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선생을 찾아서…
어수선한 시기에 조선후기의 대학자인 다산 선생이 절실하게 다가온다. 다산의 발자취를 따라 걷고 싶어 휴가를 냈다. 첫 날 남양주 조안면 능내리 마현의 기념관이 있는 생가터와 묘소를 찾아갔다. 두물머리가 바라보이는 농촌의 자그마한 마을, 지금은 주변에 식당과 까페가 늘어서 있다. 12대조부터 8대에 이르러 옥당에 올랐던 명문가라는 명성은 뒤로 하고 자그마한 기와집의 툇마루 내부에 책 몇 권 달랑 있고 구색을 갖추기라도 하듯 낡은 농기구 몇 점이 놓여 있다. 기념관에 들어가니 다산학의 계보를 한 눈 에 볼 수 있다.가학의 계승자(아들과 사위, 외손)와 유배지 강진읍의 제자들(사의재라는 주막에서 가르친 제자), 다산초당의 제자들(윤씨가 많은 걸로 봐서 외척들) 그 외의 학연들(혜장, 초의 등 차 마시며 교류하던 부류)로 구분 지어져 있다. 다산이 후세에 학자로서 이름을 남기게 된 것은 유배지의 경험이 많은 기여를 하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추측컨대 정조가 비명에 가지 않았다면 그토록 유배기간이 길지 않았을 것이고 벼슬길에서 남인과 노론의 당파의 싸움에서도 합리적 결론을 도출하는 그의 능력으로 봐서 관료로서 대승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건 순전히 가정이니 불필요한 생각에 지나지 않는다. 기념관 일대를 둘러보면서 한 인간이 이렇게도 능력이 출중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과 함께 논어 한권도 숙독하지 못하는 나의 무능에 한 숨이 나온다. 네 살에 천자문을 배우고 일곱 살에 시를 짓고 열 살에 삼미집을 출간 할 정도였으니 뛰어난 문재였다. 뿐만 아니라 출세할 수 있는 요건은 모두 갖추었다. 본가는 나주 정씨 가문으로 전술한바 8대가 옥당에 올랐던 가문이고 처가는 풍산 홍씨, 외가는 해남 윤씨, 모두가 세도가집안이니 삼박자를 갖추었고, 스물여덟에 과거에 합격하여 정조의 총애를 받고 있으니 성스러운 임금과 현명한 신하의 교분으로 두 천재는 숙명적인 만남이었다.
생가 터를 뒤로 돌아서 계단을 올라가니 한강이 내려 보이는 언덕배기에는 ‘문도공 정약용의 묘’라는 비석 뒤에 선생은 잠들어 있다. 묘지 앞에 울창한 소나무사이로 가지하나가 삶을 위한 발버둥이라도 치듯 햇볕을 찾아 굽어 돌아서 손을 내밀고 있다. 아버지 재원을 따라 경기연천, 전남화순, 경북예천, 울산, 경남진주를 다니면서 산수를 즐기고 유학을 배우면서 호연지기를 키워나갔고 경기북부지역 암행어사를 하면서 공렴(정의와 공평 청렴한 공직자)의 정신을 이어나갔다. 이를 바탕으로 후일 경세유표와 목민심서, 흠흠신서를 집필한 토양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된다.
열정과 애민정신을 뒤로하고 중국인 신부 주문모사건으로 온갖 모함 속에 좌천과 이직移職을 몇 번 하다가 고향으로 돌아가 생활하던 중 정조의 갑작스런 죽음 앞에 그의 운명에도 검은 그림자가 다가왔다.1801년 신유옥사와 황사영백서사건으로 형 약종은 처형당하고 약전은 흑산도로 다산은 전남 강진으로 유배되었다.
다음날 05시30분 전남 강진을 향해서 운전대를 잡았다 .일상에서의 탈출과 함께 설레는 마음으로 다산의 유배지를 찾아나서는 길. 398km를 달려서 월출산 자락의 강진다원과 무위사를 둘러본다. 대지는 먹구름과 황사로 온통 찌푸려있고 스산하다. 백운동 별서정원으로 발길을 옮긴다. 조선중기 이담로가 조성한 별장이다. 다산초당에 머물던 다산은 백운동의 정원에 매료되어 초의선사에게 백운도를 그리게 하고 다산은 12경의 시로서 풍경을 기린다. 월출산의 옥판봉을 뒤로하여 병풍처럼 펼쳐두고 울창한 동백나무와 대나무는 취미선방과 유상곡수로 선비의 한류를 즐기기에 충분하다. 유배지라고 해서 슬퍼하고 고행만 있는 것이 아니다. 잠시 백운동 별서정원에서 문명의 공간을 벗어나 원시림같은 자연에 머무니 탈출한 일상이 영원으로 이어졌으면 하는 바램이다.
