상 평하기를, 늙은 오랑캐3가 반야般若 지혜知慧를 얻는 것은 허락하겠지만, 분별分別 해회解會는 용서치 못한다. 범인도 반야의 지혜를 얻으면 곧바로 성인이지만, 성인도 분별 해회하면 곧바로 범부일지니.4
게송으로 가로되, 몸을 수련하여 완전하게 하는 것이 마음을 완전히 쉬는 것만 하겠는가? 마음을 깨달아 걸림이 없으면 몸은 아무 걱정이 없네. 하물며 만약 몸 수련 마음 수행을 모두 마쳤다면, 바로 신선인데 또 무슨 작위까지 필요할까!
II. 배경
대통지승불大通智勝佛5 대통지승불은 무한히 먼 과거인 아승지겁阿僧祗劫6전 호성好城이란 나라에 살던 부처이다.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제7장 화성유품化城喩品」에 그 일화가 전한다.
부처님께서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대통지승불의 수명壽命은 540만 억 나유타7 겁이니라. 그 부처님이 처음 도량에 앉아서 마군들을 깨뜨리고 최상의 깨달음을 얻으려 하였으나, 불법佛法이 앞에 나타나지 아니하여, 10소겁이 되도록 가부좌를 틀고 앉아 몸과 마음을 동하지 않았는데도 불법은 오히려 앞에 나타나지 않았느니라.
그때 도리천신忉利天神들이 먼저 그 부처님을 위하여 보리수 아래에 사자좌獅子座를 펴놓았는데 높이가 1유순8이라. ‘부처님이 여기에 앉아서 마땅히 최상의 깨달음을 얻으리라.’하니, 마침내 이 사자좌에 앉으셨느니라. 그때 여러 범천왕들이 온갖 하늘 꽃을 비 오듯 내리니 그 꽃의 넓이가 100유순이며, 향기로운 바람이 때때로 불어와서 시들은 꽃은 날려 보내고 다시 새 꽃을 내려서 10소겁 동안을 쉬지 않고 부처님께 공양하였느니라. 열반에 드실 때까지 항상 이렇게 꽃을 내렸느니라. 여러 사천왕들은 부처님께 공양하기 위하여 항상 하늘의 북을 치고, 그 외에 다른 하늘에서도 하늘의 풍류를 연주하여 10소겁이 차도록 하였으며 열반하실 때까지 그렇게 하였느니라.
여러 비구들이여, 대통지승불께서는 10소겁이 지나고 나서야 부처님의 법이 앞에 나타나서 최상의 깨달음을 이루었느니라. 그 부처님이 출가出家하기 전에 16명의 왕자가 있었느니라. 맏아들의 이름은 지적智積이었으며, 여러 아들들이 각각 여러 가지 진기한 놀이기구를 가지고 있었느니라. 그 아버지가 최상의 깨달음을 이루셨다는 말을 듣고는 모두 진기한 놀이기구를 버리고 부처님이 계신 곳으로 나아가는데, 그 어머니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전송하였느니라.
그들의 조부 전륜성왕이 일백 대신과 백 천만 억 백성들에게 둘러싸여 함께 도량道場에 이르렀느니라. 모두 다 대통지승 여래를 가까이 모시고 공양 공경하며 존중 찬탄하였느니라. 그 곳에 이르러서는 머리를 숙여 발아래에 예배하고 부처님을 여러 번 돌고는 일심으로 합장하여 세존을 우러러 바라보며 게송으로 읊었느니라.”
큰 위덕을 갖추신 세존께서 중생들을 제도하시려고 한량없는 억만 년을 지내고 이제 비로소 성불하셨습니다. 온갖 서원을 이미 구족하시어 참으로 훌륭하시고 더없이 길상吉祥하십니다. 세존께서는 매우 희유하여 한번 자리에 앉아 10소겁 동안을 지내시었습니다. 몸과 손과 발을 고요히 하여 움직이지 않으시며 마음도 항상 담박하여서 조금도 산란하지 않으십니다.9
대통지승불의 왕자들도 아버지를 따라 출가하여 깨달음을 얻고 부처가 되었다고 하는데, 동방의 아촉불과 서방의 아미타불 그리고 사바세계로 오신 석가모니불(막내아들)이 그들이라고 한다.
임제 선사의 해설 『임제록臨濟錄』에는 대통지승불에 관한 물음과 임제의현(臨濟義玄, ?~867)10 선사의 대답이 실려 있다.
질문, “대통지승 부처님은 십겁十劫이라는 긴 세월 동안 청정한 도량道場에 앉아 좌선 수행을 했지만, 불법이 실현하지도 않고, 불도를 완성하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이것은 도대체 무슨 까닭입니까? 스님께서 가르쳐 주십시오.” 임제스님이 대답했다. “대통이란 바로 우리 자신이다. 어디에서나 여러 가지 존재(萬法)는 실체가 없고, 고정된 모양도 없다고 하는 사실을 통달한 것을 대통이라고 한다. 지승智勝이란 어디에서나 의심하는 일이 없고, 하나의 존재(法)라도 얻는 것이 없음을 지승이라고 한다. 부처(佛)란 마음이 청정한 것이다. 광명이 온 세계(법계)에 두루 비치는 것을 부처라고 한다. 십겁이라는 긴 세월을 도량에 앉아 좌선 수행하였다는 것은 10가지 바라밀11을 실천한 것이다. 불법이 실현하지 않았다는 것은, 부처는 본래 망념이 일어나지 않는 不生이고, 법은 본래 없어지지 않는 不滅인데, 어떻게 또 다시 불법을 실현할 수가 있겠는가? 불도를 완성하지도 않았다고 하는 것은 본래 부처이기 때문에 다시 부처가 되려고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옛 사람12도 ‘부처는 항상 세간에 있으면서도 세간의 모든 것(法)에 물들지 않는다.’고 말했다.”13
임제 선사는 불법이 실현하지 않았다는 것은 본래 불은 생기지도(佛本不生) 법은 멸하지도(法本不滅) 않는 것이기 때문이고, 또 불도를 완성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본래부터 부처인데 다시 부처가 될 필요가 없기 때문(佛不應更作佛)이라고 해설하고 있다. 그리고 이어서 불법의 현전現前에 대해서 다시 자세하게 해설을 덧붙이고 있다.
세간에서나 출세간에서나 부처도 없고, 법 또한 없으며, 또한 불법을 실현하는 일도 없고, 또한 없어지는 일도 없다. 설사 불법이 존재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모두 명칭이고 설명인 것이며, 어린아이를 유인하는 방편으로서 병에 대한 약과 같은 것으로, 언어로 표현한 말(名句)에 불과한 것이다. 또한 말(名句)이라는 것은 스스로 자신이 말(名句)이라고 하지 않는다. 다름 아닌 그대라고 하는, 나의 면전에서 분명하고도 신령스럽게 사물을 보고, 기억하고, 듣고, 알아 분별하고, 사물을 비추고 있는 그(본래인)가 일체의 모든 존재에 대하여 이름과 말(名句)을 붙이고 있는 것이다.”14
한편 『임제어록』에는 ‘不得成佛道, 불도를 완성하지 않았다’고만 서술하고 있는데 반해, 본칙에는 ‘不得成佛道’의 이유를 재차 묻고, 이에 청양 화상이 ‘爲伊不成佛’이라고 대답하는 부분이 추가되어 있다. 이 구에 대한 해석이 책마다 다양하다.
“그가 성불 못했기 때문이다.”15 “그가 성불하지 않았으니까 그렇지.”16 “너도 부처를 이루지는 못 하느니라!” “그 대통지승불은 성불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17 “그것은 그가 (스스로) 성불하지 않았기 때문이다.”18 “너 때문에 성불을 하지 않았다.” “네가 성불하지 못했기 때문이다.”19
비슷하면서도 느낌이나 의미가 조금씩 다르다. 이 부분이 추가된 것으로 보아 일부러 부처가 되지 않았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의도로 보여 ‘스스로 성불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문맥상 자연스러워 보인다. 한형조 교수는 ‘너 때문에 성불을 하지 않았다.’고 해석하면서, “중생을 고통과 슬픔의 바다에서 건지기 위해 복락의 나라로 가는 것을 유보한 보살과 여래의 숭고한 발원 때문”이라고 하기는 밋밋하다하여 ‘네가 성불하지 못했기 때문이다’라고 곧바로 일러주는, 보다 생동감 있는 해석도 덧붙이고 있다.
III. 사설
좌선과 성불 이 화두는 ‘오랫동안 좌선하면 깨달을 수 있는가?’라는 근본적인 의문를 제기하고 있다. 이는 불가에 내려오는 논란거리로 간화선의 탄생과도 무관치 않을 것 같고, 임제종(간화선)과 조동종(묵조선) 간의 논쟁과도 연관되어 있다. 남악회양(南嶽懷讓, 677~744)과 마조도일(馬祖道一, 709~788) 사이에 있었던 일화(마전작경磨塼作鏡)를 우선 살펴보자.
