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절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하게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만약 율법이 온전한 것이라면 제사를 왜 계속 드리겠느냐는 반문입니다.
죄가 왜 자꾸 생각이 났겠느냐고 묻는 겁니다. 제사를 계속 드리는 것은 죄가
계속 생각나기 때문이 아니냐는 말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죄가 생각나지 않는데
누가 속죄 제사를 드리겠느냐는 말입니다. 사실 죄를 반복해서 회개하는 것은 저쪽
동네 사람입니다. 뒤에 나옵니다만 그럼 어쩌지요? 그건 히브리인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죽은 자의 행실을 자꾸 회개하는 것은 저쪽 동네 사람이지 이쪽 동네 사람이 아닙니다.
모세는 물에서 건져냈습니다. 히브리인입니다. 그러기에 모세는 애굽의 종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홍해를 유유히 건너갑니다. 그래서 고전10장은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를 따라서 세례를 받았다고 말씀합니다(고전10:2) 모세는 애굽의 노예가 아닙니다.
애굽 건너편 동네에서 건너왔어요. 하나님이 보내셨습니다. 따라서 홍해가 모세를
가둘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모세가 지나가니까 홍해가
갈라지는 겁니다. 그래서 모세를 따라 몽땅 세례를 받았다고 말씀합니다(고전10:2)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의 패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는 법칙이 있습니다. 하늘로 내려온 자만이 하늘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늘로부터 오셨기 때문에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때 예수님만 올라가신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예정된 자들을 몽땅 사로잡아
올라가셨습니다(엡4:8) 그래서 말씀을 통해 이 세례의 의미를 받아들이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세례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의 약속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와 사망의 강을 건너온 자들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인이 됩니다.
따라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이나 고후5:17절 말씀은 우리 신앙의 정체성에
큰 도움이 되는 말씀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사신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 옛것은 지나갔고 이제 새것이다’ 이 두 구절의
말씀이 수레바퀴 예화에 보면 중심축이 되어있습니다. 일대일 양육 교재도 보면
이 두 말씀이 축이 되어 있습니다. 수레의 축이 잘못되면 수레가 굴러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축이 제대로 되어 있으면 바퀴의 살이 한두 개 빠져도 굴러 갑니다. 이와 같이
이 두 말씀이 중심축이 되어야 항상 우리의 영이 성령께 붙들릴 수 있는 기초가 됩니다.
기초라고 했을 뿐 이 두 구절이 우리의 신앙전체를 좌지우지 할 수는 없음은 물론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관념이 문제라는 겁니다. 애굽의 근성입니다.
그러므로 성령과 진리 안에서 자기의 형상을 계속 바꾸어 나가야 합니다. 바꾸지
않으면 제 자리에서 올라갔다가 내려갔다 반복합니다. 회전목마를 타는 것 같습니다.
설교 말씀을 듣다 보면 되는 것 같고 한참 안 듣다 보면 그만 안 되는 것 같습니다.
남이 볼 때는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저 집사님 은혜를 많이 받는
모양이네’ 하는데 2년이 지나도 3년이 아니 10년이 지나도 늘 그 모양입니다.
그런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의 식구가 되어서
그 영광 속에서 기뻐 뛰며 주님을 더 사랑하며 그리스도의 충만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올라가는 사람이 극히 드뭅니다. 이 문제는 어디가나 똑 같습니다.
사람 사는 동네는 다 똑 같습니다. 영국도 미국도 저 미개한 나라도 다 똑 같습니다.
3절 “그러나 이 제사들에는 해마다 죄를 기억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이 제사는 해마다 죄를 생각(기억)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은 죄를 깨닫는 것이라고 로마서 3장 20절은 말씀합니다.
그런데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과 죄를 깨닫는 것은 다릅니다. 다시 말하면 나는
죄인이기 때문에 틀렸다는 것 하고 내가 지금 잘 못 가고 있구나 하고는 다릅니다.
우리는 이미 히브리인입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함께 죽고 다시 살아서
죄와 사망에서 의와 생명으로 넘어왔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알고 자신을 알고
나서 ‘아버지 저는 아닙니다. 저로서는 안 되겠습니다’하는 것과 자신이 죄인이므로
‘나는 아니다’ 하는 것 하고는 다른 이야깁니다. 자신이 죄인이라고 말하는 것과
‘내가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내가 지금 잘 못 하고 있구나’ 하는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죄인은 여전히 종으로 있는 것이고 자녀는 내가 잘 못 가고 있구나 깨닫고 자신을
바로 잡으면 되는 겁니다. 그게 바로 빛 가운데로 돌아가는 반복의 자백입니다.
그 때에 그 아들의 피로 죄와 생각이 자동세척이 되는 겁니다(요일1:7,9)
그러면 ‘목사님 무한반복 들락날락해도 됩니까?’ 묻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 백번이고 천 번이고 해도 됩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렇게 하기 싫어질 때가옵니다.
왜냐하면 깨끗한 옷을 입고 나면 더러운 것이 싫어지게 됩니다. 더러워서 안하게 됩니다.
손발 깨끗하게 씻고 나면 더러워서 지금까지 하던 짓을 안 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인간은 ‘내가 죄를 이겨야지’ 또는 ‘이것은 죄다 하지 말라 저것도 죄다 하지 말라
똑바로 해라’고 해서 죄를 이길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누가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틀렸습니다’하는 것과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녀이지만 잘 못 하고
있습니다. 주여 저를 붙잡아 진리의 길로 바로 인도하소서’ 하고는 전혀 다릅니다.
4절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이는 ‘왜냐하면’ 입니다.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합니다.
사람의 죄는 누가 갚아야 합니까? 당연히 사람이 갚아야 합니다. 값이 다릅니다.
황소하고 사람하고는 값이 다릅니다. 사람의 죄는 사람이 갚아야 됩니다.
그래야만 그 값이 같습니다. 흠이 없고 점이 없는 어린양의 피로 갚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보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요1:29)라고
소개했습니다. 그 다음 이튿날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은 빠지고
바로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말합니다(요1:36) 바로 보좌에 앉아서 경배를
받으시고 책의 인봉을 떼시는 만왕의 왕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숭례문에 가서 남대문이 어디에 있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으면 나 같은 바보겠지요.
말씀이신 우리 주께서 예수로 오셔서 세상 죄를 지고 가신 어린양이 되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후에 승천하셔서 보좌에 앉으신 만왕의 왕으로
천상천하가 다 그 앞에 엎드려 경배를 하는 어린양이 되시고 우리를 위해
밤낮 쉬지 않고 간구하시며 하나님께 중보하시는 대제사장이 계십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주님은 마땅히 찬양을 받으셔야만 합니다!
아멘~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