이제 강진군청 뒤에 있는 영랑시인 생가터로 발걸음을 옮긴다. 초입의 도로는 문화행사를 알리는 깃발과 시인들의 시로 가득하다. 생가에 들어가 영랑의 사진을 보니 강단 있는 모습에 외압에 굴복하지 않을 그의 운명을 보는듯하고 <모란꽃이 피기까지> 시비 앞에서 사진을 찍어본다. 국토남단의 끝자락에 있는 강진. 보은산이 뒤에서 터줏대감처럼 버텨주고 군청 뒤로 펼쳐진 공원과 금서당, 강장법단으로 이르는 길은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한 노력을 엿 볼 수 있다. 오후가 되어서 햇살까지 따뜻하게 비추니 시간을 즐기기에 충분하고 흰 매화는 외부인을 반기고 있다. 금서당 고옥터에서 강진만을 내려 보며 표지판에 붙어있는 영랑의 시 한 수를 읊어본다
언덕에 누어 바다를 보면 / 빛나는 잔물결 헤일 수 없지만
눈만 감으면 떠오르는 얼골 / 뵈올 적마다 꼭 한 분이구려.
이 시를 읽고 나니 정지용의 <호수>라는 시가 연상된다.
이제 본격적으로 다산의 유배길을 찾아간다. 참전기념탑을 지나서 사의재-네 가지(생각과 용모와 언어와 행동) 올바로 하는 이가 거처하는 집-로 가는 길. 허름한 골목에는 각진 그랜저가 고옥 앞에 서 있다. 담 넘어 집안에는 <梧月楊風>현판만 걸려있고 문은 굳게 닫혀있다.
유배지에서 아무도 받아주는 곳이 없어 찾아든 곳은 허름한 주막이었다. 지금은 한옥으로 단장하여 당시의 초췌함은 찾을 길 없다. 사의재 입구에는 그 당시 주막을 재현(?)한 듯 10평 남짓한 동문주막이다. “계세요” 하고 문을 두드리니 어서 오라는 듯 반긴다. 벽에 ‘다산선생이 즐겨 먹었다는 아욱된장국’이라는 문구가 있고 건너편 벽에는 당시의 부패한 현실을 한탄한 <애절양>이라는 시가 적혀 있다. 벽에 적힌 대로 아욱된장국을 주문했다. 국은 아욱대와 된장, 고추를 재료로 하고 반찬은 냉이와 콩나물, 멸치, 빨간무와 김치로 정갈하게 차려졌고 시장기를 해결하기에 충분했다.
선생은 주막에서 1801년 11월부터 1805년 까지 머물면서 후학들을 양성했다고 한다.
주막에서 후학양성이라…
주막할머니는 선비의 아까운 재능을 활용하라고 권했고 다산은 후학을 양성하면서 시름을 달랬을 것이다. 동문주막 앞에는 그의 심정을 담은 시 한편(憂來)이 보인다.
천 명이 술에 취해 떠드는 속에 / 단정한 선비 하나 있고 보면
그 들 천명이 모두 손가락질 하며 / 그 한 선비야 미쳤다고 한다네.
원숭이 눈이 한 개인 집단에 두 눈을 가진 원숭이 홀로 있으면 병신 취급 받는 것이 마땅하다. 하물며 세력 약한 당파에 속해서 온갖 모함으로 유배되어 한이 되지만 그 옛날 중국 초나라 시인 굴원으로 심정으로 돌아갔으리라.
주막이 있던 터에는 한옥체험관이 건축되어 있다. 유숙객을 위한 잠자리로 제공하는 모양인데 당시 다산선생이 후학을 가르쳤던 심정으로 돌아가 <아학편>이나 <목민심서> 한 줄이라도 읽어보는 학습체험관으로 한다면 다산선생을 기리는데 한 몫 더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다음은 보은산 중턱에 자리를 잡고 있는 고성사의 보은산방이다. 고성사로 가는 길은 저수지아래에 연蓮 밭이 조성되어 있다. 연은 군자를 상징한다. 주돈이는 <애련설>에서 연꽃을 예찬하기를 ‘진흙에서 나왔으나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맑고 출렁이는 물에 씻겼으나 요염하지 않으며 속은 비었고 밖은 곧으며 덩굴은 뻗지 않고 가지를 치지 아니하며 향기는 멀수록 더욱 맑고 꼿꼿하고 깨끗이 서 있어 멀리서 바라볼 수는 있으나 함부로 가지고 놀 수 없기 때문이다.’고 했다.
강진만을 조망하고 있는 고성사. 당시 강진의 1경을 <고성사의 모종>이라고 했다고 하니 길지임에는 틀림없다. 가파른 경사길을 오르며 산책을 즐기는 주민들만 몇몇 다녀 갈 뿐 절에는 아무도 없다. 유배 온 선비는 혜장스님과의 친분으로 이곳에 머물며 아들 학연과 주역과 예기를 가르쳤다고 한다. 보은산방의 문은 잠겨있고 다산의 흔적은 찾을 길 없다. 대웅전 뒤쪽에는 대나무가 자라고 있다. 곧은 절개를 상징하는 대나무가 절 뒤에 있고 초입에는 연을 키우고 있으니 분명 선비로서 바른 생각과 용모, 언행을 갖춰야 할 여건이다.