당나라 개원開元년간에 도일道一이란 한 사문이 전법원에서 살고 있었다. 늘 좌선하고 있었기에 스승께서 법기임을 알아보시고 가서 물으셨다. “대덕께선 무엇을 위해 좌선을 하시는가?” “부처가 되고자 합니다.” 이에 벽돌을 하나 갖다가 암자 앞의 돌에다가 갈기 시작하셨다. “스님께서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갈아서 거울을 만들고자 하노라.” “벽돌을 간다고 해서 어찌 거울이 되겠습니까?” “좌선한다고 성불을 하겠느냐?” “그럼 어찌해야 되겠습니까?” “만약 사람이 수레를 타고 가는데 나가지 않는다면 수레를 때려야 옳겠는가? 소를 때려야 옳겠는가?” 도일이 대답이 없자 스승께서 말씀하셨다. “너는 좌선坐禪을 배우고자 하는가, 좌불坐佛을 배우고자 하는가? 만약 좌선을 배우고자 한다면 선은 앉고 눕는 것이 아닐 것이며, 좌불을 배우고자 한다면 불은 고정된 모양이 아니며 머무는 것이 아니므로 취하고 버리는 것이 아니니라. 네가 만약 좌불을 배우고자 한다면 곧 부처를 죽이는 것이니라. 만약 앉아 있는 모양에 집착한다면 진리에 도달할 수가 없느니라.” 도일은 바다 같은 가르침을 들은 뒤 단술을 마신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 스승께 물었다. “어떻게 마음을 써야만 무상삼매에 들겠습니까?” “네가 마음의 법을 배우는 것은 씨를 뿌리는 것과 같고, 내가 법의 요지를 설해주는 것은 하늘이 단비를 뿌리는 것과 같도다. 둘의 인연이 합해야만 마땅히 도를 보게 되리라.” “도는 모양이 아니거늘 어찌 볼 수 있다고 하십니까?” “마음에 있는 법의 눈으로 도를 볼 수 있느니라. 무상삼매도 또한 이러하니라.” “이루고 잃어버림이 있습니까?” “만약 이루고 잃어버리는 것으로 도를 본다면 도를 보지 못하느니라. 나의 게송을 들어 보거라.”
心地含諸種 마음의 땅에는 여러 가지 씨앗이 있어서 遇澤悉皆萌 단비를 맞으면 모두다 싹을 틔운다. 三昧華無相 삼매의 꽃은 모양이 없으니 何壞復何成 어찌 이루고 잃어버리리!
도일이 깨달아서 마음이 초연해졌다. 10년간 시봉하면서 나날이 더욱 심오해져 갔다.20
이 일화는 후일 <수레가 가지 않을 때, 수레를 때려야 하겠는가? 소를 때려야 하겠는가?>라는 화두로 되어 선가에서 회자되는데, 요지는 좌선만으로는 성불할 수 없다는, 즉 깨달을 수 없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는 후에 마조도일에 의해 수행은 다른 것이 아닌 평범한 일상생활 속에서의 실천 수행이라는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로 구체화되었고 간화선의 화두 참구에 대한 이론적 배경이 되기도 한다.
어떤 스님이 마조에게 어떻게 수도를 하여야 하는지를 물었다. 마조는 이렇게 말했다. “도는 닦는 것이 아니며, 평상심이 바로 도이다. 무엇을 일러 평상심이라고 하는가? 그것은 바로 조작하지 않으며, 옳고 그름이 없으며, 취하고 버림이 없으며, 단상斷常이 없으며, 범인凡人과 성인聖人이라는 마음의 경계도 없다. 옷을 입고 밥을 먹으며, 머무르고 움직이거나, 앉고 눕거나, 말을 하고 행동을 옮기는 이 모든 것이 마음이 일어나 생각이 움직이는 것이다. 사물에 접응하는 일체가 모두 도이다. 이것은 바로 천만 갈래의 강물이 그 상황이 각각 다르나, 모두 함께 바다로 돌아가며, 모두 함께 바닷물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 단지 일상생활 중에 선악善惡 두 방면에서 모두 막히지 않으면, 비로소 수도인이라고 부를 수 있다.”
참선의 본래 의미는 마음을 깨달아 부처를 이루는 데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세상을 떠나 한가하고 조용한 산중에서 좌선하는 데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언제 어디서나 경계에 끄달리지 않으면서 번잡한 저자거리에서, 또는 일상생활 속에서, 선을 실천하는 것이 참된 수행이라고 설파하고 있다. 이를 무시선법無時禪法이라고도 하는데, 원불교에서 말하는 무시선無時禪, 무처선無處禪이 바로 이를 가리키는 것이다. 좌선은 속세를 떠나 고요한 산중에서 하는 것이고, 이로써 깨달음에 이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리고 있는 것이다.
성불이냐 불성불이냐 앞서 임제 선사는 본래 부처이기 때문에 다시 부처가 될 수는 없다고 하면서, 다만 항상 세간에 물들지 않으면 부처라고 하였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은 항상 분별하기를 좋아하여 성불했느냐 하지 않았느냐를 헤아리려고 한다. 이분법적二分法的 사고思考에 익숙해 있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은 혹은 있다(有) 혹은 없다(無)라는 두 극단極端에 의해서 미혹迷惑한다. 세상 사람들은 모든 경계를 취取하기 때문에 마음이 곧 분별하여 집착한다.21
이것이냐 저것이냐 하는 것은 중생의 분별심이니 거기서 벗어나야 한다고 선가에서는 부르짖고 있지만, 중생들에게 있어 세상은 상대적으로 나누어 보아야 파악이 잘 된다.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현대 물리학에서는 이를 상보성원리相補性原理22라고 하는데, 하늘이 있으니 땅이 있고, 남자가 있으니 여자가 있고, 긴 것이 있으니 짧은 것이 있고, 높은 것이 있으니 낮은 것이 있고, 좋은 것이 있으니 나쁜 것이 있다는 등의 양 극단을 기준으로 보아야 명확하게 식별이 된다. 사물을 대립되는 개념, 즉 ‘이것’과 ‘이것 아닌 것’ 또는 흑 아니면 백으로 보아야 파악이 잘되고 이해도 잘된다.
사물을 ‘이것’과 ‘이것 아닌 것’으로 나누는 것은 인간적 지혜의 시작이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인간의 지성과 논리의 법칙은 이분법적 사고思考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 이분법적 사고는 서양 합리주의 철학의 바탕이자 고전물리학의 바탕이기도 하다. 인간은 이분법적 사고를 벗어나서 사물을 볼 수가 없다. 그런데 어떻게 이 세계를 ‘이것’과 ‘이것 아닌 것’으로 나누지 말라는 것인가?23
서양에서는 자유나 민주, 평등, 같은 인간의 언어적 규정까지도 실체화하려고 노력하였다. 실재하지 않는 신神까지도 규정 하려하였다. 그러나 실체화하는 것은 한정되고 제한되며 의미 또한 축소되게 마련이다. 그리하여 서양 철학은 언어 속에 갇히게 되었고, 이로써 논란이 끊이지 않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24
한편, 선禪에서는 이것이라고 해도 옳지 않고 이것이 아니라고 해도 옳지 않다고 한다. 언어에서 자유로운 것이다. 또, 이것이라고 해도 틀렸다고 하고 저것이라고 해도 틀렸다고 한다. 이분법적인 사고를 배제하는 것이다. 나아가서는 ‘범부즉불凡夫卽佛’이요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라, 범부가 곧 부처이고, 번뇌가 바로 보리라는 ‘불이不二’25를 주장한다. ‘생사즉열반生死卽涅槃’이란 말도 생사 가운데 열반이 있는 것이지 생사를 떠나서는 열반도 없다는 뜻이다. 자유롭지만 모호하다. 일장일단이 있는 것 같지만 중요한 것은 본질이 무엇이고 진리는 무엇인가이다.
不二와 빛의 이중성 과학자들은 오랫동안 빛의 속성이 무엇인지 파악하려고 노력해 왔다. 그 노력으로 1920년대에 이르면 빛을 입자粒子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생겼고, 파동波動이라고 주장하는 물리학자들도 생겨났다. 뉴턴이나 아인슈타인은 빛을 입자라고 생각하는 쪽이었고, 호이겐스, 영, 맥스웰 등은 빛이 파동이라고 생각하는 쪽이었다. 그러나 입자와 파동은 물리학에서는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완전히 다른 개념이다. 파동은 공간의 한쪽에서 생긴 교란이 다른 부분으로 퍼져 나가 공간을 가득 채우는 속성이 있는데 반해, 입자는 다른 입자와 상호작용해서 에너지와 운동량을 주고받는 존재로 논리적으로 판이한 성질을 가진다. 그런데 20세기 초 물리학자들은 파동波動이라고 생각했던 빛이 입자粒子처럼 행동하는 현상을 몇 가지 발견하고 당황하게 된다.
벽면에 두 개의 구멍을 뚫어놓고 빛을 쪼이면 두 개의 구멍을 통과한 빛은 반대편 벽면에 밝음과 어두움이 교차交叉하는 무늬를 만든다. 이것을 간섭무늬라고 하는데 입자는 간섭무늬를 만들 수 없고 파동만이 간섭무늬를 만든다. 빛이 간섭무늬를 만든다는 것은 빛이 파동이라는 확실한 증거이기 때문에 물리학자들은 빛이 입자의 성질을 가지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1923년 컴프턴(A. H. Compton, 1892~1962)이라는 물리학자가 컴프턴 효과(Compton Effect)를 발견한다. 이것은 당구공이 다른 당구공을 쳐서 튕겨내듯이 ‘빛’이 다른 입자를 쳐서 튕겨내고 ‘빛’ 자신도 튕겨나는 현상을 말한다. 이 발견으로 인해 물리학자들은 ‘빛’이 입자-파동의 이중성을 갖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26
빛이 입자로도 보이고 파동으로도 보이는 특성을 ‘빛의 이중성’이라고 하는데, 이는 결국 빛의 본성에 대해서 아직 잘 모르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래서 뉴턴이나 아인슈타인 같은 사람들은 이중성이라는 말 자체를 좋아하지 않았는데, 빛의 이중성에 이어 입자인 전자(電子, Electron)도 빛처럼 간섭무늬를 만든다는 것이 관찰되면서 입자·파동의 이중성(duality)이 <자연계의 본질>임이 밝혀졌다.
실상 자연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항상 있을 뿐이다. 그것이 이율배반적인 성질을 갖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은 인간의 사물인식 방식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어떻게 관찰하느냐에 따라 관찰결과가 달라진 것일 뿐이다. 이것은 인간의 인식능력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으로 관찰자의 관찰행위는 언제나 관찰결과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부연하면 인간의 눈으로 자연을 파악하는 데는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간섭무늬는 파동이 두 개의 구멍을 통과할 때만 나타나는 법이다. 구멍이 두 개 있더라도 한 번에 하나의 구멍만을 통과하도록 전자선의 세기를 약하게 하면 어떻게 될까? 그래도 간섭무늬는 생긴다. 하나의 전자가 두 개의 구멍을 동시에 통과했다는 뜻이다.27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하나의 전자가 둘로 쪼개져 각각의 조각이 구멍을 하나씩 통과하는가? 확인을 해보면 언제나 하나의 전자가 하나의 구멍을 통과한다. 전자 하나가 둘로 쪼개지는 법은 없다. 그런데 이렇게 확인하면 이번엔 간섭무늬가 사라진다. 어느 구멍을 통과하는지 확인하면 마치 자신이 입자로서 행동하는 것이 발각되었으니, 더 이상 파동의 행세를 할 수 없다는 듯이 전자는 더 이상 간섭무늬를 만들지 않는다. 같은 상황, 같은 실험 장치에서 어느 구멍을 통과하는지를 관찰하면 입자처럼, 관찰을 중단하면 전자는 다시 파동처럼 행동한다. 구멍을 열 개 뚫어 놓으면 하나의 전자가 열 개의 구멍을 동시에 통과하는 것처럼 행동한다. 그렇다면 전자가 해파리처럼 전 공간에 넓게 퍼져 있어서 그렇게 행동한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28
하나의 입자일지라도 관찰하지 않으면 파동으로서 여러 곳에 동시에 존재하고 관찰하면 어느 한 곳에 입자로 나타난다는 것이 관측결과이다. 이것은 과학이론이 아니고 관찰 결과가 그렇다는 것으로 그냥 그렇다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한편 불교는 일찍부터 이중성이 사물의 본질이라고 말해왔다. ‘색즉시공色卽是空’이나 ‘불이不二’, 또는 ‘불일역불이不一亦不異’가 그것으로 현상계의 다양성과 차별상 속에서도 통일성을 보았던 것이다. 이것은 사물의 겉모습이 다르게 보일지라고 사람의 사물인식 방식 때문에 다르게 보일 뿐이라는 현대물리학의 관찰결과와 통하는 논리이다.
‘같은 것’을 관측자의 상태에 따라 다르게 보는 예는 과학에서 셀 수 없이 많이 찾을 수 있다. 그리고 만법이 본질적으로는 하나라는 그래서 다를 바가 없다는 ‘不二’나 ‘不一亦不異’ 또는 ‘만법귀일萬法歸一’은 선가의 깨달음이다. 이 둘이 만난 것이다. 이들은 사람에게 사물을 보는 바른 눈을 뜨게 해주는 개념이며 과학적으로 뒷받침되는 사상이다.
선가의 눈으로 봐도 그렇지만, 현대물리학의 눈으로 봐도 성불과 불성불은 본질적으로는 같다. 말이나 의미로는 나눌 수 있지만 본질은 나눌 수 없는 것이다. 다만 진리에 어긋나는데도 사람들은 나누어 보려고 할 뿐이다. 다르게 보이는 물리현상도 어느 하나만이 옳은 것이 아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에서 말하는 것처럼 물리현상도 상황에 따라 상대적이고 그 각각의 입장에서는 다 옳은 것이다. 성불 불성불도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중도中道의 원리이기도 하다. 중도란 어느 한 쪽의 입장만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입장과 가능성을 다 인정하는 것이다.
중도中道 vs 중용中庸 고타마 싯다르타는 29세에 출가하여 35세에 깨달음을 얻을 때까지 6년간 대부분을 가혹한 고행으로 일관한다. 그러나 그 고행이 고타마 싯다르타에 있어서는 몸을 괴롭게 하였을 뿐, 실재 생로병사 해결에는 도움을 주지 못했다. 그러므로 고타마 싯다르타는 출가 전의 쾌락이나 출가 후의 고행이 모두 한편에 치우친 극단이었다고 깨닫고, 이 고락苦樂 양면을 떠나 심신心身의 조화를 얻는 중도中道에 진실한 깨달음의 길이 있다는 것을 스스로의 체험을 통해 자각하게 된 것이다. 성도成道후 함께 고행을 했던 5인의 비구比丘들에게 가장 먼저 설교한 것이 이 중도의 이치였다.
그런데 왜 중도를 설했을까? 중도가 사물의 실상實相이기 때문이다. 불교의 수도승과 같은 깨달음이 없더라도 자연을 관찰하면 극단을 취하는 것은 인간이 사물을 인식하는 방식일 뿐 자연은 극단을 취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적어도 양자역학이 기술하는 자연은 두 개의 극단 중 어느 하나만을 취하지 않는다. (중략) 중도란 중간이 아니라 모든 가능성을 다 포용하고 포함한 상태를 가리킨다. 모든 것을 허용하는 이러한 상태는 확률파29처럼 실체를 가지지 않는다. 거기서 단멸도 볼 수 있고 상주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상주도 아니고 단멸도 아닌 空일 뿐이다. 그것이 물리학적으로 풀어본 중도요 空의 이치다.30
싯다르타는 최초의 설법에서 쾌락도 고행도 바른 길이 아니며, 이 두 변(二邊)을 떠나는 것을 중도라고 하였는데, 뒤에는 고락만이 아니라 유무有無, 단상斷常(단멸斷滅과 상주常住) 등 대립개념도 추가되어 그 종류가 늘어나게 되었다. 후에는 중도 이론 또한 다양하게 진화進化하게 되는데,31 중도를 가장 쉽게 설명한 경전이 바로『자설경自說經』32이다.
『자설경自說經』에 장님 ‘코끼리 만지기’라는 우화寓話가 있다. 코끼리 전체의 모습을 보지 못하는 장님들이 코끼리를 가리켜 머리를 만져본 장님은 ‘물 항아리’, 귀를 만져본 이는 ‘키질하는 키’, 상아를 만져본 이는 ‘쟁기’, 코를 만져본 이는 ‘쟁기막대기’, 몸통을 만져본 이는 ‘벽’ 등, 장님은 저마다 코끼리를 다르게 묘사하였다. 장님 코끼리 만지기만큼 불교의 본질을 분명히 해주고 불교와 그 외의 모든 철학과의 구별을 확실히 해주는 것은 없다. 또한 이 우화는 양자역학에 대한 코펜하겐 해석33을 이해하는 데도 도움을 준다. 코끼리 전체의 모습이 중도中道를 나타낸다. 이를 줄여서 중中이라 하고 머리, 귀 등 부분의 모습을 변邊이라고 한다. (중략) 장님은 누구나 다 논쟁이 되는 대상의 일부분을 만져보고 자신이 가진 유한한 능력이 허락하는 한계 내에서 바르게 서술하고 있다. 사람이 세상을 보고 세상에 대해 말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능력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보고 바르게 서술하고 있다. 모두 다 어떤 한계 내에서는 맞고 모두 다 어떤 한계를 넘어서면 틀린다. 지구가 평평하다고 말한다고 해서 전적으로 틀린 것은 아니다. 십리나 백리를 움직이는 사람에게는 지구가 평평하다. 하루를 시작할 때 해가 동쪽에서 뜬다는 말도 옳은 말이다. 천동설天動說은 절대적으로 틀리고 지동설地動說은 절대적으로 맞는 것 같지만 어떤 한계 내에서는 천동설도 맞는다. 어떤 한계를 벗어나면 지동설도 새로운 관점, 시공간의 구조라는 새로운 틀로 대치된다.34
한편 선종禪宗에서 중도中道는 ‘본무희로애락本無喜怒愛樂, 본래부터 회로애락이 없다’라고 새기는데, 일어나는 바 없이 일어난다는 의미이다. 희로애락이 없는 마음 상태를 불교에서는 공空 또는 반야般若라고 부른다. 중용中庸도 비슷한 의미로 해석된다. 中庸의 ‘中’은 희로애락喜怒哀樂之이 발하지 않은 상태를 말하고, ‘庸’은 범용凡庸이란 뜻으로 ‘항상, 늘, 언제나’의 뜻이다. 中은 ‘부편지위중不偏之謂中’, 치우치지 않는다는 공간적 개념이고, 庸은 ‘부역지위용不易之謂庸’ 변하지 않는다는 시간적 개념이다.