다음에 거처하였던 이학래의 집. 이곳에서 2년을 머물렀다고 하나 찾지는 않았다. 벼슬에 눈이 멀어 스승을 배신하고 추사의 집에 머물다가 우물에 빠져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마음도 발길을 옮기고 싶은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이제 백련사를 향해서 달려간다. 초입은 동백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숲길을 따라 절 안으로 들어가니 비자나무 한그루가 눈에 띈다. 연리지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백련사는 다산선생의 마실 길이고 혜장스님과 초의선사와 차를 마시며 교류했던 곳이다. 홍매화가 활짝 피어 있다. 꽃의 화려함으로 인해 매실은 열리지 않는다고 하니 각자무치란 말이 꼭 맞다. 아름다움을 더하니 결실을 맺지 못하는 것이다. 만덕산 중턱에 있는 백련사 또한 절경이다.
다음은 1808년부터 유배가 풀릴 때까지 머물렀던 다산초당으로 이동한다. 초당으로 가는 길은 경사가 가파르고 깊은 산속의 절을 찾아가는 기분이다. 초당으로 올라가는 길 나무뿌리가 앙상한 뼈를 드러내고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뻗어있다. 마치 부모가 자식의 한 끼를 해결하기 위해 발버둥치는 고난의 흔적과 땀방울의 결실 같기도 하고, 한편 다산의 아내 홍씨가 그를 그리워하며 빛바랜 속치마를 보냈다는 것을 생각하니 부부의 끈끈한 연緣같기도 하다. 드디어 다산초당에 도착한다. 초당은 맨 안쪽에 천일각이 있고 그 옆에 동암(도서관의 성격) 다산초당 서암(18명의 제자들이 저술활동)으로 건물이 배치되어 있다. 이곳은 외척인 윤단의 산정이었는데 다산을 위해 배려해 준 모양이다. 이곳에서 약 11년간 머물면서 집필활동에 전념했으며 때로는 차를 마시고 천일각에 올라 흑산도로 유배된 약전형을 그리워하고 정조대왕의 은덕을 기리기도 한 모양이다. 어찌 이뿐이랴 고향땅에 두고 온 아내와 아들 딸이 눈에 선하게 그려지며 눈물도 흘렸으리라. 특히 눈에 아른 거리는 딸을 생각하면서 지은 시 매조도가 생각나서 적어본다.
펄펄 나는 저 새 우리 집 뜰 매화가지에 쉬고 있네
그 향기 진하게 풍기니 사랑스러워 아득히 날아 왔구나
이제 여기 머물며 즐거이 집으로 삼고
꽃은 이미 활짝 피었으니 잔뜩 머금고 열매 맺으라
천일각 옆에는 백련사로 가는 오솔길이 있다. 다산과 혜장은 이 길을 오가며 학문도 교류하고 시도 읊고 차도 마시며 우정을 쌓았던 길이다. 길목에 ‘벗이 찾아오면 기쁘지 아니한가!’라는 글귀하나 담아 두었으면 하는 바램과 함께 다산의 인생을 돌아본다.
다산은 정조대왕의 총애 속에서 용산에서 노량진으로 가는 배다리 설치와
수원화성을 설계하고 축조에 필요한 거중기와 녹로를 만들었다. 실현성 없는 관념적 학문이 아니라 실생활의 변화와 개혁을 이루는 성과를 낸 것이다. 아울러 오랜 된 조선을 새롭게 개혁하자고 제시한 정책건의서 경세유표, 공직자의 청렴과 정의, 공평을 주장하며 의식개혁을 하도록 했던 목민심서, 억울한 사람이 없도록 공정한 재판에 도움이 되는 흠흠신서, 이런 저작들이 세상의 발전적 변화를 기약했던 것이다. 아울러 교육개혁 농지개혁 세금개혁 같은 굵직한 개혁을 완성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정조의 급작스런 사망과 당파싸움에 내몰려 실패한 관료의 삶은 화려한 학자로서 부활한 것이다. 다산은 사도세자가 죽은 해에 태어나 정조가 죽은 해에 유배의 길을 떠났으니 그는 분명 정조와 조선의 쇠락과 연관되어 있는 운명인가보다.
이제 가우도의 출렁다리를 넘어서 둘레길을 한 번 돌고 나니 해는 저물고 마량미항에 도착하여 저녁을 해결한다.
-이후 일정은 다산 유배와 무관한 여행이라 여기서 접는다.-
첫댓글 한편의 기행문이네요
다산연구소에서 매일 보내주는 메일을 받아보고있어 다산문화관은 수차례 방문해 보았지만
양후배의 글을 읽고보니 그저 나는 헛 발걸음만 한것 같아 좀 창피한 생각까지 드는구려
다산 유배지를 따라 여행을 하기전 이 글을 한번 더 읽고 가야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네^.^
ㅎㅎㅎ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차근차근 반복해서 읽었습니다.
어디에 기고해도 손색이 없을만한 내공이 느껴집니다.
자전거 라이딩하러 두물머리는 몇번 갔어도 아직 다산 기념관은 못가봤는데 꼭 한번은 가봐야겠네요.
좋은글 감사합니다.