『중용中庸』제6장에는 ‘집기양단執其兩端 용기중어민用其中於民’35이란 구절이 나온다. ‘執其兩端’이란 두 양단의 끝을 잡고 가운데서 일어나는 모든 사태에 대한 상황을 전부 고려한다는 뜻이고, ‘用其中於民’이란 그 가운데를 백성들에게 적용시킨다는 뜻으로, 전체적인 상황을 고려하면서 시중時中을 지키는 것이다. 즉 좌우의 모든 가능한 극단까지를 다 품어서 자기화 시키는 가운데 우러나오는 것이 바로 中이고, 그 中을 백성을 위해 쓰는(用)것이 바로 중용인 것이다.
중용은 존재의 기반이며, 상식이고, 도덕이므로 이를 기반으로 철학, 예술, 문학을 익혀야 하는 것입니다. 중용이란 호문하고, 가까운 말들을 살피고, 좋은 면을 기르고 추한 것을 가리는 것으로, 양극단도 고려하나 극단에 빠지지 않고 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도덕적인 주체를 가지고 일상에서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36
중도와 중용의 뜻은 비슷한데, 그 활용에 있어 중용이 보다 적극적이고 실천적이다. 불교와 유교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고 하겠다.
다시 깨달음으로 지금까지 ‘중생과 부처가 하나’이며 나아가서는 ‘무명無明과 깨달음이 하나’라고 역설하였지만(자연계에서도 이중성이 본질), 동시에 분명히 중생과 부처는 다르며, 무명과 깨달음 또한 구별된다는 것이 ‘중도의 원리’이다. 그럼 과연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임제 선사는 앞서 대통지승불 해설에서, 불법이 실현하지 않은 것과 불도를 완성하지 않은 것을 설명하면서, 부처되는 법을 다음과 같이 덧붙이고 있다.
“여러분! 그대들이 만약 부처가 되고자 하거든 여러 사물(경계)을 쫓으면서 분별하지 말아야 한다. ‘마음에 번뇌가 일어나면 여러 가지 법(경계)이 일어나고, 마음에 번뇌가 없어지면 여러 가지 법(경계)이 없어진다.’37 ‘하나의 망심이 일어나지 않으면 만법에 허물이 없다’38고 했다.39
한산시寒山詩에는 ‘심중무일사心中無一事 만경불능전萬境不能轉’, 마음속에 아무런 일이 없으면, 만 가지 경계에도 휘둘리지 않는다‘는 구절이 있고, 육조(六祖慧能, 638~713) 대사는 ‘밖으로 미혹되면 상相에 집착하고 안으로 미혹되면 공에 집착 하나니, 상에 있어서 상을 떠나고 공에 있어서 공을 떠남이 미혹되지 않음이라.’40고 하였다. 중국의 유명한 방거사龐居士41는 다음과 같은 게송을 남겼다.
但自無心於萬物 다만 스스로 온갖 만물에 무심하면 何妨萬物常圍遶 만물이 나를 에워싼들 무엇이 방해가 되겠는가! 鐵牛不怕獅子吼 무쇠로 만든 소가 사자후를 두려워하지 않듯이 恰似木人見花鳥 흡사 나무로 만든 사람이 꽃과 새를 보는 것과 같네.
木人本體自無情 나무로 만든 사람은 본래 스스로 아무런 감정이 없고 花鳥逢人亦不驚 꽃과 새가 나무로 만든 사람을 만나도 또한 놀라지 않네. 心境如如只遮是 마음과 경계가 여여하면 다만 그저 이러할 뿐이니 何慮菩提道不成 보리도(깨달음)를 이루지 못한들 무엇을 염려하랴!
숭산 노사님은 ‘깨달음이란 깨달을 바가 없는 것’이지만, 그 본성에 대한 깨달음을 통해 현실에서 ‘어떤 상황, 어떤 조건에서도 움직이지 않는 마음’을 소유하고, ‘순간순간에 맑게 기능하며 중생제도를 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하면서 ‘진정한 참선은 앉는 자세가 아니라 마음의 자세’라고 하였다.42
한편, 간화선을 확립한 대혜종고(大慧宗杲, 1089∼1163) 선사의『서장書狀』은 당시 지식인들과 주고받은 편지를 모아놓은 책이다. 여기에는 이참정이란 관리가 대혜 선사에게 보낸 편지가 여러 편 실려 있는데, 깨달음에 대한 마음의 상태를 담백하게 기술하고 있다.43
저는 요사이 세 가지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일에서 순경계와 역경계44가 없어서 인연을 따라 대응하면서도 가슴에 머물지 않습니다. 둘째는 숙세의 두터운 장애가 애써 버리려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경미해집니다. 셋째는 고인의 공안이 예전에는 막연했으나 이제는 언뜻 알아챕니다. 이것은 엉뚱한 말이 아닙니다. 앞의 편지에서 제가 ‘큰 법을 밝히지 못했다’고 한 말은 적게 얻은 것으로 만족할까 염려하여 한 말입니다. (깨달음의 경험을) 넓히고 충실하게 할지언정 어찌 별도로 뛰어난 견해를 구하겠습니까? 현재에 일어나는 망상의 흐름을 깨끗하게 제거하는데 이치가 없지 않는지라, 어찌 가슴에 새겨두지 않겠습니까?45
이 편지는 이참정이 깨닫고 나서 나타나는 깨달음의 경험을 세 가지로 정리하고 있다. 하나는 일상에서 사람을 만나고 사물을 접촉하지만 집착이 없고, 두 번째는 숙세의 번뇌가 저절로 경미하여 지며, 세 번째는 예전엔 알 수 없었던 옛 조사의 공안을 분명하게 알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46 ‘아직은 대법을 얻지 못한 것이 아닌가’하고 말한 부분은 스스로 만족하지 않고 공부를 계속 지어가기 위함이라고 하면서 대혜의 말씀을 가슴에 새겨 공부하고 있음을 전하고 있다. 대혜는 이 편지에 대한 답장에서 이참정의 깨달음을 인정하고, 점수漸修적인 오후悟後 수행에 대해 구체적으로 점검해 준다.
부처가 된다는 것 그럼 도대체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만일 석가모니 부처님에게 “부처가 무엇입니까?” 혹은 “어떻게 하면 부처가 될 수 있습니까?” 라고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할까? 물론 이 문답은 성립될 수조차 없는 것이지만 경전을 통해 유추해 볼 수는 있지 않을까?47
부처님이 계시던 숲에는 재산도 많고 저명한 바라문들이 같이 살고 있었다. 어느 때 바라문인 바셋타와 바라드바자 사이에 “도대체 바라문이란 어떤 것인가?”라는 논쟁이 벌어지는데, 그들이 바로 바라문이지만 질문의 의미는 “참다운 성자란 어떤 것인가?”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서로 의견일치를 보지 못하자 부처님에게 묻게 되는데, 『숫타니파타 Suttanipata』「바셋타」경에는 그들 사이에 오간 문답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우리 두 사람은 3베다의 학자라고 스승께서도 인정하고 스스로도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저는 폭카라삿티의 제자이고 이 사람은 타루카의 제자입니다.
(595) 3베다에 쓰여 있는 모든 것을 우리는 완전히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베다의 어귀語句와 문법에 통달했고 독송도 스승에게 견줄 만합니다. (596) 고타마시여, 그러한 우리가 태생에 대한 논쟁을 했습니다. ‘태생에 따라 바라문이 된다’고 바라드바자는 말합니다. 그러나 저는 ‘행위에 따라 바라문이 된다’고 주장합니다. 눈이 있는 분이시여, 이런 사정임을 알아주십시오. (599) 세상의 눈으로 출현하신 고타마에게 우리는 묻습니다. 태생에 따라 바라문이 됩니까? 행위에 따라 바라문이 됩니까? 알지 못하는 우리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바라문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도록.
부처님은 모든 생물에 대한 태생의 구별을 차례대로 설명하고 나서 생물 사이에는 각기 구별이 있지만 인간 사이에는 그런 구별이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인간의 구별은 다만 그 명칭일 뿐이라고 하면서, 참된 성자인 바라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한다.
(620) 나는 바라문의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사람을 바라문 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그는 ‘그대여, 라고 불리는 사람’48 이라 부른다. 그는 무엇인가 소유물에 걸리어 있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고 집착이 없는 사람,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 (621) 모든 속박을 끊고 두려움이 없으며, 집착을 초월하고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는 사람,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 (622) 고삐와 함께 가죽 끈과 가죽 줄을 끊어 버리고 장애를 없앤 눈 뜬 사람,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 (623) 죄 없이 욕을 먹고 구타나 구속을 참고 견디며, 인내력이 있고 마음이 용맹한 사람,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 (624) 성내지 않고 도덕을 지키며, 계율에 따라 욕심을 부리지 않고, 몸을 안정시켜 <최후의 몸>에 이른 사람,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 (625) 연꽃잎에 이슬처럼, 송곳 끝에 겨자씨처럼, 온갖 욕정에 더럽히지 않는 사람,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 (626) 현세에서 이미 자기의 고뇌가 소멸된 것을 알고,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걸림이 없는 사람,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 (627) 지혜 깊고 총명하며 온갖 길에 통달해 최고의 목적에 도달한 사람,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 (628) 재가자나 출가자 아무하고도 섞이지 않고, 집 없이 편력하며 욕심이 없는 사람,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 (629) 힘세거나 약한 어느 생물에게도 폭력을 쓰지 않고, 또 죽이거나 죽이도록 하지 않는 사람,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 (630) 적의를 품은 자들과 함께 있으면서도 그들에게 대적하는 마음이 없고, 폭력을 휘두르는 자와 함께 있으면서도 마음이 온화하며, 집착하는 자들과 같이 있으면서도 집착하지 않는 사람,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 (631) 겨자씨가 송곳 끝에서 떨어지듯이, 애착과 증오와 거만과 거짓을 털어 버린 사람,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 (632) 거칠지 않고, 사연을 전하는데 진실한 말을 하며, 말로써 남의 감정을 상하게 하지 않는 사람,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 (633) 이 세상에서 길고 짧거나, 가늘고 굵거나, 깨끗하고 더러운 것을 막론하고, 주지 않은 것은 어떤 물건이라도 갖지 않는 사람,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 (634) 현세도 내세도 바라지 않고, 욕심도 걸림도 없는 사람,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 (635) 집착이 없고 완전히 깨달아, 의혹이 없이 불사不死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 (636) 이 세상의 재앙이나 복덕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근심과 티가 없이 깨끗한 사람,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 (637) 구름에 가리워 있지 않은 달처럼, 깨끗하고 맑아 환락의 생활이 끝난 사람,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 (638) 이 힘들고 어려운 길, 윤회, 헤매임을 넘고 피안에 이르러 정신을 안정시키고, 욕망도 의욕도 집착도 없이 마음이 평안한 사람,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 (639) 이 세상의 욕망을 끊고 집을 떠나 편력하며, 욕망의 생활을 끝낸 사람,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 (640) 이 세상에 대한 집착을 끊고 집을 떠나 편력하며, 애착의 생활을 끝낸 사람,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 (641) 인간의 인연을 끊어 버리고, 천상의 인연도 벗어나 모든 굴레를 벗어난 사람,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 (642) 쾌락도 쾌락 아닌 것도 버리고, 맑고 깨끗해져 얽매임 없이 온 세상을 이겨낸 영웅,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 (643) 모든 살아 있는 생물의 생사를 알고, 집착 없이 행복한 사람,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 (644) 신도 귀신(간다르바)도 인간도 그의 행방을 알 수 없는 사람, 번뇌의 더러움을 멸해 버린 사람,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 (645) 앞에도 뒤에도 중간에도 한 물건도 가지지 않고 집착하지 않는 사람,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 (646) 황소처럼 늠름하고 기품 있는 영웅, 위대한 성자, 도의 승리자, 욕망 없는 사람, 목욕하는 사람, 깨달은 사람,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 (647) 삶의 모든 일을 알고, 천국과 지옥을 보며, 생존을 멸滅해버린 사람,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
이어 바라문은 태생에 의해 되는 것이 아니고, 행위로 인해 되는 것이라고 역설한다.
(648) 세상에서 쓰는 이름이나 성은 통칭通稱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이 태어난 그때마다 임시로 붙여지는 것이다. (649) 성명이 임시로 붙여진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그릇된 선입견을 오래 가지게 된다. 모르는 사람은 말한다. ‘태생에 의해서 바라문이 된다’고. (650) 태생에 의해 바라문이 되는 것은 아니다. 태생에 의해 바라문이 안 되는 것도 아니다. 행위로 인해 바라문이 되고, 행위로 인해 바라문이 안 되기도 하는 것이다. (651) 행위에 의해 농부가 되고, 행위에 의해 기능인이 되며, 행위에 의해 상인이 되고, 또한 행위에 의해 고용인이 된다. (652) 행위에 의해 도둑이 되고, 행위에 의해 무사가 되며, 행위에 의해 제관이 되고, 행위에 의해 왕이 된다. (653) 현자賢者는 이와 같이 행위를 사실 그대로 본다. 그들은 ‘연기緣起’를 보는 자이며, 행위와 그 과보를 잘 알고 있다. (654) 세상은 행위로 말미암아 존재하며, 사람들도 행위로 인해서 존재한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행위에 매어 있다. 마치 달리는 수레가 쐐기에 의해 매어 있듯이. (655) 고행과 청정한 행과 감관의 억제와 자제, 이것으로 바라문이 된다. 이것이 으뜸가는 바라문이다.
여기서 바라문(참된 성자)을 ‘부처’로 바꾸어 보시라.
의식 소성이란 의식이 인간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의식이 인간을 형성한다는 것은,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듣고 무엇을 읽고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맹세하고 어떤 일을 행하는 가에 따라 그 인간이 형성 된다는 것이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사람은 생각대로의 인간이 되고, 원하는 바대로 되며, 혹은 배우는 바대로 인간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일이 모두 자신의 자유의사에 달렸다는 것이다. 붓다가 두 바라문에게 설한 것도 이 같은 인간 형성의 작용을 두고 한 말이다. (중략) 그리고 자기의 자유로운 선택에 맡겨진 자신의 행위에 있어, 무엇을 할 것인가,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 것인가를 투철한 지혜로 바르게 판단하고 또한 확고한 소신을 가지고 실천하는 것이 좋다고 가르친 것이 불교, 즉 붓다의 가르침의 모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49
부처님 행이 곧 부처이다.50
IV. 참구 종종 매우 간단하고 명확한 것들을 묻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그런 것들에 대해 전혀 의심이 없는 것을 보면 기실 간화선 수행이 어떤 변화를 가져온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그러나 그 경지를 설명하기는 쉽지 않아서 이렇게 말을 한 적이 있다. “한 3년 아니 1년만이라도, 버린다고 생각하시고 간화선 수행을 해보시라. 사람들이 도를 찾아 이리저리 헤매고 다니는데, 그 1년이 앞으로 헤맬 무수한 시간들을 말끔하게 정리해 줄 것이다.” 이 화두는 성불했느니 못했느니 하는 분별을 경계하는 화두이다. 우선 성불, 불성불의 이원적 분별에서 자유로운 경계부터 참구해 볼 일이다. 적어도 성불했느니 안 했느니 하는 의심은 사라질 것이다.
V. 재독 1. 대통지승불은 왜 성불하지 못했나? 2. ‘爲伊不成佛, 부처를 이루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는 무슨 뜻인가? 3. 성불하고 나면 어떻게 되는가?
VI. 감상
五畝種竹 五畝藝蔬 다섯 이랑 대나무를 심고 다섯 이랑 채소를 가꾸며 半日靜坐 半日讀書 한나절은 좌선하고 한나절은 책을 읽는다.51
참고한 책과 글
1) 영주郢州 흥양산興陽山 흥양청양(興陽淸讓, 814~?) 화상은 위앙종潙仰宗의 종사이다. 선사의 생애는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전등록傳燈錄』13권, 『오등회원五燈會元』 9권에 그의 이름이 보인다. 백장이 죽은 해(814년)에 태어났다고 하는데, 입적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오등회원』 흥양전에는 『무문관無門關』 9칙에 수록한 공안을 인용하고 있는 정도이다(無門 慧開, 鄭性本 譯解, 『무문관無門關』 p. 106에서 인용). 그의 법계는 백장회해(百丈懷海, 749~814) → 위산영우(潙山靈祐, 771~853) → 앙산혜적(仰山慧寂, 803~887) → 남탑광용(南塔光涌, 850~938) → 파초혜청(芭蕉慧淸, ? ~ ?) → 흥양청양(興陽淸讓, 814~?)으로 이어진다. 참고로 당나라 시대 위앙종 종사인 芭蕉慧淸은 신라출신으로 28세 때 앙산의 南塔光涌을 참문하고 그 법을 이었다. 호북성 영주의 파초산에 주석하면서 수많은 제자를 배출하였다.
2) 도량道場이란 부처나 보살이 도를 얻는 곳이나 도를 얻으려고 수행하는 곳, 또는 불도를 수행하는 절이나 중들이 모인 곳을 이른다. 건물이 있고 없음에 관계없이 불도를 닦는 곳은 물론, 자비도량慈悲道場, 수륙도량水陸道場과 같이 사원의 법당에서 이루어지는 법회를 도량이라고도 한다. 우리나라 불교에서는 기복적인 목적에서 이루어지는 매우 신비화된 의식을 지칭하는 경우가 많았다. 『삼국유사』에는 인왕도량仁王道場, 미타도량彌陀道場, 관음도량觀音道場, 백좌도량百座道場 등이 언급되어 있으며, 고려시대에도 약 50여 종의 도량이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3) 늙은 오랑캐老胡는 인도 승을 지칭한다. 보통 달마를 가리키지만 여기서는 대통지승불을 가리킨다고 할 수도 있겠다.
4) <지知>와 <회會>는 별로 눈에 띄지 않는 대비對比이지만, 여기서 知는 ‘반야의 무분별지’로, 會는 ‘범부의 분별지’에 해당한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그래서 보통은 “조사 달마의 知는 인정하나 (아무리 조사라도) 會라면 용서치 않아”라는 뜻으로 풀이한다. 그러나 이 구만을 끄집어내서 일 칙의 공안으로 풀이할 때에는 또 다른 모양으로 “자네의 견지도 ‘조사의 知’라면 인정하나, ‘조사의 會’의 경지로서는 용서 못해”라고 풀이한다. 여기서는 전후의 문맥으로 봐서 전자의 뜻을 취한다. (秋月龍珉 · 秋月眞人 著, 慧謜 譯, 『선어록 읽는 방법』, 운주사, p. 79.)
5) 대통지승불大通智勝佛은 『법화경法華經』「화성유품化城喩品」에 나오는 부처이다. 경전에는 근기가 낮은 제자를 위해서 석존이 자신의 본지本地를 밝혀서 무한한 과거에 출현한 대통지승여래의 수행 과정을 설한 것이다. 선불교에서는 경전의 주장과는 다른 각도에서 비유로 설법하고 있다. 임제의 설법이 대표적이다. 이 게송은 선종禪宗에서도 일찍부터 주목하여 『백장광록白丈廣錄』, 『조당집祖堂集』17권 「잠화상장岑和尙」장,『전등록』 제4권 천주산天柱山 숭혜(崇慧, ? ~779) 장에도 문답이 있으며, 뒷날 『무문관』 제 9칙에 제시되어 유명해졌다. (臨濟 義玄, 鄭性本 譯註, 『임제어록臨濟語錄』 p. 236.)
6) 아승지겁阿僧祗劫은 불교에서 일정한 숫자로 나타낼 수 없는 무한한 시간을 이른다. 산스크리트 kalpa의 음역인 겁파劫波의 약칭으로, 장시長時, 대시大時라 의역된다. 본래 인도에서는 범천梵天의 하루, 곧 인간계의 4억 3,200만 년을 1겁이라 한다. 불교에 등장하는 산스크리트 숫자는 보통 1059까지 헤아린다. ‘언급될 수 있다’란 의미를 지닌 아비라쁘야(abhila-pya)의 부정어인 안아비라쁘야(anabhila-pya)가 그 마지막 단위 1059에 해당되는데, 한문으로는 ‘불가설不可說’이라고 하였다. 그 아래 1058은 ‘생각될 수 없는’이란 의미를 지닌 어찐뜨야(acintya)로서 ‘불가사의不可思議’라고 하였고, 1057은 ‘비교될 수 없는’이란 의미를 지닌 어마쁘야(ama-pya)로서 ‘불가비不可比’라 하였다. 경전에서 오랜 시간을 뜻하는 아승지겁에서 아승지는 ‘계산할 수 없는’이란 의미의 어쌍크야(asam.khya)란 말에서 온 것이며 1051에 해당하는 숫자이다. (「불가설이든 아승지든 정하기 나름, 산스크리트의 숫자에 관해」, 현진스님, 불교신문 2739호)
7) 나유타那由他는 아승지阿僧祗의 만 배가 되는 수로 1060을 이른다. 예전에는 아승지의 억 배가 되는 수를 이르던 말로 10112을 이른다(국어사전). 다른 의견도 있다. 나유따(nayuta)는 인도의 고대 숫자단위로 우리 단위로 ‘경’에 해당하며 1011이다. (「불가설이든 아승지든 정하기 나름, 산스크리트의 숫자에 관해」, 현진스님, 불교신문 2739호)
8) 유순由旬은 고대 인도의 이수里數 단위. 소달구지가 하루에 갈 수 있는 거리로서 80리인 대유순, 60리인 중유순, 그리고 40리인 소유순의 세 가지가 있다.
9) 무비스님의『법화경法華經』 해설에서 인용.
10) 임제종臨濟宗의 개조開祖인 진주鎭州 임제의현 선사는 조주(曹州, 산동성 소재) 남화南華태생으로, 휘는 義玄이고, 속성은 형邢씨이다. 스님의 출생연대는 분명하지 않으나, 함통咸通 7년(866, 혹은 함통 8년)에 입적入寂하였다. 臨濟라는 스님의 법호는 대중大中 8년(854) 이후 진주(지금의 河北省 正定) 호타하河 부근의 작은 절 임제원臨濟院에 계신 데에서 유래한다. 『임제록』이 처음 편집된 것은 스님의 입적 후 그 제자 삼성혜연三聖慧然에 의해서이다. 그러나 이것은 전해지지 않고 그 후 북송北宋 때 선화宣和된 것이 가장 널리 유통되었으며, 이때 마방馬防의 서序가 첨가되었다. 이것을 선화본宣和本 혹은 종연본宗演本이라한다.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송宋 원풍元豊 8년(1085)에 편집된 『사가어록四家語錄』속 『임제록』이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한다. 그 이후 간행된 선화본에는 약간의 증광增廣이 있고, 또 편집순서에서 전기 대신에 상당설법을 앞에 두고 있다. 현재 유통되는 『임제록(宣和本)』은 서문序文, 상당上當, 시중示衆, 감변勘辯, 행록行錄, 탑기塔記의 여섯 부분으로 되어있다. (선림고경총서 12, 『임제록·법안록』 백련선서간행회 편, 장경각, 출판사 서평)
11) 십바라밀十波羅蜜은 열반에 이르기 위한 보살의 10가지 수행을 말한다. 육바라밀인 보시(布施, dana), 지계(持戒, ila), 인욕(忍辱, Ksanti), 정진(精進, Virya), 선정(禪定, dhyana), 반야(般若, Prajna) 바라밀에 방편(方便, Upaya), 원(願, Pranidhana), 력(力, Bala), 지(智, Jnana) 등 4가지 바라밀을 합한 것이다.
12) 고인古人은 문수보살文殊菩薩을 가리킨다.『여래장엄지혜광명입일체경계경如來莊嚴智慧光明入一切境界經』에 보이는 구절로, 이 말은 당시 일반화되어 있던 관용구였다.『역대법보기歷代法寶記』와『백장광록白丈廣錄』에도 인용되어 있다.
13) 13-37 問, 大通智勝佛, 十劫坐道場, 佛法不現前, 不得成佛道. 未審此意如何. 乞師指示. 師云, 大通者, 是自己 於處處, 達其萬法無性無相, 名爲大通. 智勝者, 於一切處不疑, 不得一法, 名爲智勝. 佛者心淸淨, 光明透徹法界, 得名爲佛. 十劫坐道場者, 十波羅蜜是. 佛法不現前者, 佛本不生, 法本不滅, 云何更有現前. 不得成佛道者, 佛不應更作佛. 古人云, 佛常在世間 而不染世間法. (臨濟 義玄, 鄭性本 譯註, 『임제어록臨濟語錄』 pp. 235~236.)
14) 世與出世, 無佛無法, 亦不現前, 亦不曾失. 設有者, 皆是名言章句, 接引小兒, 施設藥病, 表顯名句. 且名句不自名句, 還是儞目前 昭昭靈靈, 鑑覺聞知照燭底, 安一切名句. (臨濟義玄, 鄭性本 譯註, 『임제어록臨濟語錄』 p. 237.)
15) 無門 慧開 原著, 宗達 李喜益 提唱, 『무문관無門關』 p. 106.
16) 「우학스님의 무문관」, 우학스님은 한국불교대학 大관음사 무일선원 회주, 불교신문 2609호.
17) 無門 慧開, 鄭性本 譯解, 『무문관無門關』 p. 106.
18) ‘爲伊不成佛’을 종래에는 ‘伊가 不成佛하게 되니라’고 새겨 왔으나, 여기서는 ‘不成佛’이라는 숙어로 읽어서는 안 된다. 덧붙여 말하면, 이것은 종지에 대한 이야기로서 어학의 문제는 아니지만, 이 공안을 임제는 ‘부처는 새로이 작불하지 않는다(부처가 새로이 부처가 될 수는 없다)’라고 해석했으나 (무문도 또한 거기서 배우고 있다.), 나는 ‘그것은 저 분이 대비천제大悲闡提의 마음에서 스스로 성불하지 않은 까닭이다.’라고 풀이하고 싶은 독자적인 견해를 갖고 있다. (秋月龍珉 · 秋月眞人 著, 慧謜 譯, 『선어록 읽는 방법』, 운주사, p. 78.) 참고로 大悲闡提는 대비심의 서원을 세운 보살. 모든 중생들을 성불시킨 후에 자신도 성불하겠다는 서원을 세웠으나, 중생들의 번뇌가 다할 날이 없으므로 영원히 중생구제의 보살행만을 계속하는 보살이다.
19) 한형조 지음, 『무문관, 혹은 “너는 누구냐?”』 p. 64.
20) <磨塼作鏡> 開元中, 有沙門道一(卽馬祖大師也.). 住傳法院, 常日坐禪. 師知是法器. 往問曰, 大德 坐禪, 圖什. 一曰, 圖作佛. 師乃取一塼, 於彼庵前石上磨. 一曰, 磨塼作. 師曰, 磨作鏡. 一曰, 磨塼豈得成鏡耶. 師曰, 磨塼旣不成鏡. 坐禪豈得成佛耶. 一曰, 如何 卽是. 師曰, 如牛駕車. 車不行打車卽是打牛卽是. 一無對. 師又曰. 汝爲學坐禪, 爲學坐佛. 若學坐禪, 禪非坐臥. 若學坐佛, 佛非定相. 於無住法, 不應取舍. 汝若坐佛, 卽是殺佛. 若執坐相, 非達其理. 一聞示誨, 如飮醍. 禮拜問曰. 如何用心, 卽合無相三昧. 師曰, 汝學心地法門. 如下種子. 我說法要, 譬彼天澤. 汝緣合故, 當見其道. 又問曰. 道非色相, 云何能見. 師曰, 心地法眼, 能見乎道. 無相三昧, 亦復然矣. 一曰, 有成壞否. 師曰, 若以成壞聚散而見道者, 非見道也. 聽吾偈曰. 心地含諸種, 遇澤悉皆萌. 三昧華無相, 何壞復何成. 一蒙開悟, 心意超然. 侍奉十秋日益玄奧. (『전등록傳燈錄』) 悉은 다실. 『전등록』은 선종사의 법을 전한 내력을 담고 있는 사서史書로, 중국 선종의 계보를 밝힌 책이다. 이 책에는 과거 7불에서부터 역대 조사들의 행적, 법어, 게송, 전법 등에 대하여 기술하고 있는데, 전법법계 52대에 걸쳐 1,727명의 선사들의 이름이 기재되어 있다. 이 가운데 998명은 어록이 있고 나머지 729명은 이름만 나와 있다. 모두 30권이다.
21) 世人顛倒, 依於二邊, 若有, 若無, 世人取諸境界, 心便計著. (『잡아함경』 제10권 (262), 「천타경闡陀經」).
22) 상보성원리(相補性原理, Complementary Principle)란 자연현상은 반드시 서로 상보적인 두 조(組, Set)의 물리량으로 기술되며, 서로 짝이 되는 한 쌍의 상보적인 양은 동시에 정밀하게 측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23) 「김성구 교수의 불교와 과학 14. 사량분별思量分別」 법보신문 1008호, 2009.07.28. 김성구 이화여대 명예교수는 이화여대 자연과학대 물리학과 교수, 자연과학대학장, 대학원장, 미국 브라운 대학 교환 교수 등을 역임하였다.
24) 그러나 실체화 하려는 노력은 과학을 낳았고 뉴턴역학은 당시 자연현상을 너무나 정확하게 설명하였다. 가립된 개념에 불과한 ‘힘’을 바탕으로 한 뉴턴역학은 서구 열강의 국력이 동양을 압도하게 만든 힘의 원천이 되었다. 과학이 없던 시절, 17세기까지는 동양이 서양보다 기술력에 있어서 여러모로 앞섰었다. 종이, 나침반, 화약, 활판 인쇄술의 발명은 말할 것도 없고, 인구나 경제력에 있어서도 동양의 국력이 서양보다 훨씬 컸었다. 당나라 현장(602~664)이 유학하던 시절, 서양에는 대학이라 할 만한 것이 없었으나 인도의 날란다(Nalanda) 대학의 인구는 2만 명 정도였다. 항해에 있어서도 정화(鄭和, 1371~1434)의 선단船團은 선원의 수, 배의 수와 배의 크기 등 규모 면에서 컬럼버스(Christopher Columbus, 1446?~1506)나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 1469?~1524)의 함대보다 백배쯤 컸다. 그러나 동양과 서양의 힘은 뉴턴역학이 나온 지 200년 만에 역전된다. 뉴턴역학을 바탕으로 한 서양의 과학기술이 발휘하는 힘은 단순한 기술에 불과한 그전의 기술이 가진 힘과는 차원이 달랐던 것이다. (「김성구 교수의 불교와 과학 6. 假有의 威力」법보신문 992호. 2009.05.18.)
25) 불이不二는 ‘불일불이不一不二’의 줄임말이다. 따라서 ‘다르지 않다’라는 말을 할 때에는 ‘같지 않다’라는 말이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중생과 부처가 하나’이며 ‘무명과 깨달음이 하나’라는 말에는 당연히 그 중생과 부처가 다르며, 무명과 깨달음이 엄격히 구별되어야 할 것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부처와 구별되는 나의 ‘중생성’(不一)이 철저히 인식될 때 중생이 곧 부처라는 불이의 존재론적 세계관이 가능한 것이다. 중생이 곧 부처라고 해서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아도 지금 있는 그대로 부처가 되는 것은 아니다. 너무도 당연한 말이지만 지금 한국의 많은 불자들이 쉽게 간과하고 있는 것이 바로 중생과 부처가 다르며, 무명과 깨달음이 다르며, 성聖과 속俗이 다르다는 ‘불일不一’의 정신이다. ‘번뇌 즉 보리’라는 것 또한 깨달음을 어떤 초월적인데서 찾지 말고, 구원을 밖에서 찾지 말라는 것인데도 세간적, 생물학적 욕망의 번뇌를 그대로 발산하면서 불이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라 믿는 것은 착각을 넘어 사기요 자기기만이다. 불이는 깨달음의 경지요, 부처의 경지이다. 이 경지를 중생의 경지로 착각하는 것이요, 그 착각의 근저에는 정신적 나태함과 방종을 수행의 경지로 호도하는 자기기만이 자리 잡고 있다. (조성택 고려대 철학과 교수, 「불일不一이라야 불이不二가 산다.」 불교평론 16호, 2003년 09월 12일.
26) 「김성구 교수의 불교와 과학 9. 이중성二重性」 법보신문 998호, 2009.05.18.
27) 법경 법사가 창안한 <두 문을 동시에 투과한다>라는 화두가 여기서 비롯되었다.
28) 「김성구 교수의 불교와 과학 10. 언어도단 심행처멸 言語道斷 心行處滅」 법보신문 1000호, 2009.06.01.
29) 입자·파동의 이중성에서 말하는 파동을 현대물리학에서는 확률파確率波라고 해석한다. 입자가 파동처럼 전 공간에 퍼져있는 것이 아니라 입자가 존재할 확률이 파동의 성질을 가지고 전 공간에 걸쳐 분포되어 있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측정 전에는 오직 ‘입자가 존재할 가능성’만 전 공간을 뒤덮고 있을 뿐이다. 측정하면 파동은 사라지고 입자가 나타난다. 측정 후에야 비로소 입자의 존재가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확률파는 매질이 진동하는 것이 아니고 입자가 존재할 확률을 나타내는 추상적인 존재다. 아무도 확률파를 직접 볼 수는 없다. 어떤 실체를 가진 구체적인 존재가 진동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김성구 교수의 불교와 과학 11. 空과 확률파」 법보신문 1002호, 2009.06.15.)
30) 「김성구 교수의 불교와 과학 19. 중첩과 중도」 법보신문 1018호, 2009.10.12.
31) 中道란 극단적인 견해나 실천을 벗어나는 것으로 불교철학의 기본 입장이다. 산스크리트어로는 마드야마 프라티파드(madhyamā pratipad) 라고 한다. 석가는 최초의 설법에서 쾌락에 빠지는 것과 고행에 애쓰는 것을 부정하고, 팔정도八正道에 의해서 수행해야 한다고 설교하였는데 이를 <고락중도>라고 한다. 이처럼 중도는 이변二邊을 벗어나는 것으로서 이해되는데, 고락만이 아니라 유무有無, 단상斷常, 일이一異 등의 대립개념도 이변 즉, 극단적인 견해라고 하며, 그로써 중도도 다양해진다. 대승 중관파의 선조인 용수는 『중론中論』에서 연기緣起와 공성空性을 중도로 보았다. 또한 일체의 법(존재)은 세속에서는 무無가 아니라 유有이며, 승의勝義에서는 유가 아니라 무라는 것이 중도라고도 중관파는 주장하고 있다. 중국불교에서도 중도의 분류는 다양해서, 삼론종의 길장은 공空에도 유有에도 구애받지 않는 무득정관無得正觀에 있는 것을 중도라고 하고, 세속의 존재를 실법은 멸하지만 가명은 존속하므로 부상부단하다고 보는 <속제중도俗諦中道>, 궁극의 입장에서 보면 부상도 부단도 아니라 공(무자성)이라는 <진제중도眞諦中道>, 속된 입장에도 궁극의 입장에도 치우치지 않는 <이제합명중도二諦合明中道>의 3종을 주장했다. 천태종의 지의는 『중론』에 의거해서 공(空, 존재에는 자성, 실체는 없다), 가(假, 단 공도 가로 설명되어 있다), 중(中, 공에도 가에도 치우치지 않는 입장)의 <삼제원융三諦圓融>을 주장하고, 모든 존재에 중도라는 실상이 갖추어져 있다는 <일색일향무비중도一色一香無非中道>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것도 중도의 진리를 드러낸다)를 주장했다. (종교학대사전, 한국사전연구사)
32) 『자설경自說經』은 말 그대로 묻는 사람이 없이 부처님께서 스스로 설한 경을 말한다. 경장 중 소부의 세 번째 경전으로 원어는 우다나(Udana)이다. 우다나란 일반적으로 감흥에 따라 자발적으로 나오는 말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한역으로는 자설 외에도 ‘무문자설無問自說’ 또는 ‘감흥어感興語’라고 번역되기도 한다. 경전을 보면 부처님은 대체적으로 제자나 신도의 질문에 의해 설교하는 경우가 많은데, 누구의 질문에 의해서가 아니라 부처님 스스로 설하는 경우를 일컬어 ‘우다나’ 즉 ‘자설’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 경전은 부처님이 때때로 느껴서 말한 우다나를 모아 기록한 경으로, 전체 8품 80경으로 구성되어 있다.
33) 코펜하겐 해석(Copenhagen Interpretation of Quantum Mechanics)은 양자역학에 대한 다양한 해석 중의 하나로 닐스 보어(Niels Henrik David Bohr)와 베르너 하이젠베르크(Werner Karl Heisenberg) 등에 의한 정통해석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그 논의의 중심이었던 코펜하겐의 지명으로부터 이름이 붙여진 것이며, 20세기 전반에 걸쳐 가장 영향력이 컸던 해석으로 꼽힌다. 쉽게 말해서 전자를 예로 들면 전자의 상태를 서술하는 파동함수는 측정되기 전에는 여러 가지 상태가 확률적으로 겹쳐있는 것으로 표현된다. 하지만 관측자가 전자에 대한 측정을 시행하면 그와 동시에 ‘파동함수의 붕괴(Collapse of Wavefunction)’가 일어나 전자의 파동함수는 겹침 상태가 아닌 하나의 상태로만 결정된다는 것이다. (위키백과)
34) 「김성구 교수의 불교와 과학 23. 파동함수의 불교적 해석」 법보신문 1027호, 2009.12.14. 참고로, 중세기때 지동설을 주장한 세 사람이 있었다. 폴란드의 철학자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 조르다노 브루노, 갈릴레오 갈릴레이이다. 코페르니쿠스는 죽음이 임박할 때까지 지동설을 주장하지 않았고 갈릴레이는 거짓말과 반성문을 쓰면서 종교재판에서의 처형은 모면했다. 반면 갈릴레이가 재판을 받기 33년 전인 1600년에 브루노는 자신의 의지를 강력하게 주장하다 이단자로 규정되어 교황과 추기경들이 보는 앞에서 화형 당한다. 브루노는 원래 도미니크 수도원에 들어가 수도사 생활을 했던 사람이다. 지동설도 맞고 천동설도 맞다는 내용을 읽으면서 인류 의식이 얼마나 발전했는가를 새삼 느끼게 된다.
35) 『中庸』 제6장, 子曰, 舜其大知也與. 舜好問而好察邇言, 隱惡而揚善, 執其兩端, 用其中於民, 其斯以爲舜乎.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순임금은 크게 지혜롭도다. 순임금은 묻기를 좋아하고, 천근淺近한 말을 살피시기를 좋아하셨다. 추한 것을 숨기고 좋은 점을 드러내시며, 그 양단 끝을 잡아서 그 가운데를 백성에게 쓰니, 그것으로 순임금이 순임금이 될 수 있었던 까닭이다.”라고 하였다.
36) EBS 기획특강, 도올 김용옥의 「중용, 인간의 맛, 제16강 인간 공자」.
37) 心生種種法生 心滅種種法滅.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의 한 구절이다. 원래 불생불멸인 마음이 움직여 생멸生滅의 모습을 나타낸다는 말. 삼계유심三界唯心을 가리킨다. 이 구절은 『전심법요傳心法要』, 『조주어록趙州語錄』 등 많은 선 문헌에 자주 인용되고 있다. (무비스님, 『임제록 강설』, 불광출판사, 2005.) 『전심법요』는 임제종臨濟宗의 기초를 세운 황벽희운(黃檗希運, ?~850) 선사의 어록이다.
38) 一心不生 萬法無咎. 『신심명信心銘』의 한 구절이다. 만법萬法은 오직 일심一心의 현현이라는 것. ‘무구無咎’는 원래 『역경易經』에서 온 말. (무비스님, 『임제록 강설』, 불광출판사, 2005.)
39) 道流, 儞欲得作佛, 莫隨萬物. 心生種種法生, 心滅種種法滅. 一心不生, 萬法無咎. (臨濟義玄, 鄭性本 譯註, 『임제어록臨濟語錄』 p. 237.)
40) 內外不迷, 卽離兩邊. 外迷著相, 內迷著空, 於相離相, 於空離空, 卽是不迷, 悟此法. 一念, 心開, 出現於世. 안팎으로 미혹하지 않으면 곧 양변을 떠나니 바깥으로 미혹하면 상에 집착하고 안으로 미혹하면 공에 집착하나니 상에서 상을 떠나고 공에서 공을 떠나면 곧 미혹하지 않느니라. 이 법을 깨달아 한 생각에 마음을 열리면 세상에 나타나느니라. (『육조단경六祖檀經』)
41) 방거사龐居士, 거사의 이름은 온蘊이고 자字는 도현道玄이다. 마조 와 석두 선사 회상會上에서 깊은 뜻을 깨닫고, 약산유엄과 단아천연 선사 등과 지기지우知己之友로 일생을 선사 못지않게 철저히 수행하였다. 불교사에는 3대 거사로 인도의 유마힐, 중국의 방온, 한국의 부설 거사를 꼽는다.
42) 현각 엮음, 『숭산 대선사의 가르침, 선의 나침반 2』.
43) 『서장』에 등장하는 인물이 44인데, 이 가운데 여성은 1인, 승려는 2인이며, 대부분은 관료나 당시의 사대부들이다. 그 중 이참정은 대혜 선사로부터 깨달음을 인정받은 인물이다. 이들은 대부분 간화선을 처음 접하는 과정에 있었지만, 이참정은 대혜로부터 깨달음을 인정받은 인물이었다. 참정이란 벼슬이름으로서 당나라에서는 재상이었지만 송대에서는 집정관을 말한다. 그의 본명은 병邴이고, 자는 한노漢老며, 법명은 탈공脫空거사이다. (중략) 이참정은 천남에서 대혜를 만나 깨달음을 성취 뒤에 집으로 돌아와서 대혜에게 편지를 보낸다. 대혜에게 자신이 경험한 깨달음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보고하면서, 공부의 점검을 요청한다. 이점은 스승과 제자 사이에 일어난 깨달음에 관한 대화로서, 간화선 수행자에게는 매우 흥미롭게 읽어보아야 할 내용이다. (인경, 명상상담연구원, 普照思想 제23집(2005.02)「간화선과 頓漸문제」, 보조사상연구원.)
44) 순경계란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일이 순조롭게 잘 풀리는 것을 말하고, 역경계란 자신이 원하는 방향과는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거나 일이 잘 풀리지 않는 것을 말한다. 보통 사람들은 순경계에서는 욕심을 내게 되고 역경계에서는 화를 내게 된다. 산행에 비유하면 산을 올라가는 것을 역경계라고 할 수 있고, 산을 내려가는 것을 순경계라고 할 수 있다
45) 大慧語錄(大正臧47, 920,中) “邴比蒙誨答 備悉深旨 邴自有驗者三 一事無逆順 隨緣卽應 不留胸中 二宿習濃厚 不加排遣 自爾輕微 三古人公案 舊所茫然 時復瞥地 此非自昧者 前書大法未明之語 蓋恐得少爲足 當擴而充之 豈別求勝解耶. 淨除現流 理則不無 敢不銘佩” (인경, 명상상담연구원, 普照思想 제23집(2005.02)「간화선과 頓漸문제」, 보조사상연구원.)
46) 인경, 명상상담연구원, 普照思想 제23집(2005.02)「간화선과 頓漸문제」, 보조사상연구원.
47) 『업사상』이란 책을 보면서 문득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사사끼 겐쥰, 마스다니 후미오 지음, 이태영, 정양숙 옮김, 『업사상』대원정사)
48) 바라문들은 서로 ‘그대여bho’라는 말로 부른다. 초기 불교에서는 이상적인 수행자도 바라문이라고 불렀다.
49) 사사끼 겐쥰, 마스다니 후미오 지음, 이태영, 정양숙 옮김, 『업사상』대원정사 pp. 213~219.
50) 大師言, 卽佛行, 是佛. (『육조단경六祖檀經』)
51) 이 시詩는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고택 주련에 걸려 있는 추사의 시다. ‘半日靜坐 半日讀書’는 하루의 절반은 고요히 앉아 자신과 만나고, 그 나머지 반은 책을 읽으며 옛 성현을 만난다는 뜻이다. 이 구절은 일찍이 주희朱憙가 제자인 곽우인(郭友仁/곽덕원 郭德元)에게 한, ‘人若於日間閑言語省得一兩句, 閑人客省見得一兩人, 也濟事. 若渾身都在鬧場中, 如何讀得書. 人若逐日無事, 有見成飯喫, 用半日靜坐, 半日讀書, 如此一二年, 何患不進’에서 유래한다. 畝는 이랑 무(묘), 藝는 심을 예, 蔬는 채소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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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 합니다. 법사님! _()_
매번 무문관 제창 원고준비에 혼신을 다하신 것 같습니다.
모든 분들께 향후 공부하는 데 많은 도움자료가 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_()_
부처님도 中道를 正等覺하였다.
兩邊을 여윈 矛盾이 融合된 世界가 中道다.
마음에 스며드는 法門 感謝드립니다.
기회가 되신다면 龍樹보살의 中道論에 대해 감히 法門을 청해 봅니다.
仙女와 樵夫 (合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